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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클리어한 후
‘이러니저러니 해도 살 수밖에 없지만.’
나나 말대로 돈 들어오면 차원낭부터 구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우리는 어느덧 동굴 입구에 다다랐다.
도중에 적이 없어서 비교적 빨리 나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이미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붉은 저녁놀 위가 점점 쪽빛으로 물드는 걸 보면 금방이라도 땅거미가 질 것 같았다.
“하아 씨. 반나절 만에 바깥 공기를 마셔 보네.”
하루 종일 동굴 안에만 있다 보니 상쾌한 공기가 무척 반가웠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밤새들의 울음소리가 지친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줬다.
노을을 따라 붉게 변한 나무들을 보면 오늘 하루를 잘 보낸 것 같다는 뿌듯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심신을 안정시키며 나는 조심스레 주위를 살펴보았다.
당연히 트롤 슬레이어들의 흔적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어? 다들 저기 봐. 웬 핏자국이…….” 때마침 다나가 초목에 흩뿌려진 혈흔을 발견했다.
역시 반나절 만에 핏자국까지 지워지진 않는 모양이다.
허나 이미 끈적끈적하게 응고된 피는 누구의 것인지 추측조차 불가능했다.
애당초 시체들은 저 멀리 던져버렸으니 정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게 사람의 피라고도 생각하지 못할 거다.
그리고 수풀 속으로 사라진 시체들은 지금쯤 짐승들한테 물려갔겠지.
“산짐승이 사냥이라도 한 거 아니야?”
“하지만 왠지 불길한 기운이 감돌아…… 뭔가 나쁜 일이라도 있었던 게…….”
린크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듯 했으나 유미는 달랐다.
주술사라서 그런가, 그녀는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를 직감적으로 느끼는 듯했다.
혹여나 놈들의 혼령이라도 보면 어떡하지?
유미는 혼령들하고도 대화도 할 수 있을 거다.
귀신이 된 트롤 슬레이어들이 유미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괜히 귀찮아진다.
나쁜 놈들을 족치는 건 정의로운 일이지만 모험가들끼리 죽이는 건 금기 중의 금기기 때문이다.
유미 일행이 이해해준다 해도 나중에 어떤 식으로 약점이 될지 모른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나쁜 일이 있었으면 오히려 피하는 게 좋아.”
“맞아요. 여기서 누가 죽었든 저희 알 바는 아니잖아요.”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나와 나나가 입을 모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연기하는 우리를 보며 일행들도 핏자국에서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래,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는 건 이제 지긋지긋해.”
“어차피 던전 안에서 있었던 일도 보고해야 되니까 그때 같이 길드에 얘기해보자.”
린크의 현명한 판단으로 우리는 빠르게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핏자국을 뒤로 하고 도시로 향하니 나도 모르게 안도가 됐다.
이러니까 완전 범죄자가 된 기분이군.
아니, 사람을 죽였으니까 범죄자된 건 맞지.
누구를 무슨 이유로 죽였든 법은 살인을 용납하지 않으니까.
비록 판타지 세계지만 그 정도의 인식을 잡혀있을 거다. 시체들을 잘 처리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 * *
숲을 벗어난 우리는 1시간가량 걸어서 율리아나로 돌아왔다.
다행히 성문이 닫기 전엔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가 돌아왔을 때는 해가 거의 다 저물어갔지만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까진 성문이 개방된다고 한다.
“천천히 들어오셔도 됩니다! 폐문까지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질서를 지키고 꼭 신분증을 보여주십시오! 불응할 시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녁 시간대의 성문은 무척이나 혼잡했다.
모험을 끝내고 돌아온 모험가들과 밖에서 일하다 온 사람들,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상인들까지 합쳐서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이었다.
덕분에 경비병들은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질러댔다.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혼란스러워지는 법이니까.
개중에는 문이 닫힐까봐 헐레벌떡 뛰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검문 시스템이 있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아주 그냥 개판이 됐을 거다.
“……! 거기! 잠깐 멈추십시오!”
다른 사람들처럼 신분증을 제시하고 도시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신분증 대신 모험가 증패를 내밀었는데 경비병이 나를 막아서는 것이었다.
뭐 이유를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 꼴이 좀 눈에 띄어야 말이지.
나 같아도 팬티만 입고 다니는 남자가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오면 의심부터 하고 볼 거다.
정말 어딜 가나 내 존재감은 감출 수가 없는 모양이다.
이제 와서 이걸 어떻게 해볼 수도 없으니 그냥 담담하게 즐기기로 했다.
“저한테 무슨 볼 일이라도?”
최대한 태연한 기색을 유지하면서 경비병에게 말했다.
이럴 때 괜히 쭈뼛거리면 더 수상해보일 뿐이다.
나는 내 차림새가 전혀 부끄럽지 않다. 이걸 이상하게 보는 네가 더 이상한 거다.
대충 그런 기색을 드러내면서 경비병을 바라보았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경비병 같은데 게임이 게임이라서 그런지 이쪽도 정상적인 차림은 아니었다.
갑옷임에도 가슴 부위가 파여 있었고 하의도 치마에 가까웠다.
프란체스카나 비키니 아머 누님에 비하면 얌전한 편이었지만 역시나 씹덕향 가득한 차림새였던 것이다.
“아, 저…… 그, 그게 말입니다…….”
아예 죠죠처럼 기묘한 자세로 대답하자 경비병의 무뚝뚝한 얼굴이 당황으로 바뀌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다.
처음엔 이렇게 다니는 게 굉장히 부끄러웠지만 좀 지나니까 담담해질 수 있었다.
마치 누드 비치에서 옷을 벗는 기분이다.
더군다나 나에겐 검은 산양의 뿔이 준 효과도 있지 않은가.
남자 앞에서라면 몰라도 여자들 앞에선 기죽을 필요 없다.
“할 말 없으시면 들어가도 될까요? 좀 피곤해서요.”
“꺗……?!”
내가 재촉하며 더욱 다가가자 경비병은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났다.
본의 아니게 기선제압을 해버린 모양이다. 그녀는 눈 둘 곳이 없다는 듯이 이리저리 시선을 굴렸다.
남녀역전 세계로 간 주인공들이 이런 기분 아닐까.
내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조금 떨어져 있던 다른 경비병이 대신 말을 이었다.
“바쁘신 와중에 죄송합니다. 상부로부터 요청이 들어와서 몇 가지 확인하려고 그랬습니다.”
“확인이요?”
이번에 다가온 경비병 또한 여성이었지만 먼저 말건 사람보단 경력이 있는 듯했다.
그녀는 내 복장을 의식하면서도 막힘없이 이야기를 해나갔다.
“예, 혹시 오늘 오전 서쪽 관문을 통해 율리아나로 들어오시지 않았습니까?”
오전 시간에 서쪽 관문이라.
이거 좀 찔리는걸.
그간 해온 일들을 생각하면 난 그렇게 떳떳한 사람이 아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입성한데다가 사람까지 여럿 죽였다.
살인은 들통 날 확률이 거의 없지만 전자의 경우는 아니다.
행여 내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나와 나나의 불법 입성을 목격했을 수도 있지 않는가.
거기까지 생각하니까 등줄기가 조금 서늘해졌다.
애당초 경비대 상부에서 내릴 만한 명령이 뭐가 있을까?
결코 좋은 의도로 나 같은 놈을 찾으라 하진 않았으리라.
“저희가 그걸 왜 말해줘야 되는데요? 우리가 언제 어디로 들어왔든 경비대가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불길한 낌새를 느낄 때 나나가 항의하듯 말했다.
마치 우리는 찔리는 게 전혀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렇기에 이러한 질문 자체가 불편하다. 나나의 어투엔 그런 기색이 담겨 있었다.
“자세한 건 이곳에서 말씀드리기 힘듭니다. 하지만 그쪽에 계신 검사 분이 저희가 찾던 인물은 맞는 것 같군요.”
나나의 날선 질문에도 경비병 누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확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신고를 당하고 모습까지 묘사됐다면 당연히 그런 반응을 보이리라.
“아니, 왜 멈춰 세웠는지 이유도 안 말해주면서 뭐라는 거예요? 제 남친을 어쩌려고 그러시는데요?”
“자세한 건 경비대 본부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따라와 주십시오.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 말과 함께 우리 주위로 경비병들이 더 몰려왔다.
이유를 말 안 해주니 더 불안해졌다.
내가 진짜 엄청난 잘못이라도 저지른 분위기다.
비밀 벽으로 몰래 들어오는 게 그렇게 나쁜 짓인가?
하긴 탈세를 포함해서 이런저런 범죄들이 추가 적용되니 가벼운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물며 이 율리아나는 빛나는 성벽이라 불릴 정도로 치안에 철두철미한 곳이니까.
이거 왠지 좆된 거 같은데.
경비병들 표정 좀 봐. 칼만 안 빼들었지 겁나 살벌하잖아.
“사, 사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선생님…… 혹시 뭔가 잘못이라도 저지르신 건가요……?”
불온한 기운이 퍼지자 일행들이 우려 섞인 어조로 물어왔다.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줄에서 빠져나온 우리를 보며 여기저기서 별의별 이야기가 오갔다.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따라와 주십시오. 순순히 따라오시면 피해는 없을 겁니다.”
“아니……! 그러니까 뭐 때문에 그러는지 얘기를 해달라고요 씨바!”
“보안상의 이유로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무력을 써서라도 인도조치 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부디 순응해주시길 바랍니다.”
답답한 심정으로 이야기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한 결 같았다.
이걸 어쩐다. 당장 칼 빼들고 죽일 분위기는 아니니까 일단 따라가 볼까?
그러다가 이런저런 죄를 물으면서 옥에 처박으면 어떡해?
‘역시 튀어야 하나?’
유미 일행을 슬쩍 본 뒤 나는 도주로를 찾았다.
나랑 나나만 도망치면 다른 사람들은 별 문제 없을 거다.
범죄를 저지른 건 나지 유미 일행이 아니니까.
나나를 데리고 도망치는 건 좀 힘들겠지만 인파가 이렇게 많다면 안 될 것도 없다.
그렇게 내가 빤스런 각을 재고 있을 때였다.
“아니, 다키!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한참 찾았잖아!”
“응……?”
성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에 나도, 경비병도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선 웬 격투 게임 캐릭터 같은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언제 오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만. 왜 이렇게 늦었어?”
“다들 길드에서 목 빠져라 기다리고 있다고. 빨리 가자.”
남자의 옆에는 권갑으로 무장한 여성 무투가도 있었다.
순간 당황한 나였지만 그들이 누군지는 금세 떠올릴 수 있었다.
내가 던전 안에서 구해줬던 서천 클랜의 멤버들이었던 것이다.
“……일행 분이십니까?”
살갑게 다가오는 그들을 보며 경비병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쌍검사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 어깨에 팔을 걸며 말했다.
“내 아는 동생인데 무슨 일입니까? 이 친구가 뭐 잘못이라도 저질렀소?”
“아, 아뇨…… 그건 아닙니다만…….”
“아 씨 들어봐요 랄칸 오빠! 오빠랑 언니 찾으러 가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생트집 잡으면서 불러 세운 거 있죠! 존나 어이가 없어 가지고!”
경비병이 머뭇거리는 틈을 타 나나가 얼른 대화에 끼어들었다.
용케 쌍검사의 이름까지 기억한 그녀는 양손으로 부채지질을 해대면서 고자질하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저 랄칸이란 검사랑 10년은 알고 지낸 것 같겠다.
“자, 잠깐 랄칸이라면 분명…….”
“서천 클랜 멤버잖아……!”
거기에 더해 랄칸을 알아보는 사람들까지 나오자 상황은 더욱 유리해졌다.
실버 등급이라 해도 나름 유명한 편인지 경비대들 중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거기에 서천 클랜의 위광까지 더해지자 경비병 중 누구도 함부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뭐야, 당신들. 뭔데 우리 애들 걸고 넘어져?”
모두가 당황하는 와중 무투가가 싸늘한 눈빛으로 경비대를 훑어보았다.
그러자 경비병 중 가장 연륜 있어 보이는 중년 아저씨가 몸소 나서서 해명을 시작했다.
“사, 상부에서 직접 내린 명령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란님……. 오늘 오전 서쪽 관문으로 입성한 속옷 차림 남성의 신변을 확보하란 지시가…….”
“죄목이 뭔데? 우리 다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러냐고.”
“그건 보안상의 이유로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중대한 안건이니 부디 협조를…….”
새삼 서천 클랜의 권위를 실감할 수 있었다.
여기 있는 랄칸과 유란 모두 서천에선 실버 등급의 말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비대가 찍소리도 못하다니.
대체 서천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하면 이런 일개 클랜원에게도 쩔쩔 매는 걸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애를 잡아가려면 무슨 일인지 정도는 말해줘야 할 거 아니야? 그것도 말 못하면서 그냥 데려가겠다고? 경비대가 언제부터 그렇게 권력이 셌어?”
“그, 그건…….”
“됐고,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우린 애는 댁들 일이랑 관계없어. 애당초 오늘 아침엔 우리랑 같이 있었고.”
뻔하기 그지없는 거짓말이었다. 딱 봐도 급조한 티가 났다.
하지만 서천 클랜 멤버가 그렇게 말하니 경비대들은 차마 뭐라 하지 못했다.
한참을 머뭇거린 후에서야 중년 아저씨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기밀사항이라 자세히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목격자의 증언과 그쪽 검사 분의 외관이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러니 간단한 조사에라도 협조해주심이…….”
“알 게 뭐야 다른 사람하고 헷갈렸나 보지. 벗고 다니면 다 얘야? 세상 천지에 이렇게 다니는 사람이 얘 밖에 없냐고.”
“그, 그건 아니지만…….”
나름 용기 내서 말해본 것 같지만 유란은 그마저도 묵살해버렸다.
좀 뜬금없는 등장이었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선 진짜 존나 멋있다.
이런 게 바로 걸 크러시구나. 반해버릴 것 같다.
“더 할 말 없으면 우린 간다. 가자 얘들아.”
“넹 언닝~ 빨리 가요~.”
말하기 무섭게 얼른 따라나서는 나나.
나 역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연스레 합류했다.
그러면서 당황스러워하는 유미 일행까지 우리 쪽으로 끌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