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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93화 (9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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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랭크 모험가 감다키

“아, 어서 오세요 손님.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나요?”

잠깐 시선을 보내자 직원은 빠르게 우리의 방문을 알아챘다.

그는 곧 우리 앞으로 다가와 친절한 미소를 보내왔으나 곧 온갖 표정이 만면에 떠올랐다.

처음에 떠오른 것은 화색. 이건 나나를 향한 표정이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와중에 미목수려한 금발 엘프녀가 찾아오니 기분이 좋아진 것이리라.

순식간에 헤벌쭉해진 그는 열성적인 호객 행위를 보여주려 했으나 곧 내 모습을 보고 표정이 굳었다.

“흐익……!”

그는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날 훑어보았다. 마치 정신 이상자를 보는 것 같은 눈초리에 난 눈을 가늘게 떴고, 이를 본 직원이 긴장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 그, 실례했습니다…… 워낙 독특한 차림새여서 저도 모르게 그만…….”

“아뇨 괜찮아요.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사과를 받은 나는 태연하게 말하면서 표정을 풀었다. 옆에서 대놓고 욕하는 다른 남자들에 비하면 이 직원은 그나마 개념이 박혀 있는 듯했다.

“그보다 횃불이랑 화염병, 기름병을 좀 구할까 하는데요. 재고가 얼마나 있나요?”

화제를 바꾸면서 필요한 물건들을 이야기했다.

이번에 공략할 던전에선 화염 속성이 특히나 유용하다. 고블린이 화염 약점을 가진 건 아니지만 달리 쓸 일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있는 대로 다 챙겨가려 했는데 직원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손님……. 어떤 분이 전부 구매하셔서 지금은 재고가 없네요.”

“네? 그걸 전부 다요?”

“모험에 필요하다면서 전부 사가시더라고요. 그게 바로 조금 전이라 재입고까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아요.”

이거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

화염병이든 횃불이든 모험에 유용한 아이템이어서 수요가 많을 법하지만 개인이 재고를 다 털어가다니.

마치 나처럼 불속성이 아주 유용한 던전에라도 들어가려는 것 같지 않은가?

예상보다 경쟁이 치열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먼저 불렀던 아이템 외의 보급품을 챙겼다.

다 합쳐서 2100아웬이나 나왔지만 기꺼이 지불했다.

전부 던전 공략을 위해 필요한 아이템이다. 지불을 아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나마 놀한테서 얻은 이코르를 전부 처분하여 보급품 값은 메꿀 수 있었다. 놀의 이코르가 총합 2750아웬이었으니 650아웬은 내 지갑으로 들어왔다.

“가자 나나야. 좀 서둘러야겠어.”

“네 다키님!”

그렇게 거래를 마친 우리는 길드를 나서서 남쪽 관문으로 향했다.

-

관문을 나서자마자 푸른색 꽃밭이 보였다.

율리아나에 올 때 봤던 그 꽃밭이었다. 흐드러지게 펼쳐진 꽃밭은 족히 몇 킬로미터는 이어져 있었으며 그 너머에는 울창한 숲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저곳이 바로 고블린 소굴이 있는 남쪽 숲이리라.

“그러고 보니까요 다키님, 저희 급하게 오느라 보급품 말고는 아무 것도 못 챙겨왔는데 괜찮아요? 지도라거나 식량이라거나 필요할 거 같은데…….”

목적지를 확인하며 앞으로 나아가던 중, 나나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그에 나는 자신 있게 말하며 나나를 안심시켰다.

“길을 전부 외웠으니까 지도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리고 이번 의뢰는 식량이 필요할 정도로 오래 걸리지도 않아.”

그 말을 듣고 나나는 의외라는 듯 이야기했다.

“던전 공략이라고 해서 며칠 동안 동굴 안에만 들어가 있는 줄 알았는데, 설마 하루 만에 끝날 줄은 몰랐어요.”

“뭐 틀린 말도 아니야. 고블린 소굴은 어둡고 복잡해서 처음 가보는 사람들은 길 찾는 데에만 한나절 걸리거든. 대신 던전 자체는 짧아서 쓸데없는 길로만 안 빠지면 빨리 끝나.”

원작 게임과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나 남쪽 동굴의 전체적인 길이는 인내하는 자의 신전과 비슷하다.

설령 이런저런 변수가 있다고 해도 오늘 안에 클리어할 수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나나에게 필요한 정보를 설명해주면서 한 시간 정도 초원을 걸었다. 봄바람을 맞으며 꾸준히 걸으니 어느덧 남쪽 숲 초입에 다다랐다.

동굴은 그리 깊숙한 곳에 있지 않아서 길을 따라 나아가면 금방 들어설 수 있다.

그때까지 다른 몬스터들이 습격해오지는 않을까 하여 주위를 경계했는데 걱정과 달리 숲속은 평화로웠다.

몬스터는커녕 위험한 동물들도 보이지 않았으며 종종 토끼나 사슴 같은 초식동물들이 숲길을 지나갈 뿐이었다. 그러한 동물들의 모습은 숲의 신비로운 풍경과 어우러져 꽤나 볼만했다.

“앗, 다키님 혹시 저 동굴 아니에요?”

아름다운 판타지 세계를 만끽하기를 잠시, 우리는 이내 동굴 앞에 도달했다.

상당히 큰 동굴이었다. 입구가 워낙 커서 멀리서도 눈에 확 띄었다. 높이는 얼마나 높은지 기린도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맞네. 저기가 남쪽 동굴이야.”

“진짜 오질라게 크네요! 여기 진짜 고블린들 사는데 맞아요?”

동굴 입구를 보면서 나나가 감탄을 터뜨렸다.

확실히 남쪽 동굴은 고작 고블린들의 은신처라기엔 너무 컸다. 대형 몬스터들이 터를 잡아야할 것 같은 비주얼이었던 것이다.

“원래는 엄청 큰 이무기가 살았던 동굴이래. 이무기가 죽은 후에 고블린들이 점거한 거지.”

하백이 비호한 종족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무기지만 모든 이무기가 하백의 밑에 있었던 건 아니다.

놈들은 태고 때부터 이 땅을 지배해온 고대 생물들로서 율리아나 전반에 걸쳐서 활동했다. 개중에는 신에 필적하는 힘을 가져 방대한 영토를 지배한 개체도 있었다.

이 동굴의 전 주인 역시 그런 케이스다.

이무기 중에서도 강력한 개체였던 ‘독왕’은 수십 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숲을 포함한 남부 전역을 지배했다고 한다.

쇠약해진 놈이 자연사로 죽은 후 강력한 마력이 여러 괴물들을 끌어들였고 그 중 하나가 고블린인 것이다.

“응? 그럼 저 동굴에 고블린 말고 다른 몬스터도 있다는 거네요?”

내 설명을 듣던 나나가 문득 질문해왔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말했다.

“맞아. 사실 고블린은 그 먼저 온 괴물에 의해서 터를 잡게 된 거지. 일종의 자발적 노예랄까.”

“헤엥, 어떤 괴물이기에 고블린을 노예로 부린대요?”

“그건…….”

내가 기억을 더듬으며 이 던전의 보스에 대해 이야기하려던 참이었다.

“……잠깐 나나야. 멈춰 봐.”

“네? 왜 그러세요?”

나나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나나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곧 귀를 쫑긋거리며 숨을 죽였다.

“사람 소리……! 동굴 안쪽이에요……!”

“나도 봤어. 혹시 모르니까 일단 최대한 조용히 해.”

나나에게 정확한 방향을 가리키며 자세를 낮췄다.

수풀 너머를 통해 확인해보니 동굴 안쪽에는 한 무리의 남성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복장이나 무장 상태로 보아 전원 모험가인 것 같다. 다른 사람과 마주칠 거란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5명의 남성들로 이루어진 파티는 어딘가 좀 이상했다.

“왜 안 들어가고 있는 거지……?”

“일행이라도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닐까요? 좀 험상궂게 생기긴 했지만 굳이 이렇게 숨을 것까지야…….”

내가 중얼거리자 나나가 별 걱정 없이 이야기했다.

나도 순간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곧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여기가 무슨 역 앞 광장도 아니고 여기서 일행을 왜 기다리겠어? 애당초 다른 일행이 있으면 처음부터 같이 왔겠지.”

“앗, 그러게요?”

오는 길이 평화로웠다곤 하지만 여기는 마을 밖이다.

언제 어디서든 몬스터들이 공격해올 수 있으며 사람 또한 섣불리 믿어선 안 된다. 그런 위험천만한 장소를 약속 장소로 삼는다는 건 정상과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그들은 마치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5명 모두가 동굴 내부를 주시하고 있었으며 두 눈은 흉흉하게 빛났다. 안에서 뭐라도 나오면 곧장 베어버리겠다는 기색이었다.

왜 저러고 있는 걸까. 의심을 품으며 나는 천천히 동굴 쪽으로 접근했다. 놈들에게 최대한 들키지 않게끔 은밀히 움직인 것이다.

그렇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대화 소리가 보다 선명하게 들려왔다.

“하…… 새끼, 존나게 안 나오네. 이미 안쪽에서 뒤진 거 아니야?”

“혹시 모르니까 딴 짓 하지 말고 똑바로 지켜. 10분 지나도 안 나오면 그때 움직인다.”

“에이, 지 까짓 게 거기서 어떻게 살아나와? 그런 놈이 살아나올 수 있었으면 우리도 중간에 안 도망쳤지.”

“우리 형님 걱정이 너무 많아~ 다시 가보면 가죽이고 내장이고 전부 뜯어 먹혀서 형체도 안 남아 있을 걸?”

“너희들이 골통이 비어 있는 거다, 병신들아. 만에 하나 그놈이 살아서 길드까지 가면 어쩔 건데? 이번엔 경징계로 안 끝난다고.”

남자들의 대화에선 불미스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말투만 봐도 질 나쁜 무리라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었는데 대화 내용조차 살벌하니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좋을까. 여기 말고 다른 입구가 몇 개 더 있지만 너무 돌아가게 되는데.

‘모르겠다, 같은 모험간데 설마 칼부림부터 하겠어?’

한동안 고민한 나는 이내 정면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

저들이 왜 저렇게 살벌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일 거다. 그냥 얌전히 지나가면 저쪽에서도 별 말 않겠지.

그렇게 나는 나나에게 턱짓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우리가 수풀 밖으로 나오자 남자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

“…….”

다섯 명이 우리를 매섭게 쏘아보자 나와 나나는 순간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들을 마주봤다.

적의는 없는 것 같았지만 뭐랄까, 굉장히 불쾌해하는 기색이었다. 곧 그들 중 유독 덩치 큰 남자가 목소리를 확 깔면서 입을 열었다

“뭘 봐 씹새야. 구경났어?”

“네?”

“뭐요?”

갑작스러운 욕설에 난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나나 역시 역정이 담긴 어투로 남자에게 되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경우지? 서로 눈이 마주친 시간은 5초도 채 안 됐고 지들이 먼저 봤는데 다짜고짜 욕이라니. 이건 완전 싸우자는 거 아닌가?

어이를 상실한 내가 할 말조차 잃었을 때, 덩치 큰 남자는 연이어 폭언을 퍼부었다.

“우리가 구경거리로 보이냐고 병신 새끼야. 뭔 팬티만 입고 다니는 저능아 새끼가 사람을 무슨 지나가는 개 보듯이 보네? 너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이러냐? 눈 안 깔아?”

이 동네 사람들은 왜 이렇게 험악한 걸까.

길드에서 만난 금태양 새끼도 그렇고 원작 게임과는 비교도 안 되는 퀄리티로 사람에게 시비를 걸었다. 번화가에서 조폭한테 걸리면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아니 저희는 그냥 지나가는 길인데 왜 그러세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은 왜 그렇게 심하게 하고요?”

가급적 이성적으로 대하려 했으나 계속되는 욕설에 나도 모르게 칼자루에 손이 올라갔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쉽다고 했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처음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 남자가 한 마디만 더 하면 목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하리라.

여차하면 그대로 검을 뽑아들려 할 때였다.

“야, 야! 지랄 떨지 말고 그냥 와. 입구에서 대기 타고 있으면 당연히 의아하겠지. 뭐 피해망상 걸렸어? 밥그릇 뺏긴 개새끼마냥 왜 그래?”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제지에 나섰다. 기다란 직검을 등에 맨 그는 신경질적인 어조로 덩치 큰 남자를 불렀다.

그에 덩치 큰 남자는 순간 움찔거리더니 리더에게 투덜거렸다.

“아니, 형님 우리도 자존심이 있잖습니까……. 저 새끼가 먼저 기분 나쁘게 쳐다봤는데…….”

“자존심은 염병. 길 가는 사람 잡아다가 아가리 터는 게 자존심이냐? 두 번 말 안 한다. 그냥 와.”

한동안 날 노려보던 남자는 끝내 리더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

끝까지 어이없는 태도에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굳이 사람을 썰고 다닐 이유도 없었기에 나 역시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마침 리더 쪽에서도 내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하게 됐소. 우리 애가 지금 신경이 예민해져서 괜히 시비 건 거요. 방해 안 할 테니까 갈 길 가시오.”

다행히 리더에게는 상식이란 게 박혀 있는 듯했다. 솔직히 흉터 가득한 얼굴은 덩치 큰 남자 보다 훨씬 범죄자처럼 생겼지만 사람 인성이 꼭 외모와 비례하지는 않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대로 넘어가기엔 기분 너무 안 좋았다. 우리는 가만히 있다가 난데없이 욕을 먹지 않았는가.

원래 세계에 있을 때도 나는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아무리 겉으로는 찐따처럼 굴지언정 불의에 처하면 내 나름대로 전부 갚아줬었다.

그런 나에게 남자들의 욕설을 웃어넘기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당사자 본인은 나에게 전혀 사과하지 않았다.

내가 뭐라 한 마디 해주려고 할 때, 계속 인상을 쓰고 있던 나나가 먼저 노성을 터뜨렸다.

“이 뭔 씹…… 뜬금없이 욕 싸질러 놓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그만이에요? 그쪽 동생이야 말로 감정조절도 못하는 저능아 새낀 거 같은데?”

============================ 작품 후기 ============================

이벤트 참가 감사합니다. 당첨자는 다음편에 공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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