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불경한 자의 둥지
“케헤에에엑!”
“크케엑!”
“케흐윽……?!”
내 앞을 가로막는 고블린들을 모두 썰어버리며 원딜들이 포진해 있는 장소에 도달했다.
“쿠가 얀훈다!!”
마침 샤먼은 두 번째 화염탄을 완성한 참이었다. 내가 빠르게 달려가자 놈도 대응책을 마련해둔 것이었다.
“죽고 싶어서 발악을 하는구나.”
“케륵?!”
놈이 이글거리는 불덩이를 던지려는 순간 나는 벨트 주머니에서 기름병을 꺼내들었다.
지금 쓰기엔 좀 아깝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망설일 수 없었다. 화염탄이 샤먼의 손을 채 떠나기도 전에 놈에게 기름병을 집어던졌다.
콰차아아앙!
“케헤엑?! 크헤에에엑!!”
기름병이 깨지며 샤먼의 몸이 흠뻑 젖었다. 그에 따라 손 안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놈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고블린 샤먼. 항상 고블린들 뒤에 숨어서 위험한 공격 마법을 사용하는 귀찮은 적이다.
보통 초보자들은 전열에 있는 고블린 무리도 상대하기 힘들어 샤먼까진 신경 쓰지 못한다.
그러다가 주문에 맞고 죽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놈의 영창을 막는 방법은 간단하다.
지금처럼 화염탄을 사용할 때 기름병을 던지면 된다. 그러면 놈이 영창한 화염탄이 몸에 옮겨 붙어서 오히려 샤먼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불을 다루는 몬스터 주제에 화염 내성은 전혀 없어서 한 번만 성공해도 손 놓고 구경할 수 있다. 이건 화염을 다루는 마법사들에게 대부분 통용되는 방법이다.
실제로 내 앞에 있는 샤먼도 기름병에 맞자마자 바닥을 뒹굴었다. 온몸이 불길로 뒤덮여 소사하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이다.
기름병은 화염피해를 100퍼센트 증가시키는 효과도 있으니 놈은 곧 화염 데미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알아서 죽을 거다.
그렇게 샤먼을 처치한 나는 슬링어들을 향해 달려갔다.
샤먼도, 후열을 지키는 고블린도 모조리 죽였다.
이제 남은 건 두 마리의 슬링어들 뿐. 원거리에선 몹시 위협적인 놈들이지만 여느 원딜들이 그렇듯 근접전에선 약해빠졌다.
“크히이이잇!”
콰아앙!!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려는 걸까. 슬링어 중 하나가 자신들 주위에 독 안개 폭탄을 던졌다.
폭발과 함께 또다시 안개 지대가 형성됐고 주위가 진녹색으로 물들었다. 숨만 쉬어도 고통스러울 것 같은 맹독이 사방에 깔린 것이었다.
허나 내겐 소용없다.
폭탄이 터질 때는 범위 밖에 있었을 뿐더러 놈들의 독 안개는 나에게 피해를 주지 못한다.
말했듯이 독왕의 정수의 효과로 내 신체 스탯 보다 낮은 중독 수치를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후의 수단치곤 너무 조악한 거 아니냐?”
“크케엑……?!”
내가 독 안개를 뚫고 들어오자 슬링어들은 당황을 금치 못한다. 서둘러 돌팔매로 대응하려 한 놈들이었지만 내 공격보다 빠를 수 없었다.
촤악! 촤아악!!
“끼헤에에엑!”
“크기익……!”
연달아 날아간 참격이 슬리어들을 도륙했다. 한 놈은 내장을 쏟으면서 쓰러졌고 다른 한 놈은 머리통의 반이 날아갔다.
길게 늘어진 창자와 반으로 썰린 뇌가 흩날리는 광경을 보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욕지기가 올라오는 것을 참으면서 나는 일행들의 상황을 살폈다.
“쿠워어어억! 크허어어억!!”
콰아앙! 콰앙! 콰아앙!
어떻게 보나 승기는 우리 쪽으로 기울었지만 홉 고블린의 저항도 만만찮았다.
놈은 광분한 채로 여기저기 둔기를 휘둘러댔다. 둔기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주위의 종유석들이 산산조각 났고 이를 막아낸 린크는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뭐야 이 놈?! 왜 이렇게 갑자기 팔팔해진 거야?!”
“힘 좀 써 봐요 탱커! 이러다가 우리도 맞겠어요!”
“크흐윽! 노력하고 있어요……!”
거센 공격에 린크가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자 나나와 유미도 제대로 영창을 하지 못했다.
린크 혼자서 홉 고블린의 맹공을 막아내는 건 무리였다.
그러다 보니 나나와 유미도 스스로 회피를 해야 했고 이동 영창이 없는 그녀들은 계속 주문을 캔슬할 수밖에 없었다.
“원귀도 통하지 않아요……! 막을 수가 없어요……!”
간신히 즉발 주문으로 원귀를 보낸 유미였지만 그마저도 소용없었다. 아니, 비단 그녀 주술뿐만 아니라 근접 멤버들의 공격도 홉 고블린을 저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 홉 고블린은 자신의 특수 능력 중 하나인 끈질긴 생명력의 효과를 받고 있을 테니까.
끈질긴 생명력은 놈의 생명력이 일정 수치 이상 내려갔을 때 순간적으로 무적 효과를 부여하는 스킬이다.
단기간이긴 하지만 그 어떤 피해도 받지 않고 인내력도 감소하지 않아서 마음껏 날뛸 수 있게 된다.
홉 고블린도 이러한 사실을 알기에 더욱 흉포하게 공격하는 듯했다.
“쿠워어어억!! 키 칼루! 키 칼루!!”
“……?!”
카앙! 쾅! 카앙! 카가앙! 콰과앙!
괴성을 내지르며 발광하는 홉 고블린. 놈은 한 놈이라도 끌고 갈 생각인지 린크에게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다.
이미 린크의 가드 게이지는 바닥났을 거다. 저렇게나 매서운 공격은 연달아 방어했으니 게이지가 남아날 리 없다.
“쿠오오오옷!!”
끝장을 내겠다는 듯이 둔기를 치켜드는 홉 고블린. 내가 막아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거리가 멀다. 나름 전속력으로 달려갔는데도 스킬 사거리가 닿지 않는 것이었다.
이럴 때 돌진기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 내심 아쉬움을 토로하며 나는 린크에게 소리쳤다.
“린크! 놈이 내려칠 때를 노려! 너한테 닿기 직전에 방패로 쳐내는 거야! 지금부터 하나 둘 셋 세고 휘둘러!!”
내가 도울 수 없다면 스스로 극복해야만 한다.
나는 제발 린크가 성공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목청껏 외쳤다.
나나가 있으니 죽지는 않겠지만 맨몸으로 저걸 맞으면 결코 무사하지 못할 거다. 치명타라도 터지는 순간엔 린크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으아아아아!!”
내 지시를 받은 린크가 필사적으로 방패를 휘둘렀다.
반쯤 기도하는 심정으로 말했지만 린크는 내 설명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의 방패가 새하얀 보호막으로 감싸이더니 홉 고블린의 일격을 튕겨낸 것이었다.
카아아아앙!
“크후욱?!”
방어 패링이 발동되자 홉 고블린의 자세가 무너졌다. 놈의 동공이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다. 자신의 공격이 튕겨나갈 것이라곤 생각조차 못한 기색이다.
“잘 했어, 린크!”
린크가 방어 패링을 시도하는 사이 나는 홉 고블린의 배후로 접근할 수 있었다.
정말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나는 일격에 죽일 생각으로 파고들기를 사용했다.
“쯔아아아앗!!”
촤아아아악!
기합과 함께 전력으로 올려치기를 가했다. 놈의 사타구니로 파고든 쾌도는 뼈와 내장을 가르며 머리까지 치고 올라갔다.
그리고 내 동작이 끝날 무렵엔 홉 고블린이 반으로 갈라져 바닥에 쓰러지고 있었다.
털썩!
거구의 단면에서 피와 내장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다. 역겨운 광경이었으나 동굴 안에는 이미 쇠 냄새가 진동했기에 별로 놀라울 것도 없었다.
“하아, 하아, 하아……!”
“이, 이긴 거야……?”
홉 고블린이 쓰러지자마자 일행들도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린크는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르는 기색이었다. 방패를 쥔 그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으며 반으로 썰린 홉 고블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나도 마찬가지. 린크처럼 떨지는 않았지만 온몸에 힘이 풀린 듯했다. 그 와중에 유미는 나나에게 안긴 채 휘청거리고 있었다.
서른에 가까운 적들을 한 번에 상대했으니 지치는 것도 당연하다. 신체적인 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피로도 상당하겠지.
일행들의 상대를 스윽 훑어본 뒤 나는 숨을 고르며 이야기했다.
“후우…… 힘든 전투였는데 다들 잘 해줬어. 너희가 오더를 잘 따라준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이긴 거야.”
“이겼어……! 우리가 이겼다고! 와하아아아!”
내 격려에 다나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녀는 아예 자리에 드러누워서 양팔 양다리를 뻗은 채 소리쳤다.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강적을 쓰러뜨렸다. 물론 본인의 힘만으로 쓰러뜨린 건 아니지만 그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저희 덕분이라뇨……! 전부 다키님 덕분이죠! 다키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많은 적을 상대로 어떻게 싸웠을지……!”
뒤늦게 정신줄을 잡은 린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세 사람, 아니, 설령 힐러인 나나가 끼더라도 그들만으론 이 정도 수의 고블린을 상대로 절대 이기지 못했으리라.
허나 그들의 활약이 무의미한 건 아니다.
각자가 맡은 바를 충실히 수행해줌으로써 나도 이리저리 활개 칠 수 있었던 거다.
만약 이들 중 한 명이라도 없었다면 나도 꽤 귀찮은 싸움을 해야 됐을 거다. 아무리 잡몹이라 해도 30마리 이상 모여 있으면 힘겨운 법이니까.
“나도 내가 맡은 역할을 열심히 한 것뿐이야. 파티 플레이인데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가 어디 있어?”
“무슨 소리야! 다키님이 스무 마리는 잡았잖아! 혼자서 샤먼이랑 홉 고블린도 쓰러뜨리고! 이건 명백히 당신 공이라고!”
“다나 말이 맞아요. 애초에 다키님의 지휘가 없었다면 홉 고블린이 달려든 시점에서 하나둘 씩 당했을 거예요……. 다키님이 뛰어나서 저희도 해낼 수 있었던 겁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이야기하자 다나와 린크가 더욱 거세게 반론했다.
이거 참 쑥스러운 걸. 나한테 고블린 쉽게 잡는 건 너무 당연한 얘기라 이런 칭찬이 영 익숙하지가 않았다.
마치 나이 스무 살 먹고 받아쓰기 100점 맞은 걸로 칭찬 받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일행들은 나에 대한 존경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 전에도 느낀 거지만 다키님처럼 싸우는 분은 본 적이 없어요…… 실버 등급도, 아니…… 골드 등급조차 다키님처럼은 못할 거예요…….”
유미도 조심스럽게 다가와 이야기했다. 긴 앞머리 너머로 보이는 보라색 눈동자엔 동경의 시선이 담겨 있었다.
발갛게 물든 뺨도 비단 내 차림새가 민망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내게 호감과 존경심을 느끼는 듯했다.
내 최애캐가 날 무슨 대단한 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팬티 벗고 소리 지르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대체 무슨 등급이기에 이렇게 잘 싸우는 거야? 골드? 플레티넘?”
“설마 다이아 등급이신가요……?”
어느덧 세 사람은 내 등급 맞추기에 푹 빠져 있었다. 차마 내가 초보 모험가라곤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어색하게나마 진실을 전했다.
“사실 나 너희들 보다 등급 낮아. 이게 첫 임무고.”
“네……?”
“방금 뭐라고…….”
신나서 얘기하던 세 사람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나무를 깎아 만든 증패를 보여줬다.
“말도 안 돼! 그렇게 싸워놓고 언랭크라고?! 사기 치지 마!”
“저, 저희 놀리시려고 그러는 거죠……?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으신 건가요……?”
“신분을 숨겨야 되는 사정이라거나…….”
나무 증패를 확인한 세 사람은 경악을 터뜨렸다. 다나는 말도 안 된다면서 내 말을 부정했고 린크와 유미는 수상쩍다는 듯이 날 훑어보았다.
그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차분히 이야기했다.
“그냥 예전부터 싸우는 일을 해서 그런 거야. 모험가 처음 시작한다고 싸움도 못해야한다는 법은 없잖아.”
“그럼 대체 모험가 되기 전에는 무슨 일을 하다 오신 거예요……?”
“다른 나라에서 온 전쟁영웅이라거나 그런 거 아니야……?”
린크의 말을 듣고 다나가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자 린크는 뒤늦게 떠올랐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 있어……. 서쪽의 카녹스 제국에서 새로운 황제가 구 황정에 충성한 영웅들한테 수치스러운 형벌을 내린 뒤 국토 밖으로 추방했다고…….”
“나도 그 얘기 들었어……! 카녹스 쪽에서 그런 류의 저주를 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역시 내 생각이 맞지?! 저 정도 실력이면 그거 외엔 설명할 길이 없다니까!”
점점 비약이 심해져 가는 세 사람의 이야기. 그들의 말을 들을수록 내 입장은 점점 난처해져갔다.
이러다간 내 컨셉이 신분을 숨기고 율리아나로 흘러들어온 카녹스의 옛 전쟁영웅이 되겠다. 이 시점에서 ‘이젠 아니야…….’ 라는 대사를 쳐야 될 것만 같았다.
세 사람이 하는 이야길 들어보면 이미 그들 사이에선 이 얘기가 사실로 굳어진 듯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내가 아니라고 해도 안 믿을 분위긴데.
갈수록 커져가는 오해 속에서 내가 곤란해 하고 있을 때였다.
“흠흠, 거기 뉴비들? 잠깐 제 말 좀 들어보죠?”
“응?”
“네?”
나나가 헛기침을 하면서 세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모두가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며 경청하자 나나는 엄중한 태도로 이야기했다.
“여러분은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 이것저것 캐물으면 기분 좋겠어요?”
“네? 그, 그건…….”
“어디서 왔든, 과거에 무슨 일을 했든 그건 다 다키님의 프라이버시예요. 당신들한테 알려줄 의무도 없고, 다키님 본인도 별로 꺼내고 싶어 하지 않는 과거죠.”
나나의 말에 다나와 유미, 린크는 죄송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 안색을 살폈다. 순식간에 진정된 그들을 둘러보며 나나가 이야기를 마쳤다.
“그러니 도움 받는 입장이라면 다키님의 민감한 부분은 건드리지 말아줬으면 해요. 여러분이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면 알아서 말씀해주실 테니까요. 알겠죠?”
힐책에 가까운 이야기에 일행들은 무안한 듯 내게 다가왔다. 그리곤 고개를 숙이면서 사과하기 시작했다.
“미, 미안 다키님…… 우리 생각이 짧았어…….”
“팬티만 입고 다니는 거 보고 알아봤어야 했는데……. 괜한 이야기 꺼내서 죄송합니다…….”
“저희끼리 함부로 이야기해서 정말 죄송해요…….”
새삼 나나의 언변이 감탄스러웠다.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던 친구들을 바로 진정시키다니. 과연 6남매의 맏언니다웠다.
“아냐, 아냐. 내 칭찬해준 건데 미안해할 거 없지.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런 세 사람의 사과를 손사래 치며 웃어넘겼다.
자신을 찬미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더군다나 난 스트리머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만큼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때 기분이 무척 좋아진다. 자존감도 덩달아 올라가서 웃음이 지워지질 않았다.
============================ 작품 후기 ============================
착실히 광신도가 되어가는 유미와 친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