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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94화 (94/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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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랭크 모험가 감다키

어제와는 사뭇 다른 나나의 반응에 나는 적잖게 놀랐다.

이전의 나나였다면 이 시점에서 잠자코 있거나 맞장구를 치며 상황을 부드럽게 풀어가려 했을 것이다.

남에게 맞춰주는 것밖에 모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정도뿐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반면 지금의 나나는 마치 싸움닭처럼 매섭게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그렇다고 자기 멋대로 무작정 나서는 건 아니었다. 나 또한 그들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는 걸 사전에 파악하고 입을 연 것이다.

“이 썅년이 보자보자 하니까……! 너 지금 뭐라 그랬냐?!”

나나의 도발에 덩치 큰 남자가 주먹을 들어올렸다. 여자라고 해서 봐줄 생각은 1도 없는 모양이다.

정말 신사답지 못하군. 아니, 애당초 저놈한테 신사의 신자라도 붙어 있었다면 초면부터 욕을 박지는 않았겠지.

아무튼 덩치 큰 남자가 주먹을 드는 것과 동시에 나 또한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쾌도의 효과가 있기에 남자들은 내 움직임을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놈이 한 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이면 팔과 함께 목을 베어버릴 생각이었는데 덩치 큰 남자는 나나 근처에도 오지 못했다.

이번에도 리더가 놈을 불러 세운 것이었다.

“야…… 너 내 말 못 들었냐? 아니면 들어놓고도 그 지랄하는 거야?”

“……!”

살벌한 눈빛으로 거한을 노려본 리더. 그의 눈동자는 마치 날카롭게 깎은 얼음과도 같았다.

험악한 인상까지 더해지니 당장이라도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눈빛이 완성되었다. 이에 쫄은 거한은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가 뒤로 물러서고 나서야 시선을 뗀 리더는 다시 한 번 점잖게 사과한다.

“성의 없게 느껴졌다면 그 부분도 사과하겠소. 그쪽 아가씨 말대로 우리 애가 좀 모자라서 그렇다오. 사과의 뜻이라기 뭐하지만 이거 받고 좋게 풀지.”

그리 말하면서 남자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밝은 금색이 햇빛에 반사되었다.

“……!”

“와……!”

남자가 건넨 건 1천 아웬 동전 5개였다. 반짝이는 금색 동전을 본 나와 나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남자와 동전을 번갈아봤다.

사과의 표시로 50만원을 대뜸 건네주다니. 충격적이기 그지없는 일이다. 심지어 우리는 실질적으로 손해 본 것도 없는데 말이다.

어느덧 내 안에서 타오르던 분노는 하룻밤 지난 모닥불처럼 사그라졌다. 이게 자본주의의 힘이다. 깽값으로도 50만원 받았으면 그럭저럭 잘 받은 거 아닌가.

“…….”

“…….”

5천 아웬을 바라보던 우리는 슬쩍 시선을 교환했다.

단순 시비만으로 5천 아웬을 건네주려 하니 우리 둘 다 순식간에 화가 가라앉았다. 허나 동시에 의심이 되기도 했다.

현실에서도 50만원이면 큰돈이지만 이 세계의 5천 아웬은 그보다 훨씬 가치 있다. 모험가들이 돈을 많이 번다곤 해도 결코 적지 않은 돈을 선뜻 주니까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으흠…… 그쪽에서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니 어쩔 수 없네요. 저희가 선처하겠습니다.”

“맞아요~ 사람이 좀 멍청하고 인성 빻을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한 차례 고민한 우리였지만 나도, 나나도 결국 자본주의의 노예였다.

우리는 리더의 말에 긍정적으로 반응했고 만면에 미소를 띠웠다.

끝까지 도발하는 나나로 인해 뒤에 있는 거한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지만 이미 두 번이나 제지를 받은 터라 뭐라 하지는 못 했다.

“이해해줘서 고맙소. 그러면 빨리 돈 받고 지나가시오.”

그리 말하며 리더가 손을 내밀었다. 이에 나나는 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1천 아웬 동전 다섯 개를 받아들어 지갑에 넣었다.

짤랑거리며 들어가는 돈 소리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5천 아웬이야 던전 한 번 도는 것에 비하면 우스운 돈이지만 꽁으로 굴러들어온 돈을 누가 싫어하겠는가.

“그러면 수고들 하세요~!”

생각지도 못한 수입에 기뻐하며 던전에 발을 들였다. 그렇게 남자들을 지나 어두컴컴한 던전 속으로 진입하려던 순간이었다.

“어이, 잠깐 좀 서지.”

“……네?”

갑자기 파티의 리더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이에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리더를 바라보았다. 동굴 입구에 서 있는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험악했다. 조금 전의 이성적인 태도와는 전혀 상반되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뭐지? 우리가 뭐 잘못이라도 했나? 아니면 처음부터 함정이었던 거야?

나는 온갖 생각을 하며 본능적으로 놈들을 살폈다. 비단 리더 뿐만 아니라 다른 놈들까지 우릴 죽일 것 같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무기를 빼드는 그들을 보며 경계하던 무렵, 리더가 입을 열었다.

“너희 그 지갑 어디서 났냐.”

“지갑이요……? 갑자기 그건 왜…….”

“너희가 뭔데 우리 동생 지갑을 자기 물건마냥 들고 있냐고.”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허나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리더의 말을 들은 나는 천천히 나나가 쥔 지갑으로 고개를 돌렸다.

표면에 꽃 모양이 그려져 있는 지갑. 7천 아웬이란 거금이 들어 있는 그 가죽 지갑은 다름 아닌 금태양의 것이었다. 놈의 시체에서 파밍한 후로 유용하게 쓰고 있었던 것이다.

“다, 다키님…….”

나나도 본인의 실책을 깨달은 듯했다. 그녀는 자책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낭패감을 느끼며 5인조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 반응으로 보건대 그들이 바로 금태양의 동료인 트롤 슬레이어 같았다. 금태양까지 포함하면 딱 6명, 수도 맞아 떨어진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동료의 지갑을 당당하게 꺼내버렸다. 금태양이 남에게 돈을 기부할 리는 추호도 없을 테니 이들은 우리의 정체와 금태양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리라.

“이 새끼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든다 싶었는데 역시 내 감은 틀리지 않았어!”

“우리 애 건드린 것만으로 모자라 대놓고 약탈품을 꺼내? 진짜 뒤지고 싶은 거지, 응?”

점점 험악해지는 눈빛으로 보아 그들은 이미 결론까지 도달해 있었다. 우리가 금태양을 죽인 범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리라.

“형님! 저 새끼들 어떻게 할 거야?! 틀림없이 자이크 죽인 놈들이라고!”

도끼를 빼어든 채 재촉하는 거한. 다른 놈들도 별반 다를 거 없었다. 그들은 우리를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기색이었다. 동료애 한 번 각별하군.

그런 남자들의 말을 듣던 리더 또한 검을 빼들면서 얘기했다.

“당연한 걸 뭘 묻냐.”

첫 인상부터 만만하지 않았는데 칼을 뽑아드니 엄청난 박력이 느껴졌다. 트롤 잡고 설쳐대는 관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결코 허세 가득한 머저리는 아니었다.

양손으로 검을 쥔 놈이 이내 으르렁거리듯 선언했다.

“저 변태 새끼는 찢어 죽이고 엘프는 죽는 것보다 더한 꼴을 보여준다. 우리 동생을 죽인 대가는 그리 만만하지 않을…….”

“벽력일섬!!”

리더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재빨리 검을 뽑았다.

장비를 보고 역할 파악은 다 끝내 놨다.

맨 왼쪽에 있는 후드 쓴 놈이 궁수, 그 옆에 있는 놈이 마법사. 그 외에는 전부 근접 딜러다. 저 둘만 처리하면 나머지는 눈 감고도 상대할 수 있다.

“어, 어어어어어?!”

빠르게 접근한 나는 섬격을 준비했고 그것을 본 마법사는 황급히 즉발 주문을 발동했다. 급속도로 돌진해오는 날 보고 당황한 것이었다.

놈의 손에서 불꽃이 맺힌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즉발 주문이라고 해서 딜레이가 없는 건 아니다.

하물며 내 무기인 쾌도는 매우 빠른 공격 속도. 상대의 딜레이가 얼마나 짧던 쾌도로 발동하는 섬격보다 빠를 순 없다. 오히려 나를 공격하려 해서 섬격의 반격 조건만 충족됐을 뿐이다.

“핫하! 죽어라!”

파지지지직!!

청백색 뇌광과 함께 날카로운 일격이 날아든다.

곧 쾌도가 마법사를 사선으로 그었고 번개를 두른 궤적은 비단 마법사뿐만 아니라 그의 옆에 있던 궁수, 그리고 장창으로 무장한 전사까지 한꺼번에 베어버렸다.

“크하아아악?!”

“케헤엑……!!”

허공에 데미지가 떠오른다. 맞은 놈마다 데미지는 제각각이었지만 다들 500을 아득히 넘어섰다.

한 명, 한 명 꽤 괜찮은 장비를 가지고 있어서 섬격의 본래 데미지를 그대로 뽑아내지는 못했지만 데미지가 500을 넘어선 시점에선 큰 의미가 없다.

마법사나 궁수는 생명 스탯이 별로 높지 않다. 두 놈의 생명력은 아무리 높아봐야 450 언저리. 명백한 오버킬이다.

그 증거로 마법사의 상체는 오른쪽 팔과 함께 깔끔하게 절단됐다. 한 차례 피어오르던 불꽃은 뿜어져 나오는 핏물과 함께 힘없이 꺼져버렸다.

결국 마법사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두 동강이 나 죽어버렸다. 다른 놈들도 그리 좋은 꼴은 아니었다.

나를 제지하려던 장창 전사는 양쪽 팔이 잘려나갔으며 궁수는 목이 떨어졌다.

섬격 한 방으로 두 놈이 즉사, 한 명은 전투 불능에 이르렀다. 선빵으론 꽤 나쁘지 않았다. 이로서 놈들의 전력은 크게 약화됐다.

“이 새끼가!!”

“감히 우리 동료를!”

순식간에 두 놈이나 죽자 리더와 거한이 격노하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놈들은 오로지 나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나나의 위험성은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나야!”

“푸스! 로 다아앗!!”

콰아아아앙!!

나나가 지팡이를 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그녀를 기점으로 엄청난 충격파가 일어났다. 거부를 발동한 것이었다.

“커흑?!”

“으어어어어억!!”

거부에 직격당한 놈들은 그대로 저 멀리 날아갔다. 데미지는 없지만 이걸로 좀 더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됐다. 적어도 동굴 쪽으로 몰리면서 퇴로가 막힐 일은 없어졌다.

“쯧,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날아가는 두 놈을 쫓아가며 혀를 찼다.

여차하면 싸울 생각이었다만 막상 사람을 죽이려니까 기분이 나빠졌다.

살인은 불쾌하다. 아무리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다한들 내 손으로 한 사람의 생명을 꺼뜨리는 일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그것이 설령 적이라 해도 말이다.

허나 들킨 이상 어쩔 수 없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놈들도 분명 좋은 녀석들은 아닐 거다. 우리들과 만나기 전까지 나누던 대화는 틀림없이 살인을 암시하고 있었다. 분명 동굴 앞에서 대기 타며 누군가를 죽이려 한 것이리라.

그런 놈들이니 죽여도 문제없으리라. 난 지금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는 거다.

더군다나 이곳은 도시에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오지. 누구 하나 죽어도 아무도 모른다. 이들이 오늘 여기 있었던 건 산새들과 들짐승만이 알아주리라.

“죽어 이 좆같은 새끼야!!”

내가 놈들에게 당도할 무렵, 자리에서 일어난 거한이 도끼를 휘둘렀다.

날선 도끼가 매섭게 날아들었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나는 가볍게 굴러서 회피했고 악에 받친 칼질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거리 재기도, 예측도 없는 평타 같은 건 비눗방울을 피하는 것만큼이나 쉽다. 그냥 뒤로 구르는 것만으로도 피해지는 공격에 내가 맞을 리 없다.

“아니?!”

공격이 헛나가자 거한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놈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내 움직임을 어느 정도 읽었는지 리더가 거한에게 지시를 내렸다.

“병신아! 멍 때리지 말고 계속 공격해! 네가 막고 있으면 내가 친다!”

“아, 알았어!”

멀리서 리더의 지시가 떨어지자 거한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는 한 차례 회피한 나를 추적하여 도끼를 내리쳤다. 자신의 체구를 활용하며 공격을 퍼붓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영 별로였다. 온힘을 다한 공격은 한 번만 맞아도 치명적이겠지만 그것뿐이다. 공격을 명중시키기 위한 정확함도, 적을 속이는 능숙함도 없다.

리더를 보고 다른 놈들도 괜찮은 실력이지 않을까 했는데 실망이다. 금태양이 형님이라 부르는 놈들이 뛰어나면 얼마나 뛰어나겠냐만.

“너랑 싸우는 거 존나 재미없어.”

카아아아앙!!

“……!!”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공격을 무심히 튕겨냈다. 공속이 느린 한 손 도끼라 튕겨내는 게 무척 쉬웠다.

공격 패링에 당한 거한은 그대로 무방비 상태가 됐고, 나는 어느새 악마처럼 변한 왼팔을 놈의 복부에 쑤셔 넣었다.

푸후욱!!

“커허억……!!”

“안톤!!”

거한의 입에서 피가 왈칵 뿜어져 나온다. 그걸 본 리더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거한 보다 가벼워서 그런지 꽤 멀리까지 날아간 듯했다.

하지만 놈이 아무리 빨리 달려와도 동료를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정타를 맞은 시점에서 놈은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사, 살려…….”

“유언까지 노잼이군. 그냥 빨리 죽어.”

푸화아아악!!

놈의 내장을 꽉 움켜쥔 채 거칠게 손을 뽑았다. 그러자 대량의 출혈과 함께 놈의 대장이 배 밖으로 빠져나왔다. 참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었다.

끔찍하게도 거한은 내장을 뽑은 시점에서도 살아 있었다. 나는 그의 목을 칼로 베어서 자비로운 최후를 안겨주었다. 그때쯤 리더도 내게 도달해 칼을 휘둘렀다.

“네노오오오옴!!”

카아아아앙!

날카로운 찌르기에 나는 방어 패링으로 대응했다. 속도가 빨라서 공격 패링을 썼다면 튕겨내지 못했을 거다. 고개를 돌려서 확인하니 놈의 칼에선 붉은색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자세를 보니까 관통 찌르기인 듯했다. 줄여서 관찌라고 부르는 전투 기술로 근력 계열 전사들에겐 밥줄과도 같은 돌진기다.

관통 찌르기

액티브

요구 스탯: 근력 18

비용: 70 기력

사용 조건:  근접 무기 착용

습득 방법: 운명 항목에서 습득

효과: 최대 20미터 거리를 빠른 속도로 돌진하여 목표 지점에 있는 적을 강하게 찌른다.  +160퍼센트의 피해를 주며 스킬 발동 도중 슈퍼 아머가 적용된다. 피격된 적은 즉시 넉백 후 다운된다. 인내력이 50 이상인 적에겐 효과가 발동하지 않는다.

돌진기인 데다 이동 속도도 빠르고 슈퍼 아머 효과까지 붙어 있는 사기 스킬. 거기에 더해 적을 넉백, 다운시키기는 효과도 있다.

직격 당했다면 그대로 균형을 잃고 쓰러져 후속타를 맞았을 거다.

하지만 그건 PVP를 해본 적 없는 초보들이나 당하는 일이다. 관찌를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저런 식으로 쓰지 않는다.

“그렇게 요란하게 달려오면 누가 못 막겠냐? 그냥 뛰어오는 것보다 못 하잖아.”

퍼어억!

“커헉?!”

공격을 튕겨내자마자 칼자루로 놈의 안면을 강타했다. 그에 몸은 코피를 뿜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진짜 죽일 기세로 때렸으니 꽤나 아플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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