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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26화 (12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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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클리어한 후

“마, 맞다 요르나!”

“빨리 찾아보자……! 고치 모아둔 곳에 분명 섞여 있을 거야!”

요르나가 거론되자마자 세 사람은 허겁지겁 고치가 모여 있는 장소로 달려갔다.

린크를 구속했던 거미줄과 마찬가지로 희생자들을 묶어둔 고치 역시 전부 사라졌다.

하지만 그 중에서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운반하는 과정에서 중독됐는지 중독사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 밖에도 영양실조, 질식사 등의 이유로 대부분의 희생자가 숨을 거뒀다.

“요르나! 요르나!!”

“어디 있어?! 있으면 대답해봐!”

“요르나……!!”

시체들이 즐비하니 세 사람의 마음도 초조해진 모양이다.

그들은 부패해가는 시체들과 뼈 무더기를 쉴 틈 없이 뒤졌다.

나도 한 몫 거들어 주위를 샅샅이 살폈고 나나는 신성한 빛으로 조명을 밝혀줬다.

“으, 으응…….”

“……! 얘들아 여기!”

한동안 이무기 유골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나는 이내 젊은 여성의 목소리를 들었다.

일행들을 부르며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하자 우윳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나이는 유미와 비슷해 보였고 입고 있는 옷은 단정한 사제복이었다.

외관만 봐선 일행들이 찾던 그 요르나가 틀림없는 듯했다.

서둘러 달려온 유미 일행도 그 모습을 알아보곤 눈시울을 붉혔다.

“요르나!!”

가장 먼저 뛰어간 건 당연하게도 린크였다.

그는 칼과 방패까지 내던지면서 요르나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숨이 붙어 있는지 확인하면서 그녀를 깨웠다.

“요르나 정신 차려! 나야, 린크야! 친구들이랑 같이 구하러 왔어!”

“린…… 크……?”

꾹 감겨 있던 눈동자를 게슴츠레 뜨는 요르나.

곧 맑은 하늘처럼 투명한 눈동자가 린크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한동안 눈을 깜빡거리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헤헤헤…… 미안…… 많이 걱정했어?”

“요르나……!!”

그 순진무구한 미소에 린크는 결국 그녀를 끌어안으며 오열했다.

그럴 만도하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요르나는 다른 희생자들처럼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을지 모른다.

얼마나 걱정했을까.

소중한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녀를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러한 감정들로부터 비로소 해방된 기분이 어떨지 나로선 상상도 가지 않았다.

“뭘 실실 쪼개는 거야……!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요르나는 바보……! 바보, 바보!!”

다나와 유미도 결국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요르나를 책망하는 기색도 있었지만 그렇게 미워할 수 있는 것도 소중한 동료이자 가족이라 그럴 것이다.

“보기 좋네.”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나나 역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꽤 흐뭇한 마음인 듯했다.

“저기요들? 잃어버린 푼수 찾아서 좋은 건 알겠는데 이제 슬슬 돌아가야죠?”

한참이 지나도 떨어지지 않자 결국 나나가 지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채근했다.

확실히 여기까지 오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돌아갈 때 걸리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가급적 서두르는 게 좋다.

해가 저물고 날이 어두워지면 율리아나의 성벽도 닫힌다.

오늘 하루 힘겨운 일의 연속이었는데 밖에서 노숙하고 싶지는 않다.

일행들도 그 사실을 떠올렸는지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래……! 돌아가자 이 바보 요르나! 진짜 숙소 가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응, 응. 다나도 이제 그만 뚝 해야지.”

“이씨……! 울긴 누가 울었다 그래!”

울먹이는 다나를 요르나가 연신 쓰다듬어줬다.

다나만 그러는 게 아니라 린크, 유미도 요르나에게 달래지고 있었다.

뭔가 구해진 쪽은 요르난데 울고 불며 난리 피우는 건 세 사람이라니.

요르나가 태평한 건지, 세 사람이 호들갑인 건지. 어찌됐든 평범한 광경은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멀뚱히 일행들을 보고 있을 때였다.

“저어…… 인사가 늦어서 죄송해요. 여러분이 친구들을 도와주신 거죠?”

“응?”

자리에서 일어난 요르나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이는 유미 보다 어리다고 했는데 뭔가 어른스러운 분위기의 소녀였다.

원래 실눈 기믹이 있는 캐릭터인지 두 눈은 나긋하게 감겨 있었으며 그 위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여동생이라기 보단 최소한 동갑, 나아가선 누나라고 불러야 될 것 같았다.

예상외의 성숙함에 놀라면서 나는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그렇지. 그래도 순전히 내 힘만으로 온 건 아니야. 네 친구들도 열심히 했어.”

“정말 감사해요. 그리고 저 때문에 이렇게 위험한 일에 끌어들여서 죄송해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요르나는 나와 나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 태도에선 진정성이 느껴졌다.

비단 말로만 감사하고 미안하다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던 것이다.

“헹, 알면 다행이네요. 운 좋은 줄 알아요! 원래 같았으면 댁 같은 고구마녀는 절대 안 도와줬을 테니까요!”

“고구마요? 제가 그렇게 달달해 보이나요?”

나나의 말을 이해 못한 요르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고구마 드립 같은 건 게임 세계 사람들이 못 알아들을 말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요르나는 좀 엉뚱한 기색이 있는 듯했다.

“뭐래! 네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다 답답하다구요!”

“저런 그랬군요. 아, 그보다 뭐 하나만 질문해도 될까요?”

“아이 씻팔! 사람 말 은근슬쩍 한 귀로 흘리지 마요!”

너무나 온화한 기미에 나나가 열불을 터뜨렸다.

굳이 저렇게 화낼 일인가 싶었지만 무시당하는 입장에선 기분이 썩 좋지 않겠지.

그렇다고 둘이 싸우게 둘 수는 없어서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그, 그래. 뭐가 궁금한데?”

“웁웁! 읍웁! 우으웁!”

나나의 입을 틀어막으며 질문을 건넸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나가 뭐라뭐라 욕을 해댔지만 요르나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말했다.

“저희랑 같이 던전에 들어오신 분들이 있는데요, 그분들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요.”

“너희랑 같이 온 사람이라면…….”

“트롤 슬레이어라는 파티인데, 혹시 도망치지 못하셨으면 어쩌나 해서…….”

지금만큼은 나나의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이 녀석, 진짜 머릿속이 말도 안 될 정도로 꽃밭이다.

어찌 보면 트롤 슬레이어 때문에 본인이 이렇게 된 건데 이 와중에 그 말종 새끼들 걱정을 하다니.

뭐 성인이라도 되나? 증오나 복수심 같은 감정이 아예 없는 거 아니야?

나나도 아예 할 말을 잃었는지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분개할 수 있는 건 린크와 다나 뿐이었다.

“무슨 소리야 요르나?! 그 자식들이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맞아! 애초에 그 새끼들 아니었으면 네가 여기 잡혀오는 일도 없었다고!”

두 사람의 말은 팩트라는 이름의 몽둥이를 양손으로 들고 휘두르는 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르나는 평온함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될 필요는 없는걸. 그분들도 사람이잖아. 죗값을 받을지언정 위험에 처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구와아아악…….”

기어이 나나는 벽 쪽으로 달려가 헛구역질을 했다.

요르나의 말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물론 나도 상당히 안일한 판단이라 생각한다.

내가 트롤 슬레이어들을 족치지 않았으면 요르나는 어떻게 했을까?

차마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역시 그놈들은 동굴 입구에서 죽이는 게 맞았다.

내가 한 일들을 거듭 잘 했다고 생각하며 일행들을 진정시켰다.

“트롤 슬레이어에 대해선 우리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이렇게 위험한 던전에 들어왔으니 무사하진 않을 거 같은데.”

“선생님 말씀도 맞네요…… 저처럼 탈출로를 찾았다면 모를까, 그 많은 거미들한테서 도망치긴 쉽지 않았겠죠.”

“하! 잘된 일이네! 아주 그냥 거미들 뱃속에 들어갔으면 좋겠어!”

내 얘기에 린크는 수긍했고 다나는 통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요르나는 여전히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부분에 관해선 넘어가기로 했다.

본인이 이해심 넓은 성격인데 내가 그걸 뭐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보다 가기 전에 보상이나 좀 챙겨가자. 아마 이 근처에 보물방이 있을 거야.”

“보상!”

보상 얘기가 나오자 토악질을 하던 나나가 눈을 번뜩였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요르나를 제외한 일행들은 모두 보상이란 말에 기대감을 드러냈다.

“생각해보니 그러네! 이렇게 강한 괴물의 둥지라고! 뭐라도 있는 게 정상이잖아?!”

“이야기에 따르면 아라크네는 베 짜는 기술이 뛰어나다던데……! 그거랑 관련된 물건이 많지 않을까……?!”

비록 요르나를 구하기 위해 온 그들이라지만 보상은 또 다른 이야기다.

던전에선 값비싼 보물들과 진귀한 유물들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이는 가디스 던전 세계관에 아주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야기다.

누구나 던전하면 산더미처럼 쌓인 보물을 상상하고 마련이고, 그것은 일확천금의 꿈으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수많은 모험가들이 목숨을 걸고 던전으로 향하는 것이다.

아직 뉴비긴 하지만 그들 역시 모험가. 보물이라는 말에는 가슴이 두근거릴 수밖에 없으리라.

“아니, 너무 좋아하지 마 얘들아. 그건 우리들 게 아니니까.”

“뭐라구?”

다나와 유미가 손을 맞잡으며 좋아할 때였다.

갑자기 린크가 겁나 진지한 얼굴로 그녀들의 기쁨에 초를 쳤다.

그에 다나가 황당한 어조로 묻자 린크는 완고한 기색으로 이야기를 이었다.

“요르나를 구한 것도, 우리가 살아 있을 수 있는 것도 전부 선생님과 나나 씨 덕분이야. 보물이 있다면 전부 두 분이 갖는 게 맞아.”

“그, 그게 뭔 개소리야?! 우리도 죽도록 고생했잖아! 사부가 다 가져가는 법이 어디 있어?!”

“선생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고생할 틈도 없이 죽었을걸. 유미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린크의 시선이 유미에게 돌아갔다.

질문의 대상이 된 유미는 잠시 주저했지만, 내 얼굴을 슬쩍 보더니 이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응…… 스승님이랑 나나 씨가 아니었다면 원령쇄도도 쓸 수 없었을 거야. 애초에 홉 고블린한테 당했을 게 분명해…….”

“유미 너까지…….”

어느새 여론은 나에게 보상을 밀어주는 걸로 결정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독식할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초중반까진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던전의 보상들을 내가 독차지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허나 여기까지 오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미 몇 번이나 말했지만 이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나도 많이 위험한 상황을 겪었을 거다.

내가 버스 태워준 부분이 없잖아 있지만 던전 공략은 우리 모두의 힘으로 해낸 것이다.

“너무 그렇게 말하지 마. 나도 욕심 부릴 생각 없으니까.”

“선생님……?”

부드럽게 웃으면서 린크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자 일행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모였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며 내 뜻을 전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우리 모두가 열심히 했기 때문이야. 린크랑 다나, 유미 너희들이 없었다면 아라크네도 잡기 힘들었겠지.”

“사부…….”

“스승님…….”

내 말에 감격이라도 한 건지 두 사람의 얼굴에 뭉클한 감정이 떠올랐다.

귀여운 여자애들이 내 말 한 마디에 감동하다니.

정말 오지는 기분이다. 벌써 이것만으로도 보상을 다 얻은 듯했다.

“물론 내 공이 제일 크긴 하지만, 너희들도 적당히 나눠받을 권리는 있다고 생각해. 많이는 아니더라도 아쉽지 않게 챙겨줄게.”

“뭐, 뭐야 은근슬쩍 자랑하고……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내가 웃으면서 자만하자 다나가 다시 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단지 보상을 얻게 돼서 좋은 게 아니라 뭔가 뿌듯한 기분을 느낀 것 같았다.

“하~ 이거 참~ 쩔 받은 것들이 도리어 돈을 타가다니. 뭐해요 좆늅들! 빨리 다키님한테 그랜절하세요!”

한창 따뜻한 공기가 오가고 있을 때 나나가 거들먹거리면서 삿대질을 해댔다.

그에 세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랜절이 뭐야……?”

“절이랑 비슷한 건가요……?”

원래 세계에서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문환데 게임 세계 사람들이 알 리가 없지.

어김없이 튀어나온 나나의 트수 기질에 한숨을 쉴 때, 나나는 친절하게도 몸소 설명해주었다.

“이렇게! 물구나무서면서 절하는 거예요! 자! 빨리 따라하세요! 존나 힘드니까요!”

“이, 이렇게……?!”

“새, 생각보다 어려운데요……!”

나나의 재촉에 유미 일행은 하나둘씩 그랜절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나는 다섯 명의 사람들에게 동시에 절을 받는 기묘한 체험을 하게 됐다.

미친놈들이 그걸 하란다고 진짜 하네.

어처구니없음을 느끼면서 나는 보물방이 있을 방향을 가리켰다.

“아니 그런 거 하지 말고…… 빨리 보상이나 털러 가자.”

“네 스승님……!”

이런저런 대화 끝에 우리는 시신들을 지나 보물방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버려서 늦었습니다. 127화는 가급적 새벽에 올리려 했는데 마음이 잘 추스러지지 않아 완성을 못 하고 말았습니다. 내일 중으로 꼭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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