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29화 (129/217)

129====================

던전을 클리어한 후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분은 저희에게 꼭 필요한……!”

우리가 인파 속으로 사라질 무렵에도 경비병 아저씨는 끝끝내 우릴 불러세웠다.

하지만 무력으로 멈춰세울 수는 없는지 우리가 멀어지는 걸 구경만할 뿐이었다.

대체 서천 클랜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면 일개 클랜원에게 쩔쩔 매는 걸까.

“멋대로 연기해서 미안해요. 혹시 기분 나빴어요?”

북적북적한 거리로 스며들어갈 무렵 유란이 내게 이야기를 걸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센 누님의 모습을 보여줬는데 갑자기 살갑게 말하니까 적응이 안 됐다.

난 당장이라도 누나아아앗! 하고 소리 질러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아, 아뇨 도와주신 건데 저희야 고맙죠.”

“그니까요! 짭새 새끼들 몰려들 때 얼마나 쫄깃했는지 몰라요! 그런 와중에 오빠랑 언니가 뽱! 하고 나타나서 엄청 안심됐다구요!”

방금 전의 상황이 감명 깊었는지 나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확실히 경비병들을 찍어 누르는 유란의 모습은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는다.

도시로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내 머릿속의 그녀는 그냥 엑스트라 1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니아 누님 정도로 인지도가 높아져 있었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아는 건지 유란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그쪽은 우리 생명의 은인인데 고작 이 정도론 감사 인사도 못 받죠.”

“하긴~ 언니한테 쏟은 마력 생각하면 그렇기도 하네요~”

“아하핫! 태도가 너무 빨리 바뀌는 거 아니에요 사제님?”

고작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나나와 유란은 벌써부터 친해진 듯했다.

나나가 친화력이 높은 것도 있지만 유란 역시 사교적인 성격인 것 같았다.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할까.

처음 만났을 때는 단단한 쇳덩이처럼 보였던 사람이 갑자기 사근사근하게 구니까 낌새가 좀 이상했다.

단순히 호의를 위해서만 접근한 게 아닌, 뭔가 목적이 있어서 다가온 것처럼 보인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나나 쪽에서 질문을 건넸다.

“그보다 저 경비병들 유란 언니 엄청 잘 아는 거 같던데, 언니 클랜에선 꽤 높은 사람인가 봐요?”

마침 나도 그 부분이 궁금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말단 클랜원에게 그렇게까지 깎듯 대하는 건 좀 이상했다.

실제로 랄칸이 등장했을 때는 그냥저냥 놀라다가 유란의 얼굴을 본 후부터 어쩔 줄 몰라 하지 않았는가.

“그건 말이지 사제님, 이 녀석이 우리 클랜 공주님이라서 그래.”

“야 랄칸!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랄칸이 우리의 의문을 해소해주려 하자 유란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공주님? 그게 무슨 뜻이지? 말단인데 클랜에서 공주님 취급 받을 이유가 있나?

“헐 설마 언니네 가족이 클랜 간부라도 돼요?”

의아해하는 나와 달리 나나는 곧바로 요점을 집었다.

그러자 랄칸은 씨익 웃으면서 수긍했다.

“그래, 귀검 해원이라고 다들 들어는 봤지?”

“귀……!”

“귀검 해원?!”

이번에도 경악은 세 사람의 몫이었다.

귀검 해원이라는 말에 우리 뉴비 3인조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말을 잇지 못했다.

여태까지 여러 번 놀란 세 사람이었지만 이번엔 그 정도가 한층 더 강한 느낌이었다.

“귀검 해원이라면 서천의 부마스터님이잖아요?!”

“서천의 원년 멤버이자 백전노장의 영웅……! 유르돌리아 2대 검성 중 한 분이 당신 아버지란 말이야?!”

“경우에 따라선 마스터보다도 강하다고 평가 받는 분인데……!”

내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세 사람이 해원이란 양반에 대해서 아주 자세히 설명해줬다.

검성이니 백전노장이니 하는 칭호가 붙어 있을 정도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겠다.

애초에 한 국가에서 최정상을 차지하는 클랜의 부마스터란 것 자체가 엄청난 것이리라.

“잘 알고 있네. 어때 유란이? 너희 아버지 인기가 실감 되냐?”

“좀 닥쳐…….”

랄칸이 놀리듯이 말하자 유란은 차마 얼굴을 못 들고 홍조를 띄웠다.

유명인의 가족들은 다 저런 기분이겠지.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해봐서 그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우리 아빠는 완전 유명인까지는 아니어도 큰 병원의 원장이라 나름대로 명성이 따랐으니까.

그 아저씨의 가족이자 장남인 나도 가끔 주목을 받곤 했지.

물론 대체로 부정적인 시선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대단하신 분의 따님이 어떻게 클랜 말단에서…….”

“다, 다나…… 그런 말은 하는 거 아니야…….”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다나를 린크가 다그쳤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그녀의 입장에 대해 말하는 건 그것만으로도 실례가 될 수 있다.

천재의 자식이라고 해서 무조건 천재인 건 아니다.

오히려 대단한 업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자식들은 반대로 평범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마 유란도 비슷한 케이스이리라.

아버지는 검성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무인인 반면 본인은 그렇게까지 재능이 출중하지 않은 것이리라.

“죄, 죄송합니다……. 제 친구가 본의 아니게…….”

“괜찮아 너희가 생각하는 그거 맞으니까. 난 딱히 신경 안 써서 미안해할 것도 없어.”

내 예상이 맞는 것 같다.

손사래 치며 말한 유란은 털털한 미소와 함께 직접 답했다.

“아버지랑 다르게 난 검에 별로 소질이 없었거든. 그래도 아버지 같은 훌륭한 무인이 되고 싶어서 내 나름대로 수련하고 있는 거야.”

“그러면서 아버지 권력은 마음대로 휘둘러도 돼요?”

“그건 수련이랑 관계없는 얘기니까요~. 인맥은 최대한 써먹는 게 좋잖아요.”

나나가 장난기 가득한 어조로 질문하자 유란 역시 태연하게 받아쳤다.

어찌됐든 경비대가 그렇게 쩔쩔 매던 이유를 알겠다.

원래 세계로 따지면 유란은 대기업 부회장의 따님인 거다.

단지 회사에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실적을 쌓을 뿐이지.

그렇다고 아버지가 부회장인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경비대를 상대로 저 정도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이리라.

“아무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등골이 다 서늘하네요.”

“에이 유란이도 이미 말했잖습니까. 다키님한테 받은 도움에 비하면 이건 새 발에 피죠.”

“뭐, 그거랑 별개로 경비대가 왜 그렇게 잡고 싶어 했는지는 궁금하지만요.”

웃어넘기는 랄칸과 다르게 유란은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날 꿰뚫어 봤다.

“얼마나 대단한 일을 저질렀기에 저러는 거예요? 바로 잡아가지 않는 거 보면 살인이나 뭐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뇨, 맞는데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어떻게든 집어삼켰다.

나로서도 경비대가 왜 그렇게 매달리는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몰래 들어온 혐의로 구속하려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헤어지기 전의 말을 들어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그러면 대체 날 왜 찾는 거지? 트롤 새끼들 처죽인 건 들킬 껀덕지가 없는데.

솔직히 지금 상황이 가장 궁금한 건 다름 아닌 나다.

마음 같아선 직접 조사해보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괜히 헛짓하다가 잡혀갈까봐 차마 그렇겐 못 하겠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팬티 바람으로 돌아다녀서 그런가.”

“거짓말 엄청 못 하네요. 표정에 그런 거 아니라고 다 써 있어요.”

“…….”

아 이 누님 겁나 날카롭네.

당신처럼 눈치 빠른 누님은 싫은데 말이야.

“너무 그렇게 캐묻지 마. 괜히 곤란해 하시잖아.”

식은땀을 흘리는 날 대신해서 랄칸이 유란을 제지했다.

머릿속에서 어떻게 대답하지?! 만 한 수십 번 되새기던 참이었는데 존나 다행이다.

“아 왜. 협상 수단은 많이 갖출수록 좋잖아.”

“협상이 아니라 협박이겠지. 그게 은인한테 할 짓이냐?”

“누가 이거 가지고 협박한대? 나도 그런 짓은 안 하거든?”

두 사람 사이에서 묘한 이야기가 오간다.

협상이라니. 나랑 도대체 뭘 협상하고 싶다는 거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날 대상으로 수많은 음모가 오가는 것 같다.

물론 그 정도까진 아니겠지만 다들 날 가지고 뭘 해보겠단 심산이라서 불안감이 앞선다.

내가 그들에게 슬쩍 질문하려는 순간이었다.

“아 다 왔다. 여러분도 길드 오려고 했었죠? 얼른 들어가요.”

우리는 어느새 길드 정문에 도착해 있었다.

유란의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 보니 자연스레 길드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아, 네.”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기에 난 별 생각 없이 길드 건물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안쪽에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한 상황이 오가고 있었다.

“……! 왔다! 그 사람이야!”

“뭐?! 진짜?!”

“틀림없다니까! 진짜 속옷만 입고 있다고!”

“뭐해 빨리 애들 불러! 대형 클랜 보다 빨리 움직여야지!”

“무슨 수를 써서도 우리 쪽으로 끌고 와!!”

끌고 오라고?

누굴? 나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란에 나는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날 보고 있었다.

테이블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남자들부터 접수창구의 직원들, 화려하게 입은 베테랑 모험가들까지 전부 말이다.

달려오는 그들을 보며 내가 경직된 순간, 그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남쪽 던전 공략자 되시죠?! 하이랜더 클랜에서 나왔습니다! 저희 클랜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직 초보자신 거 같은데 클랜 들어오실 생각 없으십니까?! 그러면 저희 붉은 상어 클랜으로 오세요!”

“저희 클랜은 무려 키벨레님의 가호를 받는 클랜입니다! 그 분의 가호를 받을 기회는 별로 없다고요!”

순식간에 수십 개가 넘는 클랜 이름이 들려왔다.

그 중에는 유명한 신의 이름을 거론하는 클랜들도 많았다.

서로 자기들 클랜이 더 우월하다느니,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느니 하면서 경쟁하는 것이었다.

“이게 뭔…….”

그에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내가 그러는 동안에도 각 클랜의 대표로 보이는 사람들은 열심히 입을 놀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번에 너무 많은 말을 해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정신이 사나워진 나는 잠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피했는데 그곳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직접 달려들지 않을 뿐이지 어디든 내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사람이야! 저 사람이 남쪽 던전의 몬스터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대!”

“서천의 골드 등급도 못 당해낸 몬스터라는데, 그러면 최소 플레티넘급 아니야?”

“살아 돌아왔다는 건 고작 다섯 명이서 보스까지 클리어 했단 거 아니야! 그럼 플레티넘 이상이지!”

길드 직원과 모험가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 내게 이목을 집중했다.

그들의 말에는 하나 같이 경탄이 담겨 있었다.

나에게 선망어린 시선을 보내는 이도 적지 않았으며 일부 여성들의 시선은 농후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고 난 길드가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지 유추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지주귀들로부터 서천 클랜원을 구해줬다는 이야기가 길드에 퍼진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이 이렇게나 열띤 반응을 보일 리 없다.

“사부 완전 유명인 됐는데……?!”

“스,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당황한 일행들이 내게 붙으며 물어왔다.

그들의 심정은 이해하겠지만 나라고 해서 뭐 별 다른 수단이 있는 건 아니었다.

살면서 이렇게나 주목받아본 적은 처음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날 무슨 연예인처럼 취급하면서 관심을 주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아 거 지나가게 좀 비킵시다! 왜 길을 막고 그래?!”

“이야기 하고 싶으면 나중에 약속을 잡던가 하라고! 나중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랄칸과 유란이 길을 열어줬다.

마치 두 사람이 내 전속 매니저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다른 클랜의 사람들이 불만을 퍼부었다.

“우리한테도 기회 좀 달라고 서천 클랜!”

“그래! 이번에도 너희가 다 데려갈 셈이냐!”

“양심이 있으면 중소 클랜한테도 양보해달라고요!”

들려오는 대화를 듣다 보니 그간 느꼈던 수상쩍은 낌새가 이해됐다.

처음부터 좀 작위적이긴 했다.

랄칸과 유란은 어떻게 그리 절묘하게 우리를 도와줄 수 있었던 거지?

단순히 우연이라 보기엔 어딘가 이상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당연히 나를 데려가기 위해서겠지.

다른 클랜들을 제치고 자신들 클랜에 영입하기 위해서 말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솔직히 유명인사가 된 기분은 오지게 좋았지만 동시에 무섭기도 했다.

관심을 많이 받는 만큼 쫓기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클랜들의 제의까지 더해지니까 살짝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내가 갈피를 못 잡은 채 유란 누님 곁에 붙어 있을 때였다.

2층 계단에서부터 웬 인파가 내려왔다.

“오셨군요, 다키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건 또 무슨…….”

계단을 타고 내려온 건 검보라색 망토를 걸친 사람들이었다.

얼추 서른 명은 되는 듯했는데, 그들이 걸친 망토에는 하나 같이 꽃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선두에 있는 사람이 던전에서 만난 기사인 걸 보면 서천 클랜이 틀림없는 듯했다.

마치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듯 우르르 몰려온 서천 클랜.

그들은 질서 정연하게 길드 홀에서 공간을 만든 뒤 일렬로 늘어섰다.

아예 다른 클랜으로부터 나를 단절시키는 것이었다.

“기사님……?”

내 쪽으로 다가오는 기사를 보며 난 어안이 벙벙해진 채 중얼거렸다.

그러자 기사는 손을 내밀면서 살갑게 말했다.

“소개가 늦었네요, 아르간 라우스트입니다. 편하게 아르간이라 불러주세요.”

“아 네 아르간 씨……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얼떨결에 악수를 받으며 묻자 아르간은 멋쩍게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몰려 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간부님께서 다키님을 꼭 만나보고 싶다하셨거든요.”

“간부님이요?”

“네, 다키님에 관해서 보고 드렸더니 직접 행차하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클랜원들을 대동하게 됐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아르간이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또각 거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한 여성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전신을 로브로 가린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여성이었다.

하지만 볼륨감 있는 몸매와 아람다운 곡선은 로브로도 다 가려지지 않았다.

감춰지지 않는 미모를 한껏 뿜어내면서 여성이 내 앞에 멈춰 섰다.

“처음 뵙겠사옵니다. 서천 클랜의 간부 덕춘이라 하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사옵니까?”

============================ 작품 후기 ============================

어제 한 편 밖에 못 올려서 오늘 세 편 올렸습니다. 새벽에 올리겠단 약속 지켜드리지 못해서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