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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02화 (10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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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만남

거기까지 말하자 유미와 린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두 사람을 압도해버린 나나였지만 그녀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애초에 구해줘서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다짜고짜 감 놔라, 배 놔라 칭얼거리기나 하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싹 사라지네요.”

“그, 그렇게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급한 마음에 감사 인사 보단 부탁이 먼저 나왔을 뿐이에요…….”

연이은 팩트 폭력에 린크는 쩔쩔 매며 사과했다. 유미는 아예 말문이 막혀서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나나의 말은 매우 냉담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아는 사이도 아니고, 도와준다고 해서 보상이 있지도 않은데 상처까지 입으며 도와줬다.

그 시점에서 나나는 3인조를 돕는 게 굉장한 손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명색에 내 여친인데 남친인 내가 남들 때문에 다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겠지.

그런 와중에 도움 받은 사람들은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안 하고 있으니 화가 날 만도 하다.

“됐고요, 그렇게 도움을 받고 싶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놔요. 싫으면 댁들 친구 업고 마을까지 달리던지.”

끝까지 공사구분이 철저한 나나. 이 와중에도 그녀는 내 상처를 치료하는데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리, 린크…….”

“…….”

그녀의 으름장에 유미와 린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나의 말이 백번 맞긴 하지만 그녀의 요구는 너무나 가혹했다.

3인조는 척 봐도 가진 거 하나 없는 뉴비들이다. 장비 수준으로 보아 벌이도 변변치 않은 듯했다.

그들이 이 상황에서 만족할 만한 보상을 내놓는 건 무척이나 어려우리라.

이 이상 몰아붙이면 두 사람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내 선의로 시작한 일인데 그렇게까지 무리한 보상을 받고 싶지는 않다.

“그깟 힐 한 번에 마력 몇이나 든다고 그래. 많이 아파하는데 좀 써주라.”

세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나나를 달래보았다.

내가 잘 이야기하면 고분고분 따를 거라 생각했지만 나나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완강했다.

“다키님은 길 가다가 누군지도 모를 사람이 장기 기증해달라고 하면 주실 거예요?”

“응? 당연히 안 주지…….”

“저도 마찬가지예요! 제 마력은 다키님의 장기와도 같다구요! 소중하단 말이에요!”

“내 오장육부랑 네 마력이랑 대체 어느 부분이 비슷한데?”

“제가 마력을 낭비해서 진짜 중요할 때 다키님한테 힐 못 해드리면 어떡해요! 큰일이잖아요!”

요컨대 나나의 의견은 이거다.

지금 여기서 마력을 낭비하면 내가 다쳤을 때 사용할 마력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곧 내 신체가 손상되는 것을 의미하니 자신의 마력이 곧 내 장기라는 논리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괜찮아. 여기 잡몹들한텐 한 대도 안 맞을 자신 있어.”

“방금 전에도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셨잖아요……! 뭘 한 대도 안 맞아요!”

“그거야 저 친구들 지켜주려고 그런 거지. 뭣보다 난 넥타르도 있잖아.”

허리춤에 메어 뒀던 넥타르를 흔들며 자신 있게 말했다.

나나의 마력은 570. 정화랑 회복을 썼으니 조금 떨어졌겠지만 그렇다 해도 차고 넘치는 수준이다.

그녀가 주로 사용하는 거부와 찬광은 효율에 비해서 마력 소모량이 한없이 낮기 때문이다.

“애당초 돈 없는 초보자들한테 가진 게 뭐가 있겠어.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셈치고 한 번만 봉사하자.”

“가진 게 없긴 왜 없어요! 돈 없으면 본인들 몸으로 때우면 되죠!”

내가 구슬림에 나나가 크게 반발했다. 그녀의 손은 유미를 가리켰고 손가락질당한 유미는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우, 으웃…….”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무리도 아니다. 다 큰 성인이라면 지금 나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을 테니까.

“야 그거 성희롱이야……. 네가 이상한 말해서 나까지 쓰레기 됐잖아.”

“쓰레기라뇨, 이건 어디까지나 정당한 대가를 받는 거라고요. 우리가 아니었으면 고블린한테 무슨 꼴을 당했을지 모르는데 이 정도면 싼 거 아니에요?”

정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매정한데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서 참 곤란했다.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유미도, 다나도 고블린한테 몹쓸 짓을 당했겠지.

린크가 눈앞에서 뜯어 먹히는 걸 보며 잔인하게 겁탈 당했을지도 모른다. 고블린들은 그러고도 남는 놈들이니까.

그리고 나 역시 유미에게 약간 흑심이 있기는 하다.

그녀는 내가 가디스 던전을 플레이하는 동안 부동의 최애캐였다. 초반 회차에선 그녀와 결혼까지 했을 정도로 유미에 대한 내 애정은 각별하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고 싶었다. 원작 게임에선 하지 못했던 여러 일들을 게임 세계에서 해보고 싶다는 욕망도 있다.

‘아냐…… 그렇다고 초면부터 몸을 요구할 순 없어. 분명 안 좋은 감정만 쌓일 거야…….’

그간 나에게 적극적인 여성들만 있어서 자주 혼동하곤 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전부 헤베, 브릴린트, 나나 같지는 않을 거다.

나는 은근슬쩍 시선을 돌려 유미의 반응을 살폈다.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못 들고 있는 유미. 그녀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 듯했다. 다친 다나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고 린크의 눈치도 봤다.

나나가 쐐기를 박아 넣는다면 그녀는 내게 몸을 넘길지도 모른다.

한편으론 기대됐지만 다른 한편으론 걱정됐다. 찰나의 쾌락으로 그녀와의 관계가 아예 끝장날 수도 있지 않은가.

“린크…… 나…….”

유미가 힘겹게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하지만…….”

린크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단호한 눈빛으로 유미를 바라본 그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사제님의 말씀이 맞아요. 두 분도 저희 같은 모험가, 절대 무상의 도움을 바래선 안 되겠죠. 저희 생각이 짧았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린크가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그것은 보석처럼 생긴 광물이었는데 에메랄드마냥 녹색 빛을 띠었다.

“저희를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염치 불구하고 다시 한 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건 답례 겸 치료비니 부디 제 동료를 치료해주세요.”

얼떨결에 광물을 받아든 나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디서 난 건진 모르겠지만 고작 치료 한 번 받겠다고 이런 걸 주다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이건 비싸다며 다시 돌려주려던 참이었다.

“어……?”

광물을 자세히 본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경악했다.

뭐야, 이건 또 왜 여기서 나와? 어떻게 이 친구가 이걸 가지고 있는 거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나는 광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자 여느 때와 같이 아이템 창이 떴고 그 안의 내용은 내가 생각한 대로였다.

독왕의 정수

과거 남쪽 동굴의 주인이었던 이무기의 특수한 장기. 강대한 힘이 한 곳에 모여 보석과 같은 형태를 이루었다. 복용 시 자신의 신체 스탯 보다 낮은 수치의 중독을 무시하는 효과를 얻는다. 또한 ‘독’에 의한 상태이상 효과 또한 무조건 저항한다. 이 효과는 영구적으로 지속된다.

고블린 샤먼을 잡았을 때 아주 낮은 확률로 드랍되는 희귀 아이템, 독왕의 정수.

중독 내성을 부여하는 아이템 중에선 가히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아이템이며 그 효율은 그 어떤 장비와도 비교 되지 않는다.

현재 내 신체 스탯은 17. 그런 내가 정수를 복용하면 조금 전처럼 맹독 분출을 다 맞아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버틸 수 있다.

맹독 분출의 중독 수치는 한 발당 15였으니 정수의 효과로 그것을 전부 무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당장은 그리 강력한 효과가 아니지만 근접 캐릭터를 키우기로 한 이상 신체 스탯은 지속적으로 찍을 것이다.

그렇게 신체 스탯이 상승하다보면 추후에는 중독 효과에 완전 내성을 얻는 것도 가능하다.

와호 부적과 달리 아무런 페널티 없이, 장비칸조차 차지하지 않고 상태이상에 내성을 부여하는 아이템은 흔하지 않다.

드랍률도 현저히 낮아서 나조차 6천 시간의 플레이 타임 동안 두 번 밖에 먹어보지 못했을 정도다.

“이, 이거 엄청 비싸 보이는데 어디서 난 거야……?”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하기를 잠시,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며 린크에게 물었다.

“아무리 봐도 댁들 같은 초보자가 들고 다닐 물건은 아닌데…… 장물이나 뭐 그런 거 아니에요?”

나나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정수를 바라보았다.

정수의 효과를 전혀 모르는 그녀지만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초록색 보석은 굉장히 비싸보였다. 확실히 가난한 뉴비들이 들고 다닐 만한 물건은 아닌 것이다.

“보답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내 동료 말대로 훔친 물건이면 받을 수 없어. 그러니까 확실하게 얘기해.”

나나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진지한 어투로 추궁했다. 허나 린크는 한 점의 부끄러움 없는 태도로 부정했다.

“여기 오기 전에 샤먼을 하나 쓰러뜨렸어요. 소규모 집단을 이끄는 놈이라 쉽게 처치할 수 있었는데 그 놈 품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마, 맞아요…… 그건 순전히 저희들 힘으로 얻은 거예요……! 장물 같은 건 절대 아니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린크의 말은 전반적으로 사실인 듯했다.

실제로 이 아이템은 샤먼이 드랍하는 아이템이고 지도자급인 샤먼이라도 소규모 무리를 이끄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렇다면 정수가 장물일 가능성은 다소 낮아진다. 거기에 대해 안심한 나는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

린크도, 유미도 이 아이템의 효과를 전혀 모르는 듯했다. 아니, 알고 있었다면 우리 앞에서 꺼내지도 않았겠지.

내성을 부여해주는 아이템은 강력한 무기만큼이나 귀중한 것이다.

더군다나 독왕의 정수는 신체 스탯이 높은 사람이 사용할 경우 만독불침이라 해도 무방한 효과를 발휘하니 그 가치는 더욱 높다.

자신이 사용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팔면 수백 만 아웬, 원화로 수억 원은 족히 챙길 수 있을 텐데 미쳤다고 넘겨주겠는가.

이걸 치료비로 넘겨줄 수 있는 건 두 사람 다 독왕의 정수를 그냥 특이하게 생긴 보석 정도라고 생각해서겠지.

‘미안하지만 이건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운 물건이야. 돈이 많다고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등쳐먹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으나 나는 떨리는 손으로 보석을 벨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면 믿고 받아둘게. 나나야, 보상도 받았으니까 이제 그만 저 친구 좀 치료해줘.”

손의 떨림을 감추며 나는 최대한 태연한 어조로 얘기했다. 그제야 나나도 횡재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우리 고객님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지 한 번 볼까요~?”

“으으으…….”

돈이 들어오니 조금 전의 태도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순식간의 백의의 천사가 된 나나는 아주 정성스럽게 다나의 상처를 보살펴줬다.

골절 상태를 정화 주문으로 치료하고 몇 번이나 회복 주문을 걸어서 다나를 치료해준 것이었다.

“너네도 몰골이 말이 아니네요! 이리 와 봐요. 서비스 차원에서 치료해줄 테니까.”

“……! 가, 감사합니다!”

그걸로 모자라 린크와 유미까지 치료해줬다.

사실 다나 보다 덜할 뿐이지 린크 역시 심각한 상태였다. 홉 고블린한테 두 차례나 직격당한 데다가 탱커다 보니 다른 자잘한 상처들도 많았다.

유미가 그나마 괜찮았지만 그녀라고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몸 곳곳에 생채기가 나있었다. 찢어진 옷가지가 붉게 물들어 있는 것도 보였다.

“저, 저까지 치료해주실 필요는 없는데…….”

“에이 이제 와서 뭘 그래요~ 마력도 많이 남아 있으니까 부담 갖지 말아요~”

“어휴, 저 속물…….”

만면의 미소를 담아 얘기하는 나나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나가 현명한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편협한 것 같다. 전부 나와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런 거니까 미워할 수는 없지만.

“…….”

그런 것보다 난 유미의 옷차림에 더 눈길이 갔다.

린크는 가죽 갑옷, 다나는 의병대 세트라고 하는 별 볼 일 없는 방어구를 착용했는데 그녀 혼자 척 봐도 좋은 옷을 입고 있으니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물망초 세트.

주술 관련 옵션이 붙어 있는 희귀 등급 방어구로 검은색과 진보라를 베이스로 한 개량형 한복 같은 디자인이다.

가디스 던전의 옷치고는 노출도가 적은 편이지만 어디까지나 가디스 던전 기준에서 그렇다는 거지 노출이 없는 건 아니었다.

가슴 윗부분이 살짝 파여 있는데다가 치맛자락이 짧아서 유미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인 허벅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갈색 스타킹에 감싸여 있는 통통한 허벅지. 헤베나 나나도 예쁜 허벅지를 가지고 있지만 유미의 경우 실로 압도적이었다.

손으로 꼬옥 쥐면 손가락이 파묻힐 것 같았다. 무척이나 부드러워보였으며 스타킹 특유의 매끈한 재질 덕분에 더욱 요야했다.

게다가 워낙 짧은 치마로 인해 조금만 움직여도 팬티가 보일 것 같았다.

본의 아니게 치마 속을 훔쳐보게 됐는데 검은색 레이스 팬티를 입고 있었다. 앳된 인상과 대조되는 매혹적인 속옷이다.

“유미 양은 치마가 엄청 짧네요! 팬티 다 보이는데 괜찮아요?”

“네, 네……?”

나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갑작스레 그런 질문을 했다.

순간 당황한 유미였으나 이내 수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이 옷은 원래 이렇게 입는 옷인 걸요…… 게다가 스타킹도 신었으니까 그렇게 부끄럽지는 않아요…….”

“흐으음~ 그렇단 말이죠~?”

유미의 말을 듣고 나나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뭔가 묘하다. 굉장히 음흉한 계획을 꾸미고 있는 사람의 눈빛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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