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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신
전설로만 여겨졌던 괴물 아라크네.
그 무시무시한 괴물이 남쪽 던전의 보스였으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초보 모험가가 그녀를 쓰러뜨렸다.
이러한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붙으면 던전에서 나온 전리품에도 관심이 쏠리지 않겠는가.
개당 25만 아웬도 적잖은 돈이지만 더 받아서 나쁠 건 없으니까.
내가 태피스트리 코인이 대박나길 기원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할 것 같군요, 거두절미하고 이야기하겠사옵니다.”
간볼 생각은 접었다는 듯이 덕춘이 말했다.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매우 직설적으로 내게 제안해왔다.
“제가 직접 찾아온 이유는 이미 예상하셨겠지요? 그대에게 영입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은하수 같은 보라색 눈동자에는 강렬한 집착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소유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여자는 지금 날 가지고 싶다는 마음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이다.
“그대는 능력과 실력을 모두 입증한 몸, 설령 초보 모험가라 할지라도 서천은 그대를 환영할 것입니다.”
두 팔 벌리며 미소 짓는 덕춘.
우리는 준비됐으니 너는 대답만 하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말을 끝내자 다른 클랜원들도 이야기에 힘을 실었다.
“아시겠지만 저희 같은 대형 클랜에서 영입 제안을 건네는 건 흔한 일이 아닙니다.”
“클랜에 가입하는 순간 다키님께선 무수히 많은 혜택을 얻고 상급 모험가로 대우 받게 될 거예요.”
“유르돌리아 최강의 모험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죠. 지위도 수입도 수직 상승할 기회입니다.”
클랜원들도 덕춘 못지않게 흥분하고 있었다.
마치 모래사장 속에서 보석을 발견한 사람들 같았다.
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는 모습은 탐욕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르간이 던전에서 얘기를 꺼낼 때부터 영입이 들어올 걸 예상하긴 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열렬히 달려들 줄이야.
아무래도 재앙신급 보스를 잡았다는 사실이 그들의 눈을 뒤집어 놓은 듯했다.
보아하니 게임 세계에선 재앙신 하나 잡는데 많은 병력과 노련함이 필요한 듯하다.
칠흑검도 수십 명이서 하백을 잡았다는 걸 보면 나라는 존재는 그들에게 보석처럼 보일 수밖에 없을 거다.
‘내가 생각해도 좀 낯간지럽지만…….’
뭐 부끄럽긴 해도 솔직히 말하자면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모두의 관심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분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클랜 가입에 관심이 생긴 건 아니다.
가족 같은 클랜원들과 함께 친목을 다지는 것도 좋겠지만 난 좀 더 원대한 목표가 있으니까.
클랜에 가입하는 건 나중으로 미뤄도 되지 않나 싶다.
“제안은 정말 감사해요 간부님. 하지만 전 따로 클랜에 가입할 생각이 없어요.”
“네……?”
“지금 뭐라고…….”
내 대답을 듣고 덕춘과 클랜원들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만면에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모래사장에서 찾은 보석이 당연히 자신들 것이라 생각하는 눈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보석이 갑자기 다리가 돋아나 저 멀리 도망가려 하니 어처구니가 없으리라.
정적이 길드홀을 지배하길 잠시, 덕춘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후훗…… 소첩이 정신이 없었군요. 계약금도 언급하지 않고 대뜸 들어오라 했으니 거절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지요, 아르간?”
“하, 하핫! 그,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도 깜빡했습니다! 하하핫!”
덕춘이 어디 한 군데 망가진 것처럼 말하자 아르간의 입에서 어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르간은 지금 엄청난 공포에 휩싸여 있는 듯했다.
나와 덕춘 사이를 번갈아 보면서 내게 간절한 눈빛까지 보내고 있었다.
“저희 클랜에 들어오는 즉시 계약금으로 1000만 아웬을 지급하겠사옵니다. 이후엔 성과에 따라 지속적으로 임금을 지불하지요. 물론 만 단위로.”
“처, 처, 천……!”
“천 만?!”
상상을 초월하는 거금에 나나와 일행들은 비명처럼 소리쳤다.
나나는 원화로 천 만 아웬이 얼마인지 환산하기 바빴다.
다른 일행들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서로에게 재차 확인하며 연이어 경악했다.
나 역시도 상당히 놀랐다.
천만이라니. 이거 세게 나오는걸.
서천이 유르돌리아 최고의 클랜이란 걸 생각하면 적은 금액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가 고작 언랭크의 초보 모험가라는 걸 생각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제시이옵니다. 그대가 원한다면 더욱 높게 측정할 수도 있사옵니다. 원하시는 금액을 말씀해보시지요.”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덕춘은 자신만만한 어조로 협상까지 권했다.
우리는 얼마든지 퍼줄 수 있다.
널 가질 수 있다면 천 만이든, 억이든 내주마. 그러니 순순히 우리 클랜으로 들어와라.
덕춘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최강 클랜의 자금력으로 날 잡아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하지만 난 돈에 굴할 정도로 쉬운 상대가 아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 진짜로 서천에 가입할 마음이 없어요.”
거듭되는 제안에 나는 크고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나름 진지해보이려고 목소리로 깔았다.
그에 덕춘과 아르간은 물론 구경꾼들까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다시 찾아온 정적.
이를 깬 건 역시나 덕춘이었다.
“……대체 왜죠? 따로 염두에 둔 클랜이라도 있는 것이옵니까?”
“아뇨, 그냥 지금은 별로 안 내켜서요. 나중엔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죠.”
“…….”
덕춘은 끝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자신이 차일 거란 걸 생각조차 못한 기색이었다.
“미친 거 아니야……?! 어떻게 다른 곳도 아니고 서천을 차?!”
“역시 초보는 초보구만.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라!”
“아니면 서천도 못 데려가는 인재인 거 아니야? 유르돌리아에선 성이 안 차는 걸 수도 있잖아……!”
그 와중에 대중들은 이런저런 추측을 하느라 바빴다.
유미 일행이 꺼냈던 제국의 전쟁영웅 설을 뛰어넘는 온갖 괴악한 이야기가 오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오갈 수 있는 것도 잠시 뿐이었다.
“그렇사옵니까……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요…….”
“……?!”
“더, 덕춘님……! 안 됩니다!!”
클랜의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아르간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떠올랐다.
곧 그것은 다급함으로 바뀌었고 다른 클랜원들과 함께 덕춘을 저지하려 했다.
뭐지? 설마 영입 거절했다고 칼부림이라도 하려는 건가?
내가 가지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하게 하겠어.
대충 이런 대사를 치며 칼이라도 뽑아들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덕춘은 그저 자신의 후드로 손을 가져갈 뿐이었다.
난 그걸 멍하니 바라봤지만 클랜원들은 어떻게든 막으려 했다.
허나 덕춘 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결국 덕춘은 후드를 벗으며 자신의 얼굴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래도 거절하시겠습니까?”
“어, 어어어어어?!”
“바, 바……!!”
주위가 다시 한 번 소란스러워진다.
허나 이전과는 데시벨부터가 달랐다.
다들 어찌나 놀랐는지 비명을 지르며 난리법석을 떠는 것이었다.
물론 나 역시 두 눈을 크게 뜨며 덕춘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흑발은 마치 비단결과도 같았다.
머리에는 꽃 장식들이 가득했는데 전부 생생하게 살아있는 생화였다.
그것들은 수시로 주위에 씨앗을 뿌렸고, 길드 바닥에 아름다운 꽃밭을 만들어냈다.
바닥에 핀 꽃이 살아있는 시간은 매우 짧았으나 금세 또 다른 꽃이 피어났다.
마치 그녀의 주위에서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것만 같았다.
비현실적이기 그지없는 모습을 통해 나는 그녀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바리 여신……?”
저승의 여신이자 무조신이란 칭호를 가진 한국 신화의 여신.
주술사들에겐 가히 주신이나 다를 바 없는 대신이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바, 바리 여신님을 뵙습니다!!”
“여신님을 뵙습니다!”
덕춘의 정체가 드러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절을 했다.
그 중에는 유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치 경이로운 존재를 영접한 것처럼 차마 고개를 못 드는 것이었다.
설정상 모든 주술의 기원은 바리에게 있다고 한다.
주술사들에게 있어서 바리는 말 그대로 조상.
누구보다 귀한 존재이며 부모보다 각별히 여겨야 하는 대상인 것이다.
실제로 절을 하는 사람은 유미처럼 주술에 관련된 이들이었다.
“바, 바리님……! 아무리 그러셔도 이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내시면……!”
“조용히 하려무나 아르간. 내 서천을 이끌어온 지만 백 년에 가깝거늘, 그간 이렇게나 철저하게 차인 적은 처음이구나. 이대로 돌아갈 순 없다.”
사태가 점점 커지자 아르간이 어떻게든 수습에 나서려 했다.
물론 일개 클랜원인 그가 바리 여신을 막을 순 없었다.
그녀가 손짓 한 번 하자 아르간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과연 유르돌리아 최강 클랜을 지배하는 신다웠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선 그녀가 하는 말이 곧 법도고 질서다.
누구도 그녀의 말엔 거스를 수 없으리라.
주술사가 아닌 자들도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안절부절 할 정도니 말 다했다.
“다시 한 번 묻겠사옵니다.”
아르간의 제지에도 아랑곳 않고 바리가 날 직시했다.
그녀는 마치 만물이 요동치는 것 같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내게 거듭 질문했다.
“나 무조신 바리공주는 그대가 나의 권속이 되기를 바라마지않고 있사옵니다. 그럼에도 거절할 생각이옵니까?”
말 한 번 잘못했다간 그대로 매장해버릴 기세로군.
여신이나 되는 분이 이렇게 유치하게 나와도 되나 싶다.
뭐 헤베나 브릴린트를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말이다.
‘돈으로 안 되니까 신위로 찍어 누르겠다 이건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 시점에서 더는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신이 괜히 신인 게 아니다.
그들은 자체적으로 다른 이를 매료시키는 초자연적인 권위를 뿜어낸다.
이에 영향을 받은 사람은 신의 뜻을 거절하지 못하고 서서히 신에게 빠져들게 된다.
한 마디로 사람을 순식간에 광신도로 만들어버리는 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본인에게도 엄청난 모험일 텐데…….’
신이 재앙신이 되는 이유는 자신의 권능을 남발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매료시키는 것 또한 권능의 사용이라고 볼 수 있다.
잠깐 사용하는 정도론 재앙신이 되지 않겠지만 이는 휘발유로 점철된 장소에서 라이터를 켜는 것과 같다.
조금만 실수해도 주위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바리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능을 발휘한 건 내가 미치도록 갖고 싶다는 뜻이겠지.
‘뭐야, 이거 존나 설레는데……?’
미모의 여신이 날 권속으로 삼고 싶어서 얀데레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다니.
살짝 무섭기도 하지만 왠지 모르게 두근거렸다.
잠깐이나마 그녀의 제안을 수락할 뻔한 나였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몇 번을 물어보셔도 제 대답은 같습니다. 설령 위대한 바리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 해도요. 제안은 감사하지만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언동과 함께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어 바리의 얼굴을 확인해보니 꽤 가관이었다.
어째서 권능이 통하지 않지? 부터 시작해서 왜 날 거절한 거야까지.
수많은 의문들이 그녀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그것들이 수치심으로 이어지는 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 우우……! 우우웃……!”
“응……?”
바리의 태도가 점점 이상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권위 넘치는 여신의 모습이었는데, 점점 어린애처럼 변하는 것이었다.
주먹 쥔 두 손은 부르르 떨렸고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것이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며 땡깡을 부릴 것만 같았다.
그러는 도중에도 촉촉하게 젖은 눈가는 계속 날 향하고 있었다.
“왜…… 왜 내 말을 안 들어주는 거야아아앗!!”
결국 그녀는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빽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나 너무 커서 홀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지경이었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바리는 내게 달려들어선 양 주먹으로 내 가슴을 쳐댔다.
비율이 너무 좋아서 몰랐는데 이 여신님 키가 은근히 작다.
“내가! 내가 갖고 싶다고 하잖아아앗!! 그럼 순순히 내 권속 해달란 말이야!!”
“바, 바리님? 죄송한데 일단 진정을…….”
”돈도 많이 주고, 예뻐해 준다는데 대체 왜?! 이렇게 차이면 난 어떻게 돌아가라구우!! 흐아아아앙!!
원성의 대상이 된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 가슴을 때리는 여린 주먹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