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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랭크 모험가 감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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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이 끝난 뒤 나와 나나는 먼저 트롤 슬레이어들의 시체를 처리했다.
도시와 많이 떨어져 있는데다가 주변에 인기척도 없어서 우리의 살해 행위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다만 던전 입구에 그대로 방치해두면 지나가던 모험가들이 발견할 수 있으니 수풀에 던져놓기로 했다.
“푸스! 로 다아앗!”
콰아아아앙!
시체들을 한 곳에 모은 뒤 나나가 우렁찬 외침과 함께 거부를 사용했다. 그러자 트롤 슬레이어들의 시체는 저 멀리 날아가 수풀 너머로 사라졌다.
“정말 이걸로 괜찮을까요? 땅 파서 깊게 묻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시체들을 걸레짝처럼 날려 보낸 나나가 수풀 너머를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 말에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이 근처에는 늑대나 표범 같은 맹수들이 많아. 던전 클리어하고 나올 때쯤엔 전부 짐승들 뱃속에 들어가 있을 거야. 나중에 먹다 남은 뼛조각이나 좀 발견되겠지.”
이미 피 냄새가 멀리 퍼졌을 거다. 당장은 조용하지만 곧 여기저기서 짐승들이 몰려들 것이다. 자연이라는 훌륭한 처리반이 있는데 여기서 더 조치를 취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래도 증패나 지갑처럼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물건들은 전부 챙겨뒀다.
얼굴도 돌로 몇 번인가 내리찍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수준까지 함몰시켜 놨다.
그러니 행여 시체가 발견된다 하더라도 트롤 슬레이어의 시체란 건 밝혀내지는 못할 거다. 우리가 죽였다는 사실은 더더욱 모를 테고.
이곳이 중세 배경의 판타지세계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렇게만 해도 완전범죄라고 할 수 있겠지.
“이러니까 용의주도한 연쇄살인마 된 것 같아요. 고작 이틀 만에 사람을 여섯이나 담그다니. 완전 코난 뺨치는 수준 아니에요?”
차마 부정할 수 없는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무척이나 살벌한 주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나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나나 역시 나처럼 적들을 게임 캐릭터로 인식하는 모양이었다.
원래 세계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전부 같은 증상을 보이는 걸까? 살인에 담담해지고, 잔인하거나 끔찍한 장면을 봐도 동요하지 않는 것 말이다.
마치 모종의 힘이 우리의 정신을 보호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도, 나나도 이렇게 태연할 수는 없었을 거다.
정말 그런 힘이 있다면 분명 우리를 게임 세계에 떨어뜨린 존재, 유다희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리더가 죽기 전에 한 말을 떠올리니 묘하게 확신이 갔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우리에게 그런 힘을 준 걸까. 게임 세계에 보다 쉽게 적응하라고? 아니면 모종의 목적이 있어서?
지금으로선 잘 모르겠다. 아니, 비단 지금 뿐만 아니라 유다희와 게임 세계 전이에 대해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다.
뭐, 사람을 반쯤 사이코패스로 만들어놓은 것 같지만 아무나 죽이고 다니지만 않으면 문제될 건 없겠지.
누차 생각하는 거지만 살인에 담담해지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적어도 이 게임 세계에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시체들을 뒤로 하고 던전 내부로 향했다.
“보자…… 골드 등급이 하나에 브론즈가 하나, 나머지는 다 실버군.”
“돈주머니에는 1만 아웬이나 있어요! 완전 대박이네요!”
던전에 들어가는 동안 우리는 전리품을 확인했다.
나는 증패에 있는 내용을 확인하고 나나는 놈들이 소지금을 셌는데 생각 외로 수입이 괜찮았다.
살인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영 찝찝했지만 그래도 금색으로 반짝거리는 동전들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이러니까 진짜 살인강도 듀오 같네.
“대가리한테서 뺏은 칼은 어쩔까요? 다키님이 쓰실래요?”
돈주머니를 가방 안에 집어넣은 나나가 내게 장검을 내밀었다. 리더가 사용하던 북방의 장검이었다.
참고로 증패를 확인해보니 리더는 안드레이라는 이름이었다. 등급은 니아, 프란체스카와 같은 골드였다.
“좋은 무기긴 한데 나랑은 빌드가 달라. 그게 아니더라도 굳이 가져가야 되나 싶고.”
“듣고 보니 그러네요. 이걸로 괜히 덜미 잡히면 귀찮아질 테니까요.”
트롤 슬레이어를 몰살했지만 문제는 비단 그놈들뿐만이 아니다.
안드레이와 그 부하들은 바나르간드 클랜의 주인, 펜리르의 권속들이다. 그 늑대녀의 클랜이 전 대륙에 퍼져 있는 것을 생각하면 전리품을 챙기는 건 무척 위험한 행동일 수 있다.
북방의 장검이 안드레이의 고유 무기는 아니지만 또 모르지 않는가. 놈들이 금태양의 지갑을 알아본 것처럼 다른 클랜원들이 놈의 검을 알아볼지.
“아깝지만 가는 길에 대충 버려두자. 그러면 나중에 발견되더라도 던전 공략 중에 죽었다고 판단할 거야.”
“좋은 생각이네요 다키님! 그렇게 하죠!”
같은 이유로 다른 놈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나 방어구도 챙기지 않았다.
이제부터 벌어질 전투를 생각하면 무게를 늘리는 건 무척이나 비효율적인 일이다.
무엇보다 던전을 온전히 클리어하면 그런 장비들을 내다 파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금을 벌 수 있다. 귀찮게 갑옷을 벗기고 무기를 챙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후로 얼마나 걸어갔을까.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자 곧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이 우리를 맞이했다. 슬슬 조명이 필요할 듯했다.
“나나야, 성스러운 빛 지금 쓸 수 있겠어?”
“네, 다키님! 한 번 해볼게요!”
내 질문에 나나는 기합을 넣으며 홀장을 들었다. 하지만 이전에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 걱정스러운 기색이 담겨 있었다.
“제발 잘 돼라……! 위대한 빛의 창세신이시여, 밝은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주세요……!”
파아앗!
영창을 마치자 밝은 빛이 동굴 내부를 밝혔다.
다행히 이번에는 몇 초 만에 꺼지지 않았다. 나나가 나름대로 집중을 해서 지속 시간이 크게 늘어난 것이었다.
“대단한데? 처음 썼을 때보다 훨씬 늘었잖아.”
“후후훗! 이게 다 재능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두 번 만에 성공한 나나를 보며 감탄하자 그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자화자찬했다.
입가에서 미소가 떨어지지 않는 걸 보면 내게 칭찬받아 기분이 좋아진 듯 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나나는 곧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 저희 횃불 사오지 않았어요? 제가 빛 밝히는 것보단 횃불 쓰는 게 더 안정적일 거 같은데…….”
그 말도 일리가 있다.
나나가 성스러운 빛을 완전히 마스터했다면 모를까, 아직은 숙련도가 부족하기 때문에 법술을 유지하는 동안 계속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곧 조명을 밝히는 동안엔 다른 법술을 사용하는 게 제한된다는 뜻이다.
그럴 바에야 들고 다니기 편한 횃불을 쓰는 게 좋지 않겠냐는 것이다. 기껏 사왔는데 안 쓰는 것도 이상하고 말이다.
허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론했다.
“횃불은 빛 밝히려고 가져온 게 아니야.”
“그러면요?”
“중반부쯤부터 쓸 일이 생겨. 이번 던전에선 필수적일 물건이니까 아껴 써야 돼.”
모험가 길드에선 구하지 못했지만 오는 길에 잡화점이 한 군데 더 있어서 횃불만큼은 챙길 수 있었다.
허나 그 수가 많지 않다. 지금 가방 안에 들어 있는 횃불은 고작 세 개, 공교롭게도 다른 잡화점에도 재고가 별로 없었다. 성화 교단에서 대량으로 발주를 했다나.
“대체 뭐가 나오기에 불이 그렇게나 중요한 거예요?”
의미심장한 이야기에 나나가 어리둥절해했다. 마침 좋은 기회인 것 같다. 그녀에게도 던전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으니까.
그렇게 내가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를 꺼내려 할 때였다.
“응? 다키님 저기…….”
“왜? 뭐 있어?”
한 차례 귀를 쫑긋거린 나나가 정면을 가리켰다. 홀장을 좀 더 앞으로 내밀자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주위의 지형을 떠올렸다. 익숙한 구간이다. 그 말은 곧 적들이 나올 장소에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나나야 물러나 있어.”
“……! 적인가요?!”
“그래, 저놈들도 우리 봤을 거야.”
내가 거기까지 말한 순간이었다.
쐐애액!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공기를 찢으며 날아온 그것은 다름 아닌 화살이었다. 선두에 서 있던 나는 재빨리 검을 휘둘러 그것을 베어냈다.
서걱!
화살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방어 패링으로 원거리 공격을 튕겨내려면 관련 스킬이 필요하지만 이렇게 정확한 순간에 무기를 휘두르면 스킬 없이 투사체를 파괴할 수 있다.
물론 모든 투사체를 파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당장 이후에 날아온 것이 그랬다. 화살을 막아내자 이번에는 또 다른 원거리 공격이 가해진 것이었다.
팅! 티딩! 티잉!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를 들은 나는 재빨리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가드 게이지가 연달아 깎여나가며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눈으로 잘 보이지도 않는 자그마한 크기의 침이었다.
맞는 순간 10의 중독 수치를 부여하는 독침이다.
중독은 여느 게임처럼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감소시키는 상태이상으로 매초마다 누적된 중독 수치만큼 생명력이 빠져나간다.
방금 전에 날아온 독침이 총합 세 개였으니 전부 맞았다면 30의 중독 수치가 쌓여서 초당 30의 피해를 지속적으로 받게 됐을 거다.
“뭐, 뭐예요!? 누가 공격하고 있는 거예요?!”
연이은 원거리 공격에 나나가 당황을 터뜨렸다. 그에 나는 어둠 속을 꿰뚫어 보며 소리쳤다.
“지금 당장 저쪽으로 찬광 날려!”
“앗, 네! 위대한 빛의 창조신이시여……!”
갑작스러운 지시에도 나나는 즉각적으로 주문을 영창했다. 우왕좌왕 하는 것처럼 보여도 전투에 제대로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타다닷!
그때 사방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나가 캐스팅하는 사이 습격자들이 사방으로 산개한 것이었다. 주문이 날아올 것을 인지하고 일제히 회피하는 것이리라.
여태껏 나온 적들 보다 훨씬 지능적인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쯤은 이미 계산하고 있었다.
애당초 내가 원한 건 놈들이 찬광을 맞고 기절하는 상황이 아니라 뿔뿔이 흩어지는 상황이다.
타앗!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놈들을 재빨리 추적했다. 놈들은 민첩하지만 인간 보다는 이동 속도가 느리다. 보폭이 좁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는 놈들이 어디로 숨어들지 전부 파악하고 있다.
“잡았다!”
푸후욱!
습격자가 바위틈으로 숨어들려는 찰나 날렵하게 쾌도를 뻗었다. 그러자 놈의 몸에 칼날이 박혔고 곧 귀에 거슬리는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끼케에에에엑!”
“아 씨발 귀갱!!”
불쾌하기 그지없는 비명 소리에 나나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다행히 그녀는 이미 영창을 마친 상태였고 내가 가르쳐준 방향으로 찬광을 날려 보낸 후였다.
파아아아앗!
“끄키이이익!”
“케헤에에엑!!”
눈부신 금색 빛이 동굴 내부를 밝게 비추었다. 빛이 사방으로 퍼지자 어둠 속의 습격자들도 이내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아이 정도 크기에 기분 나쁜 진녹색 피부. 마귀와도 같은 검은색 눈동자와 긴 귀, 그리고 긴 코.
당연하게도 습격자들의 정체는 고블린이었다. 흔히 판타지 작품에 등장할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야 좀 보이네.”
한 놈을 찔러 죽인 나는 곧장 다른 놈들에게 달려갔다.
나름 피해보려 한 고블린 무리였으나 전원이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세 마리가 그대로 찬광을 맞고 기절한 것이었다.
세 놈이 기절한 틈을 타 어둠 속으로 숨어든 놈들을 처리한다. 그렇게 하면 포위당할 위험도, 협공당할 위험도 없이 흩어진 놈들을 각개격파 할 수 있다.
“키 칼루 쿨다!!”
오른쪽에 있는 바위 뒤편으로 들어가자 매복해 있던 녀석이 독이 잔뜩 묻은 단검을 들고 돌진해왔다.
130센티미터도 안 될 법한 왜소한 체구였지만 그런 놈이라도 게거품을 문 채 흉기를 휘두르니 꽤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말했듯 고블린은 한 마리만 있으면 굉장히 약하다.
공격력은 85에서 135 정도로 꽤 아프지만 생명력은 110 밖에 안 된다. 더군다나 리치 면에서도 단검을 든 저놈보다 쾌도를 든 내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1대1이 된 시점에서 고블린은 나에게 피해를 줄 가망조차 없는 것이다.
“기습을 할 거면 조용히 했어야지!”
“크헤엑……!!”
빠르게 검을 휘둘러 놈의 머리를 쳤다. 그러자 고블린의 윗머리가 마치 뚜껑 열리듯 잘려나갔다. 찬광이 뿜어낸 빛 때문에 놈의 절단된 뇌가 쓸데없이 잘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미처 피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소용없다.
놈들의 매복 위치는 이미 다 외워뒀다. 설령 놈이 입을 꾹 다물고 기습을 감행했더라도 나한텐 안 통했을 거다. 위치를 이미 발각당한 매복은 더 이상 매복이 아니니까.
“크키이이잇!!”
“키 칼룩! 키 칼…… 쿠헤에에엑!!”
처음으로 기습한 놈을 시작으로 나는 바위 뒤편에 있던 놈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다.
찬광 범위에서 벗어나 이쪽으로 숨어든 놈은 총 세 마리. 한 놈이 기습을 실패한 뒤엔 두 마리가 일제히 덤벼들었으나 역시 허튼 노력이었다.
바위 뒤편의 공간은 그리 넓지 않다. 그런 곳에서 나란히 덤벼오면 한 놈이 덤비나 두 놈이 덤비나 별 차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