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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만남
“아니 잠깐만, 잘못한 건 트롤 슬레이어들인데 왜 린크가 욕을 먹어야 되는데? 린크랑 요르난 엄연히 피해자라고!”
연이은 폭언에 참다못한 다나가 항의했다. 허나 나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험담을 이어갔다.
“호구 보고 답답하다고 한 게 뭐가 문제예요? 너희도 여기까지 와서 고생하고 있는데 그런 생각 안 들어요?”
“나랑 유미는 자진해서 온 거야! 동료를 구하러 가는 건 당연하니까! 그리고 사실적시 명예훼손이란 것도 몰라?!”
“어이구 법잘알이라 좋겠네요! 그리고 동료가 소중하면 너네끼리 구하러 가요! 머리 박고 절해도 도와줄까 말까 하는데 그런 식으로 나오면 참도 도와주고 싶겠네요!”
나름 린크를 위해 나서준 다나였지만 나나의 언변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다나에겐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는 건 우리다. 기분 나쁘다고 해서 큰소리 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이다.
“역시 얘들은 도와줄 가치가 없는 거 같네요! 저런 답답한 일에 끼어들 바에야 우리 갈 길이나 가는 게 좋겠어요! 다키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빼액 하고 소리 지른 나나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에 나는 나나와 세 사람을 번갈아본 뒤 멋쩍게 얘기했다.
“아니 그게…… 공교롭게도 우리 갈 길이 이 친구들 목적지거든…….”
“……띠요옹?!”
“진짜?!”
내 말을 들은 나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랐다. 그건 3인조도 마찬가지. 세 사람은 당황을 금치 못하며 재차 질문했다.
“그, 그게 정말인가요? 정말로 그 거미들 소굴에 들어갈 생각이세요……?!”
가장 열성적으로 질문한 건 유미였다. 다른 두 사람 보다 잠자코 있는 그녀였지만 이중에서도 가장 내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린크 역시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도움이 절실하다는 걸 알고 있을 거다.
홉 고블린도 버거워하는 그들이 중후반부 몹들을 뚫고 동료를 구출할 가능성은 1도 없으니까.
“우리 목적은 이 던전을 완전히 공략하는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갈 생각이었으니까 요르나도 자연스레 구출할 수 있겠지.”
연이은 질문에 나는 쑥스러움을 느끼며 긍정했다.
새삼 느끼는 건데 뉴비들이 이렇게 선망어린 시선을 보내며 매달리니까 꽤나 부끄러웠다.
“그러니까 굳이 부탁할 필요 없어. 안쪽에 있는 놈들 잡을 때 겸사겸사 너희 친구도 구해줄게.”
그리 말하며 나는 슬슬 움직일 준비를 했다.
애당초 질질 끌 생각은 없었지만 서두를 이유가 생겼다.
거미들에게 끌려갔다면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놈들은 먹이를 저장해두는 습성이 있어서 희생자를 바로 죽이기 않기 때문이다.
빨리 죽일 거였으면 린크가 보는 앞에서 뜯어먹었겠지. 물론 그렇다고 여유가 있는 건 아니다.
원작 게임에선 거미들의 습성을 상세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즉, 붙잡힌 요르나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먹힐지는 나도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후반부로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를 구해주신 걸로 모자라 동료까지……. 어떻게 감사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내 결단에 린크는 허리까지 숙이면서 감사를 표했다. 거듭 요르나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차림새로 가실 생각이세요……?”
“응?”
“다키님의 실력은 잘 봤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속옷만 입고 거미들과 싸울 수 있을지…….”
순간 의아해한 나였지만 그 말을 듣고서야 린크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은 비단 내게 고마워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감사 반, 걱정 반인 눈빛으로 내 행색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유미는 입가를 가리면서 얼굴을 붉혔다. 분명 내 민망한 차림새 때문이리라.
어딜 가나 마찬가지겠지만 던전 안에서 팬티만 입고 다니는 내 모습은 기행을 넘어서 기괴해 보이는 수준일 거다.
이걸 걸고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내 복장만큼이나 정신머리가 이상한 사람뿐이겠지.
“애초에 왜 팬티만 입고 다니는 거야? 처음엔 노출증 걸린 변탠 줄 알았다고.”
다나도 맞장구치면서 질문을 건넸다. 그에 나는 최대한 태연한 기색으로 받아쳤다.
“이래 보여도 전신이 신의로 보호 받고 있으니까 괜찮아. 걱정할 필요 없어.”
“걱정도 걱정인데…… 신의 걸쳤다고 팬티만 입고 다니는 사람은 없지 않아……? 특히 남자들은 더 그렇고…….”
내 설명에 다나는 더욱 의아한 얼굴로 날 훑어보았다.
아무리 비키니 아머가 상용화된 세계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여성들 사이에서만 해당되는 얘기다. 남자인 내가 벗으면 변태 새끼로 밖에 안 보이겠지.
그렇게 두 사람이 의혹을 지우지 못할 때 나나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흐흥, 원래 옷은 약한 놈들이나 입고 다니는 거예요. 다키님은 한 대도 맞지 않을 자신 있으니까 팬티 한 장만 입고 다니는 거죠!”
“그, 그게 뭐야…… 오히려 더 변태 같잖아…….”
“너희 같은 좆늅들은 다키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죠! 그게 너희가 하수라는 뚜렷한 증거예요!”
나나의 설명에 세 사람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들어도 구구절절 개소리였다. 원작 게임에서나 통용되는 얘기를 게임 세계에서 당당히 꺼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나나 넌 좀 조용히 있고…… 사실 내가 옷을 못 입는 저주에 걸렸거든…… 나도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줬음 해.”
“아…… 그렇군요…….”
“확실히 누군가의 저주라면 그럴 수 있겠네요…… 어떤 지방에선 타인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한 저주도 있다고 했으니까요…….”
저주라는 말이 나오자 세 사람은 쉽게 납득했다. 날 노출증 변태로 보던 시선도 금세 연민으로 바뀌었다.
특히 유미는 심오한 표정을 지으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본업이 주술사라서 저주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리라.
아무튼 나와 나나는 세 사람과 파티를 결성하기로 했다.
사실 난 유미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들이 마을로 먼저 돌아가 줬으면 했으나 3인조는 내 의견을 완강히 거부했다.
린크는 요르나가 납치된 게 자신 때문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고 다나와 유미 역시 먼저 돌아가면 불안해서 참을 수 없다는 이유로 동행을 고집했다.
죽다 살아난 사람을 던전 최심부까지 끌고 가려니 영 걱정됐지만 어찌 보면 잘된 일이기도 하다.
린크, 다나, 유미로 이루어진 3인 파티는 그들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조합이다.
탱커와 근접 딜러, 서포터 겸 원거리 딜러가 한 데 모여 있으니 던전 공략에 필요한 역할군을 고루 갖췄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내가 메인 딜러로 참전하고 나나가 힐러로 활약해준다면 파티의 완성도는 더욱 높아진다.
나와 다나가 전방에서 싸우고 나나, 유미가 후방 지원, 거기에 린크가 후열을 보호해주면 웬만한 적들은 안정적으로 처리할 수 있으리라.
더군다나 세 사람의 유용성은 비단 본인들의 포지션뿐만이 아니었다.
“이걸 누가 다 사갔나 했더니 너희였구나?”
“도망치는 도중에 우연히 거미 하나를 횃불로 지졌었거든요. 그때 놈이 유난히 고통스러워하기에 길드 상점에서 있는 대로 구해온 거예요.”
본격적인 탐사에 착수하기 전, 우리는 정비를 할 겸 서로 가진 보급품을 확인했다.
린크와 다나가 가지고 있던 가방은 유독 묵직했는데 그 안에는 많은 양의 횃불과 화염병, 기름병들이 들어 있었다.
길드의 잡화점을 다 털어간 건 다름 아닌 린크였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다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일행들에게 이야기했다.
“린크가 본 대로 거미들은 불에 약해. 이것만 있어도 훨씬 수월하게 잡을 수 있을 거야.”
“그럼 거미들이 보이자마자 화염병부터 던지고 보면 되겠네?”
“거기까진 좀 힘들지. 화염병이 아무리 많아도 그놈들 머릿수 보단 적으니까.”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하자 다나는 질색하며 몸서리쳤다.
“이 정도로도 부족하다니…… 대체 얼마나 많은 거야……?”
“너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아. 그러니까 효율적으로 써야지.”
린크가 구비해둔 화염병과 기름병은 각각 15병. 횃불은 10개다.
가디스 던전의 화염병은 모 좀비 게임의 화염병처럼 광역 데미지를 주지 않는다.
불이 잘 붙는 거미들의 특성과 주변 환경을 잘 활용하면 여러 마리에게 불을 붙이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화염병이랑 횃불은 어디까지나 보조 무기라고 생각해. 근본적으로 중요한 건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거야.”
거기까지 말한 나는 파티원들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역할에 대해 설명해줬다.
“린크 넌 후열 멤버들을 지켜줘. 절대 싸우겠다고 앞으로 튀어나오면 안 돼. 무조건 뒤에서 말뚝 박고 있어.”
“적들 수가 그렇게 많은데 다키님이랑 다나만으로 괜찮을까요?”
“우리 둘이 잘만 싸우면 문제없어.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유미랑 나나를 지키는 것에만 집중해.”
내가 진중히 지시하자 린크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만난 진 불과 30분 정도 밖에 안 됐지만 이미 린크는 내가 이 파티의 리더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홉 고블린을 상대로 보여준 활약상이 그의 뇌리에 강하게 박힌 모양이다.
“설령 적이 뒤쪽으로 간다고 해도 조금만 버텨주면 내가 금방 달려 갈 테니까 그 점은 걱정 안 해도 돼. 그리고 다나라고 했지?”
“응! 나는 당신이랑 같이 다 찔러 죽이면 되는 거지?”
“그래, 넌 나랑 같이 전방에서 싸워줘. 장창의 사거리가 기니까 나보다 많은 적들을 상대할 수 있을 거야.”
다나 역시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나나랑 실랑이 벌이는 걸 보고 조금 걱정했는데 날 선망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걸 보면 적어도 돌발 행동은 하지 않을 듯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미는…….”
“네, 네……! 전 뭘 하면 좋을까요……?”
자신의 차례가 되자 유미는 무령을 끌어안으면서 긴장했다. 마치 자그마한 동물이 날 올려다보는 것 같아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네 역할은 원거리에 있는 적들을 견제하는 거야. 근거리는 굳이 상대할 필요 없어. 활이나 돌팔매 든 녀석이 보이면 바로 주술을 날려버려.”
“정말 그것만 하면 되나요……? 아까처럼 강한 적 나오면 저도 화력 지원을 하는 게…….”
다른 두 사람과 달리 유미는 조금 불안한 목소리로 이의를 제기했다. 내 판단에 의구심을 느끼는 기색이었다.
그녀는 홉 고블린을 상대할 때 자신이 아무 것도 못했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담아둔 듯했다.
확실히 주술로 공격 지원을 해주면 우리가 좀 더 편하겠으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던전의 원딜들은 하나 같이 다 위험해.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사각에서 튀어나온 놈들이 너희부터 노릴 거야.”
이 진영에서 너희가 공격받게 되는 유일한 상황이니까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
강한 적을 빠르게 잡는 것보다 원거리 공격으로부터 파티를 보호하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러한 사실을 각인시키면서 경고성 담긴 어조로 말하자 이내 유미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최선을 다할게요…….”
어딘가 내키지 않아 하는 기색이었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유미도 막상 전투를 해보면 자신이 후방 지원을 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포지션을 상기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 후로 첫 전투를 벌이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 사람과 만난 공동을 벗어난 우리는 넓은 통로에 접어들었다.
종유석과 바위가 특히나 많은 곳이었는데, 어디서라도 기습해올 수 있을 것 같은 구조였다. 원거리 딜러들이 포진하기 좋은 경사면도 상당히 많았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익숙한 지형을 살펴보며 나는 엄폐물 하나하나를 예의주시했다.
가디스 던전의 몬스터들은 항상 같은 장소에 스폰되지 않는다. 완전 랜덤한 것은 아니지만 매 회차마다 매복해 있는 장소가 제각각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더군다나 놀들의 사례를 보면 원작 게임과는 전혀 다른 장소에서 튀어나올 가능성도 있기에 좀 더 신경 써서 주위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 다들 저기 좀 보세요……!”
주위를 경계하며 조심스레 전진할 때였다.
유미가 어느 방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커다란 바위기둥 주위에 종유석들이 모여 있는 지형이었다. 자세히 살피니 그곳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적습이다! 다들 준비해!”
적의 존재를 확인한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 과정에서 유미의 얼굴도 눈에 들어왔는데 그녀의 눈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안광, 틀림없이 신내림이 발동될 때 나오는 이펙트야.’
신내림은 캐릭터를 생성할 때 선택하는 은혜 중 하나다.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도움을 받아 적의 기습을 미리 알아채거나 숨겨진 길 혹은 아이템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은혜다.
어쩐지 조금 전 전투에서 샤먼의 기습을 이상하리만큼 잘 파악하더니 전부 신내림의 효과 덕분인 듯했다.
“내가 말했던 포지션 잘 기억해! 유미는 원거리 견제, 린크는 후열 수비, 나나는 나 말고 린크나 다나를 우선적으로 지원해줘!”
“네……!”
“알겠어!”
검을 뽑아들며 일행들에게 소리쳤다. 내가 전투태세를 갖추며 말하자 일행들도 무기를 움켜쥐며 공격에 대비했다.
그들이 준비된 것을 확인한 뒤 지면을 박차며 달려 나갔다.
때마침 유미가 가리킨 곳에선 서너 마리 마리의 고블린들이 괴성을 지르며 튀어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