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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06화 (10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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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한 자의 둥지

“가만 안 둬……!!”

쐐애액!

일방적으로 몰아붙여지는 상황에 화가 난 걸까.

머리까지 발끈한 다나가 창을 집어던졌다. 온힘을 다해 내던진 창은 그녀의 손을 떠나자마자 무시무시한 기세로 공기를 찢어발겼다.

“퀘엑!!”

직후 날카로운 창끝이 아처의 목덜미를 관통했다. 다나를 맞춘 아처는 몸부림조차 치지 못하고 그대로 즉사했다.

‘뭐하는 거야, 아직 주위에 적들 남아 있잖아.’

아처 하나를 자른 것까진 좋았으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매우 잘못된 판단이었다.

당장 지상에 남은 고블린만 해도 세 마리나 된다. 게다가 아처들도 둘이나 남았으니 맨손이 되는 건 무척이나 위험하다.

더군다나 웨이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놈들은 선발대, 본대는 따로 있는 것이다.

쿵! 쿵! 쿵!

어둠 속에서부터 굉음이 들려왔다. 지면을 울리는 육중한 발소리의 주인공은 세 번째 홉 고블린이었다.

허나 홉 고블린만 나타난 건 아니었다. 놈의 곁에는 샤먼 하나와 열 마리 정도의 고블린이 있었다.

저놈들이 바로 이 길목의 본대라고 할 수 있다. 중반부로 넘어가는 관문을 지키는 수문장이기도 하다.

“뭐야…… 얘기가 전혀 다르잖아……!”

또다시 나타난 고블린 무리를 보며 다나나 질겁했다.

홉 고블린 하나만으로 충분히 트라우마가 유발될 텐데 그 주위에 정예 병력까지 딸려 있으니 경악할 수밖에 없으리라.

“다나야! 이거 받아!”

“응?! 어, 어어?!”

그런 다나를 부르며 무기를 던졌다. 내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무기, 폭풍의 숏소드였다.

“일단 그거라도 휘둘러! 조금 전처럼 들이대지 말고 계속 뒤로 빠지고!”

“자, 잠깐만 당신……! 이건 대체……!”

얼떨결에 숏소드를 받아든 다나, 그녀는 검신에 흐르는 번갯불을 보며 당황을 터뜨렸다.

무리도 아니다. 초보자인 그녀는 권능석으로 강화된 무기를 처음 볼 테니까.

비단 초보자들뿐만 아니라 어지간한 모험가들도 폭풍의 숏소드 정도의 무기는 본 적 없으리라.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까 시키는 대로 해! 나나야! 일단 다나 먼저 치료해! 유미는 발 묶을 수 있는 주문 있으면 그거 쓰고!”

“네 다키님!”

“알겠어요……!”

아직 적들과 간격이 있는 틈을 타 일행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에 나나와 유미는 재빨리 주문을 영창하여 고블린들의 진영으로 날렸다.

“나쿠아 글라, 쿠가 얀훈다……!!”

화르륵!

허나 적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후열 멤버들이 캐스팅할 기미를 보이자 샤먼 또한 스킬을 발동했다. 작렬하는 불꽃 구체를 발사하는 마법, 화염탄을 시전한 것이었다.

“어딜 캐스팅을 하려 들어!”

쐐애액!

“크헤엑!!”

다행히 화염탄이 놈의 손에서 떠나는 것보다 내 나이프가 더 빨랐다.

허공을 가른 투척 나이프가 샤먼의 눈에 꽂혔다. 놈은 괴로워하면서 뒤로 물러났고 거의 완성된 화염탄도 캔슬 됐다.

이걸로 후열 멤버들이 조금은 안전해졌다. 그래도 위험한 건 매한가지였다. 샤먼이 공격당한 걸 기점으로 고블린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키 칼루 얀카!!”

“지보나 카훌루!”

빠르게 거리를 좁혀 오는 고블린 무리. 그 뒤에선 양손 둔기로 무장한 홉 고블린이 걸어오고 있다.

“지나가게 둘 거 같아?!”

그런 고블린들을 다나가 막아섰다. 후방으로 물러나며 접근하는 고블린들에게 검을 휘두른 것이다.

창을 주무기로 쓰는 그녀였으나 검술 또한 능숙했다. 그녀는 고블린들이 도약할 때마다 깔끔한 동작으로 놈들을 연신 썰어버렸다.

파지직!!

“크헤엑!!”

“우, 우와아……! 이 칼 뭐야?! 이런 무기 생전 처음 봐!”

번갯불과 함께 양단되는 고블린을 보며 다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침 그녀와 합류한 나는 측면에서 오는 놈을 베어 넘기며 말했다.

“네 심정은 알겠는데 지금은 싸우는데 집중해! 상처는 좀 어때?!”

“사제님이 치료해줘서 괜찮아졌어!”

나나의 회복 법술 덕분에 그녀의 다리는 말끔히 나아 있었다. 허벅지에 꽂힌 화살도 상처가 아물며 저절로 빠져나간 듯했다.

다리의 부상이 나았으니 기동성에는 문제없겠지. 그 점에 안도하면서 이야기를 이었다.

“좋아, 이제 다가오는 놈들 상대하면서 린크네가 있는 곳까지 후퇴하자! 홉 고블린이 오면 너 먼저 피하고!”

“알겠어……! 도와줘서 고마워……!”

“고맙긴!”

한 차례 작전을 논의한 뒤 우리는 온 신경을 고블린들에게 쏟았다.

이대로 후열까지 물러나면 다굴 맞아 죽을 일은 없을 거다.

그 후 좁은 길목에서 나나와 찬광과 유미의 주술을 활용하여 각개격파하면 위험부담 없이 이길 수 있다. 게다가 유미도 슬슬 영창을 마친 참이었다.

“한 많은 원혼들아……, 편히 눈 감지 못하고 수면 위로 떠오른 영혼들아…… 이리 와서 데려가라, 물밑까지 끌고 가 동포로 삼아라……!”

풍덩, 풍덩…… 풍덩……!

돌과 흙 밖에 없던 동굴 바닥에서 갑자기 물이 솟아났다.

순식간에 커다란 물웅덩이가 형성되더니 그곳에서 수많은 손이 뻗어 나왔다. 그 위를 지나던 고블린들은 소름끼치는 손에 붙잡혀 꼼짝도 못하게 됐다.

[으어어어어어……!!]

[아아아아아!]

주술사의 대표적인 홀딩 스킬인 물귀신이다. 하나둘씩 발이 묶이는 고블린들을 보며 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물귀신

액티브

요구 스탯: 신념 17

비용: 마력 80

사용 조건: 주술 무기 착용

습득 방법: 운명 항목에서 습득

효과: 6초간 캐스팅한 뒤 물귀신을 불러내 적들의 움직임을 둔화시킨다. 물귀신이 튀어나오는 물웅덩이의 범위는 반경 12미터로 시전자로부터 최대 20미터 떨어진 장소까지 생성할 수 있다. 물웅덩이 안에 있는 모든 적은 이동 속도가 대폭 감소되고 지속적으로 경직을 받는다. 15초 동안 지속된다.

따로 데미지를 주는 효과는 없지만 무려 15초 동안 적의 발을 묶는 고효율의 홀딩기.

물웅덩이 안에 들어간 상태에서 이동을 못하진 않지만 기동력이 엄청 좋지 않은 이상 자력으로 빠져나오기는 힘들다.

“키이익! 키이익!!”

“크얀바 키 칼루!! 즈카 후쿤다!”

실제로 물귀신들에게 잡힌 고블린들은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고 있었다.

발을 떼려할 때마다 물웅덩이 안에 있는 귀신들이 온몸을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하하! 꼴좋다 버러지 같은 새끼들!”

욕설을 내뱉는 고블린들을 보며 다나가 조소를 흘렸다. 나 역시 그녀와 같은 심정으로 고블린들을 보며 말했다.

“가까이 있는 놈들만 죽이고 나머지는 놔둬. 어차피 좁은 길로 빠지면 하나하나 처리할 수 있으니까.”

우리 팀에 마법사나 궁수가 있었다면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미가 원딜러이긴 하지만 그녀에겐 강력한 딜링 스킬이 없는 듯했기에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씩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런 놈들한테 바람의 상처를 쓸 수도 없으니까.’

그리 생각하며 고블린들에게 칼을 박으려던 찰나였다.

휘이익!

“어?”

머리 위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진녹색으로 빛나는 구체를 본 나는 비릿한 기시감을 느꼈다. 야구공만한 구체가 우리 쪽으로 떨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불현 듯 떠올랐다.

“다나야 피해!”

“응? 우와앗?!”

다나를 끌어안은 채 황급히 옆으로 굴렀다. 회피하는 도중 입과 코를 막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 진녹색 구체는 고블린들이 던진 화학 무기기 때문이다.

콰아앙!!

푸샤아아앗!

다음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과 함께 뿜어져 나온 것은 거센 화염도, 날카로운 납덩이도 아니었다. 짙은 초록색 연기가 퍼져 나와 주위에 안개 지대를 형성한 것이었다.

“다들 조심해! 독 안개 폭탄이야! 맞으면 중독 당한다고!”

“도, 독 안개 폭탄……?”

간신히 범위에서 벗어나는 나는 일행들에게 소리쳤다. 내게 안긴 다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 안개 지대를 바라보았다.

독 안개 폭탄은 고블린 슬링어가 사용하는 특수 능력 중 하나다.

폭발 시 범위 내의 있는 모든 적에게 200의 무속성 피해를 주며 초당 10의 중독 수치를 부여한다. 안개 지대에 계속 들어가 있으면 중독 수치가 천정부지로 오르는 것이다.

나는 오는 길에 독왕의 정수를 먹어둬서 중독 효과를 받지 않지만 문제는 따로 있다.

안개 지대 안에 있는 동안엔 회복 아이템을 사용할 수 없다. 회복 포션은 물론 넥타르조차 사용할 수 없기에 가급적 피해야 한다.

“크히히히힛!”

“얀카 브훌라 운 카 즈얀!”

구체가 날아온 방향에선 두 마리의 고블린이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다른 놈들과 달리 웬 망토 같은 걸 걸치고 조류의 두개골을 뒤집어썼는데, 그 모습이 중세시대의 흑사병 의사를 보는 것 같았다.

놈들이 바로 고블린 슬링어다. 조금 전에 던진 독 안개 폭탄은 손에 들고 있는 투석구로 던진 것이다.

투석구를 주 무기로 사용하는 만큼 평소에는 돌팔매질을 하며 원거리 공격을 가한다.

명중률이 시원찮은 아처들과 다르게 명중률도 높은데다 독 안개 폭탄까지 사용하니 성가시기 짝이 없는 적이다.

‘설마 저놈들까지 나올 줄이야.’

슬링어들을 보며 깊은 낭패감을 느꼈다.

홉 고블린이 나올 때부터 어느 정도 염두에 두긴 했다만 설마 이 시점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슬링어들 역시 2회차에서부터 등장하는 몬스터다.

원작 게임에선 던전 초반부부터 나오는 놈들이라 여기까지 왔으니 안 나오겠거니 했는데, 딱 방심이 될 찰나에 튀어나온 거다.

대체 몹 배치가 어떻게 돼먹은 걸까. 내심 불평하면서 슬링어들을 노려봤다.

‘그나저나 너무 멀어…… 우리가 가진 수단으로 잡을 수 있을까?’

놈들의 위치를 확인한 나이프를 꺼내들며 거리를 쟀다.

슬링어들은 고블린의 진영 중에서도 최후방에 위치해 있다.

샤먼 보다 뒤에 있으니 유미의 원귀로 잡는 건 꿈도 못 꾸며 나나의 찬광 또한 닿지 않을 거다.

내 나이프가 그나마 가능성이 있지만 놈들 앞에는 홉 고블린 있다.

나이프의 경로를 완벽하게 가로막고 있는 거구를 보면 원거리에서 처리하는 건 어려울 듯싶었다.

“쿠워어어어억!!”

그때 홉 고블린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내가 나이프를 던질 걸 눈치 챈 모양이다.

바보는 아니란 건가. 확실히 놈들 진영에서 가장 성가신 건 샤먼과 슬링어. 그리고 놈들을 유일하게 타격할 수 있는 건 나다.

내 앞길만 막으면 후열을 지킬 수 있는데다 우리를 보다 안정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 고블린치고는 꽤 전략적으로 움직이는 게 눈에 보였다.

“린크! 방패 들고 대기해! 뚫고 올 거야!”

“네, 넵!”

린크에게 지시하며 적 진영을 향해 달려 나갔다.

날 공격하려고 달려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홉 고블린이 노리는 건 내가 아닐 거다. 어둠 속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을 보며 놈들의 전략을 대략적으로 파악했다.

내가 홉 고블린과 대치하면 샤먼이 내게 화염탄을 날리겠지.

그러면 난 피해를 입고 빈틈을 보일 것이며 그 사이에 홉 고블린은 날 지나쳐서 후열을 노릴 거다.

이미 다 눈치 챈 전략이지만 지금의 나로선 어떻게 막을 수가 없다.

홉 고블린을 아무리 잘 막아도 샤먼의 화염탄은 어찌할 수 없으며, 반대로 샤먼을 노리면 홉 고블린을 막을 수 없게 된다.

우리 파티에 안정적인 원딜러가 없는 이상 놈들의 전술은 말 그대로 가불기인 것이다.

‘이도저도 못한다면 적 원딜부터 죽이고 본다……!’

그렇기에 나는 홉 고블린을 지나쳐 적 원거리 진영으로 돌진했다.

“크훅?!”

내 쪽에서 먼저 지나칠 거라곤 생각 못했는지 홉 고블린이 당황했다.

그것은 적 원딜들도 마찬가지였다. 샤먼과 슬링어들이 흠칫 놀라는 게 보였다.

“잘 들어 린크! 내가 돌아올 때까지 방어만 해! 네 스펙이면 충분히 버틸 수 있어!”

“……!”

물귀신에게 묶인 고블린들을 베어 넘기면서 지시를 내렸다. 그에 린크는 결연한 표정을 짓더니 곧 큰 소리로 외쳤다.

“으오오오오옷!!”

파아아아앗!

그의 몸에서 붉은색 빛이 뿜어져 나온다. 근력 계열 전투 기술 중 하나인 도발이었다.

“크후우우욱!!”

린크의 포효를 듣고 홉 고블린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놈의 눈이 붉은색으로 물들었으며 곧 경로를 바꾸어 린크에게 달려들었다. 도약력이 좋아서 물귀신이 있는 웅덩이쯤은 한 번에 뛰어넘었다.

다행히 도발의 효과로 다른 사람들은 눈에 뵈지 않는 듯했다. 멧돼지처럼 돌진한 홉 고블린은 이내 둔기를 휘둘렀다.

“얀후 크훈다! 키 칼루 즈바!!”

카가아아앙!!

도깨비 방망이 같은 철퇴, 금쇄봉이 날아들자 린크는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방어했다.

“크흐윽!”

간신히 공격을 막아낸 그였지만 한 번의 공격만으로 자세가 무너질 뻔했다. 그럼에도 린크는 이를 악물며 방패를 들었다.

“너 같은 놈한테……! 또 당할 줄 알아?!”

콰아악!

다리에 힘을 주며 라운드 실드를 들어 올리는 린크. 무슨 만화 속 열혈 주인공을 보는 것 같았다. 비록 초보자지만 의지 하나만큼은 훌륭했다.

“빛의 창세신이시여! 태양처럼 눈부신 빛으로 적의 눈을 멀게 해주세요!”

“부탁이야! 린크를 도와줘!”

린크가 공격을 막고 있을 때 나나와 유미도 주문을 퍼부었다.

파아앗!

촤라라라락!!

“크하악! 아아악!”

섬광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시커먼 원귀가 홉 고블린의 몸을 휘감았다.

린크를 때리는데 정신이 팔려 있던 홉 고블린은 기절 상태가 된 채 연이어 피해를 받았고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다나야 지금!”

“알고 있어!!”

린크의 부름에 다나가 힘껏 응했다.

지면을 박찬 그녀는 어느덧 홉 고블린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고 린크 또한 칼을 빼들었다.

푸욱! 푸후욱!

“커허억!!”

양쪽에서 동시에 박힌 칼날. 공중에서 내리찍은 다나의 숏소드가 특히나 더 깊게 박혔으며 린크의 브로드 소드도 홉 고블린의 복부를 관통했다.

두 사람의 공격력, 그리고 원귀로 인해 가해진 피해까지 고려하면 즉사까진 아니더라도 중상에 이르는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큰 변수가 없다면 이대로 공격만 이어가도 홉 고블린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변수를 제거하는 것이 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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