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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30화 (13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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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신

덕춘이라. 왠지 위화감이 드는 이름이다.

가디스 던전에서 동양풍 이름이 사용되지 않는 건 아니다.

당장 유미나 유란만 봐도 동양풍 이름을 당연하다는 듯이 쓰고 있으니까.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덕춘이란 이름은 그 중에서도 유독 동떨어진 느낌이다.

내가 예쁘장한 이름만 들어와서 그런 걸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것 봐……! 저 문장 틀림없이 최고위 간부의 문장이야!”

“꽃이 세 개인 문양이라면 마스터 바로 아래 사람이란 소리잖아……!”

덕춘의 등장에 길드의 직원들도, 날 영입하려 한 클랜들도 동요를 금치 못했다.

듣자하니 저 덕춘이란 여자는 서천 클랜에서도 엄청 높은 사람인 듯하다.

원래 세계로 따지면 대기업의 임원 정도 될까.

사람들이 이토록 놀라는 걸 보면 어지간해선 얼굴도 보기 힘든 사람이 분명하리라.

새삼 내가 얼마나 굉장한 상황에 놓였는지 되새기면서 입을 열었다.

“저한텐 무슨 볼 일이세요?”

괜히 찐따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목소리에 힘을 줬다.

하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얘기 때문일까.

내가 엄청난 사람을 대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니 적잖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아니야, 쫄지 말자. 싸우자고 온 것도 아니고 날 스카웃하고 싶다는 거잖아. 주도권은 나한테 있어.’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으면서 덕춘의 대답을 기다렸다.

내 기개가 마음에 들었는지 후드 아래로 드러난 입가가 예쁘게 곡선을 그렸다.

입만 봐도 이 사람이 얼마나 미인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단아한 자태와 특유의 고결한 분위기.

다시 생각해 봐도 덕춘이란 촌스러운 이름과는 안 어울리는 분이시다.

“우선 저희 가족을 구해주신 것에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 싶사옵니다. 클랜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리옵니다.”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덕춘은 내 앞에 꾸벅 절을 했다.

마치 양반집 아가씨 같은 단정한 자세였다.

특유의 사극적인 말투까지 더해지니 여러모로 참 매력적이었다.

“아뇨, 아뇨…… 위험에 처한 분들을 돕는 게 뭐 대순가요. 그렇게 절하실 것까지야…….”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아 나는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절을 받는 건 좀 아니지 싶었다.

상대는 대형 클랜의 최고위 간부.

그에 비해 나는 이제 막 모험가 활동을 시작한 신입 모험가에 불과하다.

그런 내가 덕춘에게 절을 받는 건 영 좋게 보이지 않을 거다.

내가 부담스러운 것도 있지만 괜히 묘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대는 정말 마음이 고우시군요. 부담스러우셨다면 죄송하옵니다.”

손사래를 치며 만류해도 덕춘은 한참이나 내게 고개를 숙였다.

주위에서 소란이 번져갈 때에서야 몸을 일으킨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얘기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말씀드리고 싶군요. 저희 클랜에게 구성원 하나하나는 가족과도 같사옵니다.”

“가족이요?”

“예, 아르간과 그 동료들을 구한 건 제 자식들을 구한 거나 다름없지요. 그래서 이렇게나마 마음을 전하고 싶었사옵니다.”

처음엔 이 모든 것이 일련의 퍼포먼스가 아닐까 싶었다.

허나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덕춘이 말한 가족이란 단어에는 엄청난 무게가 실려 있었다.

클랜원 모두를 정말 자신의 아들딸처럼 대하는 자세.

그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진정성.

덕춘의 태도에선 그런 것들이 엿보였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해온 친부모에게서도 좀처럼 나오기 힘든 진정한 가족애가 그녀의 어조 하나하나에 녹여들어 있었던 것이다.

“마음을 전하고 싶으면 절 말고 좀 물질적인 걸로 주시지…….”

“나, 나나 씨……!”

“이럴 땐 말 좀 아껴……!”

내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나나가 뒤에서 구시렁거렸다.

그 말을 들은 유미 일행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솔직히 나도 나나와 같은 심정이었지만 말은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적어도 대형 클랜 간부 앞에선 그랬다.

살짝 등골이 서늘해졌으나 덕춘은 웃으면서 넘어갔다.

“후후,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저희도 빈손으로 온 건 아니니 걱정일랑 마시지요.”

“아, 아니 간부님…… 저희는 딱히 뭘 바란 게 아니라…….”

“괜찮사옵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모험가. 선행에 대한 대가를 바란다고 어느 누구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자상한 어조로 말하면서 덕춘이 턱짓했다.

이를 알아들은 아르간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클랜원들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직후 몇몇 여성 클랜원들이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저희의 마음이옵니다. 클랜에서 준비한 보답이오니 부담 없이 받아주시지요.”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덕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성 클랜원이 내게 보따리를 넘겼다.

이를 얼떨결에 받아든 나는 반사적으로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했다.

‘와…… 이게 다 뭐람……?’

보따리 안에는 붉은색 빛을 띠는 보석들이 수두룩하게 쌓여 있었다.

생김새로 보건대 틀림없이 신혈 결정이었다.

전부 가장 낮은 등급인 신혈 파편이었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신혈 결정 파편은 1강부터 3강까지 강화할 때 쓰이는 재료다.

1강 때는 3개, 2강 때는 5개, 3강 때는 8개가 필요한데 보따리 안에는 최소 서른 개 이상의 파편이 들어 있었다.

무기는 두 개는 거뜬히 3강까지 찍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인 것이다.

“이, 이렇게 귀한 걸 다 받아도 괜찮을까요……?”

순간 눈이 돌아간 나였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며 덕춘에게 물었다.

가디스 던전 세계관에서 신혈 결정은 굉장히 귀중한 자원이다.

무기를 강화하는 힘을 가져 어디서나 수요가 많으며 특히 모험가들 사이에선 비싼 값에 거래된다.

그런 물건이 습득처까지 한정되어 있으니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설정을 가지고 있다 보니 원작 게임에선 상점가가 최소 5000아웬부터 시작하곤 했다.

게임 세계의 변수를 고려하면 훨씬 더 비쌀 수도 있다.

원작 게임에선 비단 설정상으로만 수요가 많다고 했지만 여기선 정말 너도 나도 원하는 물건이니까.

그런 걸 30개가 넘게 건네주다니.

얼추 계산해 봐도 15만 아웬이라는 금액이 나온다.

“저희들 목숨 값으론 오히려 부족할 정도죠. 부디 좋은 곳에 사용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건 우리가 따로 준비한 거예요. 강화비에 보태 써요.”

내가 걱정스럽게 묻자 아르간과 그 일행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얘기했다.

그러면서 유란이 내게 돈주머니 하나를 건넸는데 이 역시 굉장히 묵직했다.

못해도 금태양한테서 파밍한 돈주머니 보단 세 배 이상 묵직했다.

그 말은 곧 이 주머니 안에 2만 아웬 이상 들어 있다는 얘기이리라.

보상을 바라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퍼줄 줄이야.

과연 대형 클랜은 이름에 걸맞게 자금력 또한 빵빵한 모양이다,

“헤헤, 그렇게 보답하고 싶다니 사양 않고 받도록 하죠! 어서 챙기자구요 다키님!”

감탄하기 바쁜 나와 다르게 나나는 누가 가져갈 새라 클랜에게 받은 보상을 얼른 집어넣었다.

안 그래도 꽉 찬 가방에 결정 보따리랑 돈주머니까지 집어넣으려 하니 가방이 찢어질 기세였다.

그래도 나나는 알뜰살뜰하게 잘 쑤셔 넣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보답이옵니다. 그대가 사용해주시면 좋을 것 같군요.”

“제가요……?”

로브 안쪽에서부터 무언가를 꺼내는 덕춘.

이번에는 또 뭘 주려는가 싶어서 봤더니 웬 자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흔히 반지를 보관할 때 쓰는 그런 상자였다.

덕춘은 곧장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보여줬는데 역시나 반지가 들어 있었다.

매가 독수리 같은 맹금류가 장식된 날카로운 디자인이었다.

맹금의 반지   희귀

분류: 반지

상승 스탯: 기교 3

내구도: 35/35

부가 효과: 에어본 상태인 적을 공격할 때 항상 치명타가 발생한다.

“……!”

그 반지를 본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허나 바로 다음 순간에 뜬 상태창은 내게 자그마한 의심조차 불허했다.

‘맹금의 반지잖아……?! 이걸 이 여자가 왜 갖고 있는 거야?!’

맹금의 반지는 비행 계열 몬스터를 처치할 때 낮은 확률로 드랍되는 장신구다.

에어본을 활용하지 않는 직업군에겐 무용지물이지만 세팅을 마친 기교 딜러가 사용하면 그만큼 강력할 수가 없는 물건이다.

공교롭게도 에어본 세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세팅이자 많이 써온 세팅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베헤리트를 되찾을 때 그리피스가 이런 기분 아니었을까.

마치 이 반지가 내 손에 쥐어지는 게 운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저나 다른 아이들에겐 불필요한 물건이오나, 그대는 유용하게 쓸 수 있을 듯해서 가져왔사옵니다. 마음에 드시옵니까?”

흐뭇한 미소와 함께 덕춘이 말했다.

마치 내 심정을 읽은 것 같은 질문이었다.

그에 나는 고민할 것 없이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그야 물론이죠!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귀중한 물건을 받게 될 줄 몰랐어요!”

가디스 던전도 일단 파밍 요소가 있다 보니 그에 따라 아이템 세팅의 중요도가 높다.

장비 세팅을 얼마나 완벽하게 하느냐에 따라 같은 직업, 같은 스킬이라도 성능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그런 게임에서 파밍하기 유독 어려운 장비를 손에 넣었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다행이옵니다. 그러면 보답에 관한 이야기는 다 했으니…… 슬슬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도 되겠사옵니까?”

그와 동시에 덕춘의 눈빛이 바뀌었다.

후드 아래에서 아름답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날 직시했다.

밤하늘처럼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였다.

별이 가득한 은하수를 눈동자에 담으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그토록 매혹적인 눈은 내 영혼을 꿰뚫어보는 것만 같았다.

“다른 이야기라 하시면…….”

“그대의 활약은 아주 잘 들었사옵니다. 저희 클랜원들도 고전한 상대를 압도했다지요? 거기에 더해 던전 보스에게도 도전하셨다고 하던데…….”

덕춘이 조금씩 거리를 좁혔다.

어느덧 지근거리까지 다가오는 그녀는 내 위아래를 면밀히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사지 멀쩡히 돌아오신 걸 보면 보스 역시 토벌하신 것 같군요.”

덕춘의 말로 인해 길드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내가 들어온 순간부터 사람들은 남쪽 던전 공략에 관해 어느 정도 유추하고 있었다.

그렇게 화제성 짙은 이야기를 덕춘이 다시 한 번 건드렸으니 말이 오갈 만도 하다.

“예, 생각하신대로예요. 남쪽 던전의 보스는 제가 처치했습니다. 이거 그 증거고요.”

만천하에 다 알려진 마당에 이제 와서 숨기는 건 의미가 없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당당히 수긍하며 아라크네의 이코르를 꺼내들었다.

“뭐, 뭐야 저 이코르……?! 저렇게 큰 건 처음 봐……!”

“나, 난 본 적 있어! 칠흑검이 하백을 잡은 뒤에 가져온 이코르랑 비슷해!”

“아니, 아니! 그때보다 더 커! 애초에 하백의 이코르는 이렇게 빛나지도 않았다고!”

아라크네의 이코르를 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경탄을 터뜨렸다.

청록색 이코르는 여느 몬스터의 것보다 훨씬 크고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놀의 이코르와 비교하면 그 크기만 두 배 이상이었고 빛은 조명 대신으로 써도 될 정도였다.

“천지신명이시여…….”

심지어는 덕춘마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를 따라온 클랜원들 역시 세뇌라도 당한 것처럼 이코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말을 잊었던 덕춘은 어렵게나마 입을 열었다.

“소첩이 듣기로 그대는 불과 다섯 명이서 보스에게 도전했다고 들었사옵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요……?”

“네, 저랑 여기 있는 동료들이 같이 잡았습니다.”

“물론 다키님이 거의 다 잡았지만요!”

내가 동료들을 가리키며 이야기하자 나나는 그새를 못 참고 날 띄워줬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 한 마디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나를 향한 경외감이 한층 더 강해진 것이었다.

“이코르에서 나오는 힘은 아무리 봐도 재앙신이 가질 법한 힘인데, 그걸 고작 다섯 명이 처치했단 말이옵니까?”

“재앙신까지는 아니었지만 재앙신에 준하는 괴물이었어요. 잡는 게 쉽진 않았죠.”

내가 잡았던 보스가 아라크네였다는 사실부터 아테나와 관련이 있을 거란 얘기까지 전부 털어놓았다.

막힘없는 이야기에 길드홀은 더욱더 소란스러워졌다.

다들 아테나에 관한 전설들은 하나씩 들어봤을 거다.

그 중엔 아라크네 관한 이야기도 있을 테고, 몇몇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관련 정보를 떠올렸다.

자기과시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것도 나름 홍보 전략이다.

우리는 가방 안에 가득 든 태피스트리를 팔아야 되는 입장이다.

아라크네에 관한 이야기를 퍼뜨리면 퍼뜨릴수록 태피스트리의 수요는 늘어날 거다.

그러면 덩달아 거래가 또한 상승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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