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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한 자의 둥지
기사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역시나 유미였다.
“저, 정말요?! 저, 저희들도 입단할 가능성이 있는 건가요?!”
“그야 물론이죠. 조금 전에 보여주셨던 연계와 상황 대처 능력은 클랜 내에서도 아주 높게 평가될 겁니다. 저희로선 영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꺄아아……!”
동경하던 클랜에 입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니 유미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평상시에는 그렇게 조용하던 애가 행복한 비명을 지르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었다.
롤을 좋아하는 중학생이 유명 프로 게임단에게 러브콜을 받으면 저런 표정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유미의 반응은 무척이나 순수했다.
“하, 하지만 저희는 아이언 등급 밖에 안 됐는데 괜찮을까요? 서천 클랜의 입단 하한선은 실버 등급이라고 들었는데…….”
그녀 보다 더 현실적인 린크는 이 제안 자체에 의문을 느낀 듯했다. 그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네자 기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세간에 퍼진 인식입니다. 저희는 가능성이 있는 모험가들을 등급에 상관하지 않고 영입하죠. 당장은 아이언이라 할지라도 언제 실버, 골드로 오를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렇게 이야기한 기사는 슬쩍 내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본인 딴에는 나름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쪽에선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유미 일행을 미끼로 나까지 끌어들일 생각이겠지.’
유미 일행의 연계가 훌륭하긴 했지만 아직 미숙한 부분이 많다. 솔직히 상황 대처 능력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온갖 인재들이 모여 있는 대형 클랜에서 이 정도 실력의 뉴비들을 영입할 이유는 굳이 없으리라.
그들의 목적은 어디까지 나다. 당장은 유미나 린크, 다나가 내 일행처럼 보이니까 그들을 끌어들이면 나도 자연스레 입단할 것이라 생각하는 거겠지.
‘그보다 클랜 영입이라…….’
기사의 속내를 읽으며 대형 클랜에 입단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솔직히 전혀 구미가 당기지 않는 이야기다. 클랜이란 게 정확히 뭘 하는 집단인지도 모르겠고 나한테 구체적으로 어떤 이득이 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내 1순위 목적은 모든 재앙신들을 토벌하고 황혼으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것. 그 다음이 온갖 미녀들이랑 행복한 이세계 생활을 보내는 것이다.
그걸 위해선 굳이 클랜의 도움을 빌려야할 것 같지는 않았다.
대형 클랜이라면 나한테 온갖 지원을 해줄 수 있겠다만 난 그런 거 없어도 혼자만의 힘으로 깰 자신이 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클랜에 가입하면 비단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내 능력을 온갖 일에 제공해야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당초의 목적을 이루기 힘들질 수도 있다.
“참 나, 보상을 달라니까 클랜 영입 이 지랄. 참도 들어가고 싶겠네요.”
유미가 한창 좋아하고 있을 때 나나가 구시렁거렸다.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못마땅한 기색을 어김없이 내비친 것이었다.
“아무튼 오늘 저희를 도우신 걸 절대 후회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일단 저희 소개부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이야기하는 기사. 악의는 없어 보였지만 타산적인 기색은 감돌고 있었다. 기사뿐만 아니라 여사제도 내게 묘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마치 이 사람은 꼭 데려가야 한다는 눈빛. 어떻게든 이 자를 우리를 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심정이 표정 위로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자아도취에 빠져서 착각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계속 흘깃흘깃 쳐다보는 걸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듯했다.
“……잠깐만요 떡대. 조용히 좀 해봐요.”
“예?”
기사가 호전된 클랜원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려 할 때였다.
갑작스레 나나가 귀를 쫑긋거렸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어느 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이상한 소리 나요. 확인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곳은 반쯤 탄 거미들이 모여 있는 시체 더미였다. 겉보기엔 다들 겉바속촉하게 잘 익은 것 같지만 살아남은 놈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칼을 뽑아들며 말했다.
“린크가 방패 들고 앞장 서. 다른 사람들은 뒤로 빠지고.”
“네 선생님.”
척척 알아들은 린크가 방패를 세우며 시체 더미로 다가갔다. 그 뒤를 내가 바짝 따라붙으면서 우리는 거미들의 사체를 칼로 들쑤셨다.
새우 굽는 냄새가 진동하는 사체 더미를 쑤시길 수 번. 곧 익숙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끼리이이이익!!]
“……!”
거미들의 사체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온몸이 그을린 채 나타난 그것은 지주귀 길쌈꾼이었다.
열공의 한 획을 맞고 죽은 줄 알았는데 가까스로 살아남은 모양이다. 특유의 민첩한 몸놀림을 살려 직격만은 피한 거겠지.
허나 목숨만 붙어 있을 뿐 사실상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놈의 양다리는 깔끔하게 잘려나가 있었으며 팔은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다. 배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서 쉴 새 없이 피가 뿜어져 나오기도 했다.
길쌈꾼을 보면서 린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멀쩡히 살아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이 상태라면 공격도 제대로 못 하겠네요.”
“그러게…… 진짜 깜짝 놀랐어…….”
다나 또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맞장구쳤다.
다른 이들도 지주귀의 얼굴을 보고 적잖게 당황한 듯했다. 특히 서천 클랜 사람들은 PTSD라도 도진 것처럼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 빌어 처먹을 새끼……! 네놈들 때문에……! 네놈들 때문에……!”
물론 그 중에선 공포가 아닌 분노를 드러내는 이도 있었다.
무슨 대전 게임 캐릭터 마냥 생긴 장신의 남성이 지주귀를 향해 달려왔다. 쌍검을 사용하는 검사였는데 그의 얼굴엔 증오와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거미들한테 동료라도 잃은 건가? 생각해보니 초입에서 만났던 남자가 이들의 동료일지도 모르겠다.
“죽기 전에 당한 만큼 갚아주마……!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해주겠어……!!”
급기야 그는 칼을 들어서 지주귀를 난도질하려 했다.
그의 증오심을 존중한 나는 좋을 대로 하게 놔뒀다. 다 죽어가는 몬스터를 고문한다고 해서 우리가 피해보는 것도 없으니 말이다.
이걸로 조금이라도 위안이 된다면 나쁠 거 없겠지. 그리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리려 할 때였다.
[니 쿨라 아훈 카룬 카……! 키리리리릭! 즈게가 브쿨 투 카, 즈 칼루!]
지주귀가 이상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너무 기괴해서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고블린의 언어 같았다.
살려달라고 비는 건가? 아니면 저주라도 퍼붓나?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역시 알 바 없는 이야기였다. 곧 죽을 놈이 뭐라고 하던 별로 영양가 있는 얘기는 아니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여왕……? 공물……?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응?”
난데없이 린크가 질문을 던졌다. 마치 지주귀의 말을 이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린크에게 시선을 모았다. 그 중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린크 너, 설마 저 놈 말 알아듣는 거야?”
“아, 네…… 그린 스킨들의 언어도 교수님한테 배웠거든요. 간단한 단어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어요.”
그린 스킨이란 고블린, 트롤, 오크 같은 피부가 녹색인 인간형 괴물들의 총칭이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만큼 언어 체계도 비슷하며 기본적인 틀만 이해하면 말을 알아듣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한다.
“일단 계속 번역해볼게요……. 요르나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우리에게 이야기한 뒤 린크는 이후로도 지주귀의 말을 경청했다.
터무니없는 광경에 쌍검사는 복수할 것도 까맣게 잊고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행을 바라보았다.
약 1분간의 대화 끝에 린크는 지주귀가 한 말들을 대략적으로 해석했다.
“놈이 한 말은 대충 이래요. 여왕에게 바칠 공물을 가로채다니, 네놈들은 끔찍하게 죽을 거다. 곧 다가올 만찬의 시간 때 여왕께서 너희를 포식하리라.”
“이야…… 진짜 간단한 말만 해석할 수 있는 거 맞아요? 완전 현지인 수준인데?”
막힘없는 해석에 나나가 감탄을 터뜨렸다. 나 역시 의외인 모습을 보며 흥미로운 시선을 보냈다.
가디스 던전에서 언어 관련 스킬을 터득하려면 지성이 15는 넘어서야 한다. 즉 린크는 최소 15의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의 본업이 전사라는 걸 감안하면 이는 굉장히 높은 수치다. 당장 마법사로 전향하거나 둘 다 병행하여 마법 전사가 되어도 될 수준인 것이다.
“놈이 한 말을 제가 적당히 의역한 거예요. 고블린들의 언어엔 문장이란 게 딱히 없거든요.”
“그래도 쟤가 한 말은 다 알아들은 거잖아요. 어디 가서 부모님이 고블린이라 해도 믿겠네요!”
“그거 칭찬이에요, 욕이에요……?”
패드립에 준하는 발언에 린크가 곤란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었다. 나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신나서 말을 이었다.
“좋아요! 이제부터 네 이름은 파파고예요!”
“그게 뭔데요……?”
“훌륭한 번역가의 이름을 따온 거예요~ 영광으로 아세요.”
졸지에 번역기가 되어버린 린크. 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내게 의논을 해왔다.
“아무래도 거미들은 붙잡힌 사람을 그 여왕이란 개체한테 바쳤나 봐요. 요르나도 여왕의 거처에 있지 않을까요?”
“그럴싸하네. 이놈들이 그렇게 챙길 놈은 하나 밖에 없으니까.”
여왕은 틀림없이 이 던전의 보스를 가리키는 말일 거다. 그렇다는 것은 곧 지금까지 붙잡혀온 희생자들이 전부 보스방에 있다는 뜻이겠지.
“만찬의 때 먹힐 거라고 했으니까…… 요르나가 살아있을 가능성도 높지 않을까요……?”
유미가 슬쩍 이야기했다. 그녀의 표정 위로는 희망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다나와 린크도 그렇게 판단했는지 동조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게! 아직 밥시간이 아니면 요르나도 분명 살아 있을 거야!”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어…… 아직 때가 안 됐을 뿐이지 지금 바로 그 시간이 올 수도 있는 거잖아.”
역시나 린크는 냉철했다. 나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기에 다소 재촉하는 어투로 일행들에게 말했다.
“린크 말이 맞아. 지금 당장 여왕이 너희 친구를 뜯어먹어도 이상하지 않지. 아무래도 서둘러야겠어.”
“네……!”
“최대한 빨리 가죠……!”
내 말을 들은 세 사람은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들의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올라 있었다.
지금까지 그들은 알게 모르게 요르나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우고 있었을 거다.
동료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애써 부정하고 있었지만 이성이 계속해서 현실적인 결말을 이야기했으리라.
허나 조금 전 지주귀의 발언으로 요르나가 생존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지금 당장 보스방까지 달려가면 요르나를 구할 수 있다. 그러한 생각이 세 사람의 투지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
“저희는 이대로 보스방까지 가겠습니다. 여러분은 최대한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평원의 거미들은 저희가 다 정리했으니 그쪽으로 가면 안전할 거예요.”
“가, 감사합니다…… 하나서부터 열까지 도움만 받는군요…….”
“감사 인사는 나중에 제대로 받을게요. 율리아나에서 다시 만나죠.”
그 말을 끝으로 서천 클랜 사람들과도 헤어졌다. 서로 갈라지는 동안 그들은 내게 동경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 많은 거미들을 어떻게……?! 라거나 저 사람 진짜 정체가 뭐야……? 같은 말들을 끊임없이 꺼내는 것이었다.
나에 대한 평가가 갈수록 높아지니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솔직히 지금도 입 꼬리가 자꾸 위로 치솟으려 하고 있다.
아무리 말단이라지만 나름 대형 클랜의 일원들인데 이 기회로 나 엄청 유명해지는 거 아니야?
저 사람이 서천 클랜 멤버들을 구한 사람이라느니, 대형 클랜도 고전한 던전을 클리어한 실력자라느니 하면서 말이다.
벌써부터 기대가 샘솟는다. 너무 나 혼자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꼭 망상으로 치부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게 내 데뷔전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여왕 거미도 최대한 멋있게 쓰러뜨리고 요르나란 친구도 확실하게 구해내야겠다. 그 다음엔 모험가 길드에서 모두에게 알리는 거지.
경력 있는 신입 감다키의 존재를 말이다.
“다키님……? 아까부터 왜 기분 나쁘게 웃고 그러세요……?”
“으, 응?”
빠른 발걸음으로 보스방을 향해 가고 있을 때 나나가 불쾌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에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그보다 슬슬 보스방인데 작전 회의나 좀 하자.”
표정 관리에 들어가면서 일행들에게 말했다.
보스방에 진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조금 전의 전투로 이 근방에 있는 몬스터들은 대부분 처치했을 테니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무작정 들이닥칠 수는 없는 노릇.
이게 솔로 플레이였다면 나 혼자 잘 피하고 잘 때리면 그만이지만 지금은 일행과 파티를 맺은 상태다.
그러니 그에 맞는 전략이 필요하다. 보스방으로 향하면서 난 일행들에게 대략적인 공략법을 설명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