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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99화 (99/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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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랭크 모험가 감다키

“다키님, 좋은 고블린은 죽은 고블린이라는 말 들어본 적 없으세요?”

내 의견을 그대로 이야기한 직후 나나가 문득 진지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난데없는 질문에 나는 다소 어이없는 기색으로 답했다.

저건 또 어디서 나온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고블린 슬레이어 씨의 명언이에요. 전 전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고요! 목구멍에 성대 대신 걸레를 쑤셔 박은 병신 새끼들은 전부 찢어 죽여야 해요! 한 놈도 남김없이! 모조리요!”

“돈 때문에 죽이는 게 아니라……?”

“그것도 있긴 한데 쟤들 목소리 진짜 좆거지 같잖아요! 듣는 것만으로도 귀갱이라고요! 고막에 저 새끼들 좆밥 묻는 것 같단 말이에요!”

고블린 슬레이어 씨가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나나는 고블린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싫은 모양이다. 아니면 고블린 사냥에 맛을 들렸거나.

모기도 혐오스럽고 짜증나지만 전기 파리채로 잡다 보면 살상 자체가 재밌어지지 않는가? 나나도 그것과 같은 맥락으로 고블린을 죽이는 것에 쾌감을 느끼게 된 걸지 모른다.

“나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아싸~ 다키님 최고!”

사냥의 쾌감을 이해하는 나였기에 나나의 의견을 들어주기로 했다.

무엇보다 수동적이던 나나가 이렇게나 강력히 주장하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내 쪽에서 권장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불필요한 전투가 손해인 건 사실이지만 전투 자체가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다. 어찌되었든 고블린을 잡으면 500아웬씩 받을 수 있으니 수련 겸 돈벌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대신 내가 진지하게 말할 땐 군말 말고 따라야 된다?”

“물론이죠! 전 다키님의 충실한 노예니까요! 다키님이 진지하게 안 된다고 하면 얌전히 말 들어야죠~”

나나의 고분고분한 대답을 들으며 우리는 오른쪽 통로로 이동했다.

왼쪽 통로가 위험성이 적은 건 사실이지만 오른쪽 통로에도 장점이 없는 건 아니다.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아서 보다 빠르게 중반부로 접어들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비교적 위험한 오른쪽 길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내 귀에도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문제는 고블린 소리만 들려오는 게 아니었다.

“나나야 이 소리…….”

“누가 싸우고 있는 거 같은데요?”

나나가 귀를 쫑긋거리면서 대답했다. 나 역시 청각에 집중하며 소리를 분별했는데, 고블린들의 울음소리 외에도 쇠가 부딪치는 소리, 누군가의 고함 소리 같은 게 연이어 들렸다.

먼저 들어간 사람이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할 무렵 우리 앞에 넓은 공동이 나타났다.

“하아압!!”

“키에에에엑!”

종유석으로 둘러싸인 그곳에선 한 무리의 모험가 파티가 십여 마리의 고블린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방패와 직검으로 무장한 전사, 장창을 든 창술사, 그리고 주술사로 이루어진 3인조 파티였다.

머릿수로는 압도적으로 불리하지만 나름 대형을 갖춘 덕에 열댓 마리의 고블린들을 상대로도 효율적인 전투를 이어갔다. 이미 몇몇 고블린은 시체가 되어 바닥을 구르고 있을 정도였다.

“내가 막을 테니까 옆에서 계속 공격해! 절대 후열로 보내지 마!”

“알았어, 맡겨둬!!”

푸후욱! 푸후욱!!

“케헤에에엑!!”

“쿠헤엑……!”

검방으로 무장한 청년이 선두에서 소리쳤다. 아무래도 그가 이 파티의 리더인 듯했다.

그가 고블린들의 공격을 방패로 막으며 소리치자 뒤에서 대기하던 여전사가 기다란 장창으로 고블린들을 연달아 찔러 죽였다.

간혹 측면에서 들어온 고블린들이 청년과 여전사를 노렸지만 주술사의 주문이 그들의 빈틈을 완벽하게 메꿔주었다. 비록 인원수는 적지만 꽤 이상적인 파티였다.

“에이, 누가 이미 선수 쳤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다키님 말대로 할 걸 그랬어요.”

세 명의 모험가를 보며 나나가 아쉬움을 토로했다. 고블린들을 털어먹을 생각으로 신나 있었는데 먼저 온 사람이 있는 걸 보니 흥이 식어버린 것이리라.

“어떻게 할까요, 다키님? 이대로 쭉 갈까요?”

“글쎄…… 어떻게 할까…….”

다른 고블린들이 없는지 더 살펴보던 나나가 내게 물어봤다. 허나 나는 좀처럼 대답할 수 없었다. 세 사람을 본 순간 그들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것이다.

열심히 하고 있지만 어딘가 어설픈 움직임, 약체 몬스터인 고블린으로도 고전하는 모습.

그들에게선 나나와 같은 냄새가 났다. 게임을 접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만이 풍길 수 있는 미숙한 냄새. 다름 아닌 뉴비의 냄새였다.

이를 맡고 나니 손발이 덜덜 떨렸다. 고인물로서 차마 고칠 수 없는 오랜 버릇이 나오려는 것이었다.

‘아, 겁나 들박하고 싶네.’

들박, 들어서 박는다는 상스러운 의미를 가진 줄임말로 고인물들이 뉴비를 반강제로 도와주는 걸 의미한다.

고인물들이 뉴비를 도와주는 사례는 어느 게임에나 있지만 특히 가디스 던전에선 이런 경우가 유독 많다.

가디스 던전은 신규 유저의 유입이 굉장히 적은 게임이다.

멀티 플레이를 하려 해도 허구한 날 같은 사람만 만나며 그들은 전부 플레이 타임을 몇 백 시간씩 넘긴 고인물들이다.

서서히 질려가는 회차 진행. 매일 똑같은 사람과 만나는 멀티 플레이.

그렇게 게임 자체가 무료하게 느껴질 때 썩어가는 물 안에 청정수가 한 방울 떨어지면 고인물들은 뽕 맞은 개처럼 발광할 수밖에 없다.

파리만 날리던 태권도 도장에 운동이라곤 해본 적도 없는 여대생이 신입으로 들어왔다 생각해보라. 보기만 해도 귀엽고 막 가르쳐주고 싶고 이것저것 도와주고 싶지 않겠는가?

그것과 같은 이치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게임을 얼마나 할지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뉴비를 본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와준다. 들박은 고인물들에게 있어서 본능과도 같은 것이며 최고의 컨텐츠다. 뉴비들이 어버버 하는 모습만 봐도 고인물들은 즐겁고 행복하다.

그 마약 같은 즐거움을 몇 번이나 만끽한 나는 뉴비들을 보면 어쩔 줄 모르는 몸이 되었다.

마치 쥬지에다가 뉴비들만 보면 요란하게 진동하는 전동 오나홀을 씌워놓은 기분이다. 그들의 야한 냄새 때문에 나는 유사 발정 상태에 접어든 것이었다.

“후욱, 후욱, 후욱……!”

“다키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그렇게 뉴비들을 향해 달려가려던 순간, 나나가 걱정스러운 어투로 물어왔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평정심을 되찾는다.

“아,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열심히 싸우고 있는 거 보니까 귀여워서.”

“대체 어디가요……?”

내 말을 들은 나나가 다시 한 번 3인조 파티를 돌아보았다.

“크흐으으윽!”

“……?! 야, 너 괜찮아?!”

“괜찮아 살짝 긁힌 거뿐이야! 난 신경 쓰지 말고 계속 공격해!”

탱킹을 하던 검방의 청년이 상처를 입은 참이었다.

녹슨 장검에 베인 그는 고통을 호소했지만 이 악물고 버티며 고블린과 맞서 싸웠다. 옆에서 그를 걱정하던 여전사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봐도 귀여움이 느껴질 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그들에게선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그런 걸 보고 귀엽다고 말하니 나나가 이상하게 여길 만도 하다.

설마하니 나나한테 이상한 사람 취급받게 될 줄이야.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너한텐 그런 시선 받고 싶지 않았는데.

나나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길드에서 뉴비들을 봤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원작 게임 시절의 버릇이 나왔다. 아무래도 뉴비들이 고전하는 모습을 보고 스위치가 켜진 모양이다.

증상의 원인을 파악하면서 나 역시 뉴비들을 바라보았다.

어리숙한 부분이 없잖아 있었지만 저들은 나름 수월하게 싸우는 중이다.

탱커는 파티원들을 능숙하게 보호했으며 이를 뚫고 들어오는 고블린들은 창술사가 즉시 처리했다.

거기에 더해 주술사의 지속적인 지원까지 더해져 파티는 매우 안정적인 진영을 갖출 수 있었다.

처치하는데 시간이 걸릴 뿐이지 이 싸움은 이미 모험가들의 승리나 다름없다.

고블린 무리는 자신들의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무작정 달려들다가 죽어나가기만 했다. 대략 10마리 안팎이었던 고블린들이 어느덧 다섯 마리 밖에 남지 않았다.

‘자제하자, 지금 내가 끼어들어봤자 방해 밖에 안 될 거야.’

고인물로서 뉴비를 지나치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하지만 무작정 도와준다고 긍정적인 영향만 미치는 건 아니다.

저렇게 직접 싸워보고 파티원들과 호흡도 맞춰봐야 실력이 쌓이고 자신감이 붙는다. 안 그래도 잘 싸우고 있는 애들인데 굳이 도와줄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나나에게 말했다.

“저기 끼어들면 저 사람들도 우리도 귀찮아질 거야. 그냥 원래 가려던 길로 돌아가자.”

“네 다키님. 그렇게 하죠!”

날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나나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애초부터 3인조를 도울 생각이 없었나 보다. 하긴 뉴비라고 무턱대고 도와주는 사람은 나 같은 고인물들 뿐이겠지.

내심 뉴비 모험가들을 응원하면서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저 정도 실력이면 중반부로 접어들지 않는 한 큰 문제는 없으리라.

그리 판단하며 왔던 길로 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끄아아아악!”

“린크!!”

“린크……!”

콰아아아앙!!

“……!”

갑자기 고통어린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동료들의 비명과 공동 전체를 울리는 굉음도 함께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도, 나나도 깜짝 놀랐다. 우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소리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커흐윽……! 쿨럭, 쿨럭……!!”

비명 소리의 주인은 검과 방패로 무장한 청년이었다. 공동 한 가운데에서 고블린들과 대치하던 그는 어느새 왼쪽 벽면에 처박혀 있었다.

그가 들고 있던 무기는 바닥을 나뒹굴었고 청년은 어딘가 잘못 맞았는지 연신 기침을 토해냈다. 척 봤을 때도 무척 고통스러워 보였다.

멀쩡하던 사람이 어쩌다가 저런 꼴이 됐을까. 그 원인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크르르르르르…….”

동굴의 어둠 속에서 웬 덩치 큰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릴라처럼 비대한 몸집. 외형은 고블린과 비슷했으나 체격은 비교조차 안 됐다.

몸집은 율리아나에서 만난 전사들 보다 우락부락했으며 키는 나나 보다 컸다. 나나가 160cm 정도인 걸 생각해보면 저놈은 고블린치곤 상당한 장신이었다.

“홉 고블린……? 저놈이 여기서 왜 나와……?”

덩치 큰 고블린, 홉의 등장에 나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아니 진짜 저놈이 왜 여기서 나오는 거지? 빨리 나와 봐야 중반부에서나 등장하는 몬스터가 초반 던전에 떡하니 등장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키님? 저놈이 뭐하는 놈이기에 그러시는 거예요?”

내 혼잣말에 나나가 불안한 어투로 물었다. 그에 나는 순간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가라앉히며 설명했다.

“저건 홉 고블린이란 건데 고블린의 강화 개체 중 하나야……. 일반 고블린 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스펙을 가진 정예 몬스터라고 볼 수 있어…….”

생명력은 고블린의 열 배, 공격력은 두 배에 달하며 인내력이 높아서 경직도 잘 안 받는다.

거기에 각종 특수 능력까지 보유한 탓에 스펙이 낮은 초보자들이 조우하면 열에 아홉은 상대도 되지 않는다.

몇 백 시간 이상 플레이한 고인물이 아니고서야 저스펙으론 덤벼볼 수도 없는 진짜배기 괴물인 것이다.

“그래봤자 고블린 아니에요? 고블린이 고블린 소굴에서 등장한 건데 이상할 것까지야…….”

“아니……, 확실히 이상한 일이야. 원래대로라면 저놈은 초반부에 절대 등장하지 않거든.”

말했듯이 홉 고블린은 절대 초보자가 상대할 만한 몬스터가 아니다.

상대하기 어려운 만큼 중반부부터 등장하도록 배치되어 있으며 초반부에 나오려면 게임을 한번 클리어 해야만 한다.

즉 놈을 이 구간에서 보려면 게임을 최소 2회차 이상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도 게임 세계의 변수 중 하난가? 아니면 이 세계가 1회차가 아닌 거야?’

순간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처음부터 의심스럽긴 했다.

저택의 보상방에는 상자가 두 개나고 있고, 조건을 갖춰야만 출현하는 상송이 난데없이 자기 멋대로 튀어나왔다.

이건 비단 게임 세계의 변수라고 해석할 게 아니다. 게임으로 따지면 뭔가 오류가 생긴 것이다.

상송과 홉 고블린, 둘 중 하나만 나타났다면 의심을 할 일도 없었겠지만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연속으로 이어지니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크워어어어억!!”

“크흑……!”

내가 고민을 거듭하는 동안 홉 고블린이 거대한 클럽을 휘두르며 돌진했다.

목표는 정면에 있는 창술사. 고블린이 달려들자 그녀는 놈의 거체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홉 고블린이 시속 80킬로미터로 달려오는 경차처럼 보일 거다. 그만큼 전속력으로 달려드는 홉 고블린은 무시무시했고 차마 고블린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이 자식이……! 감히 린크를……!!”

쐐애액!

한순간 몸이 굳었던 창술사였으나 이내 창을 내질렀다. 강적을 상대로도 맞서 싸우는 용기는 가상했지만 지금 그녀의 판단은 크게 잘못됐다.

창은 사거리가 긴 대신 저지력이 낮은 무기다. 하물며 그녀가 사용하는 윙드 스피어의 저지력은 고작 10. 인내력이 60인 홉 고블린은 눈 하나 깜짝 안 할 수준이다.

“크훌다! 키 칼루 즈바!!”

“어어어……?!”

내 예상대로 홉 고블린은 창술사의 공격을 그대로 뚫고 들어왔다.

그녀가 전력을 다해 가한 찌르기는 생채기만 남길 뿐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창술사가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홉 고블린의 공격이 더 빨랐던 것이다.

놈은 맹렬한 기세로 클럽을 휘둘렀고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둔중한 클럽이 창술사를 타격했다.

퍼어어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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