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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한 자의 둥지
[키리익……?!]
심지를 활활 태우며 날아가는 화염병. 그것을 본 지주귀 전사는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새끼 거미들이 그랬듯이 놈들도 본능적으로 불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키리이이익!]
[키뤼익!]
그때 길쌈꾼 두 마리가 거미줄을 뿜었다. 동료가 당하는 걸 두고 보지 않겠다는 듯이 화염병을 막으려 한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예상했다. 적이 양쪽에 떡하니 있는데 설마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았겠는가.
“걱정 마라, 너희들 것도 준비해뒀으니까!”
쐐애액!!
놈들의 거미줄이 길게 뻗어나가기 전에 투척 나이프를 던졌다.
평범한 나이프는 아니었다. 기름을 잔뜩 바르고 불까지 붙여 놓은 화염 나이프였던 것이다.
[뀌케에에에에엑!!]
[크리야아아아악?!]
푸후욱!
화르르르륵!!
불붙은 나이프가 길쌈꾼들의 안면에 정확히 내다 꽂혔다.
투척 나이프에 불을 붙인 정도라 큰 데미지를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놈들을 잠시 무력화시키기엔 충분했다.
더군다나 놈들이 괴로워한 덕분에 처음에 던진 화염병도 명중할 수 있었다.
[키뤼아아아아악!!]
화르으으윽!
병이 깨지면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린크를 공격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던 전사의 몸이 화염에 뒤덮였다.
곧 놈은 고통어린 비명을 내지르며 이리저리 날뛰었다.
동료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했지만 그 모습을 본 다른 놈은 자신에게도 불이 옮겨 붙을까봐 멀찍이 물러났다.
지주귀들은 정말 성가신 적이다.
항상 거미들과 함께 등장하는 걸로도 모자라 생명력도 높고 방어력도 상당하다.
거기에 전사들은 가드 게이지를 무려 1000이나 올려주는 특수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
초보자들은 절대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은 악랄하기 그지없는 몬스터들. 제작진의 악의가 느껴지는 스펙이었지만 강력한 스펙을 갖춘 만큼 약점도 명확하다.
화염 속성만 제대로 갖춰주면 놈들은 그냥 이족 보행하는 거미 새끼들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넌 잠깐 구르고 있어!”
기어이 바닥에 쓰러져서 데굴데굴 구르는 지주귀. 나는 놈을 지나치고 옆에 있는 또 다른 전사에게 달려들었다.
[크뤽?!]
불길에 겁을 집어먹고 있던 놈은 내가 휘두른 검에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었다.
한 쪽 손이 날아가 방패 밖에 남지 않았으니 방어 외엔 대응할 수단이 없었던 것이다.
카아앙!!
맑은 쇳소리와 함께 내 공격이 튕겨나갔다. 정말이지 엄청난 반응 속도다.
나름 기습한다고 했는데 그걸 막다니. 역시 예측샷을 하지 않으면 뚫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 가드 게이지가 1100이나 돼서 몇 번 공격하는 정도론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비록 다 죽어가는 놈이지만 방패를 드니 거대한 요새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방패를 쓴 건 놈의 실책이다. 애당초 내 공격이 놈의 방패를 뚫지 못할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놈이 나에게 집중하는 것. 나한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시점에서 놈은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다.
“흐으읍!”
[……?!]
지주귀의 등 뒤에서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지주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고 곧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어느새 놈의 뒤로 돌아간 린크가 화염병을 던진 것이었다.
화르르르륵!!
[키기야아아아악!!]
또 다시 불길이 치솟았다. 등을 훤히 보여준 지주귀 전사는 그대로 불길에 휩싸였으며 거센 화염은 놈의 몸을 눈 깜짝할 사이에 뒤덮었다.
[키아악! 카아악! 카아아아아악!]
화염병에 직격당한 놈은 방패까지 집어던지면서 미친 듯이 날뛰었다. 정말 어지간히도 고통스러운가보다.
“기름도 안 부었는데 이렇게 잘 타다니…….”
“그럴 만하지. 생긴 건 고블린이랑 비슷해도 몸은 거미에 가까우니까.”
신기해하는 린크에게 나름대로 설명을 해줬다.
실제로 지주귀의 몸체는 포유류 보단 벌레에 가까웠다. 불 앞에선 살아있는 장작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아무튼 지금이 기회야! 이 틈에 전사들 먼저 끝장내자고!”
“네 선생님! 흐아아아압!!”
놈들이 괴로워하는 틈을 타 린크에게 지시했다. 그에 린크는 힘차게 대답하며 날 따랐고 우리는 불타는 전사들에게 협공을 퍼부었다.
촤악! 촤작! 촤좌자자작!
[크히이이이이익!!]
수차례의 검격이 전사들을 베어 넘겼다. 몸이 불타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대항해 보려 한 놈들이었지만 그래봤자 허튼 발버둥이었다.
애당초 몸부림치느라 칼도 방패도 다 내던진 놈들인데 뭘 할 수 있겠는가?
전사들은 내 공격은 물론 린크의 공격조차 피하거나 막지 못한 채 서서히 썰려갔다.
“잘 가라!”
촤하아아악!!
놈들이 린크의 검을 맞고 발악하는 사이 빠르게 횡 베기를 가했다.
큰 횡을 그리며 날아든 검선은 놈들의 목을 깔끔하게 절단했다. 두 마리의 전사들은 끝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동시에 죽음에 이르렀다.
“하아, 하아……! 해냈어요, 선생님! 저희가 쓰러뜨렸어요!”
“잘 했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계속 집중해!”
참수당하는 전사들을 보며 린크가 쾌재를 불렀다. 허나 길쌈꾼들이 둘이나 남아 있다.
마침 나이프를 뽑아낸 놈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채 우리들에게 달려들었다.
[키 칼루루루루루룩!!]
촤아악! 촤악! 촤아악!
날카로운 손톱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길쌈꾼. 비록 무기를 착용하지 않았지만 공격이 매서운 건 전사들과 별 반 다를 바 없었다.
“……?! 선생님 한 놈이 애들한테!”
더 큰 문제는 두 놈 중 하나가 후열로 달려갔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도 머리는 돌아가는지 귀찮은 적부터 처리하려 한 것이다.
역시 신력을 나눠받은 놈들이라 여느 잡몹들과는 다르다.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와중에도 저 정도로 지능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건 놈들이 보스의 권속이기 때문이리라.
“괜찮아, 그래봤자 한 놈이야! 너희들! 잘 버틸 수 있지?!”
“그럼여! 맡겨만 주세요, 다키님!”
“최대한 버텨볼게요……!”
달려드는 길쌈꾼을 저지하면서 후열 멤버들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나나와 유미, 다나 세 사람은 재빨리 대형을 갖추며 달려드는 놈에게 맞섰다.
나나의 찬광, 유미의 물귀신, 그리고 다나의 리치까지 더해지면 길쌈꾼을 상대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무시무시한 몬스터라고 해도 먹힐 건 다 먹히는 놈이니까.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못 잡을 건 없다.
“잘 들어 린크! 놈의 공격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느리게 오기도 할 거야! 내가 말하는 패턴 잘 기억하고 상대해!”
“네 선생님……!”
날아드는 손톱을 튕겨내면서 린크에게 놈의 패턴을 알려줬다.
놈들의 공격은 일정하지 않다. 공격 속도 자체는 빠르지만 간혹 가다 평범한 공격 보다 한 박자 느린 엇박자 공격을 섞어 넣는 것이다.
그래서 놈들의 공격은 패링하기도 회피하기도 어렵다.
내가 여태껏 공격 패링이 아닌 방어 패링으로 대응한 이유도 위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때라고 생각한 순간 피하거나 패링하려 하면 한 박자 늦게 공격이 들어와서 그대로 맞게 된다. 괜히 패링 잘 한다고 깝치면 역으로 당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놈들 공격도 끊길 때가 있어, 그때를 노리면 돼!”
[키리리리릭!!]
우리가 여섯 번의 공격을 모두 튕겨내자 길쌈꾼이 양팔을 위로 치켜들었다. 전력을 다해 마무리 일격을 가하려는 것이었다.
양팔을 내리긋는 공격. 내가 기다리던 모션이다. 팔을 위로 치켜들어서 공격 직전엔 복부가 훤히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파지지지직!!
놈의 복부를 향해 섬격을 가했다. 청백색 번개에 에워싸인 칼날이 길쌈꾼을 배를 크게 벤 것이다.
[크기이이이익!!]
복부를 베인 길쌈꾼은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물러났다. 비단 섬격의 경직 효과 때문만은 아니었다. 놈은 눈에 띄게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지주귀의 약점은 비단 화염만이 아니다.
전신을 단단한 갑각으로 보호하고 있는 지주귀지만 유일하게 복부만은 연한 살이 드러나 있다. 저곳만은 인내력도, 방어력도 0이어서 큰 피해를 받는 것이다.
평소엔 허리를 굽히고 다녀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마무리 일격을 가할 때는 이렇게 약점이 훤히 노출된다.
아무리 밀리고 있어도 이 기회를 노리면 쉽게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
“린크! 막타는 네가 넣어!”
“……! 알겠습니다!”
물러나는 놈을 가리키며 린크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린크는 머뭇거리지 않고 있는 힘껏 달려갔다.
“으오오오옷!!”
푸후우우욱!
[켁……! 케게에에엑……!!]
내장을 쏟으며 발버둥 치던 길쌈꾼이 마구 경련했다. 린크의 브로드 소드가 놈의 상처를 정확하게 파고든 것이었다.
끝내 지주귀의 몸은 날카로운 칼날에게 관통 당했다.
린크를 죽이려고 몇 차례가 손을 움찔거린 놈이었으나 끝내 추욱 늘어지고 말았다.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이 0으로 떨어진 것이다.
“허억, 허억……!”
푸화악!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검을 뽑아드는 린크. 그에 따라 대량의 피가 뿜어져 나오며 그의 갑옷을 붉게 물들였다.
“서, 선생님……! 제가 쓰러뜨렸……!”
“확인 사살!”
촤하악!
[끼기이이익!!]
린크가 기뻐하는 사이 나는 쓰러진 놈의 목을 빠르게 내리쳤다.
그러자 길쌈꾼이 비명을 지르며 끝내 절명했다.
목이 날아가는 도중에도 놈은 한 명이라도 데려가겠다는 듯이 추악하게 몸부림쳤다. 그 광경을 본 린크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중얼거렸다.
“어, 어째서…… 분명 척추를 끊었는데…….”
“대부분의 몹들은 인간보다 생명력이 질겨. 죽였다 싶어도 확인 사살 한 번씩은 해주는 게 좋아.”
특히나 지주귀들은 죽은 척한 뒤에 플레이어들을 엿 먹이기로 악명 높은 놈들이다.
나도 초보 시절에 많이 당해봤기에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불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놈들은 그리 쉽게 죽지 않는다.
“알았으면 얼른 도와주러 가자. 좀 간당간당해 보이네.”
“네 선생님……!”
길쌈꾼의 숨통을 끊은 뒤 나와 린크는 후열을 향해 달렸다.
상당히 강력한 적이어서 조금 걱정 했는데 세 사람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잘 버텨줬다.
내가 계획한 대로 유미가 물귀신과 원귀를 사용해서 놈의 움직임을 방해했고 둔해진 길쌈꾼을 다나의 창이 견제했다.
가끔 거미줄이 날아오면 나나가 거부 주문으로 튕겨내서 다른 사람들을 보호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바로 뚫려버릴 것 같았으나 저 정도면 훌륭한 편이다. 얼핏 보기엔 그녀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
“세 사람 다 잘 했어! 이제 우리한테 맡겨!”
촤아아아악!!
파고들기로 빠르게 접근한 뒤 쾌도를 위로 올려쳤다. 우리의 접근을 눈치 챈 길쌈꾼이었지만양각을 잡힌 탓에 차마 대응하지는 못했다.
[케게엑?!]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 떠오르는 길쌈꾼. 그런 놈을 향해서 린크가 화염병을 집어던졌다.
“이거나 먹어라!!”
콰차앙!
화르르르륵!!
린크의 센스 있는 공격이 길쌈꾼에게 그대로 먹혀들었다. 놈은 공중에 뜬 채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으며 나는 떨어지는 길쌈꾼을 섬격으로 끝장냈다.
푸화아아악!!
눈앞에 붉은색 숫자가 떠오른다. 치명타가 발생함으로써 길쌈꾼은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어 지면을 나뒹굴었따.
기분 나쁘게 생긴 내장이 바닥에 길게 늘어진다. 어쩌다 보니 상송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죽여 버렸다. 이젠 이 공격이 내 페이탈리티가 된 것 같았다.
“사부! 기다리고 있었어!”
“스승님……! 린크도……!”
“어이, 어이 믿고 있었다구 젠장!”
우리의 난입에 세 사람은 무척이나 기뻐했다. 한편으론 안도하는 기색도 있었다. 길쌈꾼과의 싸움이 꽤 고된 듯했다.
무리도 아니다. 전력을 다해 싸우는 데도 길쌈꾼은 도통 죽을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녀들의 화력으론 1천이나 되는 생명력을 깎기 힘들었겠지.
[크히이이익! 키리이이익!!]
[으어어어어어!!]
[아아아아아악!!]
그 무렵 하반신을 잃은 길쌈꾼은 물귀신들에게 둘러싸여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물귀신과 함께 나타난 물웅덩이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한 길쌈꾼이었으나 놈의 발악은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끝내 놈은 다른 지주귀들처럼 싸늘한 시체가 되어 물웅덩이 속으로 가라앉았다.
“으으…… 씹극혐…….”
그 모습을 보며 나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이들도 썩 보기 좋지는 않은지 너나 할 것 없이 질색했다.
마지막 놈이 죽는 걸 본 나는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면서 일행들에게 물었다.
“다들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네, 네…… 다나가 좀 다치긴 했지만 나나 씨가 치료해주셨어요…….”
“응! 애초에 그리 큰 상처도 아니었고!”
유미가 수줍게 이야기하자 다나는 주먹을 부르쥐면서 끄덕였다. 그리곤 곧장 내게 달라붙어서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그보다 방금 전의 그건 뭐야?! 사부가 알려준 그거!”
“바람의 상처?”
“맞아 그거! 살면서 그런 건 처음 봐! 평범한 무기는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열공의 한 획이 다나에게 꽤나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모양이다. 그녀는 차마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고 이후에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걸 어디서 구했냐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게 말로만 듣던 권능 무기냐며 물었고, 본인도 비슷한 걸 얻고 싶다고 열성적으로 말했다.
그 모습이 꽤나 귀여웠지만 질문에 대한 답변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궁금한 건 천천히 알려줄게. 그전에 해야 될 일이 있잖아.”
다나에게 그렇게 말한 뒤 고개를 돌렸다. 내가 바라본 곳에는 방금 구해준 모험가들이 모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