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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34화 (134/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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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신

“세이나 씨, 솔직하게 말해 봐요.”

격분한 세이나를 진정시키면서 반론을 내놓았다.

“까놓고 제가 이코르 넘겨준다고 해서 길드가 뭘 할 수 있죠?”

“그, 그거야……! 아라크네와 아테르니아 간의 유사성을 연구해서 사태의 대응책을……!”

“고작 이코르 하나 연구 한다고 괴물이 왜 튀어나오는지 밝혀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격양된 채 설명하려 한 세이나였지만 그녀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코르는 만능이 아니다.

신의 힘이 담겨 있는 신비로운 물건이긴 하지만 결국엔 생물의 장기에 불과하다.

이런 걸 열심히 만지작거린다고 일련의 사태를 파악할 수 있진 않으리라.

한 마디로 길드가 하려는 짓은 헛수고에 불과하다.

“그럼 어떡해요……? 방법이 그것 밖에 없는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죽는 걸 두고 보기만 해야 되는데……!”

사실은 세이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단지 이코르에 매달리는 이유는 가만히 당하고 싶지 않아서이리라.

주먹을 움켜쥐며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부드러운 미소로 답해줬다.

“어쩌긴요. 직접 가서 클리어하고 오면 되죠.”

“네……? 설마…….”

“제가 장원에 다녀올게요. 거기 보스도 잡고, 던전 브레이크에 관해서도 조사해보죠. 그게 이코르 하나 낭비하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요?”

내 대답에 세이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도, 얌전히 대기하던 부하 직원들도 두 눈을 깜박거리면서 날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경악이었다.

말도 안 된다는 눈빛, 그런 건 불가능하다는 시선이 내게 박히고 있는 것이다.

한참이 지나서야 세이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씀인가요?”

“그럼요. 물론이죠.”

“아테르니아가 던전이 된지도 십여 년 전이에요. 그동안 누구도 여신의 아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고요. 그런 곳을 어떻게 당신이…….”

세이나가 저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지혜 잃은 장원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공략되지 못했다.

유르돌리아에만 수많은 클랜이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이는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이야기다.

처음엔 나도 아테르니아가 다른 클랜에 의해 공략당한 게 아닐지 걱정했다.

칠흑검이 하백의 던전을 공략한 것처럼 말이다.

지혜의 여신이 통치하던 풍요롭고 찬란한 도시.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지상 낙원이라 불린 곳이며 그에 따라 온갖 보물 또한 가득한 곳이다.

그런 보물창고 같은 곳이 털리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아테나와 그 추종자들이 막강하다는 뜻이다.

게임 세계의 강대 세력들도 차마 건들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 걸 나 같은 초보 모험가가 잡겠다고 하니 얼마나 어이없겠어.’

비록 아라크네를 쓰러뜨린 몸이지만 아테나와 아라크네의 차이는 극명하다.

굳이 비교하자면 용과 뱀 정도의 차이다.

설령 재앙신으로 각성한 아라크네라 할지라도 아테나에겐 결코 당해내지 못했으리라.

그토록 강한 괴물을 팬티 한 장만 입은 남자가 쓰러뜨리겠다고?

숙련된 실력자도 아닌 오늘 막 모험가가 된 신입이?

세이나의 얼굴에는 그런 의사가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너무 걱정 안 해줘도 돼요. 전 자신 있거든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세이나의 말을 받아쳤다.

물론 이걸로 납득하진 않으리라. 그녀는 날 미친 사람처럼 보면서 만류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 지배신이 괜히 지배신인 줄 알아요?!”

그리스의 주신인 제우스도, 아스가르드의 투신인 토르도 기원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아테나는 자신의 아버지조차 살아남지 못한 전쟁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생존했다.

그렇게 끝까지 살아남은 신만이 지배신의 칭호를 받는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실력이 좋든, 자신감이 있든 상관없어요……! 그 여신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해볼 상대가 아니란 말이에요!”

내가 불가능할 것이라 단정 짓는 세이나.

하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지혜 잃은 장원으로 갈 것이다.

애당초 아라크네 다음 타깃으로 점찍은 게 아테나였으니까.

“믿지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며칠 뒤엔 싫어도 믿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말을……!”

“아무튼 전 이코르 넘겨드릴 생각 없고요. 의뢰 보상금이나 확실하게 챙겨주세요. 그게 길드가 할 일이잖아요?”

세이나의 요구를 일축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로도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세이나였지만 그녀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했다.

결국 단념해버린 건지 세이나는 무거운 목소리로 부하 직원들에게 말했다.

“비앙카…… 보상 수령을 도와주도록 하세요. 홀은 소란스러울 테니 뒷문으로 안내해주고요…….”

“하지만 사무장님…….”

“이분은 이미 거절의 의사를 보이셨어요. 저희 쪽에서 더는 뭐라 할 수 없죠. 그러니까…… 이만 보내드리도록 해요…….”

최대한 차분히 말하는 세이나였지만 그녀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저렇게 암울해하니까 내가 다 미안해지는 걸.

어쩌면 지금쯤 그녀는 모험가란 직업 자체에 환멸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뭐 당장 며칠만 지나면 생각이 바뀔 거다.

그때 가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흔쾌히 받아주지.

“수고들 하세요. 세이나 씨는 너무 초조해하지 마시고요. 곧 좋은 소식 들고 올게요.”

“…….”

좋은 의미로 한 말이었지만 세이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가슴이 아프다. 그녀는 여태껏 만나온 여자 중에서도 허들이 높은 것 같다.

저 까칠한 여자한테도 사랑 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해야지.

“이, 이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다들 절 따라와 주세요…….”

그리하여 우리는 접객실을 떠나 보상금을 수령했다.

방을 나설 때쯤엔 고블린 귀의 계산이 전부 끝나 있었다.

“고블린 귀는 다 합쳐서 107쌍이었어요. 개당 500아웬이니까 총 53500아웬입니다.”

“으아앙! 안 돼욧! 이렇게 크고 묵직한 게 들어갈 리 없어요!”

돈주머니를 받으며 나나가 앓는 소리를 냈다.

던전에서 챙긴 태피스트리에다가 서천 클랜에게 받은 보답까지만 해도 이미 가방은 꽉 차 있다.

이번에야 말로 돈주머니는 들어가지 않았고 결국 나나가 직접 손으로 들어야만 했다.

게다가 우리가 받는 보상은 비단 그것만이 아니었다.

비앙카라는 여직원은 우리에게 웬 서류 같은 걸 건넸다.

“그리고 이건 길드 상부에서 따로 제공하는 보상입니다.”

“이게 뭐죠?”

“길드 휘하 여관의 6개월 숙박권입니다. 모험가님께서 직접 사용하셔도 되지만 판매하셔도 무방합니다. 자유롭게 사용해주세요.”

비앙카의 설명에 린크와 다나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기, 길드 휘하 숙소라면 혹시 도시 중심부에 있는 거기 말하는 건가요……?”

“숙박비 비싸기로 소문난 데잖아……! 하루 숙박비만 3천 아웬이 넘는다고!”

일행들의 설명에 나 역시 크게 놀랐다.

값싼 여관의 숙박비용이 대략 300아웬이다.

나나, 프란체스카랑 묵었던 사창가의 여관도 1박에 500아웬 정도 밖에 하지 않았다.

그런데 1박에 3천 아웬이라니. 이거 완전 상류층의 전유물 아닌가.

물론 모험가들이 버는 돈을 생각하면 일반적인 걸 수도 있겠다만.

“잘 됐네요, 다키님! 마침 방 잡을 필요 있었잖아요. 6개월이면 기간도 넉넉하고~”

호화 여관이란 말에 나나가 신이 나서 말했다.

사창가 쪽의 여관도 좋긴 했다.

하지만 거리의 특성상 일상적으로 드나들기엔 좀 그랬다.

하물며 3천 아웬짜리 여관이면 시설도 위치도 사창가 쪽보다 훨씬 좋지 않겠는가.

거기 여사장님이 만들어준 밥은 잊지 못할 것 같지만 장기 투숙할 여관을 구해둘 필요는 있을 듯했다.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네…… 그리고 모험가님…….”

“예?”

서류와 돈주머니를 잘 챙기면서 길드를 나설 때였다.

비앙카라는 여직원이 죄송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날 불러 세웠다.

내가 반응하자 그녀는 양손을 아래쪽으로 모은 채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사무장님께서 험하게 말한 건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너무 심각한 일이라 조급하셔서 그런 걸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여직원은 세이나를 옹호해주었다.

부하 직원들 사이에서 어려운 사람으로 통하는 듯했는데 경력 있는 직원들에겐 인망이 있는 듯하다.

조금 의외다 싶으면서 나는 손사래를 쳤다.

“비앙카 씨가 죄송하실 필요 없죠. 제가 좀 재수 없게 말하기도 했잖아요. 세이나 씨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모험가님…… 그리고 혹여나 이코르 판매하실 생각이 드시면 언제든 찾아와주세요.”

그렇게 이야기해도 길드 측에선 차마 미련을 못 버린 모양이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참에 못을 박아둬야겠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장원에서 아테나 튀어나올 일도요.”

“하지만 모험가님…….”

“남쪽 던전에서 좋은 물건을 찾았는데, 이거 매입할 준비나 좀 해주세요. 내일 당장 와서 팔 테니까요.”

나나와 린크의 가방을 번갈아 가리킨 뒤 비앙카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끝끝내 암담한 표정을 지었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저 얼굴이 경탄으로 물드는 것도 시간문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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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해요, 선생님. 식대랑 숙박비까지 다 내주시고…….”

“저희들은 그냥 싼 여관에서 자도 되는데…….”

린크와 유미가 고마움 반, 미안함 반인 기색으로 내게 말했다.

맥주잔을 홀짝이던 나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그들에게 얘기했다.

“괜찮아, 까짓 거 비싸면 얼마나 비싸다고. 나중에 또 만나려면 귀찮으니까 내준 거야.”

현재 우리는 길드 근처에 있는 여관 겸 선술집에 자리를 잡았다.

참고로 숙박권에 명시된 그 여관은 아니다.

길드 휘하 여관은 율리아나의 중심부까지 가야 하는데, 거기 가는 데만 몇 십분은 족히 걸린다.

짐도 너무 많고 지치기도 해서 우리는 그냥 서쪽 광장 근처에 있는 여관 중 아무 곳이나 들어왔다.

피곤함 때문에 막 고른 장소긴 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가게 분위기는 전형적인 판타지 여관이었고 식사도 썩 나쁘지 않았다.

길드 주위에 있는 가게라 그런지 좀 시끌벅적하긴 했지만 이것도 다 나름대로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어차피 우리도 사부한테 돈 받기로 했잖아! 미리 좀 땡겨 받았다고 하지 뭐!”

“아, 알겠으니까 얌전히 좀 마셔……!”

내 말에 동조하며 린크 어깨에 팔을 거는 다나.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다나는 유미 일행 중에서도 유독 술이 약한 모양이다.

“와…… 맥주 반잔 마시고 취하는 거 실화예요?”

“다나도 저희도 술 마실 기회가 별로 없었거든요. 나나 씨야 말로 엄청 잘 드시네요.”

“맥주는 그냥 음료수니까요! 유미 쟝이랑 고구마 쟝도 벌컥벌컥 마셔요!”

나나는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일행들에게도 술을 권했다.

요르나는 아직 미성년자라 마셔도 될까 싶었는데 판타지 세계라 그런지 19살쯤 됐으면 괜찮다고 한다.

야한 건 안 되는데 술은 마셔도 된다니.

게임 세계의 성인 기준은 여러모로 모호한 경향이 있었다.

그렇게 적당히 식사 겸 안주거리가 될 요리를 시키고 맥주잔을 들이킬 때였다.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던 린크가 불현 듯 내게 물었다.

“그런데요 선생님…….”

“응? 왜?”

“정말로 지혜 잃은 장원에 들어가실 생각이세요……?”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에서 나온 주제는 장원에 관한 것이었다.

길드를 나선 이후부터 별 말 없었던 유미 일행이지만 흘려 넘기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

지혜 잃은 장원을 태연하게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마 나밖에 없으리라.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장원은 수많은 악명들을 떨쳤을 테니 말이다.

“히끅…… 맞아, 맞아. 다른 모험가들한테 들은 건데 거기 완전 생지옥이래! 지금까지 도전한 놈들 중 멀쩡히 돌아온 놈들이 하나도 없다구!”

린크가 말하자 다나도 첨언했다.

술기운이 잔뜩 오른 그녀였지만 장원 얘기가 나오니까 걱정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이전에도 장원에 도전한 이들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 중 살아 돌아온 건 극소수에 불과하다.

클랜 단위로 도전한 이들은 클랜의 존속조차 위태로워졌다는 것이다.

“하물며 상대는 그 유명한 아테나잖아요. 경우에 따라선 제우스에 비견될 정도로 강대한 신이에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라고요.”

린크 역시 날 만류하고 싶은 모양이다.

생명의 은인이 허무하게 죽는 걸 원치 않는 건가?

의도는 갸륵하지만 그가 아무리 진지하게 말해도 난 물러설 생각이 없다.

“괜찮아, 나도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곧 그 여신님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질 거고.”

린크와 다나에게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답해줬다.

물론 이걸론 답이 되지 않았을 거다.

그들은 내 당당한 대답에 오히려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던전을 공략하는 내내 믿고 따라준 그들이지만 지금은 날 미친 사람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허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게 힘을 실어주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오늘, 내일은 1편씩 올릴 예정입니다. 앞으로의 스토리도 정리하고 전개도 좀 더 보완하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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