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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신
난데없이 유아로 퇴행한 바리 여신이었지만 생각보다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바리 역시 가디스 던전에 등장하는 여신.
그 말은 곧 공략 가능한 히로인이라는 뜻이다.
6천 시간 동안 모든 히로인을 공략해온 나로선 이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공주님이란 컨셉을 살려서일까.
평소에는 양반집 아가씨처럼 단정하고 고고한 모습을 한 바리지만 꼭지가 돌면 성격이 180도 바뀐다.
지금처럼 어린애 같은 성격으로 변하여 생떼를 부려대는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로 심할 줄이야…….’
내가 놀란 부분은 생떼를 부리는 모습이 아니라 그 정도가 심해서였다.
원작 게임에서도 바리가 땡깡을 부리는 이벤트가 있다.
허나 그때는 플레이어와 단둘이 있을 때였고 마지막에는 절대 남한테 말하지 말하고 으름장까지 놓는다.
그런 바리가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유아 퇴행을 시전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엄청난 흑역사가 될 텐데 괜찮을까.
자칫하다간 클랜의 주가가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바리를 불쌍히 여긴 나는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여, 여신님. 진짜 죄송해요. 제가 달리 사정이 있어서 가입 못하는 거예요. 여신님이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요.”
“몰라아아아!! 우리 클랜 들어와아아! 들어오란 말이야아아!!”
팍팍팍팍팍!
성난 동물을 진정시키는 사육사처럼 대화를 시도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내게 날아오는 주먹질만 더 세질 뿐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주먹만으로 그치지 않고 바리는 로우킥까지 날려가면서 내게 분풀이를 했다.
150센티미터 언저리인 여성이 로우킥을 때려봤자 얼마나 아프겠냐 생각할 수 있는데 그녀도 나름 신이다.
이성이 날아가서 그런지 주먹질과 발길질에 신력을 담고 있다.
맞을 때마다 숨이 턱 막히고 뼈가 부러지는 듯했다.
“바리님 제발 진정하세요……! 그렇게 때리시면 사람 잡습니다!”
“이거 놔아앗! 쟤 꼭 데려갈 거란 말이야아앗!! 팔다리 다 분질러서라도 데려갈 거라구우우!!”
이를 보다 못한 아르간이 바리를 붙잡았다.
아르간의 키가 워낙 크다 보니 바리는 그에게 붙들려서 양팔 양다리를 허우적거렸다.
마치 어린 여동생이 오빠한테 잡혀서 몸부림치는 것 같다.
허나 아르간의 체격으로도 그녀를 완벽히 저지하기는 힘든 듯했다.
나를 향하던 주먹이 그의 얼굴로 노선을 바꾼 것이었다.
“억! 아악! 아아악!”
퍽! 퍽! 퍽! 퍽! 퍽!
눈과 뺨을 가리지 않고 쉴 새 없이 두들겨 맞는 아르간.
맞을 때마다 나오는 그의 비명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픈 곳만 골라서 때리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클랜원은 전부 가족이라더니…….”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나나가 어이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평소처럼 비꼬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너무나 황당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것이다.
바리 말로는 클랜원들이 다 자기 자식 같다고 했는데 글쎄.
제 3자 입장에서 보면 클랜원들이 전부 그녀에게 지고 사는 언니 오빠로 보일 지경이었다.
“다들 뭐해?! 빨리 단 거 가져와 단 거!”
“네 유란님……!”
아르간만으론 안 되자 클랜원들이 또 다른 조치를 취했다.
유란의 지시 하에 그들은 웬 주머니를 허겁지겁 들고 왔다.
그 안에는 만든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한과들이 한 가득 들어 있었다.
한과를 별로 안 좋아하는 나마저도 순간 군침이 돌 것 같은 비주얼이다.
클랜원에게 그것을 낚아챈 유란은 능숙한 움직임으로 바리에게 내밀었다.
“바리님 이거 보세요~ 바리님이 제일 좋아하는 과자예요.”
“흑…… 흐윽…… 과자아……?”
“네, 네. 이거 드시고 화 풀어요. 다키님도 하나 먹을래요?”
그리 말하며 나에게도 약과 하나를 내민 유란.
하지만 단순히 선의로 그런 건 아니었다.
떨리는 손은 제발 받아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내가 약과를 받지 않으면 큰일이 벌어질 것처럼 말이다.
간절한 눈빛까지 더해져 나도 모르게 약과를 받아들었다.
“자, 잘 먹겠습니다…….”
“자 봐요 바리님. 다키님도 맛있다면서 잘 먹네? 저렇게 맛있는데 안 먹을 거예요?”
다시 한 번 날아오는 예리한 눈빛.
나한테 최대한 맛있게 먹어달라고 요청하는 기색이었다.
그에 나는 손에 든 약과를 입에 우겨넣으며 말했다.
“우, 우움! 지, 진짜 맛있네요! 와 씨 완전 개꿀맛이네!”
상황이 상황인지라 내 입에선 어색한 말 밖에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것과 별개로 약과는 진짜 맛있었다.
내가 먼저 먹는 모습을 보여주니 바리는 아르간에게 안긴 채 우물우물 약과를 먹었다.
“우우웃…….”
눈물을 또르르 흘리면서 과자를 먹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사실 클랜의 공주님은 유란이 아니라 바리 본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할 때 유란이 이야기했다.
“죄송해요 다키님. 저희 때문에 많이 곤란했죠……?”
“아뇨 뭐…… 여신님들이 개성적인 건 알고 있었으니까요.”
당장 성소에 있는 여신님들한테 시달려본 적이 있는 나였기에 불편한 심정은 없었다.
다만 던전에서 돌아오자마자 이런 소란을 겪으니 적잖게 피곤해졌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게요. 혹시나 마음 바뀌시면 저희 클랜으로 찾아와주세요. 얘들아 그거 드려.”
유란의 손짓에 여성 클랜원 중 하나가 웬 씨앗을 건네줬다.
반쯤 싹이 핀 씨앗이었는데 보석처럼 예쁜 빛이 났다.
이 역시 내가 알고 있는 아이템이었다. 바리의 맹약 아이템인 삼색 꽃의 씨앗이다.
“그럼 다음에 뵐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꾸벅 인사를 하고 발길을 돌리는 유란과 아르간.
그 뒤를 다른 클랜원들이 우르르 따라갔다.
그러는 도중에도 바리는 계속해서 날 보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미련이 남나 보다.
“안녕히 가세요, 여신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바리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손을 흔들어줬다.
그러자 바리도 잠깐 머뭇거리더니 수줍게 손을 흔들었다.
아가씨 같던 여신님이 어린애가 됐을 때는 기분이 묘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또 겁나 귀여웠다.
“충격과 공포네요. 최강 클랜의 여신님이 저런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서천 클랜이 길드를 벗어난 뒤 나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에 곁에 있던 린크도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모로 황당하긴 하네요……. 학자님이 신들은 하나 같이 미치광이라던데, 그 말이 틀리진 않나 봐요.”
“베이비 플레이 하면 존나 꼴릴 것 같지 않아요?”
“쿠, 쿨럭, 쿨럭!!”
나나의 말에 나도 모르게 뿜어버렸다.
옆에서 들은 린크 역시 충격적인 표정을 지으며 나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렇지.
나나가 저런 걸 보고 정상적인 생각을 할 리 없다.
당사자인 바리보다도 더 괴악한 상상을 머릿속에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베이비 플레이가 뭐예요?”
“그, 그건 말이지……!”
멀뚱히 이야기를 듣던 요르나가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에 린크는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몇 번이나 말을 골랐다.
곤란해 하는 린크를 보고 있자니 내가 다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그, 그나저나 유미는 괜찮아? 여신님의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봤는데.”
화제를 전환하기 위함인지 다나가 유미 쪽을 바라봤다.
나도 솔직히 좀 걱정이긴 하다.
유미는 다른 주술사들처럼 바리를 숭배하고 있다.
주술사들에게 있어선 말 그대로 종교나 다를 바 없는 존재인데 저런 추태를 봐버리다니.
나였다면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거다.
“그렇지는 않아.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걸.”
“잉? 진짜?”
허나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유미는 무척 태연해보였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슬쩍 주위를 둘러봤는데 주술사로 보이는 사람들은 별로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바리님을 봐서 영광이라며 다들 흐뭇해하고 있었다.
마치 바리가 유아 퇴행을 할 거란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듯했다.
“바리님은 온갖 신령님들과 육신을 공유하시거든. 그 중에는 동자신도 있으니까 이상할 거 없어.”
“동자신이라면 그 아기 신들?”
“응, 듣기론 주술사들처럼 직접 빙의당하시진 않지만 경우에 따라선 영향을 받는다고 해.”
추가로 유미는 바리가 육신을 공유하는 신령들에 대해 좀 더 설명해줬다.
바리는 장군신, 조왕신 등 차마 현세에 강림하지 못했던 무교의 모든 신들과 함께 한다.
그들의 지혜와 힘 덕분에 바리는 무예나 가사, 학문, 정치 등에도 뛰어나다.
동자신도 그렇게 바리와 함께 하는 신 중 하나다.
영험한 힘을 가진 동자신은 바리가 권능을 쓰지 않아도 뛰어난 주술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준다.
허나 신격 자체는 어린아이의 것이어서 저런 식으로 곤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애처럼 변한 거였구나…….”
“신령들은 주술사의 감정에 따라 난폭해지기도 하거든. 아마 스승님이 제안을 거절하신 것 때문에 많이 흥분하신 걸 거야.”
그렇게 말하며 유미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뭔가 죄인이 된 것 같은 걸.
길드홀에 가득 찬 혼란을 보면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보면서 엄청 놀랐어요, 스승님…… 설마 서천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실 줄이야…….”
날 빤히 쳐다보길 잠시, 유미의 입에서 감탄어린 목소리가 나왔다.
부러워하는 기색도 보였지만 그보단 나에게 느끼는 경외심이 큰 듯했다.
“그냥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야.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데 뭐.”
“그,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 스승님처럼 말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걸요!”
“맞아, 맞아! 천 만 아웬이었다고! 평범한 사람이 그걸 어떻게 참아?”
목소리를 키우는 유미를 따라 다나도 맞장구쳤다.
린크 역시 ‘천 만은 못 참지……’ 라며 조용히 수긍했다.
“어찌 됐든 저희도 슬슬 빠지는 거 어때요? 여기 더 있으면 귀찮아질 거 같은데.”
일행들이 신나서 떠들 무렵 나나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서천 클랜은 떠났지만 다른 클랜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물론 바리 여신이 차인 터라 아직까진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진 않다.
지금이야 서로 눈치만 하고 있지만 누구 하나 덤벼들면 조금 전과 같은 상황이 반복되리라.
“그래야겠다. 보고는 나중으로 미루자.”
나 역시 클랜들의 동태를 살피며 일행들에게 말했다.
의뢰 보고는 굳이 그 날 바로 할 필요 없다.
사무장인 세이나의 말로는 따로 명시된 기한 안에만 보고를 올리면 보상과 실적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고블린 토벌 의뢰의 보고 기한 역시 당장 오늘이 아니니 내일 다시 방문하면 되리라.
그리 생각하며 길드를 벗어나려 할 때였다.
“모험가님? 잠깐 괜찮을까요?”
“어?”
누군가 참새처럼 귀여운 목소리로 날 불렀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자 그곳에는 아침에 만났던 길드의 사무장, 세이나가 있었다.
“세이나 씨?”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반가움과 놀람을 반씩 섞인 기세로 그녀에게 반응했다.
그러자 세이나는 내 쪽으로 바싹 다가오더니 까치발을 세우며 귓속말을 해왔다.
“의뢰에 관해 이야기할 겸 조용한 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저흴 따라와 주세요.”
그녀의 말을 듣고 뒤늦게 깨달았다.
내게 다가온 건 비단 세이나 만이 아니었다.
길드의 직원들과 무장한 경비들이 우리 주위를 빙 둘러 싸고 있었다.
“서천 다음엔 길드야……?”
“저희 완전 인기인이 됐네요.”
거의 포위하듯 다가온 직원들을 보며 일행들이 질린 기색으로 말했다.
그들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난 잘 됐다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 길드를 나가봤자 클랜들의 추적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거다.
다들 모험가이기도 하니 집요하게 쫓아올 가능성이 높다.
귀찮게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따돌릴 바에야 길드의 도움을 받는 편이 나을 것이다.
“좋아요, 바로 가죠.”
“그럼 이쪽으로…….”
경비들이 벽을 만드는 틈을 타 우리는 세이나를 따라갔다.
그런 우리를 다른 클랜들이 쫓으려 했으나 경비들이 떡하니 막아서 차마 그러진 못했다.
“이봐! 어째서 서천을 찬 거야?!”
“우리한테도 좀 알려주세요! 다들 당신 정체를 궁금해 하고 있다고요!”
“아라크네 잡은 얘기 좀 들려줘! 정말 상반신은 미인이었어?!”
접수창가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려할 때였다.
여기저기서 구경꾼들이 말을 걸어왔다.
아라크네를 잡은 것만 해도 충분히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이다.
거기에 더해 서천의 영입 제안까지 거절했으니 화제가 될 수밖에 없으리라.
종종 기자 같은 사람들도 있는 걸로 보아 내 소식이 온 도시로 퍼지는 건 시간문제인 듯했다.
“지금은 질문 안 받아요! 나중에 기회 되면 얘기해드릴게요!”
그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살갑게 얘기해줬다.
연예인 된 기분 좀 느껴보려고 그런 건데 사람들은 의외로 환호성을 보내왔다.
여성들을 날 보면서 얼굴까지 붉힐 정도였다.
새삼 게임 세계에서의 내 모습이 얼마나 멋있는지 실감했다.
한때 바닥까지 내려갔던 자존감이 지금은 성층권을 뚫어버릴 것처럼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