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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21화 (1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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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한 자의 둥지

설정상 아라크네는 본래 순도 100퍼센트의 인간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저렇게 흉측한 괴물 겸 반신이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아테나의 저주 때문이다.

신의 저주를 받아 괴물이 됐으니 그녀 역시 반신으로 취급된다는 기적의 설정인 것이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아라크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공동을 좀 더 자세히 살폈다.

천장에서 내려온 놈이 향한 곳은 웬 뼈 무더기였다. 엄청나게 거대한 뼈였는데 그 구조를 보아하니 뱀, 아니 이무기의 것으로 보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테나는 아라크네를 저런 괴물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힘을 가지고 던전의 여왕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저 이무기의 사체다.

들어올 때도 한 번 이야기했듯이 이 동굴은 한 때 남쪽 땅을 지배하던 강력한 이무기, 독왕의 거처였다.

허나 독왕이 수명의 이유로 자연사하면서 이곳은 주인 없는 동굴이 되었다. 독왕의 시체 역시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다.

아라크네는 우연히 그 사체를 먹어서 저렇게나 비대해진 것이다. 그저 인간 여자애가 아니꼬웠을 뿐인 아테나는 사태가 이렇게 치달을 줄 꿈에도 몰랐으리라.

아무튼 간에 직접 보니까 박력부터가 남달랐다. 재앙신들 보다 약하긴 하지만 일단은 신의 힘을 가진 괴물. 절대 방심할 수는 없었다.

“저게 뭐예요……! 예쁜 거미 언니는 어디갔냐구요……!”

이런 상황에서도 나나는 납득할 수 없다는 어조로 불만을 토로했다. 그녀는 나라 잃은 사람처럼 참담한 얼굴이 된 채 말했다.

“아라크네면 상반신은 예쁜 언니여야 하는 게 국룰 아니에요……?! 살면서 저렇게 징그럽게 생긴 아라크네는 처음 보네요……!”

참 한 결 같은 태도여서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반면 린크와 다나, 유미는 사색이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우리 진짜 저런 거랑 싸워야 되는 거야……?”

“지금까지 잡은 것 중 제일 큰 게 멧돼진데…….”

“저, 저희가 할 수 있을까요 스승님?”

아직 싸움은 시작도 안 했는데 이미 아라크네를 향한 공포가 그들을 좀먹고 있었다.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나 역시 수없이 죽고, 열 번도 넘게 재도전해서 간신히 쓰러뜨린 적이니까.

그런 보스인 만큼 자체적인 위압감 또한 일반적인 몬스터들과는 격이 달랐다.

하물며 약한 몬스터들만 상대해왔던 세 사람에겐 이러한 위압감이 더욱 무겁게 느껴지리라.

그 사실을 인지하면서 나는 일행들을 불렀다.

“너희들, 잠깐 저기 좀 봐봐.”

“저기라면…… 히익……!”

나는 아라크네가 향한 뼈 무더기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비단 이무기의 유골만 늘어져 있는 게 아니었다.

거대한 늑골 이곳저곳에 거미줄로 칭칭 감긴 고치가 수십 개나 매달려 있었다. 마치 시체를 넣어둔 가방처럼 보였는데, 분명 납치된 사람들이 들어가 있을 거다.

[키리리리리릭.]

푸후욱!

“……!!”

아라크네는 그 중 하나를 앞발로 집은 뒤 날카로운 독니를 박아 넣었다.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려 퍼지길 잠시, 곧이어 웬 남자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 으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고치의 부피가 점점 줄어들어간다. 안에 갇힌 사람의 비명소리도 갈수록 작아졌고 이내 그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툭, 마치 다 먹은 과일 껍질을 버리듯이 아라크네가 고치를 내던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빵빵했던 고치는 말라비틀어진 미이라가 되어 있었다.

“설마 저 거미…… 붙잡힌 사람을 산 채로 빨아먹는 거야……?”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다나는 망연자실한 채 주워섬겼고 린크와 유미는 입술조차 달싹이지 못했다.

나는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기세로 일행들에게 말했다.

“너희 친구도 저 고치 안에 있을 거야. 빨리 가서 막지 않으면 다음은 요르나일지도 몰라.”

“……!”

잔혹한 이야기였지만 일행들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내가 당장 튀어나가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방금 전의 고치는 다른 것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요르나가 유미나 다나 정도 체구라면 저 고치는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잠자코 지켜본 거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른다.

당장은 크고 맛있는 것부터 먹으려는 거 같은데 기분이 바뀌면 작은 걸 집을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다음이 될 수도 있고 몇 분 뒤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은 것이다.

“그래…… 우리가 왜 여기까지 왔는데…… 요르나를 구하려고 온 거잖아……!”

“리, 린크 말이 맞아! 여기까지 온 이상 뭐가 됐든 싸워봐야지!”

“응……!”

싸우지 않으면 요르나가 죽는다. 세 사람은 그 사실을 뇌리에 각인시켰다.

애당초 동료이자 가족을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친구들이다. 이제 와서 공포에 잡아먹히진 않으리라.

“이 이상 사람들이 잡아먹히게 둘 수는 없어. 작전 설명해줄 테니까 잘 듣고 지시하자마자 움직여.”

아라크네의 동태를 살피면서 일행들에게 이야기했다.

이게 게임이었다면 보스방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아라크네가 모습을 드러냈을 거다.

어느 보스 몬스터들이나 등장하는 순간 플레이어를 인식하기에 보스전에선 사실상 기습이 불가능하다.

허나 게임 세계에선 다르다. 놈은 원작 게임과 다르게 희생자들을 잡아먹느라 정신이 없으며 한 사람, 한 사람 먹을 때마다 꽤 긴 시간이 걸린다.

희생자들에겐 미안하지만 이건 놈을 기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원작 게임과는 다르게 선빵으로 보스전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놈은 적어도 아크 데몬급으로 강하다. 생명력과 방어력은 그놈 보다 우위니까 어떻게든 기습을 성공해야 돼.’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머릿속에서 정리한 작전을 꺼내놓았다.

보스방 안으로 진입하며 속삭이듯 이야기하자 일행들은 다들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곧 그들의 시선은 한순간 린크에게 모였고 다시금 내 쪽으로 돌아왔다.

“……정말 그래야겠어, 사부?”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다나와 유미가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들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이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난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며 린크를 직시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제한 시간 안에 다리를 못 부숴. 유미 주술이 효과적이긴 해도 화력 자체는 부족하잖아.”

“그래도…….”

“린크가 나서지 않으면 오히려 너희들 중 하나가 크게 다칠 거야. 린크, 그래도 괜찮겠어?”

내 질문에 린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결연한 눈빛으로 즉답했다.

“괜찮아요. 제가 잘 해볼게요.”

“하지만 린크……!”

“선생님 말대로야. 여기선 내가 나서는 게 제일 나아. 그리고 우린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이 없잖아.”

린크의 시선이 아라크네에게로 향한다. 놈은 벌써 두 번째 희생자를 빨아먹고 있었다.

[크기이이익!!]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비명 소리가 들렸으나 어딘가 달랐다. 다행히도 이번에 잡아먹은 건 고블린인 모양이다.

이다음이 요르나가 될지, 아니면 또 다른 희생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요르나를 좋아하는 린크는 어떻게든 이를 막고 싶을 것이다.

“선생님.”

“응?”

“밖에 나가면 꼭 보답할게요. 도와주신 거나 가르쳐주신 거…… 그 외에도 이것저것 전부 다요.”

마치 죽을 것처럼 말하는 린크를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꼭 만화나 게임 보면 저런 대사 치는 놈들 먼저 죽는단 말이다.

나는 쓸데없이 플래그 꽂는 린크의 머리를 마구 헤집어줬다.

“서, 선생님?”

“그 말 꼭 지켜. 너무 무리하지 말고.”

비장하기만 하던 표정에 어렴풋한 미소가 걸렸다. 곧 린크는 힘차게 대답하며 검을 들어올렸다.

“네……!!”

나도, 일행들도 마음의 준비는 충분히 했다.

이제 본격적인 보스전을 시작할 때다.

“좋아 얘들아. 첫 레이드, 깔끔하게 성공해보자고.”

-

[키리리리리릭.]

투욱!

또다시 말라붙은 고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고작 몇 분 만에 두 번째 고치를 비운 아라크네는 세 번째를 고르기 시작했다.

이번엔 어떤 걸로 먹어 볼까. 큰 걸로? 아니면 좀 작은 거?

마치 어린아이가 과자를 고르는 것처럼 고치를 하나하나 건드리던 아라크네. 놈에게 돌연 재앙이 닥쳐왔다.

“바람의……!!”

[키리릭?]

난데없이 느껴진 인기척. 침입자의 존재를 깨달은 아라크네는 몸을 돌려 소리가 난 곳을 확인했다.

감히 어떤 놈이 내 침실 겸 식당에 발을 들인 게냐.

놈에게선 그런 기색이 뿜어져 나왔다. 자신을 방해한 게 누구든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명백한 살의였다.

하지만 그렇게 침입자를 인식한 시점에서 놈은 너무 늦었다.

검을 위로 치켜든 린크가 당장이라도 열공의 한 획을 쏘려 했기 때문이다.

“상처어어어!!”

파지지지지지직!!

[키기이이이이익?!!]

직선으로 날아간 토네이도가 아라크네를 집어삼켰다.

놈은 여기저기서 터지는 번갯불과 칼날 같은 돌풍에 무척이나 괴로워했다. 전차 같은 몸이 순간 휘청거리더니 전신이 그을리고 갑각이 부서졌다.

원작 게임과 같은 방식이었다면 이런 공격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 보스전이 시작되자마자 아라크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연신 공격을 퍼부었을 테니까.

허나 게임 세계에선 놈이 식사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고 꽤나 큰 빈틈을 보여줬다.

덕분에 우리는 가장 강력한 스킬로 선빵을 먹일 수 있었다.

“잘 했어 린크! 유미야, 이제 네 차례야!”

“네 스승님……!”

열공의 한 획에 직격당한 아라크네였지만 놈은 여전히 두 다리로 서 있었다.

과연 대형 몬스터답게 무식하기 그지없는 인내력이었다. 인내력이 무려 500이나 되는 놈이어서 열공의 한 획만으론 다운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격이 명중한 덕분에 한순간이나마 놈의 움직임을 막을 수 있었다. 지금의 놈은 크기만 오질라게 큰 샌드백에 불과하다.

“부탁이야……! 저 거미 다리를 부서줘!”

스르르으으윽!!

유미의 간절한 외침과 함께 무령에서부터 검은색 물체가 날아갔다.

당연하게도 검은 물체의 정체는 원귀였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한 마리만 나온 게 아니라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쇄도한 것이다.

[키리이이이익!!]

카각! 카가가가각!!

시커먼 안개처럼 생긴 귀신들이 아라크네에게 달라붙었다.

놈들은 왼쪽 다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했고 곧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세 마리의 원귀가 달라붙은 덕분에 아라크네는 초당 200가량의 피해를 받을 것이다. 인내력 또한 지속적으로 감소하겠지.

더군다나 저렇게 한 쪽다리만 공격하면 인내력이 남아 있어도 기동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열공의 한 획에 이어 원귀들의 협공까지. 놈은 갑작스럽게 떨어진 날벼락에 정신을 못 차렸다.

[키기이이익! 끼케에에에엑!!]

얼마 안 있어 아라크네가 괴성을 내질렀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놈은 원귀들을 뿌리치며 어떻게든 린크를 향해 달려가려 했다. 어그로 시스템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적을 우선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한 많은 원혼들아, 편히 눈 감지 못하고 수면 위로 떠오른 영혼들아……! 이리 와서 데려가라, 물밑까지 끌고 가 동포로 삼아라……!”

첨벙! 첨벙! 첨벙!

물론 유미가 이를 가만 두지 않았다. 그녀는 빠르게 물귀신을 영창하여 아라크네의 발밑에 깔았다.

[으어어어어어!!]

수많은 물귀신이 아라크네의 다리를 붙잡았고 놈의 이동 속도 또한 현저히 감소했다. 당장은 기동력을 살려 이리저리 뛰어다니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 틈을 타 아라크네를 향해 달려들었다. 놈이 움직이지 못할 때 최대한 피해를 누적시키기 위해서였다.

허나 놈도 바보는 아니었다. 멀쩡히 당해주지 않겠다는 듯이 입에서 무언가를 뿜어낸 것이었다.

[촤아아아악!!]

“……?!”

그것은 새하얀 거미줄이었다. 지주귀 길쌈꾼이 사용했던 것과 비슷했으나 생긴 게 마치 사슬과 같았다.

경도도 효과도 길쌈꾼의 거미줄 보다 훨씬 상위 호환인 능력이다. 이를 본 나는 재빨리 노선을 변경하여 거미줄 사슬을 검으로 쳐냈다.

티이잉!!

정확한 타이밍에 공격을 가하자 거미줄이 이상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거미줄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단단했으며 동시에 묵직한 일격이었다. 가까스로 유미 일행을 보호하는데 성공한 나는 일행들에게 채근했다.

“내가 최대한 어그로 끌어볼 테니까 어서 달려! 절대 멈추면 안 돼! 유미 너는 조준이 느려도 괜찮으니까 명중시키는 데만 집중하고!”

“네, 네……!”

“알겠어요, 다키님! 유미 쟝! 어서 업히세욧!”

지시를 내리자마자 일행들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다나와 나나가 유미를 업고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원귀를 붙이지 않은 오른쪽 다리를 노리려는 것이다.

“린크, 내가 한 말 기억하지?”

일행들이 이동하는 것을 보며 나는 린크에게 말했다. 그에 린크도 무기를 움켜쥐면서 말했다.

“물론이에요 선생님. 언제든지 말씀만 하세요.”

그에게 맡겼던 폭풍의 숏소드는 끝내 기력을 잃고 금이 갔다. 번개와도 같은 청록색 빛도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이걸로 열공의 한 획은 더 이상 못 쓴다. 하지만 상관없다. 계획대로 된다면 그보다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으니까.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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