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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만남
굉장히 신경 쓰였지만 지금은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쯤 나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것보다 나는 유미의 옷차림이 신경 쓰였다.
남들한테 팬티를 보여주는 게 당연한 옷이라니. 이 무슨 음란함이란 말인가.
원작 게임할 때도 참 꼴리는 복장이라 생각했지만 본인 입으로 직접 말하니까 더욱 요야해보였다.
당장이라도 쥬지가 벌떡 서버릴 것 같았다. 나나 때처럼 추태를 보일 수 없으니 나는 치료가 끝날 때까지 애써 시선을 피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나의 치료로 3인조는 말끔한 상태를 되찾았다.
“굉장해…… 부러지고 꺾이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멀쩡해졌잖아……?”
정신을 차린 다나가 자신의 몸을 살피며 연신 감탄했다.
“다키님이 싸우시는 것 보고 나나님도 대단할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그러게, 이 정도면 요르나 보다 몇 수는 위 아니야?”
다나의 말을 듣고 나는 의아한 기분이 들어 질문했다.
“다른 사제들은 이렇게 치료 못 해?”
“실버 이상이라면 모를까 아이언, 브론즈 사이에선 터무니없지. 당장 우리 파티 사제만 해도 실수가 잦아서 제대로 회복 안 될 때가 많다고.”
“법술에 대해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주문을 외우는 것도, 내면의 빛을 끌어내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고 해요.”
린크가 덧붙이길 신전 밖에서 이 정도 사제를 보는 건 처음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나나는 의기양양해져선 가슴을 펴며 자만했다.
“흐흥~ 제가 괜히 비싸게 군 게 아니라구요~ 저 정도 명의는 응당한 대우를 받아야죠~”
조금 더 겸손해지면 어떨까 싶었지만 세 사람의 반응을 보면 나나의 말이 썩 틀린 것 같지도 않았다.
게임 세계의 사제들은 원작 게임과 달리 스스로 법술을 터득해야 한다. 요르나라는 동료 사제의 사례를 들어보면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그에 비해 나나는 태생적으로 회복 주문을 쓸 수 있었으니 대단할 수밖에 없다. 현실로 따지면 1살짜리 아기가 의학 지식에 전통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아무튼 다키님이랑 나나님이라고 했지?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 당신들 아니었으면 진짜 골로 갈 뻔했어.”
장창을 어깨에 짊어지며 다나가 시원스레 고개를 숙였다.
싸울 때는 잘 몰랐는데 다나도 유미나 나나 못지않게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다나는 검은색 단발과 다갈색 눈동자를 가진 20대 초반의 아가씨였는데 게임적 허용인지 머리카락에 종종 보랏빛이 섞여 있었다.
단발인 점은 유미와 같았으나 청초한 분위기가 흐르는 유미와 다르게 다나의 단발은 보이쉬한 느낌이 강했다.
거기에 시원시원한 성격까지 더해져서 오래 알고 지낸 여사친 같은 이미지를 보여줬다.
부랄 친구 중에 여자가 있다면 이렇지 않았을까. 친구 하나 없던 내게 그런 망상을 심어주는 여자였다.
“저도 다시 한 번 감사드릴게요. 신전 같은 데서 이 정도로 치료 받으려면 1천 아웬부터 시작했을 거예요.”
“그, 그래. 그렇구나…….”
린크의 말을 듣고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독왕의 정수를 팔면 치료비를 떠나서 신전 건물도 살 수 있을 거다.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간신히 도로 집어넣었다.
나만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면 그들은 보석의 정체를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사실을 절대 입 밖으로 내놓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히야~ 그나저나 치료하느라 힘썼더니 목이 좀 마르네요! 마실 거 있으면 내놔 보세요!”
“마, 마실 거요?”
내가 두 사람과 대화할 때 나나가 생색을 내며 손을 내밀었다.
그에 유미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주머니를 뒤적거렸고, 나는 나나의 갑질이 심화되기 전에 화제를 바꿨다.
“그보다 너희는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치료받았다곤 하지만 그 정도 실력으로 이 이상 진행하기는 힘들 거야.”
길드에서 조사한 것과 다르게 이곳엔 위험한 몬스터들이 많이 모여 있다.
홉 고블린은 그 중 하나일 뿐이며 이 앞에선 더욱 위험한 몬스터들이 튀어나올 거다.
고작 홉 고블린 한 마리로 전멸 위기까지 갔던 너희에겐 너무 위험하다. 목숨이 아깝다면 도망치는 게 좋을 거다.
세 사람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 담담하게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듣고 유미와, 다나, 린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
그들 역시 고블린 목에 걸린 현상금을 노리고 동굴에 들어온 것이리라. 한 마리당 500아웬이나 주니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긴 너무 아쉽겠지.
확실히 이곳은 중반부만 넘어가지 않으면 초보자들에게도 괜찮은 사냥터다. 하지만 홉 고블린의 등장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방금 전에 상대한 놈 외에 다른 홉 고블린이 있다면 이 파티는 분명 전멸할 것이다.
나 같은 구원자가 또 나타나리란 보장도 없고, 너무 안쪽으로 들어와서 도망치기도 힘들 테니까.
그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3년 내내 애정을 가지고 키웠던 내 최애캐가 이런 축축하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죽어나간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물론 게임 속의 캐릭터였던 유미는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을 계기로 친해질 수도 있는 거 아니겠는가.
추후 유미를 꼭 파티에 영입하겠노라 마음먹으며 그들에게 다시 한 번 퇴각을 권유했다.
“돈 때문에 그러는 거면 여기 있는 고블린들은 너희한테 양보할 게. 샤먼이 떨어뜨린 지팡이도 있으니까 다 팔면 퀘스트 한 번 완료한 것만큼은 나올…….”
“아뇨…… 저희는 돈 때문에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 전리품도 관심 없고요…….”
내 말을 듣던 린크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돈 때문이 아니라고? 그러면 초보들이 여기엔 왜 있는 거지?
그런 의문을 품을 무렵 나나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다 댁들 좋으라고 하는 얘긴데 알아들었으면 얼른얼른 나가요. 돈이 아니면 이런 동굴에서 영웅담이라도 세워보게요?”
“그런 거 아니야……! 우리는 다른 중요한 일 때문에 여기 온 거라고!”
나나의 비아냥거림에 다나가 분개했다. 그들의 태도를 보면 진짜 단순한 이유는 아닌 모양이다.
궁금증이 도진 나는 차분하게 그들의 사정을 물었다.
“뭐 곤란한 일이라도 있나 봐? 무슨 일인데 그래?”
“아, 그건…….”
“한 번 얘기나 해봐.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모르겠다만 우리랑 행선지가 같을 수도 있잖아?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도와줄게.”
내가 그렇게 말하자 순간 세 사람의 눈이 반짝였다. 뭐가 됐든 꽤나 절박한 상황인 듯했다.
기대감어린 시선을 보낸 세 사람이었지만 곧 린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섰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건 저희 일이에요. 개인적인 사정에 두 분을 끌어들일 수는 없어요.”
“야, 린크.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요르나 구하기 싫어? 저쪽에서 먼저 도와준다는데 그걸 왜 거절해?”
정중히 거절하는 린크와 달리 나나는 내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유미도 말은 없었지만 자꾸 내게 시선을 보내는 걸 보면 내심 동행을 원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도 린크는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그런 곳에 같이 가자는 건 같이 죽자고 하는 거랑 다름없어……!”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원군을 늘리자는 거 아니야! 저 사람 정도면 네가 본 거미 새끼들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걸? 적어도 트롤 슬레이어 놈들 보단 믿음직스럽잖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상황을 대강 파악했다.
이들이 던전에 오게 된 경위는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인 모양이다.
거미들 얘기가 나오는 걸 보면 아마 중반부까지 진입했다가 거기 몬스터들에게 패배하고 동료가 납치당한 거겠지.
거기까지만 해도 흥미로운 이야기였지만 트롤 슬레이어들도 언급되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서 좀 더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기로 했다.
“들어보니까 동료가 몬스터한테 끌려간 거 같은데, 그게 트롤 슬레이어들이랑 뭔가 관련이 있는 거야?”
“…….”
“…….”
내가 질문을 건네자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어졌다.
특히 린크는 분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꽉 쥔 주먹에선 피가 나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다.
트롤 슬레이어들이 이들한테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러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린크를 대신하여 유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저희 파티에 요르나라는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요…….”
“요르나라면 너희 파티 사제라고 했던…….”
“네…… 원래 린크는 요르나랑 단둘이서 던전 탐색을 진행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도중에 트롤 슬레이어들하고 마주친 거예요…….”
그 후의 이야기는 대략 이랬다.
린크와 요르나를 발견한 트롤 슬레이어들은 다짜고짜 두 사람에게 파티 합류를 제안했다.
인원수가 부족하니까 우리와 동행해라. 그러면 너희들은 편하게 보상만 챙길 수 있게 해주겠다.
얼핏 듣기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그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은 린크가 동행을 거절했다. 그도 트롤 슬레이어의 악명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트롤 슬레이어는 린크의 거절에도 계속해서 권유해왔다.
본인들을 못 믿는 거냐면서 오히려 불쾌해했고 기어이 강요에 가까운 수준으로 린크와 요르나를 몰아붙였다.
결국 마음 약한 요르나가 승낙하는 것으로 두 사람은 트롤 슬레이어와 함께 던전 탐색을 재개하게 됐다.
“제가 멍청했어요…… 그때 억지로라도 요르나를 데리고 나왔어야 하는 건데…….”
유미가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쯤 린크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나도 그놈들에게 당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그의 울분을 공감할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건…….”
내가 묻자 린크가 직접 설명하기 시작했다.
“놈들은 고블린들을 해치우면서 동굴 안쪽까지 우리를 끌고 갔어요. 저는 기회를 봐서 빠져나가자고 얘기했지만 요르나는 린크의 말을 듣지 않았죠.”
“어째서?”
“자기가 없으면 상처를 치료할 사람이 없어진다는 이유였어요…….”
나는 힐러로서 이들을 돕겠다. 이 사람들도 우리가 편히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지 않느냐.
그러한 이유로 요르나는 린크의 만류에도 계속 트롤 슬레이어들과 동행했다고 한다.
“으으…… 씹고구마…….”
사정을 들은 나나가 질색하면서 중얼거렸다.
뭔가 요르나라는 여자애는 굉장히 답답한 성격인 듯했다.
끌려 다니는 상황에서도 트롤 슬레이어들을 돕겠다고 탈주하지 않다니. 성격이 좋은 건지 생각이 짧은 건지, 어찌되었든 바람직한 판단은 아니었다.
아무튼 요르나를 혼자 두고 갈 수도 없었기 때문에 린크도 계속해서 놈들과 동행했다.
그러던 도중 문제가 생겼다. 듣도 보도 못한 몬스터가 나타나서 파티를 공격한 것이었다.
“……어떻게 생긴 몬스터였는데?”
“커다란 거미들을 끌고 다녔는데 자세한 모습은 못 봤어요…… 그림자를 보고 키가 크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거미랑 같이 다니는 키 큰 몬스터라.
대충 어떤 놈인지 알겠다. 중후반부에서 그놈들만큼 위협적인 몬스터가 없기도 하니까.
“놈은 지나칠 정도로 강했어요…… 저는 물론 트롤 슬레이들조차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요. 진영은 빠르게 붕괴됐고, 저희는 결국 도주를 택했죠…….”
“하지만 발이 느린 요르나가 거미들한테 붙잡혔고 거미들은 요르나를 끌고 갔다…… 그런 이야기지?”
린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울분을 넘어서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토해내며 이야기를 이었다.
“요르나를 되찾아야한다고 했지만 그 놈들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무기를 들이밀면서 절 위협하더라고요.”
“아니, 안 구해주면 안 구해주는 거지 칼을 왜 겨누는 건데요?”
“절 살려두면 본인들 명성에 흠집이 날 테니까요……. 제가 생각해도 어이없지만 그놈들한텐 충분한 이유였나 봐요.”
나도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금방 이해가 됐다.
숲 트롤을 물리친 실력자들이 고작 고블린 소굴에서 도망쳤다. 그런 소문이 퍼지면 누구나 트롤 슬레이어들을 깔보게 될 거다.
그러면 예전처럼 거들먹거리며 살지 못할 테지. 길드의 후광이 있어도 정작 본인들이 약해빠졌다면 허세 부리는 것밖에 안 되니까.
“아무튼 트롤 슬레이어는 그게 두려워서 절 죽이려 했고 전 운 좋게 빠져나와 도시로 갔어요. 그 후에 다나랑 유미를 만나서 요르나를 구하기 위해 동굴로 돌아온 거예요.”
남쪽 동굴에서 율리아나까지의 거리는 왕복 2시간. 이른 아침부터 탐사를 진행했다고 하면 다시 한 번 도시에 들렀다 해도 앞뒤가 맞는다.
“너희가 웹소설 주인공이랑 히로인이었으면 독자들이 욕 오지게 박고 연달아 하차했을 거예요. 어쩜 그렇게 답답할 수가 있어요?”
이야기가 끝날 무렵 나나가 오만상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양아치 새끼들을 돕겠다고 졸졸 따라간 년이나 그걸 못 데려와서 친구들 끌어들인 놈이나…… 듣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힐 거 같네요!”
“크윽…….”
나나의 팩트 폭력에 린크는 아무 말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분한 마음에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말이 좀 심하긴 하지만 이건 비단 린크와 요르나에게만 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녀 역시 금태양 새끼를 따라갈 뻔한 전적이 있었다. 요르나를 보고 답답함을 느끼는 건 마치 자신의 실책을 되돌아보는 것 같아 그런 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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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이 안 된 채로 올려서 죄송합니다. 빠르게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