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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한 자의 둥지
이 동굴 역시 외길은 아니다. 당장은 길이 하나뿐이지만 곧 여러 통로가 복잡하게 얽힌 미로 같은 구조가 나온다.
그런 곳에서 누군가가 몹들의 어그로를 다 끌고 갔다면 우리는 제대로 꿀 빨 수 있다.
그냥이 이들이 지나간 곳 외의 다른 길로 이동하면 전투를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왜 그러세요, 스승님……?”
내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걸 보고 유미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하다가 혈흔을 가리켰다.
“여기로 누가 지나간 것 같아. 몬스터 기척도 안 느껴지는 거 보면 그쪽으로 몰린 거 같은데.”
“듣고 보니 그러네. 여기까지 들어왔는데 습격이 한 번도 없었잖아.”
일리 있다며 맞장구치는 다나. 그녀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두운 통로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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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키가 혈흔을 발견하기 수분 전,
“하아, 하아, 하아!”
“크흐윽! 젠장할!”
“허억……! 허억……!”
다섯 명의 남녀가 다급히 동굴 안으로 급히 달려왔다.
기사와 쌍검사, 무투가가 전열을 이루고 마법사와 사제가 후열을 이룬 모험가 파티였다. 장비 수준을 보면 어느 정도 실력을 쌓은 숙련자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쫓기듯 내부로 들어온 그들은 한 차례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곤 공포감이 가득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 안 쫓아오지?! 이제 우리 안전한 거지?!”
마법사로 보이는 여성이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그녀의 동공은 수시로 떨리고 있었으며 다리도 후들거렸다. 아랫도리 또한 흥건하게 젖어 있었는데 정황상 실금을 한 것 같았다.
지적인 마법사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추태지만 누구도 그녀를 비난하거나 멸시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5명 모두가 비슷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그런 것 같아……. 전부 다른 곳으로 가버렸어…….”
“왜 이제 와서……?”
“낸들 아냐 염병…… 우리 보다 더 맛있는 먹이라도 찾았나 보지…….”
동굴 밖을 살펴봐도 거미 떼는 보이지 않았다. 그 많던 거미들은 어느 순간부터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모습은커녕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걸로 보아 당장은 안전한 듯했다. 그 사실에 안도한 다섯 명은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허나 안심할 수 있었던 건 아주 잠시 뿐이었다. 그들은 뒤늦게 파티원 중 한 명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야 잠깐만…… 페트릭은……? 페트릭 그 놈은 어디 있어……?”
“아, 아앗……!”
“설마…….”
쌍검사의 말에 일행들의 얼굴이 암담함으로 물들었다.
원래 이 파티의 총원은 6명이었다. 나머지 한 명이 바로 페트릭이라는 이름의 궁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서, 설마 뒤쳐진 거야……?!”
“안 돼…… 그러면 지금쯤 분명…….”
“누구 마지막으로 본 사람 없어……?!”
불길한 생각이 무궁무진하게 피어올랐다.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리더로 보이는 기사가 일행들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무투가가 그늘진 얼굴로 이야기했다.
“……나 봤어.”
“어떻게 됐는데? 어디서 떨어졌는지 기억 나? 봤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구하러……!”
“마지막으로 봤을 때 배가 관통 당했어…… 그건 다시 볼 것도 없이 즉사야……. 살아있을 리 없다고…….”
주먹을 부르쥐며 말하는 무투가. 그녀의 손에 장착된 권갑이 쇠 긁는 소리를 냈다.
충격적인 사실에 다섯 명의 파티원들은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어 무투가를 바라보았다.
“뭐야…… 페트릭이 죽었다고……?”
“이렇게 허무하게……?”
“젠장…… 젠장, 젠장할!!”
당황에 집어삼켜진 감정이 곧 온갖 격정으로 변모했다.
여사제는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고 쌍검사는 벽을 치면서 울분을 토했다. 마법사와 기사, 무투가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동료가 죽었다. 아무리 목숨 걸고 하는 일이라지만 수 년 동안 함께해온 동료의 죽음은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물며 그 사인이 흉측하게 생긴 거미에게 복부가 뚫린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한동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모험가들은 고개 숙인 채 침묵했다.
죽은 동료를 향한 애도 같은 건 아니었다. 다음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들의 마음을 좀먹었다.
얼마나 정적이 이어졌을까, 쌍검사가 초췌한 얼굴로 불평을 토로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고블린 소굴이라며…… 그런데 저런 거미 새끼들이 대체 왜 나오는 건데……!”
분노에 휩싸인 채 바닥을 내리찍는 쌍검사. 그의 분노는 비단 거미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동료가 죽는 와중에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당시 자신은 몰려오는 거미들에게 겁먹고 미친 듯이 도망칠 줄 밖에 몰랐다.
스스로의 무력함에 너무나 화가 났다. 이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나 무투가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도 저런 괴물들이 있을 거란 얘기는 전혀 못 들었어…… 확실한 건 여긴 고블린 소굴 같은 게 아니야…….”
“이상하게 변한 지형과 괴물들을 보면 아무래도 던전이겠지…….”
몬스터들의 수준으로 보건데 이 던전의 등급은 최소 골드일 것이다.
실버 등급인 자신들이 이토록 내몰린 것을 생각하면 그 이하의 모험가들은 절대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리라.
“길드 새끼들은 일처리를 어떻게 해먹는 거야?! 이렇게 위험한 던전이 뭐? 고블린 50마리가 사는 소굴이라고?!”
“진정해 랄칸……. 퀘스트를 수주한 것도 우리고, 무리하게 안쪽까지 들어온 것도 우리야. 이제 와서 길드 탓한다고 아무 것도 안 변해…….”
역정을 내는 쌍검사에게 기사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쌍검사와 같은 심정이다. 누구나 길드와 접수원들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평할 수는 없다.
애당초 모험가는 미지의 위험과 조우하는 직업이다.
길드의 정찰만으로는 위험 요소를 전부 파악할 수 없으며 공략은 결코 예상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모험을 하는 게 당연한 사람들이 예상과는 다르다고 불평하는 건 어린아이의 투정이나 다름없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쌍검사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저렇게 남 탓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다른 동료들 또한 그와 같은 방식으로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붙들고 있었다.
절망감이 서서히 그들을 집어삼킬 때, 기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이 던전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위험해…… 우리 같은 실버 등급 모험가들은 절대 공략할 수 없을 거야.”
“그러면 어떡해……? 왔던 길로 되돌아갈 수는 없잖아…….”
“맞아, 당장 안 쫓아올 뿐이지 평원으로 나가면 거미들이랑 만날 거라고…….”
모두 거미에 대한 공포가 머릿속에 각인된 상태다.
설령 지금은 안전하더라도 절대 평원 쪽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 수많은 거미들에게 다시 쫓기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여기 오기 전에도 다른 출구들을 봤잖아. 분명 이 앞에도 밖으로 나가는 길이 있을 거야. 최대한 조심하면 전투 없이 빠져나가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해.”
이렇게 큰 동굴에 출구가 하나뿐 리 없다. 기사의 말을 듣고 파티원들도 그 사실을 자각했다.
“그래…… 여기서 이대로 죽을 순 없어……!”
“페트릭도 우리가 살길 바랄 거야. 그 녀석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자고.”
서서히 평정심을 되찾은 파티원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나 그들의 표정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이성을 되찾는 것과 절망에서 벗어나는 건 다르다. 그들의 정신은 아직도 절망 속을 헤매고 있다.
친한 동료의 죽음과 끔찍한 거미 떼의 존재는 그들을 그렇게 만들고도 남았다.
“페트릭…… 유품도 건져주지 못했는데 이렇게 두고 가야 하는 거야……? 거미들한테 먹혀서 뼛조각도 안 남을 텐데…….”
문득 여사제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마음이 여려서 그런지 유독 동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 말에 모두가 침통함을 느꼈다. 분위기를 망치는 그녀가 답답할 만도 하지만 질책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기사가 나서서 그녀를 독려했다.
“페트릭이 죽은 건 슬프지만 우리까지 죽을 수는 없잖아. 일단 밖으로 나간 다음에 클랜에 알리자 그러면 클랜이 다 알아서 해줄 거야.”
“응……. 미안해요, 저 혼자 우울한 얘기해서…….”
기사의 말을 듣고 여사제도 눈물을 닦았다. 홀장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슬픈 눈빛을 지울 수는 없었다.
“페트릭의 영혼도 바리님이 직접 천도해주실 거야. 그 녀석을 잘 보내주기 위해서라도 다들 꼭 살아남자.”
결연한 표정으로 일행들을 둘러본 기사. 그의 굳건한 의지 덕분에 다른 파티원도 어느 정도 기운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다섯 명은 태세를 정비한 뒤 동굴 안쪽으로 나아갔다.
당연히 탱커 역할인 기사가 방패를 내세우며 앞장섰으며 그 뒤를 파티원들이 따랐다.
“그래도 여긴 평원 보다 조용하네…….”
“던전마다 숨겨져 있는 안전지대 뭐 그런 걸까?”
한동안 별 문제없이 전진하자 일행들도 점차 희망을 되찾았다.
조금 전까지만 밀려오는 거미 떼가 생각나서 등골이 서늘했었는데 아름다운 광경에 차분한 분위기가 맞물리니 마음이 평온해진 것이었다.
허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다섯 명은 이 던전, 혹은 가디스 던전 개발진들이 만들어놓은 함정에 보기 좋게 걸리고 만 것이었다.
“크읏?!”
“리, 리더……?”
“뭐야, 무슨 일이야?”
평화롭게 나아가던 도중 기사가 거미줄을 건드렸다.
방패를 내세우며 움직인 탓에 큰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거미줄이 끊기면서 얼굴을 살짝 베이고 말았다.
“이게 뭐지? 와이어……?”
“이런 건 또 누가 쳐놓은 거야?”
“이, 일단 이리 와 봐요 리더. 혹시 모르니까 당장 치료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사제는 빠르게 회복 주문과 정화 주문을 영창했다.
상처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기사는 군말 없이 치료를 받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세히 보니까 비슷한 게 엄청 많아……. 곳곳이 와이어 천지야.”
“해체하면서 갈 수 있을까?”
“아무래도 힘들겠지. 도적이나 사냥꾼이 있다면 모를까…….”
가까이 있는 거미줄은 확인할 수 있었지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훨씬 많은 듯했다.
그런 걸 하나하나 해체하며 가는 것은 민첩 계열 직업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아니면 이 지역에 있는 함정들을 전부 꿰고 있는 사람이거나.
새삼 페트릭의 빈자리를 느끼며 방법을 모색하던 중이었다.
“카, 카린! 조심해!!”
“응? 갑자기 그게 무슨…… 히이익?!”
기사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이를 확인한 그가 다급히 소리치자 고개를 돌린 마법사도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 거미……!!”
마법사의 머리 위에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새끼 거미였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놈이 마법사를 기습하기 위해 접근해온 것이었다.
[끼기이이익!]
콰득!!
“꺄아아아악!!”
모두가 경악하는 사이 새끼 거미가 마법사에게 뛰어내렸다.
놈이 그녀의 어깨를 무는 데까지는 창졸간의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고 그 누구도 이를 막을 수 없었다.
“케헥……! 켁, 케게엑……!”
결국 마법사는 신경 독에 중독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저항할 새도 없이 당한 그녀를 본 파티원들은 이를 바득 갈며 거미에게 달려들었다.
“이 개 같은 새끼가!!”
“내가 막을 동안 둘러싸서 공격해!”
[키이이이이!!]
무자비하게 공격을 퍼붓는 근접 딜러들. 새끼 거미 역시 앞발을 휘두르며 응전했지만 고작 300 밖에 안 되는 생명력으론 딜러들의 협공을 버틸 수 없었다.
“죽어 벌레 새끼야!!”
콰지익!
[끼게에에엑……!]
놈은 결국 쌍검사에게 다리가 전부 절단되고 무투가의 주먹에 머리를 맞아 절명했다. 찌그러진 머리 사이에서 기분 나쁜 체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카린은?! 카린은 어떻게 됐어?!”
“아직 살아 있는 거야?!”
새끼 거미를 처치한 그들은 서둘러 마법사의 상태를 살폈다.
“그륵! 그르르르륵……!!”
“카, 카린…….”
“안 돼……! 세르카 어떻게 좀 해봐!”
쓰러진 마법사는 거품을 문 채 쉴 새 없이 경련했다.
원작 게임에선 어떤 대상에게 사용하든 동일한 효과를 보이는 신경 독이었지만 게임 세계에선 달랐다.
근접 딜러들 보다 훨씬 몸이 약한 마법사는 신경 독에 더 과민하게 반응했고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괴로워했다.
“걱정 마, 이 정도론 안 죽어……! 당장 정화 마법을 사용하면 이런 독쯤은……!”
여사제가 정화 주문을 준비할 무렵이었다.
“허억……!!”
“히이익……?!”
일행들은 난데없이 느껴진 살기에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내달렸으며 숨이 턱 막혔다.
마치 자신을 찍어 누르는 것 같은 압박감. 평범한 생물에게서 나올 법한 살기는 절대 아니었다. 그들은 차마 서로 말도 못 나눈 채 살기의 근원지를 확인했다.
“저, 저건…….”
“사람…… 이야……?”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웬 장신의 남성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뒤편에서 다가오는 그를 보며 순간 사람인가 싶었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건 아주 잠시 뿐이었다.
[키릭, 키리리리릭!]
“……!”
횃불이 보여준 놈의 모습은 도저히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고블린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무려 2미터에 육박하는 장신. 등에는 거미 다리 같은 것이 돋아나 있었으며 이는 가슴에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얼굴이 자세히 보였는데 거미의 것과 같은 크고 날카로운 독니가 입 밖으로 길게 튀어나와 있었다.
“으, 으아아아악!!”
“저게 뭐야?! 저게 뭐냐고?!”
너무나 혐오스러운 외견에 일행들은 비명을 지르며 무기를 빼들었다.
살아생전 이렇게 끔찍한 괴물은 처음 본다. 흉악한 오크 무리를 상대할 때도, 늪지에서 거대한 뱀과 맞서 싸울 때도 이 정도로 무섭진 않았다.
놈은 생리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며 파티원들을 위축시켰다. 놈을 본 순간 이 자리에 있는 전원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