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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10화 (1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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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한 자의 둥지

스승님이라. 내가 이것저것 많이 알려주고 있지만 그런 식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뭐 원작 게임에서도 뉴비들 도와줄 때도 종종 듣긴 했으니 이제 와서 어색할 건 없나. 물론 그 당시 뉴비들은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라 반쯤 장난이었겠지만.

그보다 유미가 날 스승이라 불러주니까 뭔가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그녀와는 1도 진도가 안 나갔으나 괜히 사제 간의 문란한 상황을 기대하게 된 것이다.

생각만 해도 음흉한 미소가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이를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차분히 말했다.

“유미가 편하면 그렇게 불러도 돼. 뭔가 책임지고 가르쳐야 될 거 같네.”

“네, 네……?! 아, 아뇨 그러실 것까지는……! 전 딱히 가르쳐달라고 그런 게 아니라……!”

농담 삼아 얘기하자 유미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럴 의도가 없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유미였지만 원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인 법이다.

그녀는 어떻게 봐도 내 제자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였다. 초보자라면 고인물들에게 배우고 싶기 마련이니까.

“뭐야, 그러면 나도 사부라 부를래! 유미 혼자 제자하고 치사하게!”

“그, 그런 의미로 말한 거 아니라니까……. 스승님이 곤란해 하셔…….”

“아니긴 무슨. 벌써부터 스승님, 스승님 하는 거 보니까 유미 너도 사부 밑에서 배우고 싶은 거잖아.”

급기야 다나도 내 옆에 바싹 달라붙으며 입문 의사를 밝혔다. 옆에서 계속 내가 싸우는 걸 봐왔으니 유미 이상으로 내게 배우고 싶어 할 것이다.

귀여운 제자들이나 둘이나 생기다니.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싶다. 원작 게임에선 죄다 남정네들만 가르쳐줬던 나였기에 양손에 꽃을 쥔 기분이 들었다.

“린크 너도 배우고 싶지? 사부가 제자로 받아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

“다, 다나야……!”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다나는 가만히 있던 린크까지 끌어들여 아예 스터디 클럽을 만들 기세였다.

거침없는 그녀의 행동에 유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반면 린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실 저도 기회가 된다면 지도를 부탁드리고 싶었어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한다 해도요……! 다키님 같은 분이랑 만난 것부터가 저희한텐 행운이니까……!”

린크가 말하길, 자신들이 모험가 활동을 시작한 건 불과 반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시작한 일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퀘스트의 성공률도 그리 높지 않고 강한 적을 상대로는 매번 도망치기 일쑤. 그래서 등급도 오르지 않고 있으며 돈벌이가 좋은 퀘스트 역시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세 사람이 안쓰러워졌다.

게임 세계에선 흔한 일이겠지만 평화로운 세계를 살아왔던 내게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그들의 이야기는 가히 심금을 울리는 것이었다.

비록 우연으로 만난 사이지만 이것도 다 인연이겠지. 무엇보다 그들은 유미의 친구들이지 않는가.

그들과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으리라. 그들에게 지도를 약속하는 건 사실상 유미의 번호를 따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이야기를 들은 나는 선뜻 승낙했다.

“이번 던전 클리어하면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이것저것 가르쳐줄게. 돈 같은 건 안 받을 테니까 걱정 말고.”

“……! 지, 진심이신가요? 아무 대가 없이 저희 같은 초보자를 지도해주신단 말씀이세요?”

“물론이지. 어떤 누님이 온정은 돌고 도는 거라고 했거든. 나도 선배 모험가한테 도움 받은 적이 있으니까 너희를 도와주는 거야.”

니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유미, 다나, 린크 모두 두 눈을 반짝이면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향한 존경심이 한층 더 깊어진 기색이었다.

“역시 사부야! 처음 볼 때부터 배포가 클 줄 알았다니까! 야, 린크! 너도 얼른 사부라고 불러!”

“그, 그러면 전 선생님이라고 부를게요……!”

다나의 재촉에 린크도 어색하게나마 호칭을 바꿨다.

유미는 스승님, 다나는 사부, 린크는 선생님.

그냥 다 스승님으로 통일하면 되지 않나 싶었지만 그냥 본인들이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게 뒀다. 각자의 개성이 잘 드러나는 호칭이기도 하고 말이다.

졸지에 세 사람의 스승이 된 나는 그들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유미네 쪽에서 먼저 이야기한 건 아니고 나나가 심심함이 도졌는지 계속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동굴 깊숙이 들어갈수록 적은 안 나오고 시체만 가득해서 달리할 일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 너희는 무슨 관계예요? 그냥 친한 친구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그러게. 얼마나 친하기에 자진해서 위험한 일에 뛰어든 거야?”

나도 마침 의아했던 부분이기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에 린크가 지난날을 회상하듯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랑 요르나는 어렸을 적부터 같이 자란 사이예요. 버려진 저희를 어떤 신부님이 거둬주셨죠. 저희가 10살 때쯤엔 다나도 같이 지내게 됐고요.”

“워낙 오랫동안 같이 지내서 지금은 그냥 가족이나 다름없어. 요르나도 나한텐 친자매나 다름없으니까 절대 내버려둘 수 없었던 거지.”

하긴, 부모도 집도 없던 아이들이 같은 보모 아래에서 자라면 남매 같은 관계가 될 만하다.

그들에겐 요르나를 구하러 가는 일이 비단 동료를 구하는 게 아니라 가족을 구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피가 섞이지 않았는데도 나랑 우리 가족보다 가족애가 돈독해 보이는 걸. 참 대견하면서도 부러웠다.

“흐으음~ 그렇단 말이죠~?”

거기까지 들은 나나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린크를 훑어보았다.

음흉한 시선을 보내길 잠시, 그녀는 대뜸 린크에게 질문했다.

“너 그 요르나란 애 좋아하죠?”

“네?!”

일말의 전조도 없이 날아온 돌직구에 린크가 화들짝 놀랐다. 그는 몇 번인가 말을 더듬은 뒤 거세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 좋아한다니 당치도 않은 소리예요! 저는 그냥 요르나를 동생처럼 아낄 뿐이지, 나나 씨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는 절대 아니에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남녀는 서로를 이성으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한다.

내가 누나들을 여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었던 걸 고려하면 린크의 말도 진심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나나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질문했다.

“그냥 농담이었는데 뭘 그리 진지하게 부정해요? 아니면 아니다 하고 말면 되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부정한담?”

“누, 누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고 그러세요…….”

정곡을 찔렸는지 린크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처음엔 그냥 나나의 비약이라고 생각했는데 저 반응을 보면 진짜 요르나를 좋아하는 듯했다.

한동안 린크의 반응을 즐기던 나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아~ 네가 그러는 걸 보니까 연애도 참 답답하게 할 것 같네요. 요르나란 애는 네가 좋아하는 거 개뿔도 모르죠?”

“그, 그러니까 저는…….”

“언제 한 번 찔러봤을 때도 존나 눈치 없이 ‘응 나도 네가 좋아! 다나도 좋고, 유미도 좋고 다 좋은 걸!’ 같은 말이나 하지 않았냐구요.”

거듭되는 나나의 질문에 린크의 말문은 콱 막히고 말았다. 부끄러운 나머지 차마 입을 못 여는 것이었다.

대신 옆에서 듣고 있던 다나가 놀라운 기색으로 이야기했다.

“세상에, 어떻게 알았어? 독심술 같은 거라도 쓴 거야?”

“아 다나야, 제발……!”

뒤늦게 다나를 제지하려 한 린크였지만 이미 다 들통 나고 말았다. 나나는 자신만만 얼굴로 옆머리를 넘기며 말했다.

“너희들 썰만 들어도 견적이 대충 나오더라고요~ 정말 클리셰 덩어리들이라니까요~”

“으으…….”

결국 린크는 무어라 반박하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참 좋은 인연이다. 소꿉친구와 나누는 풋풋한 사랑이라니. 러브코미디에나 나올 것 같은 설정 아닌가.

“그럼 여기 있는 예쁜이랑은 무슨 관계예요? 너희랑 오래 알고 지낸 거 같지는 않은데.”

“아, 저는…….”

내심 부러워하고 있을 무렵 나나가 유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정말 스킨쉽에 거리낌이 없구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다나가 답을 내놓았다.

“유미하곤 3년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야. 늦게 만났지만 걔도 우리 가족이나 다름없어.”

“으흠, 그렇군요. 그러면 거기 있는 답답이는 유미한테 전혀 관심 없는 거죠?”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던 나나가 다시금 린크를 바라보았다. 이에 린크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수긍했다.

“절 대체 뭐로 보시는 거예요…… 유미한테는 진짜 아무런 사심도 없어요. 소중한 동료일 뿐이라고요.”

당황하며 말했던 조금 전과 달리 지금의 린크는 무척이나 냉정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유미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반대로 요르나한테는 마음이 있다는 걸 입증하는 꼴이었지만.

“그거 참 다행이네요~ 생긴 것처럼 이 여자, 저 여자 후리고 다니지는 않아서요.”

그렇게 말한 뒤 나나가 날 바라보았다. 남모르게 찡긋 윙크하는 그녀를 보니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나 저 녀석, 린크가 내 경쟁자인지 은근슬쩍 확인한 거다.

솔직히 나나 정도의 눈치면 내가 유미에게 유독 잘해주고 있는 건 진즉에 알아챘을 거다.

내가 유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호감이 있다는 것 정도는 파악했겠지.

그렇다면 나나의 목적은 다분하다. 프란체스카 때 그랬던 것처럼 유미와 날 엮어서 자신의 이상성욕을 충족하려는 것이 틀림없다.

“반대로 윾미 쟝은 어떤 남자가 취향이에요?”

“가, 갑자기 그런 질문 하시면 곤란해요……! 그리고 제 이름은 윽미가 아니라 유미인데……!”

유미한테 이야기하는 걸 보면 확실한 듯하다.

참 보면 볼수록 별난 애라니까. 남친의 하렘 창설을 위해 앞장 서는 여친이라니. 현실에도 저런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그 후로 얼마나 걸었을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이윽고 중반부로 접어들었다.

새로운 지역에 왔다는 걸 알려주듯이 주위 경관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그 형태는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우, 우와…….”

“여기 진짜 동굴 속 맞아……?”

바뀐 환경을 둘러보며 일행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좁고 어두컴컴하던 동굴이 밝은 평원으로 바뀌었다. 곳곳에는 청록색 빛이 감돌았고 그 근원은 흐드러지게 핀 꽃과 천장에 박힌 보석들이었다.

양쪽 모두 자체적으로 발광했는데 보석이 뿜어내는 빛은 특히나 강해서 순간 밖으로 나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여신상 근처에 있는 꽃들도 그랬는데…… 여기 있는 꽃들은 햇빛도 없이 어떻게 이리 잘 자라는 건지…….”

“응…… 동굴 안에서 이렇게 예쁜 꽃이 핀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어…….”

바닥에 핀 꽃을 어루만지며 린크가 연신 경탄했다. 유미 또한 두 눈을 반짝이면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도 중반부의 경관은 경이로웠다. 판타지 세계에 어울리는 환상적인 광경, 아름다운 꽃밭에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 같았다.

“어둡고 답답한 데에만 있어서 폐소공포증 걸릴 뻔했는데 여기 오니까 숨이 좀 트이네요! 유미 쟝도 그렇게 생각하죠?”

한 차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유미에게 묻는 나나. 그에 유미는 갑작스러운 부름에 잠시 놀라더니 이내 조심스레 반론했다.

“어, 어두운 곳도 어두운 곳만의 매력이 있어요…… 오히려 저는 이곳이 더 불길한 걸요…….”

“응? 왜요? 이렇게 사방이 탁 트여 있는데 뭐가 불안해요?”

“사제님 말이 맞아. 이런 곳에선 기습도 쉽게 못하잖아. 어두운 동굴 보다야 훨씬 낫지 않아?”

유미의 말을 듣고 나나와 다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린크는 뭔가 낌새를 느꼈는지 유미에게 물었다.

“뭐 느껴지는 거라도 있어?”

“응…… 사방에서 영가가 느껴져…… 괴물들 소굴에서 원혼이 느껴지는 건 당연하지만 여기는 차원이 달라…….”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유미가 주위를 가리켰다. 소름 돋게도 유미가 가리킨 곳은 나나와 다나의 등 뒤였다.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당장 나나 씨랑 다나 뒤에도 있는 걸……. 얼굴 벗겨진 남자랑 배 갈라진 여자가…….”

“……!”

“……?!”

어느덧 유미의 눈동자는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야기만 들어도 충분히 섬뜩한데 신내림 특유의 연출까지 가미되자 두 사람은 적잖은 공포를 느끼며 소리쳤다.

“그, 그런 거 일일이 말하지 마! 하나도 안 궁금하다고!”

“맞아요……! 예쁜 귀신이라면 모를까 배가 갈라진 언니면 절대 불가능이라구요!!”

새삼 느끼는 거지만 나나는 무서운 거에 약한 모양이다. 신령들을 봤을 때도 그렇고 에리스의 신당에 들어갈 때도 굉장히 무서워했으니까.

다나 역시 그녀 못지않게 겁이 많은 듯했다. 첫 인상부터 뭔가 드센 여장부 느낌이어서 귀신같은 건 안 무서워할 줄 알았는데 좀 의외였다.

그런 두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유미가 한 말은 딱히 틀린 말이 아니다. 귀신까지는 아니라도 당장 우리 눈앞에 비슷한 것이 나타났으니까.

“얘들아 무기 들어. 나왔다.”

“뭐, 뭐가 나왔는데요……?!”

“진짜 귀신이야……?!”

고개를 돌리며 소스라치게 놀라는 나나와 다나. 그런 두 사람과 달리 린크는 침착하게 방패를 올리고 다가오는 존재를 확인했다.

“저건…… 모험가……?”

멀리서부터 웬 남성이 만신창이가 된 채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였고 입고 있는 갑옷도 여기저기 파손된 상태였다. 척 봐도 정상적인 몰골은 아니었다.

“사, 사람……! 살려줘!! 제발 부탁이야, 나 좀 도와줘!!”

그 역시 우리를 발견한 듯했다. 가뜩이나 헐레벌떡 뛰어오던 남자는 더욱 속도를 높여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왔다.

“어쩌죠, 선생님……?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요……?”

“맞아 사부! 저 남자 저대로 두면 죽을 거야……!”

남자를 보며 린크와 다나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얘기했다. 나와 나나를 설득하려고 그러는 것 같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 없다.

“아니야…… 아니야 얘들아…….”

“아니라니…… 뭐가 아니란 거야?”

그때 유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몸을 바들바들 떨더니, 이내 두려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 살아있는 사람 아니야……! 시체가 말하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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