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불경한 자의 둥지
“우선 린크는 아주 잘 하고 있어. 내가 지시했던 것도 잘 수행하고 무엇 보다 신중하게 싸우는 부분이 가장 큰 장점이야. 계속 그대로만 하면 훨씬 더 나아질 수 있을 거야.”
“가, 감사합니다! 전부 다키님이 가르쳐주신 덕분이에요……!”
칭찬 받은 린크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홉 고블린을 상대로 방어 패링한 게 떠오른 건지 그의 왼손엔 힘이 바짝 들어갔다.
짜식 긴장하기는. 그래도 이게 다 나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처음 만났을 땐 고전 게임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생겨서 얜 뭐지 싶었는데 보면 볼수록 괜찮은 친구 같았다.
“그 다음은 다나. 너한텐 할 말이 좀 많아.”
“윽…… 알겠어…… 귀 담아 들을 테니까 얘기해…….”
본인의 차례가 되자 다나는 다소 위축된 채로 경청했다. 매 맞기를 기다리는 학생 같은 태도였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담담한 어조로 미흡한 점들을 지적했다.
“넌 너무 튀어나가는 경향이 있어. 근딜이 열심히 싸우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혼자 앞서가면 너 자신은 물론 파티 전체가 위험해져.”
“으, 으응…….”
“그런 식으로 싸우면 한순간이야. 아까도 너 하나 살리려고 나랑 유미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연이은 팩트에 다나는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너무 혼내듯이 말하는 건가 싶었지만 이런 건 따끔하게 말해줄 필요가 있다. 게임하고 다르게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네가 동료들을 지키려고 무리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넌 기동성을 살려 싸우는 창술사지 중갑으로 무장한 기사가 아니잖아? 조금만 잘못해도 크게 다칠 수 있어.”
기동성을 살리기 위해 가벼운 방어구를 착용한 대가는 크다.
원작 게임에서도 창술사는 긴 사거리와 특유의 방어 무시 능력, 그리고 강력한 스킬들로 뛰어난 근접 딜러라 평가받았지만 반대로 생존성은 매우 취약한 직업이었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좀 더 실력을 쌓은 뒤 해도 안 늦어. 그러니까 지금은 동료들하고 호흡을 맞추는 것에 집중해.”
“……나 그렇게 혼자 놀아?”
“그래, 엄청 혼자 놀더라. 네 유일한 단점은 팀워크가 안 좋은 거야. 팀워크만 잘 맞추면 넌 실버나 골드 등급만큼 잘 싸울걸?”
순간 풀이 죽어 있던 다나였으나 곧 화색이 되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더니 곧 시선을 돌렸다.
“고, 고마워…… 앞으로 더 잘해볼게…….”
그 모습이 뭔가 순한 고양이 같아서 무척 귀여웠다. 잇따른 전투와 열성적인 조언으로 그녀와 꽤나 가까워진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민데…….”
“네, 네에……!”
다나가 쓴소리를 많이 들어서 그럴까. 유미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어느덧 무릎 꿇고 앉아서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아니 이러니까 내가 진짜 혼내는 것 같잖아. 나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도록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했다.
“일단 지금 쓸 수 있는 스킬 중에서 즉발 슬롯에 등록한 게 뭐야?”
“아…… 암흑이랑 원귀예요…….”
즉발 슬롯 두 개라. 그러면 마력이 20은 넘긴다는 소리군.
암흑과 원귀 둘 다 괜찮은 스킬이지만 암흑의 경우 이 던전과 그리 어울리지 않는 스킬이다.
문제점을 파악한 나는 유미를 보며 이야기했다.
“보통 두 사람을 보조할 때 암흑을 많이 쓰지? 여기서도 그랬고.”
“아, 네…… 원귀는 사거리가 짧아서 자주 쓰지 못하거든요…… 그런데 이곳 적은 어쩐지 암흑이 잘 통하지 않아서…….”
유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암흑의 효과를 떠올렸다.
암흑
액티브
요구 스탯: 신념 11
비용: 마력 20
사용 조건: 주술 무기 착용
습득 방법: 주술사 선택 시 기본 스킬로 습득, 운명 항목에서 습득
효과: 3초간 캐스팅한 뒤 적의 시야를 암흑으로 뒤덮는다. 전방 20미터 이내에 있는 적에게만 사용할 수 있으며 대상은 5초 동안 실명 상태가 된다. 실명 상태가 된 적의 공격은 70퍼센트의 확률로 자동 회피된다.
자동 회피란 굳이 회피 동작을 취하지 않아도 공격이 알아서 비껴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암흑은 꽤나 쓸 만한 디버프 스킬이다.
실명 상태가 된 대상은 비단 공격을 못 맞출 뿐만 아니라 앞을 못 봐서 플레이어를 제대로 추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력이 발달된 적에게만 통용되는 효과다.
애초부터 눈이 나쁘면 실명 효과를 걸어도 하등 소용없는 것이다. 당장 이 던전의 적들이 그렇다.
“고블린들은 원래 시력이 안 좋거든. 야행성인데다가 동굴처럼 어두운 곳에서만 생활해서 시력이 퇴화된 대신 청각이랑 후각이 발달돼 있어.”
“아! 그래서 우리가 기습할 때도 바로 눈치 챘던 거구나!”
이전의 경험을 떠올리며 다나가 말했다.
그녀 말대로다. 은신 스킬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고블린들을 기습하는 건 불가능하다. 플레이어가 가까이 다가가면 소리와 냄새로 곧장 파악하기 때문이다.
“맞아. 놈들은 눈을 감고도 얼마든지 적의 위치를 분간할 수 있어. 그런 놈들한테 암흑 주문을 사용하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지.”
“그, 그랬군요…… 저,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내 설명이 이어질수록 유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무리도 아니다. 동굴 속에서 사는 적이니 어둠에 익숙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유미는 그런 당연한 일을 인지하지 못하고 오직 동료들을 돕겠다는 생각으로 암흑 주문을 써왔다. 자신의 바보 같은 모습이 부끄러울 만도 하다.
“뭐 누구나 다 실수 하는 법이니까 너무 창피해하진 마. 나도 처음 고블린 상대할 때는 기습 한 번 넣겠다고 별 헛짓을 다 했었으니까.”
유미의 수치심을 덜어주기 위해서 난 초보였던 시절을 회상했다.
그때의 난 지금 생각해도 추하기 그지없다. 고블린에게 기습이 안 통한다는 것도 모르고 별의 별 수단을 다 썼었지.
심지어 생김새가 비슷하면 동족으로 착각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피부색을 초록색으로 바꾸기도 했다.
“크, 크흡……!”
“흐흐흣……! 그게 뭐야……! 완전 바보 같아~! 으힛! 으하하하핫!”
내 한심하던 초보 시절을 이야기하자 린크와 다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나도 고개를 둘린 뒤 남몰래 웃고 있었다.
“감사해요 다키님…… 저 같은 걸 굳이 위로해주시고…….”
그 와중에 유미는 홍조를 띄우면서 말했다. 본인을 달래주려고 웃음거리가 된 내게 썩 고마움을 느낀 모양이었다.
“너 같은 거라니. 왜 그렇게 스스로를 폄하해? 유미 네가 파티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인데.”
“저, 정말요……?”
그런 유미를 보면서 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법이다. 그녀가 내게 고마워하고 있는 지금이야 말로 호감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거다.
“그래. 네가 이전 전투에서 활약하지 못한 건 어디까지나 내 판단이 잘못돼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포지션을 바꿔보자.”
유미의 본래 역할은 후열에서 원거리 딜링을 가하는 것. 하지만 유일한 딜링 스킬인 원귀는 사거리가 짧고 암흑과 물귀신은 중거리형 디버프형 스킬이다.
그렇다면 다소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그녀가 앞으로 나와 줘야 한다.
기본적인 역할 또한 원딜이 아닌 서포터로 바꾸고 중간에서 근접 딜러들을 돕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내가 최전방에 설 테니까 다나와 유미가 내 뒤에서 공격해. 다나는 앞에 나와서 공격하기 보단 유미를 지키는 데에 집중하고.”
내 설명에 다나와 유미는 서로를 보면서 슬쩍 미소 지었다.
이로써 다나는 적을 죽이고 싶어도 마음대로 뛰쳐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앞서가는 순간 유미가 공격에 노출될 테니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자리를 지키겠지.
유미 또한 다나의 보호를 받으며 안정적인 대열을 유지할 것이다. 함께 대열을 지킴으로써 두 사람은 보다 완벽해질 수 있는 것이다.
“나나랑 린크는 원래 자리 그대로 지키면 돼. 대신 나나가 생각보다 많이 노는 것 같으니까 원거리 견제도 같이 맡아줘.”
나도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인데 찬란한 광채에는 약소하게나마 데미지를 주는 효과가 있다.
사용자 신념의 1.5배 밖에 안 되는 피해를 주기에 나나 기준으론 데미지가 고작 30 밖에 안 나온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멀리 있는 적을 방해하기는 충분하다.
하물며 나나는 예측샷도 잘 하고 조준 실력도 나쁘지 않아서 쏘는 족족 잘 맞을 거다.
“흠 좋아요! 힐러한테 딜 시키는 거 아니라지만 없으면 저라도 해야죠!”
“뭐 내가 잘 싸우면 어지간해선 괜찮을 거야.”
“그야 물론이죠~ 믿고 있습니다!”
힐러가 가장 필요한 상황은 탱커가 전열에 섰을 때다. 탱커는 필연적으로 피해를 받게 되고 그에 따라 생명력도 지속적으로 감소하니까.
허나 우리 파티는 근딜인 내가 전열에 서는 대형을 갖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힐 받을 상황 자체가 잘 안 나온다.
다른 사람들이 공격당하기도 전에 내가 다 죽여 버리니 말이다.
그렇게 휴식 시간 겸 재정비 시간을 가진 우리는 여신상을 벗어나 탐사를 재개했다.
마지막으로 전투를 벌인 장소에서 꽤 멀어졌는데 이후에도 별 다른 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곳곳에서 죽은 고블린들의 사체가 발견됐다.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있나?”
“그렇겠지. 길드에서도 대규모 토벌 퀘스트를 냈다고 하니까.”
고블린 시체를 살펴보며 말하는 다나의 말에 린크가 수긍했다. 그에 나는 문득 궁금증이 도져서 그에게 물었다.
“아침에 왔을 때는 어땠어? 다른 사람들도 좀 있었나?”
“아, 네. 저희가 들어올 때만 해도 여기저기 사람들이 자주 보였어요. 꽤 높은 등급의 모험가들도 섞여 있었고요.”
모험가들은 주로 아침 일찍부터 활동한다. 나와 나나가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수많은 모험가들이 남쪽 동굴로 몰린 것이었다.
그러면 몇몇 실력 있는 모험가들이 고블린 무리를 뚫고 중반부로 넘어간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실버 정도면 후반부에 있는 적들은 몰라도 중반부에 있는 거미들은 그냥저냥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 수를 다 감당하지는 못하겠지만.
“저, 저기 다키님…….”
내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응? 어, 유미야. 뭐 할 말 있어?”
어느덧 유미가 내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158cm로 꽤 아담한 편이어서 나와 눈을 마주치려면 고개를 꽤 들어야 했다.
그 조그마한 체구랑 위로 향하는 시선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헤벌쭉 웃을 뻔했다.
“주, 중요한 말은 아닌데요…… 당장 전투가 없는 것 같아서…… 혹시 괜찮으시면 뭐 좀 여쭤 봐도 될까 하고…….”
내가 고개를 돌리자 유미는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면서 어렵게 이야기했다.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너무 개인적인 질문만 아니면 돼.”
부탁을 승낙하자 유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한 차례 헛기침을 한 뒤 동경심이 깃든 어조로 물었다.
“다키님은 어쩜 그렇게 아는 게 많으세요……? 주술에 대해서도 저보다 잘 아시는 것 같고, 싸움도 잘 하시고…… 다키님처럼 대단한 사람은 처음 봐요…….”
너무 아는 척 했나. 생각해보면 유미 입장에선 검사인 내가 주술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는 게 수상쩍어 보일지도 모른다.
이번엔 또 어떻게 둘러댈까 고민하다가 그냥 겸허하게 대답했다.
“그냥 여기저기서 쌓은 잡지식이야. 오래 모험하다보니 알기 싫어도 머릿속에 들어오더라고.”
“그런 것치곤 많이 젊으신 거 같은데…… 저희랑 별로 차이 안 나는 거 아니세요……?”
이야기를 들은 유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로 25살인데 모험은 진짜 어렸을 때부터 했어.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거든.”
“그렇군요…… 나이 차이는 별로 안 나지만 저희보다 훨씬 선배셨네요.”
뭔가 유미는 내가 그동안 살아온 인생을 머릿속에 그리는 듯했다. 저 심오한 표정으로 보아 온갖 영웅담들을 상상하고 있으리라.
점점 오해가 커지는 것 같았으나 그냥 놔두기로 했다. 마음대로 오해해주는 사람한테 굳이 현실을 가르쳐줄 필요는 없지.
“그러고 보니 너희는 몇 살이야? 다들 동갑?”
“앗 아뇨. 저랑 다나가 스무 살이고, 린크는 저희보다 한 살 많아요. 요르나는 한 살 적고…….”
그러면 린크 21, 유미랑 다나 20, 요르나가 19인가.
나이는 조금씩 차이나지만 서로 이야기하는 걸 보면 오빠동생 할 거 없이 그냥 친한 친구처럼 지내는 모양이다.
그보다 유미도 나랑 5살 차인가. 나이차가 적은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어리진 않았다.
다들 너무 늅늅해서 미성년자인 줄 알았는데 스무 살 안팎이라고 하니 좀 의외였다. 원작 게임에선 유미의 나이를 따로 명시해주지 않았기도 하고.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살짝 흑심이 도졌다.
“이렇게 만난 것도 우연인데 우리 그냥 편하게 얘기할래?”
“편하게라면 어떻게요……?”
“어, 으흠…… 다키님은 너무 딱딱하니까 친근하게 오빠라고 부른다거나…….”
눈을 깜빡이는 유미를 보며 은근슬쩍 말했다. 그러자 뒤에서 걷고 있던 나나가 곧장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다키님?! 제가 그렇게 정 없어 보였단 건가요?!”
“응? 아, 아니 딱히 그렇단 건 아니고…….”
“게다가 오늘 처음 만난 주제에 다키님한테 오빠라니! 저도 깍듯이 대하는데!”
아무래도 나나는 유미가 자신보다 친근하게 대하는 게 불만인 모양이다.
설마 질투하는 건가. 나나의 성향을 생각하면 그러 리 없을 것 같지만 확실히 초면부터 오빠라 부르는 건 내가 생각해도 좀 오버한 것 같았다.
“으, 으음…… 그러면 오빠 말고 다른 호칭으로 불러도 될까요……? 좀 더 존경하는 의미를 담아서요…….”
“존경할 것까지야 없다만, 예를 들면 어떤 거?”
내 물음에 유미는 고개를 푸욱 숙이더니 살며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스승님…… 이라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