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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12화 (11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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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한 자의 둥지

그렇게 대답하면서 기름병 두 개를 꺼냈다.

세 사람과 만난 후에 따로 챙겨둔 기름병이었다. 하나는 다나에게 건네줬고 다른 하나는 내 몸에 들이부었다.

“너희 주위에 뿌린 다음에 불 붙여. 기름 위에 붙이면 물귀신들 위에서도 잘 탈거야.”

“자, 잠깐! 사부 지금 뭐하는 거야?!”

일단 시키는 대로 하는 다나였으나 그녀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몸에 기름을 들이붓는 광경이 그녀 입장에선 전혀 이해되지 않을 테니까. 내가 미친 짓 하는 걸로 밖에 안 보이겠지.

이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가 충격을 금치 못하면서 내게 소리쳤다.

“선생님 대체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기름은 몸에 왜 부으시는 건데요?!”

“다키님 뭐 하려는지 대충 알겠는데 그거 진짜 미친 짓이에요……! 완전 자살 행위라고요!”

오직 나나만이 내 의도를 파악한 듯했다. 허나 이제 와서 다른 방법을 모색할 시간은 없다.

나는 원작 게임에서 그랬던 것처럼 발화깃을 꺼내들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난 자연사로 밖에 죽을 생각 없으니까.”

“다키님 잠……!!”

날 말리기 위해 뛰쳐나오는 나나. 그녀가 기름원에서 벗어나기 전에 나는 지면을 박찼고 동시에 발화깃을 몸에 가져다댔다.

화르르르륵!!

“크흐윽!!”

발화깃에서 시작된 불이 전신으로 옮겨 붙었다.

기름범벅이었던 몸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고 나는 마치 모 만화의 나오는 주인공처럼 불길에 휩싸였다.

“꺄아아아악! 다키니이임!!”

그 광경을 본 나나가 비명을 내질렀다. 살짝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는데 눈동자 위로 절망과 공포가 떠올라 있었다.

나나의 눈에는 내가 분신자살을 시도하는 걸로 보이는 듯했다.

과정만 봐선 하등 다를 바 없지만 결정적으로 난 죽을 생각이 없다. 전신을 홀랑 태우고 싶어서 이런 짓을 벌이는 것도 아니다.

“난 괜찮으니까 너희들이나 잘 지켜!!”

“하지만……!!”

“다나, 린크! 뭐해 빨리 불 안 붙이고?!”

내 호통에 린크와 다나가 화들짝 놀랐다. 순간 주저한 두 사람이었으나 곧 이를 악 물면서 지시에 따랐다.

“이이익……! 죽기만 해봐 사부! 가만 안 둘 줄 알아!”

“나나 씨! 스승님도 막무가내로 저러시는 건 아닐 거예요! 일단 믿어보죠!”

화아아아악!!

기름으로 만들어진 원에 횃불을 가져가자 활활 불타는 화염의 고리가 일행들을 에워쌌다.

나나는 그 거센 불길 속에서도 내게 달려오려고 발버둥 쳤지만 린크가 제지해준 덕분에 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키이익! 키이이이잇!!]

[키기이이익!!]

화염의 고리는 무척 효과적이었다.

물귀신을 뚫고 들어온 거미들은 불길에 닿자마자 괴성을 지르며 물러났다. 페로몬의 영향을 받은 거미들이라 할지언정 불에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불길이 유지되는 동안 일행들은 안전하리라. 본인들도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내가 상황을 정리하면 문제될 건 없다.

“쯔아아아앗!! 파이어 펀치! 파이어 펀치!!”

퍼어억! 퍼어억!!

[끼케에에엑!!]

일행들의 안전을 확인한 나는 두 다리에 박차를 가하며 빠르게 돌진했다.

수많은 거미들이 내 앞길을 가로막았지만 불타는 주먹을 한 번 날려주니 고통어린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졌다.

주먹을 휘감고 있던 기름과 불길이 옮겨 붙어 놈들을 순식간에 소사시키는 것이었다.

[키이잇……!]

[끼기이이익……!]

동료들이 불타 죽는 모습을 보자 다른 거미들은 차마 내게 다가오지 못했다. 애당초 화염에 휩싸인 몸은 놈들이 가까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게 내가 기름을 들이부으면서까지 몸에 불을 붙인 이유다.

횃불이나 화염병만으론 놈들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

횃불을 들고 뛰면 어느 정도 견제할 수야 있겠지만 확실하게 빈틈이 생긴다. 평원 가득 깔려 있는 거미들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고도 남는다.

한 번이라도 공격당하는 순간 그 자리에서 끝. 당연히 붉은 거미에게 닿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나는 다소 위험을 감수하고 온몸에 불을 질렀다. 나 자신이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거미들의 접근을 완벽히 차단한 것이다.

“타죽기 싫으면 비켜 벌레 새끼들아!”

촤아악! 촤아악!

빠가아아악!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고 주먹을 내질렀다.

한 차례의 검격에 서너 마리의 거미들이 한꺼번에 썰려나갔고 주먹질 한 방에 멀쩡하던 거미가 창졸간에 불타올랐다.

그러는 와중에도 내 몸은 멀쩡했다. 전신에 불을 붙인 만큼 엄청난 열기가 느껴졌으나 그로 인한 고통이나 데미지는 일절 없었던 것이다.

‘매번 고맙네요, 기사님!’

손목에 감은 리본을 바라보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런 미친 짓을 벌일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여기사가 남겨준 장신구, 화염의 리본 덕분이다.

하루에 한 번, 화염으로 인한 피해를 0으로 만들고 1초간 무적 상태를 부여하는 옵션이 내 몸을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한 ‘한 번의 피해’란 말 그대로 한 차례의 피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공격에 의한 피해를 뜻한다.

즉 발화깃으로 인한 화염 피해를 차단함으로써 난 온몸에 불길이 번졌음에도 전혀 피해를 받지 않은 거다.

사실 단일 데미지뿐만 아니라 도트 데미지까지 막는 건 버그 같지만 아무렴 어떤가. 지금 당장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으면 상관없다.

[끼에에에에에!!]

새끼 거미들을 베어 넘기며 돌진하길 수 초, 끝내 나는 광전사 거미에게 도달했다.

내가 접근하자마자 놈은 앞발을 들어 올리면서 위협을 가했다.

낫처럼 휘어 있는 앞발은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과연 공격력이 300이나 되는 놈이라 그런지 다른 거미들보다 훨씬 위험한 면모가 엿보였다.

“잡았다!”

하지만 날 위축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내가 놈을 본 후에 느낀 감정이라곤 끝을 모르고 치솟는 희열이었다.

드디어 이놈을 죽일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이 날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게 했다. 나는 입 꼬리를 올리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퍼허어어억!!

[키께에에에엑!!]

내 왼손이 놈의 턱을 후려쳤다.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광전사의 안면이 불타올랐다.

방금 전의 둔탁한 소리는 외골격이 부러지는 소리였나 보다. 그 증거로 놈의 턱에서부터 체액이 쏟아져 나왔다.

[키에에에엑! 키이이이익!!]

온몸을 흔들며 괴로워하는 광전사 거미. 상위 개체라고 해도 역시 화염 속성에는 장사 없는 듯했다.

놈은 날카로운 앞발로 날 찢어발기려 했지만 놈보다 내가 더 빨랐다.

앞발이 내게 닿기 직전, 쾌도를 수직으로 휘둘러 놈의 머리를 벤 것이다.

“잘 가라.”

촤좌악!

외골격이 쪼개지고 안쪽의 연한 살이 깔끔하게 썰렸다.

새끼 거미들보다 더 질긴 생명력을 가진 광전사였으나 발화로 입은 데미지 때문에 놈은 일격에 절명하고 말았다.

[끼이익……!]

놈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곤 단말마를 내지르는 것뿐이었다. 결국 광전사 거미는 반듯하게 절단된 머리를 떨어뜨리며 힘없이 쓰러졌다.

[끼이익?! 끼케에에에엑!!]

[끼이이이이익!!]

[끼기익!! 끼에엑! 끼에에에엑!!]

직후, 주위에 있던 거미들이 단체로 비명을 질러댔다. 흥분한 채 일행들에게 달려가던 놈들은 일제히 발광하기 시작했고 곧 휘청거리면서 균형조차 잡지 못했다.

한 대 툭 치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이었다. 아크 데몬을 잃고 난 뒤의 악마들과 비슷했다.

“이, 이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 광경을 보며 일행들이 당혹을 터뜨렸다.

거미들이 이러는 이유는 간단하다. 광전사의 거미의 죽음이 놈들에게 광역 그로기를 안겨준 것이다.

대충 훑어본 설정이라 잘 기억 안 나는데, 광전사 거미는 죽을 때 특히나 많은 페로몬을 분출한다고 한다.

이 페로몬은 평소에는 거미들에게 강력한 힘을 불어넣어주지만 너무 많이 노출될 경우 몸에 이상 반응 일어나 엄청난 고통이 뒤따른다고 한다.

그 왜 스테로이드나 아드레날린 같은 약물도 과다 복용하면 치명적인 부작용을 야기하지 않는가. 그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얘들아 지금이야! 횃불이든 화염병이든 다 꺼내서 전부 태워버려!”

몇 번인가 바닥을 굴러서 불을 끈 뒤 큰 소리로 외쳤다.

한 번 그로기 상태에 빠진 거미들은 회복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허나 그 시간이 엄청 넉넉한 건 아니다. 이때 제대로 처리해두지 않으면 거미들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우리들을 공격해올 것이다.

지금이야 말로 놈들을 끝장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일행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서둘러 움직였다.

“유미야, 나나 씨! 가방에 있는 기름이랑 화염병 좀 꺼내주세요! 두 사람이 꺼내면 저희가 던질 테니까요!”

“알겠어……!”

“못 맞추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유미와 나나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녀들이 기름병과 화염병을 꺼낼 때마다 린크가 심지 불을 붙였고 이를 다나가 힘껏 던졌다.

“전부 타죽어버렷!!”

콰차앙!

화르르르륵!!

[끼에에에엑!!]

[끼이익! 끼기기기긱!!]

호흡이 척척 맞는 움직임 덕분에 일행들은 효과적으로 거미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다나가 던진 병들은 손을 떠나는 족족 거미들에게 명중했고 직후에 커다란 불길이 일어나 일대를 활활 불태웠다.

“역시 불장난은 못 참지!”

화아아아악!!

나 역시 놀고만 있지 않았다. 새로 꺼낸 횃불에 불을 붙인 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불을 붙였다.

멀뚱히 서 있는 거미들은 내 횃불을 피할 수조차 없었으며 몸에 불이 붙고 나서야 미친 듯이 날뛰었다.

참 재밌는 것이 놈들이 발악하면 발악할수록 불길은 더욱 널리 퍼졌다.

이를 몇 번인가 반복해주자 거미들로 가득한 평원은 어느새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그 많던 거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불타오르고 시커먼 연기가 천장 높이 솟구쳤다.

“와…… 이 무슨 불지옥…….”

“새우 타는 냄새 나…….”

화마에 휘말리지 않도록 우리는 불길을 뚫고 언덕 위로 올라갔다. 마침 가까운 곳에 불길이 닿지 않을 정도로 높은 장소가 있었다.

유미의 물귀신 덕분에 안전한 장소를 확보한 우리는 순간 넋을 잃은 채 평원을 둘러보았다.

여기도 저기도 시뻘건 불길 밖에 보이지 않으니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거미들의 끊이지 않는 비명 소리까지 더해져 여기가 지옥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 풍겨오는 타는 냄새는 은근히 군침이 도는 냄새였다. 유미의 말마따나 센 불에 새우를 굽는 것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거미는 못 먹나. 그런 생각을 하며 불구경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닼희님!!”

“으, 응?!”

갑작스레 나나가 내 팬티를 잡아 올렸다. 마치 멱살 잡는 것처럼 붙잡아서 사각 팬티가 졸지에 스판처럼 내 쥬지에 착 달라붙었다.

뭐야, 이러니까 가뜩이나 흉한 몰골이 더 끔찍해지잖아. 여성 전용 클럽에서 봉 잡고 엉덩이 흔드는 남창이 된 기분이란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몸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가시면 어떡해요?! 저 진짜 다키님이 타죽는 줄 알고 엄청 걱정했다구요!”

내가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낄 무렵 나나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내 팬티를 잡고 마구 흔드는 바람에 불알이 몹시 조였다.

민망함을 참을 수 없었던 나는 나나의 손을 뿌리치면서 서둘러 사과했다.

“미, 미안해 나나야!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설명할 시간이 없었어!”

“다음부턴 절대 그러지 마세요! 옆에서 보는 제 입장도 생각해달라구요!”

으름장을 놓듯이 이야기하며 나나가 날 와락 끌어안았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함께 피어올랐다.

살면서 날 이렇게나 걱정해준 사람이 있던가. 헤베와 브릴린트도 내 걱정을 해주긴 했지만 날 위해 눈물을 흘린 건 나나가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나나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의 등을 토닥여줬다.

“알았어, 알았어. 다음엔 미리 이야기할 테니까 울지 마. 뚝.”

“누가 운다고 그래요……!! 눈에서 쿠퍼액 나오는 거예요!”

“아 제발 나나야…….”

기괴하기 그지없는 변명에 질색하면서 나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와중에 나나는 내 가슴이 휴지라고 되는 것처럼 코를 흐응! 하고 풀었다. 가슴팍에서 질척한 기분이 든다. 분명 나나의 콧물이리라.

방금 전까지 느껴졌던 감동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그래도 뭐, 여자친구를 걱정시킨 대가로 이 정도는 싼 편이겠지.

내가 온갖 감정을 느끼면서 나나를 달래줄 때 이를 보고 있던 세 사람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남다른 분인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몸에 불을 두르고 거미들한테 달려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리 멀쩡할 수 있는 거야? 팬티랑 망토도 전혀 안탔잖아!”

“저도 엄청 놀랐어요……. 물귀신들한테 부탁해야 하나 한참 고민했다니까요…….”

세 사람도 나나 못지않게 날 걱정한 모양이다.

내가 아무렇지 않은 걸 확인하고 다들 안도하는 기색이었지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아 있는 듯 했다.

“다 이 리본 덕분이야. 화염 피해를 막아주는 특별한 리본이거든.”

“세, 세상에…… 그러면 최소 희귀급 장신구잖아요……?! 길드 경매에서도 아주 가끔 가다 올라오는 물건들인데……!”

린크의 경악에 나도 적잖게 놀랐다.

희귀급 아이템이 그렇게 귀중한 취급을 받을 줄이야.

원작 게임에서도 희귀 정도 되면 구하는 게 쉽지는 않으나 게임 세계에서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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