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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27화 (127/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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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클리어한 후

참고로 보물방에 들어가기 전에 유미의 부탁으로 간단한 제사를 지냈다.

아라크네에게 당한 희생자들을 위한 제사였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세요…… 신령들께서 보우하실 겁니다…….”

간이 향로를 피우며 유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기도를 올렸다.

아쉽게도 시체들을 하나하나 수습해주지는 못했다.

시간상의 문제도 있고, 우리도 수차례의 전투로 꽤나 지쳐 있었으니까.

뭐 도시로 돌아가면 길드에 보고할 테니 후속 처리는 길드가 알아서 해주겠지.

이 정도만 해도 죽은 사람들을 위한 예우로는 충분하리라.

씁쓸한 마을을 뒤로 한 우리는 벽을 따라 걸었다.

위치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어서 방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둥지 한쪽에 웬 길이 하나 생겼다.

이 또한 아라크네가 죽은 영향이었다. 보물방의 입구는 거미줄로 촘촘하게 막혀 있었던 것이다.

“이런 길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싸울 때는 보이지도 않았는데…… 어지간히도 꽁꽁 숨겨뒀네.”

“그만큼 값진 보물이 있다는 뜻이겠죠! 기대된당~!”

신기해하는 일행들과 함께 한동안 통로를 걸었다.

넓고 어두운 길을 걸어가자 머지않아 방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와!”

“샌즈!”

다나와 나나가 연달아 탄성을 내질렀다.

우리가 들어선 방은 넓은 돔 형태였는데 아름답게 꾸며진 직물, 태피스트리라 불리는 것들이 원을 그리며 걸려 있었다.

어떤 것은 예술적인 그림들이 새겨져 있는 반면 어떤 것은 비단처럼 무늬 없이 윤기가 흘렀다.

어느 쪽이든 무척이나 수려하고 신묘했다.

마치 미술관에 온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직물들은 한 눈에 봐도 값비싼 물건이었다.

이를 알아본 일행들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중얼거렸다.

“이거 설마 전부 저 거미가 짠 거야……?”

“베 짜기의 명수라는 얘기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여신에게 범접한다는 말이 과장은 아니었나 보네요.”

가디스 던전의 아라크네는 원전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따왔다.

그녀는 비록 인간이었지만 길쌈에 있어선 여신 아테나 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너무나 오만했던 아라크네는 그 사실을 온 동네방네 떠들어댔고 결국 아테나를 도발하기에 이른다.

그리스 신치고 비교적 윤리적이었던 아테나는 사죄할 기회를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아테나의 선처에도 불구하고 아라크네의 입에선 그녀를 향한 도전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아테나와 아르케는 베 짜기 승부를 하게 됐는데 여기서 한층 더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아테나는 그리스 신들의 명예로운 모습과 그들이 지상에 안겨준 은혜들을 태피스트리에 새겨 넣었다.

반면 아라크네가 새겨 넣은 그림은 제우스와 포세이돈이 여자들을 겁탈하는 내용이었다.

아버지와 마음이 있었던 남신을 추잡하게 그리는 걸로 모자라 그걸 본인 앞에서 대놓고 행하다니.

아라크네의 행동은 선을 제대로 넘어버렸고 아테나를 격노케 했다.

결국 아테나는 베 짜기 승부고 뭐고 아라크네가 만든 작품을 찢어버리며 그녀에게 저주를 내렸다.

이게 아라크네가 동굴에 들어오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오만해선 안 된다는 걸 알려주는 교훈적인 이야기라 생각한다.

그녀가 괜히 가오만 안 부렸으면 내 손에 반갈죽 당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하나 같이 다 폭력적이거나 야하네요! 저 거미 언니 취향도 꽤 하드코어한 쪽이었나 봐요.”

일행들이 감탄하고 있던 와중 나나는 꼭 자기 같은 그림만 보며 감평을 내놓았다.

아라크네 본인의 배경 때문일까.

태피스트리에 새겨진 그림 중엔 아테나의 파멸이나 신들의 이중적인 면모를 표현한 것들이 많았다.

반인반수의 괴물들에게 죽임당하는 아테나의 추종자들.

광전사처럼 적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아테나.

방탕의 극치를 달하는 그리스 신들의 나체 그림 등 불건전한 내용들이 잔뜩 있었던 것이다.

“요, 요르나 넌 저런 거 보지 마. 아직 너한텐 일러.”

“왜애, 재밌잖아.”

“하나도 안 재밌어……!”

묘사 수위가 강해서 그런지 세 사람은 요르나의 눈을 가리기 바빴다.

그러고 보니 요르나는 뉴비 멤버 중 유일한 미성년자였지.

19살이나 됐으니 알 거 다 알겠지만 굳이 보여줄 필요도 없긴 하다.

“그보다 동굴 속에서 이렇게 무서운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니…… 어쩐지 좀 처량해요…….”

여신의 나체 그림을 보며 헉헉 대는 나나와 달리 유미는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희생자들을 천도해줄 때부터 알아봤지만 그녀도 참 마음씨가 고운 듯하다.

“아마 쫓겨난 이후로 계속 복수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겠지. 자기가 여신 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누군가 따뜻한 칭찬 한 마디라도 해줬으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지 몰라요…… 그 사람은 단순히 인정받고 싶어서 그랬을 텐데…….”

아라크네가 여신으로 각성할 때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자기는 그저 인정받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지.

당시엔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돌이켜 보니까 좀 공감이 된다.

나도 인정받지 못하고 배척당하는 기분이 얼마나 좆같은지 잘 알고 있으니까.

유미도 아라크네에게서 연민을 느끼는 걸 보면 비슷한 사정이 있는 걸까?

언젠가 물어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부, 이게 우리가 찾던 보물이야?”

다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던전 보스가 직접 짠 거니까 가치가 어마어마할 거야. 귀족이나 갑부들한텐 이만한 소장품이 없겠지.”

“오오, 그럼 이거 하나에 얼마나 해? 1만? 2만?”

상류층 얘기가 나오니 다나의 눈에 빛이 감돌았다.

어디에나 돈 내다버리는 게 취미인 인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모험가들의 VIP 고객들인 만큼 귀족이나 대부호 같은 인간들이 거론되면 기대를 할 수밖에 없으리라.

허나 다나가 부른 가격은 그런 기대에 비해 너무 소소했다.

1만이면 원화로 100만 정도인데, 아라크네가 직접 짠 태피스트리가 고작 그 정도로 거래될 리 없지 않는가.

“이 동네 시세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곳에선 개당 25만 정도에 팔리곤 했어.”

“이, 이, 이십오만?!”

“정말로요?!”

내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하자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25만이면 약 2500만원. 다나가 예상했던 가격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고가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그만한 돈을 쥐어본 사람은 한 명도 없으리라.

하물며 이 방에 있는 태피스트리만 열 개는 된다.

다 팔면 무려 250만 아웬이라는 어마어마한 거금을 벌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들었어, 린크?! 25만이래! 저 천조가리 하나가 우리 6개월 수입 보다 훨씬 비싸다고!”

“말도 안 돼…… 한 장만 갔다 팔아도 몇 달 간은…… 아니, 아니…… 아껴 쓰면 몇 년은 먹고 살 수 있잖아.”

“지, 진짜 믿기지가 않아……!”

내 생각대로 우리 뉴비 친구들에게 25만은 상상치도 못한 돈인 듯했다.

다나는 무슨 태피스트리가 성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유미와 린크도 두 다리를 부들부들 떨면서 태피스트리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지금 어떤 기분일지 내가 다 체감이 됐다.

“아테나 여신이 보면 심기 불편할 작품들이지만, 이런 거일수록 예술가에겐 극찬 받는 법이거든.”

원래 이런 미술품들은 자체적인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작품에 붙는 스토리 또한 중요한 법이다.

여신에게 저주를 받은 당대 최고의 길쌈꾼.

그녀가 여신을 향해 복수의 칼을 갈며 괴물이 된 후로도 계속 짜낸 태피스트리라니.

내가 미술품 수집가였으면 팬티 벗으면서 달려들 거다.

실제로 이걸 경매에 내놓는다면 다들 사고 싶어서 안달을 낼 것이다.

‘진짜 보상은 이런 게 아니지만.’

일행들이 돈맛에 취해 있을 때 나는 은근슬쩍 구석 진 곳으로 향했다.

내 기억대로 그곳엔 웬 만들다만 직물이 하나 놓여 있었다.

놓여 있었다? 아니, 버려졌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 또한 아라크네가 만든 것 같았지만 전시된 것들과는 달리 반으로 찢어져 있었으며 매우 더러웠다.

거의 넝마라도 부를 정도로 해진 태피스트리.

믿기 힘들겠지만 이거야 말로 내가 이 던전을 찾아온 진짜 이유다.

“다키님? 그런 쓰레기는 왜 주우시는 거예요?”

내가 찢어진 태피스트리를 잘 접어 넣을 때 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도 내가 숨기는 게 있다는 걸 눈치 챘는지 최대한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다 쓸 데가 있거든. 나한텐 저 25만 아웬짜리 보물 보다 이게 더 귀중해.”

“그런 걸레짝이요……? 뭐 숨겨진 보물이라도 돼요?”

“보물은 아니지만 보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재료 같은 거지. 나중에 보면 알아.”

내 설명에도 나나는 여전히 반신반의 하는 기색이었다.

볼품없는 물건이 레어템이었다는 클리셰는 흔하지만 내가 주운 건 정말 걸레로 밖에 안 보였으니까.

“뭐어…… 다키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래도 나나는 이내 수긍했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기색은 남아 있었지만 말이다.

“구경 다 했으면 슬슬 챙기자. 걸려 있는 것들 전부 가방에 집어넣어.”

“응 사부!”

“맡겨주세요!”

내 말을 들은 일행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태피스트리를 회수했다.

태피스트리는 커다란 카펫 정도의 크기라서 가방 하나에 다 넣기는 무리가 있었다.

차곡차곡 접어도 부피가 꽤 됐던 것이다.

그래서 유미 일행의 가방까지 썼는데 그래봤자 몇 개 더 들어가지도 않았다.

결국 10개 중 다섯 개는 린크와 다나가 직접 손으로 들고 가야 했다.

“너희들끼리만 들어도 괜찮겠어? 나도 같이 들 테니까 좀 나눠줘.”

“아니에요, 선생님. 이런 거라도 저희가 해야죠.”

“맞아, 맞아. 잡일은 우리한테 맡기고 사부는 여차할 때 칼이나 잘 휘둘러줘.”

이불 정도의 무게는 될 거라 들기 힘들 법한데 두 사람은 전혀 불평하는 기색이 없었다.

나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처음으로 던전을 클리어했다는 사실이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리라.

붙잡힌 친구도 무사히 구했고 막대한 보상도 얻었다.

지금 그들의 기분은 일확천금을 얻은 것만큼이나 행복하겠지.

실제로 엄청난 수입을 벌기도 했고 말이다.

“받아먹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뭘 좀 아네요. 다 챙겼으면 얼른 가죠! 이러다가 해 떨어지겠어요!”

“좋아~!”

그렇게 보물방에서 나온 우리는 다른 전리품들을 챙기면서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전리품 챙기는 일은 나와 요르나가 전담했다.

린크와 다나는 직접 태피스트리를 들어야 했고 나나와 유미는 가방을 매서 빈손이 우리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르나는 환자라 나 혼자 할까 했지만 그녀도 꽤나 책임감 강한 성격이었다.

자기 혼자 놀 수는 없다고 말하며 고블린 귀를 성실하게 회수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방치해뒀던 고블린들의 귀와 새끼 거미의 갑각들을 가능한 한 챙겼다.

이것도 다 돈이란 생각으로 열심히 모았는데 그 수가 워낙 많다 보니 결국 전부 루팅하는 건 불가능했다.

“와씨…… 거미 새끼들 등딱지만 한 가득이네요!”

“안 돼…… 더는 안 들어가…… 나머진 다 버려야 될 것 같아요 스승님…….”

꽉 찬 가방을 보고 있자니 인벤토리를 향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원작 게임처럼 무제한 인벤토리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힘들게 들고 다닐 필요도 없이 보상을 모조리 쓸어 담을 수 있었을 텐데.

“이씽, 여기는 뭐 무한 가방 같은 것도 없어요? 모험할 때마다 이 짓 하고 있으니 짜증나네요!”

나랑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나나가 불만을 터뜨렸다.

확실히 마법 도구가 상용화된 세계관인데 그런 거 하나 정돈 있지 않을까.

내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유미가 조심스럽게 대답을 내놓은 것이었다.

“저어…… 무한으로 들어가진 않지만 비슷한 게 있어요.”

“어? 진짜?”

“네, 차원낭이라는 장빈데 자그마한 가방 안에 아공간을 형성하는 물건이에요. 제품마다 용량은 제각각이지만요.”

듣기로는 커다란 상자부터 넓은 방 정도까지 다양하다는 듯하다.

그 말은 들은 나나는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아니, 그렇게 좋은 게 있는데 너희는 왜 평범한 가방만 들고 다녀요?”

“공간 마법으로 만든 물건은 엄청 비싸거든요…….”

“용량이 작은 것도 최소 1만 아웬부터 시작해요. 저희 같은 초보 모험가들은 꿈도 못 꾸는 가격이죠.”

가방 하나에 100만원이라. 완전 이세계판 명품 가방이 따로 없구만.

뭐, 마법으로 만들어낸 고급품이니 비쌀 수밖에 없겠지.

마도구가 상용화 됐다지만 같은 마도구라 해도 제작 난이도나 재료의 희소성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일 테니까.

“도시에 가자마자 당장 하나 사야겠네요! 이거 한 장에 25만인데 못 살 것도 없잖아요 그죠?!”

빵빵해진 가방을 메면서 나나가 말했다.

확실히 우리에게 들어올 돈을 생각하면 그 정도 지출은 별 거 아니다.

뭣보다 앞으로 있을 여정을 생각하면 용량 큰 마법 가방 하나 정도는 있는 게 좋겠지.

그렇지만 인벤토리를 돈 내고 사야하는 건 좀 아니꼬운걸.

원작 게임에선 당연히 있는 걸 비싼 돈 내고 얻어야 되다니.

온라인 게임에서 인벤토리를 캐쉬로 파는 것과 비슷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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