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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20화 (1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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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한 자의 둥지

“일단 이번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다리를 공격하는 거야.”

“다리요?”

“그래, 이쯤 되면 다들 눈치 챘을 텐데, 여기 보스는 엄청나게 큰 거미거든.”

수많은 통솔하는 거대한 여왕 거미.

판타지 작품이라면 열이면 여덟 정도 등장하는 전형적인 클리셰다. 이 던전의 보스 역시 그러한 클리셰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알겠다! 커다란 거미가 나중에 허물 벗고 엄청 야한 거미 언니로 바뀌는 거죠?! 다 알아요!”

또 다시 이상성욕에 사로잡혔는지 나나가 내 말을 끊었다. 기대감에 가득 찬 채 말하는 그녀였지만 나는 이번에도 단호히 부정했다.

“그런 기믹은 안 나오니까 설명에나 집중해. 아무튼 그 다리 부분 공략 말인데.”

“힝구…….”

시무룩해가는 나나를 뒤로 하며 나는 일행들과 모퉁이 한 곳에 멈춰 섰다.

바로 이 앞이 보스방이다. 원작 게임이었다면 보스방 코앞까지 가도 큰 문제가 없겠지만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 일단은 조심하기로 했다.

게임하고 다르게 진입하지 않았더라도 먼저 공격해올 수 있으니까.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나는 설명을 이어갔다.

“다리를 지속적으로 공격하면 외골격이 부서질 거야. 그러면 보스는 자신이 가진 능력들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게 돼. 훨씬 쉽게 잡을 수 있는 거지.”

다용도 나이프를 꺼내서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적당히 커다란 거미 모양을 그린 후 여덟 개의 다리에 동그라미를 쳐서 약점을 표시했다.

“뭐야, 결국 다리만 부수면 아무 것도 못하는 호구 새끼라는 거 아니야? 엄청 쉽네!”

약점을 파악하자마자 다나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그러면 좋겠는데, 다리를 맞추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

“응? 왜? 크기가 크니까 작은 놈들 보단 굼뜰 거 아니야. 맞추기도 쉽고.”

“그렇긴 하지. 대신에 보폭이 넓잖아.”

내 반론에 다나는 순간 ‘아’ 하면서 탄식했다. 차마 그 생각은 못한 모양이었다.

“어휴 빡대가리. 그렇게 당연한 것도 생각 못해요?”

“시, 시끄러워! 경험이 없으니까 놓칠 수도 있는 거지 뭐!”

나나의 힐난에 다나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본인도 스스로가 얼마나 미숙했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그 모습이 은근 귀여워서 좀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현 상황에 집중했다.

“아무튼 놈의 다리를 노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우리가 공격하면 놈도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근딜들이 아무리 뛰어다녀봤자 헛수고라 보면 돼.”

“선생님의 마검으로 어떻게 안 될까요? 그 많은 거미도 한 번에 쓸어버렸으니까 엄청 큰 거미한테도 잘 통할 거 같은데요.”

린크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다나 보단 좀 더 머리를 굴린 듯했지만 이 역시 정답은 아니었다.

“열공의 한 획은 준비도 오래 걸리고 도중에 공격 받을 가능성도 높아서 위험해. 애당초 따로 쓸 곳도 있어.”

“그럼 남은 건…….”

이런저런 방법이 막히다 보니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레 유미에게 모였다.

“저, 저요?”

갑자기 시선이 집중되자 유미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내 쪽을 바라봤고 나는 린크의 의견에 긍정했다.

“맞아, 우리 중에서 제대로 다리를 타격할 수 있는 사람은 유미뿐이야. 그놈 다리는 주문 공격에 약하기도 하거든.”

근딜들이 부위 파괴가 힘든 이유는 비단 보스의 기동성 때문만이 아니다.

지주귀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곳 몬스터들의 방어력은 상당하다.

그 중 정점인 보스 또한 굉장히 튼튼하기에 평범한 근접 공격으론 한 세월이 걸려도 외골격을 못 부수는 것이다.

허나 주술은 다르다. 보스의 방어력은 물리적인 공격만을 막아낼 수 있기에 유미의 주술은 놈의 방어력을 무시하고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사거리가 짧다곤 하지만 근딜들의 공격 보단 훨씬 기니 이동하는 놈을 맞추기도 용이할 거다.

“하, 하지만 저는 이동 영창을 쓸 수 없는걸요……. 조금만 멀어져도 원귀 사거리에 닿지 않아서 빗맞을 거예요…….”

도움이 된다는 말에 순간 환희한 유미였으나 곧 그녀의 얼굴에는 의기소침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동 영창. 주문 사용자들의 공용 스킬 중 하나이며 상송이 사용했던 고속 영창처럼 주문 사용자라면 누구나 꼭 찍어야 하는 필수 스킬이다.

말 그대로 이동하면서 주문을 영창하는 스킬로 어느 상황에서나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 단점이 있다면 요구 스탯이 꽤 높다는 거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 내가 어그로 끌면서 최대한 잘 맞도록 유도할 테니까.”

“그러면 스승님이 위험해지시잖아요……! 스승님은 린크처럼 탱커도 아닌데…….”

유미는 내 의견이 썩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지금까지 최전선에서 싸워온 나지만 확실히 근딜이 탱커 보다 앞에서 싸우는 건 기형적이다.

방어 수단을 갖춘 탱커와 다르게 한 번만 잘못 맞으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린크에게 탱을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린크가 아무리 노력해 봐도 이번 보스를 상대로 버티긴 어려울 거다.

무리하게 맡겼다간 피를 보게 된다. 어차피 난 넥타르도 있어서 한두 대 정도는 감수할 수도 있다.

그리 생각하여 내가 탱킹을 맡기로 했는데, 나나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다키님, 우리가 그냥 윾미 쟝 태우고 뛰면 그게 이동 영창 아니에요?”

“뭐? 야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어처구니없는 마음으로 반박하려 했지만 나는 차마 말을 마칠 수 없었다.

‘어? 그러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이동 영창을 배우지 않은 주문 사용자는 주문을 영창할 때 반드시 제 자리에 멈춰 있어야 한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주문 사용자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다. 반대로 주문 사용자를 태운 무언가가 움직이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어때요? 다시 생각해보니 좋은 아이디어죠?”

벌써 내 마음을 읽었는지 나나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차마 반론하지 못하고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확실히 괜찮은 방법이네. 유미는 가벼우니까 나나가 아니고서야 들고 뛰기도 편할 테고.”

“그래요! 아예 다 같이 업으면 기동성도 훨씬 높아질 거라고요!”

“다 같이 업어? 어떻게?”

좀 어이없는 이야기긴 했지만 지금으로선 나나가 제시한 의견이 가장 합리적인 듯했다.

나를 포함한 일행 모두는 나나의 말에 집중했고, 곧 나나는 몸짓발짓을 해가면서 설명했다.

“그거야 관짝소년단처럼 어깨에 짊어지면 되죠! 다들 제가 시키는 대로 해보세요! 아주 안정적인 자세가 나올 거예요!”

설명하던 나나가 우리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반론의 여지가 없던 린크와 다나는 나나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고 유미 또한 멋쩍게 그녀의 지시를 따랐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다소 묘한 자세로 유미를 짊어지게 됐다.

나와 나나, 린크, 다나가 유미의 허벅지를 어깨에 짊어졌고 유미는 그 위에서 의자에 앉듯이 편한 자세를 취한 것이다.

당장이라도 귀에 익은 BGM이 나올 것 같은 자세였으나 확실히 안정적이긴 했다.

내 키가 유독 커서 처음엔 많이 불편했지만 자세를 좀 숙이니까 꽤 괜찮은 자세가 나왔다.

“이거 생각보다 괜찮네.”

“그러게. 무게가 분담돼서 무겁지도 않고, 유미가 떨어질 일도 없겠어.”

다나와 린크도 이 자세가 마음에 든 듯했다.

가장 큰 장점은 역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는 부담이 적다는 것이었다. 유미가 아무리 가볍다고 해도 50킬로그램 정도는 나갈 테니까.

졸지에 인력거꾼이 된 기분을 느끼며 호흡을 맞출 무렵이었다.

“후욱, 후우욱……!”

“히이잇?!”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거친 숨소리에 유미가 흠칫 놀라 비명을 질렀고 나와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나나 쪽을 바라보았다.

당연하게도 변태 같은 소리의 주인공은 나나였다. 허나 그녀는 비단 숨소리만 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유미의 허벅지에 코를 박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너 지금 뭐해?!”

문란하기 그지없는 추태에 나는 경악을 터뜨렸다. 다그치듯이 말한 나였지만 나나는 전혀 그만둘 기미가 없었다.

“뭐하긴요! 유미 쟝의 허벅지 향기를 만끽하고 있는 중이죠! 아주 그냥 개꿀맛이네요!”

“완전 성추행이잖아! 당장 그만 둬!”

“헤헤헤, 이 마약 같은 걸 끊을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스읍하! 스읍하!”

연이은 제지에도 나나의 행동은 더욱 대범해질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난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녀석, 단순히 유미 허벅지 냄새가 맡고 싶어서 이런 자세를 고안한 걸 거다. 이 와중에도 본인의 뒤틀린 성욕을 채우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통통하고 향기로운 허벅지라니! 목 졸려 죽어도 행복사일 거 같네요!”

“제, 제발 그만해주세요……! 이, 이상은 너무 부끄럽…… 흐으읏……?!”

참다못한 유미가 큰 소리로 항의했다. 그와 더불어 마구 몸부림쳐서 자세가 점점 불안정해졌다.

설마하니 나나가 이렇게까지 개변태일 줄은 몰랐다. 이상성욕자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대놓고 성추행까지 하다니. 이건 완전 범죄자의 영역 아닌가.

물론 그렇게 생각한 나도 유미의 허벅지에선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나의 말을 들어서일까. 어깨 위에 걸쳐진 허벅지가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그녀의 허벅지는 보기 좋게 통통했다. 살짝만 쥐어도 손가락이 파묻힐 정도로 부드러웠으며 갈색 스타킹에 감싸여서 감촉 또한 매우 좋았다.

스타킹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살결의 향기는 잘 익은 과일처럼 달콤했다. 이 모든 게 어우러져서 나는 엄청난 흥분을 느끼게 됐다.

“이잇!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도 이런 짓은 용납할 수 없어! 정도를 지키라고!”

그때 뒤편에 있던 다나가 나나에게 소리쳤다. 잔뜩 분개한 그녀는 당장이라도 싸울 기세로 나나를 노려보았다.

그래, 가족 같은 친구들 앞에서 이러는 건 좀 아니다. 이 이상 두 사람에게 못 볼 꼴을 보일 수도 없지 않은가.

슬슬 부끄러움에 한계치를 느낀 내가 나나를 유미를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유미의 냄새는 우리들만 맡을 수 있다고! 그렇지 린크?!”

“아니 넌 또 무슨 소리야?!”

다나도 나나 못지않게 제 정신이 아닌 듯했다. 질문 받은 린크는 경악하면서 다나를 바라봤고 나 또한 귀를 의심했다.

점점 미쳐 돌아가는군. 우리는 졸지에 유미의 허벅지 소유권을 두고 다투게 됐다. 정확힌 나나와 다나가 다투고 나랑 린크는 휘말린 거지만.

“목숨 빚진 주제에 말이 많네요! 저랑 다키님 아니었으면 고블린들한테 당하고 있었을 걸요!”

“아 그래서 보석 줬잖아! 그거면 됐지 언제까지 물고 늘어질 거야!”

“제발…… 제발 그마안…….”

격렬해지는 언쟁 속에서 가장 고통 받는 건 유미였다. 미친 사람들 사이에서 허벅지 가지고 휘둘리고 있으니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리라.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녀를 보며 나는 다소 진중한 어조로 두 사람을 말렸다.

“너희들 그쯤 해둬. 유미를 들어주는 건 전투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지 허벅지 냄새 맡으려고 그러는 게 아니…….”

[키리리리리릭…….]

한창 일행들을 타이르던 도중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였지만 다소 거리가 있는 듯했다.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나는 귀를 쫑긋 세웠고 유미는 두 눈을 은은하게 빛냈다.

“다키님 이 소리…….”

“여, 여왕이 깨어났나 봐요……!”

우리 모두가 유미의 말에 동의했다.

이토록 살벌한 기운을 내뿜을 수 있는 건 보스뿐이다. 마치 상송과 마주했을 때와 같은 감각이 전신을 휘감는 것이었다.

“일단 다들 조용히 해…… 아직 거리가 있으니까 천천히 확인해보자.”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채 일행들과 함께 이동했다. 나나의 이상성욕으로 인해 유미는 다시 땅에 내려줬다.

그렇게 숨죽이며 보스방 앞까지 도달한 우리는 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 무슨 놈의 거미가…….”

“존나 커……!”

보스방은 거대한 공동이었다. 곳곳에 거미줄이 쳐져 있고 천장이 높은 돔 형태의 방이었는데, 거대한 거미가 천장을 타고 지면으로 기어 내려온 것이었다.

일행들 말대로 놈은 무지막지하게 컸다. 높이만 약 5미터, 길이는 12미터쯤 되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본 새끼 거미들도 상당히 크다 싶었는데 저놈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였다.

‘게임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큰 거 같네…….’

그 거체에 나 역시 숨을 집어삼켰다. 모니터 너머로 봤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박력이 느껴졌다.

갑각에 뒤덮인 몸은 마치 전차를 보는 것 같았으며 기다란 턱에서 독극물이 흘러내리는 광경은 공포 영화 저리 가라할 정도로 무서웠다.

“저놈이 이 던전의 보스야…… 내 예상이 맞으면 아마 아라크네란 이름이겠지.”

불경한 자 아라크네.

여신 아테나에게 도전했다가 저주를 받은 당대 최고의 길쌈꾼.

과거엔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저 추악한 거미 괴물일 뿐이다. 우리가 마주친 모든 거미들의 어미이자 고블린들이 추앙하는 반신이기도 하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최대한 오늘부터 2연참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다시 연참하는 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이후 스토리 좀 더 보강하면서 최대한 빨리 연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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