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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23화 (12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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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한 자의 둥지

새로운 신? 거미의 여신 아라크네라고?

갑작스레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난 당황을 금치 못했다.

아라크네는 신 같은 게 아니다.

그저 아테나에게 저주 받았다고 반신 취급 받는 괴물이란 말이다.

그런 아라크네가 뜬금없이 신이 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너도…… 날 무시했어…….]

촤좌아아악!!

“……!”

내가 혼란스러워할 때 아라크네가 공격을 가해왔다.

날개처럼 펼쳐져 있던 8개의 거미 다리가 일제히 날아들었다.

가뜩이나 기다란 그것들은 마치 촉수처럼 움직여 날 추적했다.

“뭐야……! 이게 대체 뭐냐고?!”

나는 뒤로 굴러서 가까스로 회피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내 머릿속엔 온갖 의문들이 가득 차올랐다.

원작 게임에는 이런 이벤트가 없었다.

아라크네가 새로운 신으로 각성한다느니, 내가 모르는 패턴을 사용한다느니 하는 일은 전무했던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연달아 벌어지자 뇌가 따라가지 못했다.

게임 세계라서 변수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건 언제나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정도가 심하지 않는가?

어떤 전조도 없이 몬스터가 각성하다니. 그런 얘기는 6천 시간 동안 듣도 보도 못했단 말이다.

‘아니야…… 생각해 보니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아…….’

연이어 날아온 거미 다리를 튕겨내며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승천. 메시지에 담겨 있던 그 단어가 유독 신경 쓰였다.

그럴 만도 한 게 승천은 출시 예정이었던 DLC의 서브 타이틀이었기 때문이다.

개발 초기부터 계획되어 있었지만 끝내 흥행부진으로 취소됐던 DLC 승천.

개발사에선 다양한 컨텐츠 추가, 그리고 기존 보스들의 하드코어 버전이 추가될 거라 예고했었다.

‘설마 이 여자가 아라크네의 하드코어 버전이라는 거야?’

거기까지 생각하니까 그간 겪었던 일들이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본래 있어서는 안 되는 홉 고블린. 유독 수가 많았던 지주귀.

처음엔 회차가 뒤섞이기라도 한 건가 싶었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검은 산양의 뿔을 얻었을 때부터 눈치 챘어야 했다.

이 세계는 비단 가디스 던전의 본편만을 다루고 있는 세계가 아니다.

끝내 출시되지 않았던, 승천 DLC까지 녹아든 세계였던 것이다.

[너도…… 내가 아무 것도 아니란 듯이 말했어!!]

카각! 카가가가각!!

상념에 잠긴 채 공격에 대응할 때였다.

아라크네의 다리가 더욱 크고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수많은 다리로 땅을 찍으며 나를 향해 매섭게 달려왔다.

눈에 띄게 빨라진 움직임을 보며 나는 그녀의 패턴을 알아차렸다.

아라크네 특유의 돌진 패턴, 광기어린 질주를 사용한 것이다.

“크흐윽?!”

카앙! 카앙! 카가아아앙!

패턴을 파악한 나였지만 차마 피하지는 못했다.

너무 빠르다. 기존의 아라크네의 질주도 빠르긴 하지만 그보다 두 배 가량은 더 빨랐다.

내 반사 신경으론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나는 당황한 채 방어 패링을 반복했으나 한계는 명확했다.

결국 거미 다리 중 하나가 패링을 뚫고 내 어깨를 내리 찍었다.

푸후욱!!

“크아악……!”

찍어 누르는 것 같은 공격에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직후 262의 데미지와 함께 어깨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가죽 갑옷이 있어서 그나마 꽤 경감된 것이었다. 갑옷이 없었다면 300이 넘는 데미지가 들어왔으리라.

[용서 못 해……! 용서 못해, 용서 못 해……!!]

“뭘 용서 못해, 피해망상환자 새끼가!!”

이어서 다른 다리들도 날 관통하려 했지만 거기까진 당해주지 않았다.

촤아아아악!

나는 어깨를 찌른 다리를 베면서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섬격을 사용한 덕분에 다리를 튕겨낼 수 있었다.

그러자 도저히 생물의 다리에서 나는 것 같지 않은 쇳소리가 들려왔다.

카아아아앙!!

얼마나 단단하면 거미 다리에서 이런 소리가 날까.

그런 사소한 생각을 하며 나는 아라크네와 거리를 벌렸다.

“하아, 하아…… 너 뭐야…… 어떻게 무식하게 큰 거미가 한순간에 여신이 된 거야?”

자세를 잡으면서 아라크네에게 물었다.

그녀가 DLC의 영향으로 각성한 것은 잘 알겠다.

하지만 본래 본편 밖에 없는 가디스 던전에 어떻게 DLC가 개입하게 됐는지는 의문이다.

스토리 내에서 그녀가 어떻게 신이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단 개인적인 호기심이 아닌 정보 수집의 이유로 묻자 아라크네는 의외로 순순히 답해줬다.

[그 분들을 만나기 전엔…… 난 그저 저주 받은 거미에 불과했어…….]

“그 분들……?”

[그래…… 그저 복수심에 불타서 잡아먹기만 하는 내게 그 분들이 힘을 줬어…… 그 여신한테 복수할 수 있는 힘을……!!]

카가가가각!!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라크네는 다시금 공격해왔다.

이번에 사용한 패턴 역시 광기어린 질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접근해온 아라크네가 창날 같은 다리를 뻗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그녀의 패턴은 생각했던 것보다 달라진 게 없었던 것이다.

“쯔아아아앗!!”

카가아아앙!

[……?!]

머리를 노린 다리를 온힘을 다해 쳐냈다. 공격 패링에 성공한 것이었다.

‘원본보다 빠르긴 하지만 패턴 자체는 같아……! 타이밍만 재면 충분히 튕겨낼 수 있어!’

광기어린 질주는 피하기가 무척 어려운 패턴이다.

속도도 속도지만 이동하는 도중 모든 다리가 공격 판정을 가져서 말 그대로 살아있는 전차가 돼버린다.

하지만 중간 다리를 공격 패링으로 쳐내면 패턴을 아예 끊어버릴 수 있다.

운 좋게도 내 머리를 노린 다리가 중간 다리였다.

모습은 인간이었지만 거미에게 통하던 대응법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크흐윽……!]

미친 듯이 달려오던 아라크네가 자리에 쓰러졌다.

나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린크와 다나를 보며 소리쳤다.

“린크, 다나! 이쪽으로 합세해! 다 같이 총공격해서 무력화시킨다!”

“알겠어, 사부!”

“지금 바로 갈게요!”

내 부름에 두 사람이 지면을 박찼다.

그들이 오기 전에 먼저 공격을 가하려 한 나였지만 아라크네 역시 호락호락 당해주진 않았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악!!]

“아 씨바! 귀갱!!”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소리가 직전에서 들려왔다.

아니, 비단 찢어질 것 같은 게 아니라 찢어진 걸지도 모르겠다.

귀 안이 먹먹하고 귓구멍에선 무언가가 흘러내린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틀림없이 피가 흐르는 것이리라.

저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은 나는 곧장 자세를 가다듬으며 검을 휘두르려 했다.

“미친년이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지랄……!”

[키기이이익!]

“……?!”

아라크네에게 가한 공격을 무언가가 가로막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새끼 거미였다.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거미 새끼가 아라크네 대신 내 검을 맞은 것이었다.

“사, 사부! 큰일이야! 사방에서 놈들이……!”

“뭐……?!”

새끼 거미를 벤 내게 다나가 소리쳤다.

나는 날 가로막고 있던 놈의 숨통을 끊으며 주위를 확인했다.

[키리리리릭!]

[키이익! 키이이이익!!]

다나의 말은 사실이었다.

넓은 공동을 수많은 거미들이 가득 메웠다.

바닥은 어느덧 새끼 거미들로 들끓었고 천장과 벽에서도 끊임없이 기어오고 있었다.

“이게 뭔…….”

평원 때와 비견되는 머릿수에 나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원본 아라크네도 잡졸을 부르는 패턴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많아봤자 다섯 마리 정도지 이렇게 어마어마한 대군을 불러내지는 않았다.

[설마 내가 혼자서 싸울 거라 생각했어? 이 많은 아이들을 두고?]

어느덧 뒤로 물러난 아라크네가 조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뭔 동경식종처럼 생긴 눈으로 저렇게 웃으니 여러모로 소름끼쳤다.

동시에 이전보다 향상된 언어 능력이 내 생리적인 공포감을 자극했다.

“이것도 그 분이니 뭐니 하는 놈들 덕분이냐? 저출산 시대에 애를 이렇게 싸지르게 하고, 참 대단한 놈들이구만……!”

식은땀을 흘리면서 아라크네와 대치했다.

물론 새끼 거미들의 종류를 확인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광전사가 없는 건 다행이지만…… 더 성가신 것들이 섞여 있다.’

거미 무리 중에는 유독 특이하게 생긴 개체가 두 마리 정도 있었다.

몸 위에 꽃이 핀 특이한 거미였는데 그 꽃에선 수시로 청록색 빛이 흩뿌려졌다.

저 거미의 이름은 꽃거미.

2회차 이후부터 나오는 매우 희귀한 몬스터로 회복 능력을 가진 놈들이다.

저 청록색 빛에 닿은 거미들은 순식간에 500이나 되는 생명력을 회복한다.

두 마리가 있으니 실질적인 힐량은 무려 1000.

한 방에 처리하지 못하면 공격이 무의미해진다.

하물며 놈들이 아라크네에게 달라붙기라도 하면 지금까지 입힌 데미지가 물거품이 되어버릴 거다.

[숙녀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너 엄청 무례한 아이구나.]

“지랄하고 자빠졌네, 괴물 새끼가! 너 같은 건 절대 불가능이다!!”

아라크네의 개소리를 받아치며 꽃거미들에게 달려갔다.

절대 아라크네와 꽃거미를 붙여둬선 안 된다.

생명력이 회복되는 것도 큰 문제지만 나는 아라크네의 생명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원본 아라크네의 생명력은 8000.

거미 몸에서 태어난 인간형 아라크네는 그보다 적을 수도, 많을 수도 있다.

그런 놈에게 회복 수단을 주면 안 그래도 불투명한 전투가 더욱 안개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키기이이익!]

[키리리리릭!!]

꽃거미에게 달려가는 동안 수많은 거미들이 날 가로막았다.

지금 놈들을 공격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내 평타는 새끼 거미들을 한 방에 죽이지 못한다.

그렇다고 스킬을 쓰자니 기력이 간당간당하다.

여기서 최선의 방법은 빤스런을 하는 것이다.

나는 거미들의 포위를 피하면서 일행들에게 외쳤다.

“린크랑 다나는 다시 애들한테 가 있어! 꽃 달린 놈들 죽이기 전까진 공격해봤자 소용없으니까 방어만 하고!”

“응……! 사부도 조심해……!”

다나의 응원을 들으며 나는 꽃거미들에게 육박했다.

[키이익.]

치료 능력에 특화된 놈들이라 그런지 내가 접근해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허나 놈들이 가만있다고 해서 공격이 쉬운 건 아니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널 몸종으로 삼을까 했어. 수 십 년 만에 만난 잘 생긴 남자였으니까.]

촤라라라락!

“……!”

뒤에서 불길한 기척이 느껴진다. 나는 다급히 스텝을 밟아 그것을 피해냈다.

아니나 다를까 내게 날아온 건 거미줄 사슬이었다.

전력을 다해 거리를 벌렸는데도 아라크네는 순식간에 날 추적해서 포박까지 하려 든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잘 생겨도 날 무시하는 사람은 용서 못 해…… 역시 넌 아이들 먹이로 던져줘야겠어.]

“좆까 씻팔! 나도 너 같은 벌레 새끼는 관심 없어! 애초에 너랑 떡치면 충간이잖아!”

다시금 날아온 거미줄을 쾌도로 튕겨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꽃거미는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저항을 하지 않을 뿐이지 멀뚱히 서 있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새끼 거미들의 쇄도까지 더해져 나는 순식간에 포위되고 말았다.

어디를 봐도 거미들 밖에 보이지 않았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이잇 다키님! 그럴 때는 여러 가지 의미로 똥꼬를 빨아줘야죠! 더 자극하면 어떡해요?!”

서서히 위기감이 느껴질 때 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그녀는 다리의 부상을 전부 회복한 듯했다.

상처도 아물었고 관절의 방향도 멀쩡하다. 그러니 저런 헛소리를 당당히 할 수 있는 거겠지.

“지금이 네 이상성욕 드러낼 때냐?!”

“킹치만 저 언니 은근 꼴리잖아요! 옷도 홀딱 벗었고!”

“개뿔 1도 안 꼴려! 헛소리 할 시간에 뭐라도 좀 해봐!”

답답함을 느껴서 독촉했으나 나나는 이미 대응책을 마련한 뒤였다.

“맡겨만 주세요! 데므아시아아!!”

파아앗! 파바아아앗!!

나나가 큰 소리로 외친 후에야 난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달았다.

사방에서 찬광이 터지고 있었다.

금색으로 빛나는 구체가 연달아 터져 거미들을 기절시켰다.

마치 섬광탄으로 융단폭격을 가하는 것 같았다.

적에게만 효과를 발휘하는 찬광이지만 그 광량이 너무 강렬해서 나까지 눈이 멀어버릴 듯했다.

“나나 너……!”

내가 싸우는 사이에 즉발 주문을 찬광으로 바꾼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많은 찬광을 동시 다발적으로 생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헤헤헤헷! 딱 대요 거미 언니! 산 채로 붙잡아서 존나 따먹히게 해줄 테니까요!”

그러는 와중에도 나나는 본인의 그릇된 성욕을 발산하고 있었다.

아라크네를 생포하고 싶어서 이토록 무모한 짓을 벌이다니.

비록 일상생활이 가능한지조차 의문인 개변태지만 의지 하나 정돈 인정해줘야겠다.

[키기이이이익!]

[키리리리리릭!!]

연이어 터지는 섬광에 거미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날 공격하던 거미들이 일제히 멈춰 섰고 꽃거미도 더 이상 이동하지 않았다.

당연히 아라크네 역시 강렬한 빛 때문에 맥을 못 추렸다.

[크흐읏……?! 눈 부셔……!!]

“이게 바로 문명의 빛이다, 미개한 벌레 새끼야!”

촤아아아악!!

아라크네에게 소리치며 꽃거미들을 연달아 베어 넘겼다.

섬격으로 공격하니 단칼에 두 동강났다. 이제 아라크네를 조질 수 있게 됐다.

“다키님! 꼭 산 채로 잡으셔야 돼요! 같이 이종간의 즐거움에 눈 떠보자구요~!”

“꺼져!!”

============================ 작품 후기 ============================

오랜만에 제 시간에 올리는 것 같네요. 슬슬 컨디션을 되찾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보다 모바일에 맞게 쓰는 방식을 좀 바꿔봤는데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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