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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08화 (108/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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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한 자의 둥지

“그나저나 슬슬 출발할까? 싸우자마자 움직이느라 힘들겠지만 서둘러야할 거 같거든.”

“맞아!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요르나는 거미줄에 묶여서 떨고 있을 거라고! 얼른 가자!”

내 제안에 다나가 힘차게 소리쳤다. 유미와 린크 역시 비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거미줄에 묶여 있을지, 이미 먹히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절망적인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겠지.

나 또한 그 요르나가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그녀도 다른 두 사람처럼 유미의 절친일 텐데, 만에 하나 거미들한테 잡아먹히면 유미가 큰 충격을 받지 않겠는가.

“조금만 더 가면 본격적으로 거미들 영역이 나와. 거기서 한 번 찾아보자.”

“네 다키님……!”

내가 통로 너머를 가리키며 말하자 린크가 목소리에 힘을 줬다.

다나와 달리 그는 현실적인 생각을 할 줄 아는 듯했다. 저 무거운 표정이 그 증거이리라. 어느 누구보다 초조해 보이는 그는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앞장섰다.

그리 하여 우리는 격전을 벌인 종유석 지대를 벗어나 동굴 안쪽으로 나아갔다.

고블린들의 시체를 루팅하지 않았다. 놈들의 귀를 자를 시간에 요르나가 잡아먹히면 큰일이니까. 중간에 재정비할 시간까지 생각하면 아이템 파밍은 지양하는 게 좋을 듯했다.

나나는 뉴비들 때문에 이게 무슨 손해냐며 불평했으나 구태여 파밍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다 보니 그녀도 나름 융통성을 발휘한 것이리라. 단순히 내가 했던 보상 얘기 때문에 고블린 귀에 미련이 없어진 걸지도 모르지만.

한동안 어둡고 음침한 동굴을 나아가던 도중이었다. 우리는 지하수가 흐르는 지형에 접어들었다.

별 다른 위협은 없었지만 급류가 세서 꽤 시끄러웠다. 이런 곳에서 기습해온다면 소리로는 알아차리지 못할 듯했다.

“…….”

다른 사람들이 잘 따라오나 뒤를 확인해봤는데 문득 유미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왜 저렇게 기가 죽은 거지? 평소에도 조용조용한 성격이지만 지금은 유독 안색이 어두워보였다.

비단 요르나를 걱정해서는 아닌 듯했다. 우려나 불안 보단 죄책감, 혹은 무력함 등이 엿보였다. 나도 평생을 달고 살아왔던 감정이어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왜 그래요 유미 양? 아까부터 침울한 얼굴로 있고.”

“네, 네? 제가요……?”

내가 유미를 보며 걱정할 무렵 나나가 입을 열었다. 마치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유미에게 질문을 건넨 것이었다.

“어디 안 좋은 데 있으면 얘기해 봐요. 회복 주문 걸어줄 테니까. 질병도 치료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아,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괜찮으니까 신경 쓰실 필요없어요…….”

그리 말하며 유미는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곁눈질로 그녀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살펴봤는데 자꾸 힐끗힐끗 뒤쪽을 보고 있었다.

그 말은 곧 다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나와 린크가 전열, 나나와 유미가 중간, 다나가 후열을 맡고 있으니까.

이 와중에 다나를 신경 쓸 이유는 하나 밖에 없다. 분명 조금 전의 전투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까 다나 양이 화살 맞은 것 때문에 그래요?”

“……!”

눈치 빠른 나나도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녀는 다나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지막하게 물었다.

다른 두 사람은 물소리 때문에 안 들리겠지만 나는 두 사람의 대화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어서 쉽게 엿들을 수 있었다.

“저…… 그게…….”

“뭐 어려운 얘기도 아니잖아요. 그냥 솔직하게 털어놔 봐요. 그래야 해결법을 찾던가 하지 않겠어요?”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고민하는 유미. 나나는 그런 유미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나나의 연이은 권유에 결국 유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다나가 화살 맞은 게 저 때문인 거 같아서…… 계속 다나에게 미안했어요…….”

“에이, 그게 왜 유미 양 탓이에요. 창쟁이가 혼자 나대다가 맞고 온 거지.”

“그, 그렇지 않아요……! 다나는 자기 역할을 열심히 하려 한 것뿐인걸요. 그런데 전 제 역할도 제대로 수행 못하고…… 그래서 다나가 다친 거예요…….”

나나 말대로 다나가 다친 이유는 혼자 무리하게 뛰쳐나갔기 때문이다. 허나 유미가 원거리 견제를 잘 했다면 그녀도 다치지 않았을지 모른다.

애당초 원딜러로서 유미가 부여받은 역할을 적 원딜들을 견제하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내 잘못도 크다. 유미에게 원거리 견제를 맡긴 건 다름 아닌 나였으니 말이다.

‘당연히 원작 게임이랑 같은 스킬셋이겄거니 하고 맡겼는데…… 내가 너무 안일했어…….’

난 당연히 유미가 도깨비불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원작 게임에선 플레이어와 NPC를 가리지 않고 주술사라면 다들 필수적으로 찍는 스킬이었으니까.

하지만 주술사라고 해서 꼭 도깨비불을 찍을 필요는 없다. 비록 원거리 견제에는 도움을 주지 못한 유미지만 원귀와 물귀신 등으로 근접 딜러들을 훌륭하게 보조했다.

처음부터 내게 근딜들을 보조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은 건 이 때문이었다. 애당초 그녀는 원거리 딜링에 특화된 스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파티장이라면 당연히 파티원들의 스킬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본적인 일을 빼먹었다.

처음부터 스킬을 확인하고 유미에게 보조 딜링을 지시했더라면 전투의 양상이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그래도 유미 양이 있어서 우리가 좀 더 편하게 싸웠잖아요. 다들 조금씩 실수하기 마련이니까 자책할 필요는 없지 않아요?”

“아뇨…… 전 두 분과 만나기 전부터 계속 도움이 안 됐어요…… 주술로 적들 시야를 가리려 해도 전혀 통하지 않았고…….”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니 유미는 그간 담아뒀던 속마음을 하나둘씩 털어놓았다.

요컨대 유미는 우리와 만나기 전에도 계속 무력함을 느꼈다는 듯하다.

가족 같은 친구가 죽을지도 모르는 마당인데 자신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있다. 본인이 쓸모없어서 린크와 다나도 크게 다쳤다.

그 사실이 너무나 괴롭다. 만약 요르나를 구하는데 실패한다면 그건 틀림없이 내 책임일 거다.

유미의 이야기는 점점 부정적으로 흘러갔다. 가뜩이나 자기비판적인 기색이 강했는데 아예 자학에 가까울 정도로 스스로를 몰아가는 것이었다.

누가 보면 쓸데없는 푸념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유미의 심정이 이해됐다.

아무리 노력해 봐도 잘 되지 않을 때 찾아오는 불안감과 무력함.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럼 뭐 답 나왔네요.”

“네……?”

한참이나 이야기를 듣던 나나가 시원스레 말했다.

마치 모든 해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입을 열자 유미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못하는 건 그냥 놓아버려요. 굳이 안 되는 거 가지고 매달릴 필요 없잖아요?”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이야기한 나나. 그에 유미는 한 차례 눈을 깜빡이더니 곤란한 어조로 반박했다.

“하, 하지만 다키님이 저한테 원거리 견제를 하라고…….”

“그거야 다키님이랑 상의해서 바꾸면 되죠. 유미 양은 그것보다 더 잘하는 게 있잖아요? 잘하는 일 두고 못하는 일 할 이유는 없잖아요.”

나나의 말에 유미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치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물건을 자기 방에서 발견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제가 잘할 수 있는 것…….”

“그래요. 유미 양이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해요. 그러면 유미 양도 파티에 도움이 될 테니까요.”

연이은 나나의 격려에 유미의 표정이 어느 정도 풀어졌다. 거듭 나나가 사람을 잘 다룬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 역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재정비 시간에 유미의 포지션을 다시 짜봐야겠다. 마침 통로를 빠져나온 우리는 휴식처를 발견했다.

“잠깐 얘들아.”

“응?”

“왜 그러세요?”

길을 걷던 나는 문득 멈춰서 어떤 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일행들은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고, 난 그들이 보는 앞에서 쾌도로 벽을 베었다.

“잠깐 정비 좀 하고 가자.”

촤아악!

스르르…….

“……! 벽이 없어졌어……!”

“이게  무슨…….”

“설마 환영 주문……?”

안개처럼 사라지는 벽을 보며 세 사람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벽이 사라지자 좁은 통로가 나왔다. 나는 일행들을 이끌며 그 안으로 들어갔고, 통로 너머엔 비교적 넓은 공간이 있었다.

푸른색 꽃이 가득 피어 있는 몽환적인 방. 초반에 들어갔던 세이브 포인트처럼 중앙에 여신상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꽃들이 자체적으로 발광하여 무척 밝았다.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이야?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던 거고……?”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다나가 질문했다. 다른 두 사람도 해답을 요구하듯이 내게 시선을 보내왔다.

그에 나는 태연한 기색을 유지하며 이야기했다.

“간혹 던전엔 여기처럼 안전한 장소가 있거든. 이전에 갔던 던전이랑 구조가 비슷해서 한 번 찾아봤는데 역시 있더라.”

“하지만 다키님이 베기 전까진 아무도 벽이 환영이었다는 걸 눈치 못 챘는데 어떻게…….”

“마, 맞아. 애초에 환영이었다면 유미가 먼저 알아챘을 거라고. 그렇지?”

내 설명에도 납득할 수 없는지 린크와 다나가 의혹을 드러냈다. 다나의 물음에 유미 또한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뉴비들이라서 쉽게 넘어갈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확실히 신내림 은혜를 가지고 있는 유미 보다 먼저 발견한 건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대충이나마 설명을 덧붙이려는 그때, 나나가 나서서 세 사람에게 말했다.

“하아…… 이래서 눈치 빠른 애송이들은 싫다니까요. 너희들, 너무 많이 알면 다친다는 얘기 못 들어봤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죠……?”

“영업 비밀이니까 꼬치꼬치 캐묻지 말라 이거예요. 원래 이건 아무한테나 안 보여주는 건데 상황이 이러니까 다키님이 특별히 보여준 거라고요. 알아듣겠어요?”

세 사람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하는 나나. 그 위압적인 어투에 그들은 다시 한 번 위축됐다.

관점에 따라선 그들은 나에게 질문하는 것 자체가 실례가 될 수 있는 입장이다. 내가 빈정 상해서 같이 안 가겠다고 하면 곤란해지는 건 그들이니까.

굳이 이렇게까지 찍어 누를 필요야 있겠나 싶었지만 나 역시 이것저것 캐물으려 하면 귀찮아지니 지금은 나나에게 동조하기로 했다.

“자꾸 숨기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지금은 좀 눈감아줄래? 나중에 기회 되면 얘기해 줄 테니까.”

“으응…… 알겠어…….”

“저, 저희야 말로 자꾸 곤란하게 해서 죄송해요…….”

다시 한 번 사과하는 그들에게 손사래를 치면서 나는 여신상을 활성화했다.

푸르게 빛나는 여신상과 제단을 가리키며 사용법을 알려주자 세 사람은 이번에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생명력, 기력, 마력이 순식간에 회복되는 경험은 해본 적이 없을 테니까. 그들 눈엔 여신상의 효과가 기적처럼 느껴질 것이다.

“당신 진짜 뭐하는 사람이야? 선택받은 용사 뭐 그런 거라도 돼?”

참다못한 다나가 내게 질문했다. 나나의 경고도 있으니 파헤치려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기색이었다.

“그래, 난 사실 여신님한테 선택받은 투사고 세상을 구원하는 게 목적이야.”

“지, 진짜?”

“아니 구란데.”

장난스러운 내 대답에 다나가 뭐야~! 하고 소리쳤다.

이걸로 그녀는 내가 말해줄 생각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이걸 어쩐담. 난 이미 사실을 말해버렸다.

가끔은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게 의심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듯했다. 잘못하다간 미친놈 취급 받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여기서 잠깐 재정비하고 다시 움직이자. 이 앞은 진짜 힘들 테니까 단단히 준비하는 게 좋아.”

“어이, 그 앞은 지옥이다.”

“……갑자기 뭔 소리야?”

내 얘기가 끝나자마자 나나는 진지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저건 또 무슨 드립인가 싶었지만 그래 뭐, 지옥이라면 지옥이지. 저 세상 같은 배경에 마귀 같은 몬스터들이 끝없이 나오는 장소니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여신상 주위에 둘러앉아 정비 시간을 가졌다.

재정비라고 해도 딱히 할 건 없었다. 나와 다나, 린크는 무기 상태를 점검했고 나나와 유미는 그냥 편히 앉아 휴식을 취했다.

말이 재정비지 한숨 돌리기 위한 휴식 시간인 것이었다. 태평하게 노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 또한 피로도를 관리하는 것이니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다.

물론 서로 말없이 앉아 있기만 한 건 아니었다. 우선 내가 일행들을 둘러보면서 포지션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 이유로 포지션 변경이 좀 필요할 것 같아. 그전에 다들 본인이 쓸 수 있는 스킬 좀 말해줄래?”

조금 전 전투를 통해 부족했던 점, 개선해야할 점들을 이야기한 후 일행들에게 말했다. 그에 린크와 다나, 유미가 차례대로 자신들이 가진 스킬을 이야기해줬다.

“전 도발만 쓸 수 있어요……. 따로 훈련받을 기회가 없어서…….”

“난 삼연격이랑 파고들기, 그리고 재빠른 기상. 자경단에 있을 때 배운 스킬이야.”

“저는 암흑이랑 원기, 그리고 물귀신이에요…… 두 개가 더 있기는 한데 아직 완벽히 숙달하지는 못했어요…….”

린크는 모험가가 되기 전엔 일개 농민이었고, 유미는 어렸을 적부터 주술을 배웠다고 한다.

다나는 자경단 출신이었는데 비단 훈련만 받았을 뿐만 아니라 수차례 전투 경험을 쌓았다고 한다. 어쩐지 전투 센스가 나쁘지 않더라니 다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세계 자경단은 야생동물이나 약한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일상이고 더 나아가선 도적들하고도 싸운다. 그런 나나가 세 사람 중 가장 역량이 뛰어난 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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