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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33화 (13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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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신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을 느끼며 복도를 나아갔다.

잠시 후 우리는 오전에 왔을 때와 같은 접객실에 도착했다.

“여러분은 이만 돌아가 보세요. 나머지는 저와 두 사람이 맡겠습니다.”

“네 사무장님.”

세이나의 지시로 우리를 따르던 길드 직원 중 대부분은 본래 업무로 돌아갔다.

방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세이나를 포함한 세 명의 여직원뿐이었다.

“편하게 앉아주세요. 곧 차를 내오겠습니다.”

접객실 안에 들어가자 세이나가 자리를 권했다.

나와 일행들은 군말없이 자리에 앉았고 곧 부하 직원들이 차를 내왔다.

향긋한 허브의 향이 지친 마음을 편안하게 풀어줬다.

덕분에 이런저런 일로 들떠 있던 나도 진정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세이나가 입을 열었다.

“으흠…… 일단 고블린 사태를 해결하고 그 원인을 제거해주신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 차례 숨을 고르며 그녀가 감사인사를 건넸다.

오늘 참 여러 사람에게 감사 받는구나.

새삼 내가 한 일에 뿌듯함을 느꼈지만 세이나의 진짜 의도는 그게 아니리라.

“회수하신 고블린의 귀는 직원들이 확인한 후 아웬으로 환전해드릴 겁니다. 또한 길드에선 모험가님의 공로를 인정하여 추가 보상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헤헤, 그래도 되겠어요~? 귀 세는 데만 한참 걸릴 텐데~?”

추가 보상 얘기에 나나가 헤벌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가져온 고블린 귀만 100쌍이 넘을 거다.

고블린 한 마리당 500아웬이었으니 못해도 5만 아웬이 보상으로 나온다.

거기에 추가 보상까지 더해지면 보상금으로 버는 돈만 해도 상당하리라.

허나 세이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도리어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습니다. 애당초 50마리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것 또한 상정해두었으니까요. 예상하지 못한 건 아라크네의 존재죠.”

세이나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역시 단순히 보상 얘기만 하려고 데려온 건 아닌 모양이다.

중요한 얘기가 나올 거라 예상할 때 세이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심상치 않은 일이라곤 생각했지만 설마 재앙신에 버금가는 존재가 얽혀 있을 거라곤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럴 만도 하죠. 저희도 직접 보고 엄청 놀랐으니까요.”

사실 재앙신에 버금가는 존재가 아니라 재앙신 그 자체가 되었지만 이 부분에 관해선 말을 아끼기로 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고블린의 수, 남쪽 던전의 존재, 그리고 아라크네의 출현까지.

이것만 해도 길드 직원들은 충분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이 이상 그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하물며 믿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니 굳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다 지난 일이잖아요? 고블린 새끼들도 다 족쳤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니에요?”

문득 나나가 의아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눈치 빠른 그녀도 파악했으리라.

세이나가 이상할 정도로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수고하셨어요, 같은 인사치레는 아닌 듯했다.

세이나 역시 이를 긍정하듯 나나에게 답했다.

“사제님 말씀대로예요. 남쪽 던전 일은 이제 끝났죠. 하지만 그보다 더 중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중대한 문제라 하시면…….”

“정확히는 아라크네 본인이 아닌 그녀의 출신지와 관련된 일이죠.”

아라크네의 출신지.

그녀가 생전에 살았던 곳이자 전설에 기원을 둔 곳이다.

실제 지명을 모델로 삼은 그 지역에 대해 떠올리며 세이나의 말을 경청했다.

“여러분도 지혜 잃은 장원에 대해선 들어본 적 있으시겠죠?”

“아, 네…….”

“조금 정도는…….”

세이나가 한 명, 한 명 응시하며 묻자 일행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관해 모르는 사람은 나나 밖에 없었다.

나나가 고개를 갸웃거릴 무렵 린크가 이야기를 꺼냈다.

“지혜 잃은 장원이라면 남쪽에 위치한 초대형 던전이잖아요? 도시 국가 하나가 모조리 던전이 됐다고 들었어요.”

지혜 잃은 장원.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가 보스로 등장하는 던전이다.

스토리 진행을 위해선 꼭 클리어 해야 하는 필수 던전 중 한 곳으로 그만큼 난이도 또한 높다.

비행이 가능한 조류형 몬스터와 저주 능력에 특화된 몬스터들이 대거 등장하기에 준비를 철저하지 않으면 영혼까지 털리는 던전이기도 하다.

린크의 말을 듣고 세이나가 몇 가지 덧붙였다.

“맞아요. 과거 그 도시는 아테르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렸죠. 도시의 통치자이자 지배신인 아테나의 이름을 따서요.”

“거기가 거미 언니 고향이란 거예요?”

“옛 문헌에 따르면 그래요. 아라크네는 그 도시 출신이었고, 저주를 받은 뒤 추방당했다고 하죠.”

설정상으로도 아라크네의 출신지는 아테르니아가 맞다.

전설의 괴물이라고 해서 아라크네가 수 백 년 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의외로 그녀가 괴물이 된 건 십여 년 밖에 되지 않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게임 세계 사람들에게 아라크네는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이리라.

세이나의 말을 들은 나나는 곧 심드렁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에요? 거미 언니 뒤진 시점에서 완전 노상관인 거 같은데.”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얼마 전부터 지혜 잃은 장원이 이상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저희가 아라크네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그 때문이죠.”

“이상 징후라고요?”

생소한 얘기에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보통 가디스 던전에서 이상 징후라 하면 특정한 이벤트와 직결되곤 한다.

허나 지혜 잃은 장원에는 그러한 이벤트가 딱히 없다.

원작 게임과 같다면 아테르니아 근처에선 이상 징후가 발생할 일이 절대 없는 것이다.

의아한 기분이 내 머릿속을 간질일 무렵, 세이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대답을 내놓았다.

“……얼마 전부터 장원 인근에서 이상한 몬스터의 목격담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중 대부분이 조류형이라고 하더군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앞서 말했듯 조류형 몬스터는 장원 안에서 등장하는 일종의 간판 몬스터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몬스터들은 장원 밖에선 일절 출현하지 않는다.

던전은 재앙신의 거처임과 동시에 그들을 가두는 감옥이다.

이는 괴물로 변한 추종자들 역시 마찬가지이며 던전의 몬스터들은 절대 밖으로 나올 수 없다.

가던의 개발진은 이러한 설정을 강조하기 위해 장원 주위의 몹들을 전부 조류와 상관없는 개체로 배치했다.

한 마디로 조류형 몬스터가 던전 인근에서 출현하는 건 통상적으로 말도 안 되는 얘기인 것이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단순히 조류형인 몬스터가 있는가 하면 마치 변이된 것 같은 몬스터도 발견됐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목격자들 증언에 따르면 마치 기존 몬스터에게 조류의 특징을 섞어 놓은 것 같다고 해요…….”

세이나가 왜 그렇게 암담한 표정이었는지 이해했다.

이 상황, 절대 정상은 아니다.

세계관적인 관점에서도, 게임적인 관점에서도 말이다.

‘설마 이것도 DLC의 영향인가……?’

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아라크네와의 조우를 상기할 때였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직원 한 명이 웬 그림들을 테이블 위에 펼쳤다.

“처음에는 날개를 단 리자드맨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이후엔 반인반조 형상을 한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이건 당시 몬스터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들이에요. 저희 쪽에선 편의상 날개 기사라고 칭하고 있죠.”

여직원이 건넨 그림을 본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맹금의 기사……!’

그것이 그림 속 몬스터의 정체이자 직원들이 날개 기사라고 칭한 이놈의 진짜 이름이다.

지혜 잃은 장원의 정예 몬스터 중 하나로 유저들 사이에선 꽤나 까다로운 적으로 악명 높다.

아테나의 권속이기 때문에 장원 안에서만 출현하는 몬스터기도 하다.

“설마…… 장원 안의 몬스터가 밖으로 나온 건가요?”

순간 말을 잃었던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충격적이게도 세이나는 곧장 수긍했다.

“네…… 길드에서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몇 번이나 재고해봤지만 그것 외엔 말이 되지 않았어요.”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듯 그녀의 목소리는 가냘프게 떨리고 있었다.

나도 그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심정이었다.

던전 인근에 조류형 몬스터가 추가되는 건 그냥 DLC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조류형 몬스터라고 해서 꼭 장원의 고유 몬스터일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맹금의 기사가 던전 밖으로 튀어나오는 건 틀림없이 설정 붕괴다.

DLC에서 설정이 바뀌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이야기.

DLC의 존재 자체도 불명확한 지금으로선 이 사태가 미지의 공포로까지 여겨졌다.

‘어찌됐든 게임 세계는 원작 게임이랑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어…….’

몬스터들의 배치 변경, 아라크네의 각성.

원작 게임에선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수도 없이 벌어졌다.

이것이 DLC의 영향인지 다른 무언가의 영향인지 같은 건 상관없다.

어느 쪽이든 게임 세계는 이미 원작 게임의 틀을 한참이나 벗어난 것이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세이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여러분은 아라크네를 단서로 고른 거군요. 그녀 역시 아테르니아 출신인 괴물이니까요.”

“네…… 모험가님 말씀대로예요. 지금의 저희로선 거의 유일한 희망이죠.”

세이나가 말하길, 우리가 귀환하기 전까지 길드는 그 어떤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저 조사대를 파견하고 정보를 통제할 수밖에 없는 상황.

길드 상층부에 보고해도 답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기원전쟁이 끝나고 던전이 나타나기 시작한지 어언 수 백 여년이 지났다.

그 긴 세월 동안 던전 안의 괴물들이 밖으로 튀어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렇기에 길드도, 국가도 나오지 못하는 놈들에게 대응할 수단 같은 건 딱히 준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막연한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던전 안에서 또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저희로선 뭐라도 해야만 해요…….”

맹금의 기사를 잡는데 희생된 모험가만 스무 명이라고 한다.

민간인 사상자까지 더하면 희생자의 수는 더욱 늘어난다.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정보 통제를 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언제 뚫릴지 모르는 것이다.

‘완전 개판이구만…….’

교전 기록을 읽으면서 나는 답답한 심정으로 생각했다.

트롤 슬레이어들을 치켜세워주는 것부터 알아봤지만 설마하니 맹금의 기사한테 스무 명이나 털리다니.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나도 초보 때는 놈한테 수도 없이 죽었으니까.

내가 답답함을 느낀 부분은 모험가들의 실력이 아니다.

기사가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을 죽이는 동안 아무도 놈을 못 막았다는 게 너무나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기사의 그림을 보며 착잡한 기분을 느낄 때였다.

세이나가 문득 목소리에 힘을 주며 제안을 건넸다.

“모험가님께선 아라크네를 처치한 뒤 이코르를 입수하셨죠?”

“아 네…… 그렇긴 한데요.”

“그 이코르, 저희가 구입하겠습니다. 가격은 부르시는 대로 쳐드리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부디 협조 부탁드립니다.”

진지하기 그지없는 부탁에 직원들도, 일행들도 전부 날 바라보았다.

나나를 제외한 모두에게는 불안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던전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왔다는 건 그만큼 심각한 일이다.

한 때 세상을 멸망시킬 뻔했던 대전쟁이 반복될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유미 일행도, 세이나도 마치 집 마당에서 핵탄두가 발견된 것 같은 공포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선생님…… 이건 저희가 뭐라 할 부분이 아니긴 하지만…….”

“역시 이 사람들한테 넘기는 게 좋지 않을까 사부……?”

“저,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스승님…….”

유미 일행이 간절한 목소리로 날 설득했다.

아라크네의 이코르를 준다고 확실하게 대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미지의 공포를 조금이나마 파악하고 대응 수단을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나와 나나 외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아쉽게도 난 그들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한데, 그럴 순 없어.”

“……! 어째서?!”

“대체 왜죠……?!”

다나와 세이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거의 비명이나 다를 바 없었다.

실망시켜준 것 같아 미안하지만 난 태연한 기색을 관철했다.

아라크네의 이코르를 꺼낸 뒤 이를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답변을 주었다.

“이건 내가 따로 쓸 데가 있거든. 어떻게 써먹을지도 모를 일에 대뜸 투자할 수야 없지.”

그러기엔 이 이코르의 가치가 워낙 크니까.

내 대답에 세이나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불안정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더니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벌떡 일어났다.

“당신은 지금까지 뭘 들은 건가요? 어서 빨리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요!”

“사, 사무장님……!”

“진정하세요……!”

세이나의 급발진에 직원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목소리가 워낙 큰 나머지 나를 비롯한 우리 일행도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럼에도 세이나는 목소리를 더욱 키워가며 내게 손가락질을 했다.

“당장 던전이 열려서 괴물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어요! 마을도, 도시도 모두 초토화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다고요! 그런데 당신은……!”

지금까지 세이나는 사무장으로서의 태도를 유지해왔다.

불안해하거나 암담해하긴 했어도 특유의 정숙함을 잃어버리진 않았던 것이다.

허나 방금 전의 말이 그녀의 트리거를 당겨버렸다.

지금 세이나에게선 정숙함 같은 걸 찾아볼 수 없었다.

재앙신을 향한 공포, 나를 향한 원망만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내가 천하의 개쌍놈이 되는 순간이었다.

‘좀 얌전히 말할 걸 그랬나……?’

본인은 진지한 얘기하고 있는데 나 혼자 태연한 척, 상관없는 척하면 이성이 나갈 만도 하다.

지금 세이나의 눈엔 내가 자기 이익만 우선 시 하는 인간 말종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그건 크나큰 오해다.

나도 원인 모를 사태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 건 원치 않는다.

단지 불확실한 방법 보단 확실한 방법을 선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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