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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랭크 모험가 감다키
내 지적에 나나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한동안 말을 잃은 그녀는 이내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 그러네요……? 왜지……?”
“그뿐만이 아니야. 프랑 누나가 그랬잖아. 칠흑검은 3개월 전에 하백을 잡았다고. 그러면 키리야도 3개월 전부터 게임 세계에 있었단 건데 이상하지 않아?”
“확실히 시기상으로 말이 안 되네요…….”
나와 나나도 이 세계에 온 기간이 3일 정도 차이나지만 3일과 3개월의 그 격차가 너무나 크다.
원래 세계 시간과 게임 세계의 시간은 따로 흐른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당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다.
뭣보다 윤다혜 선수가 나보다 최소 3개월 먼저 와 칠흑검의 마스터가 됐다면 비슷한 사례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얘기 아닌가.
그런 일만큼은 없었으면 좋겠다. 당장 NPC들이 살아 숨 쉰다는 것만으로 온갖 변수가 생기고 있는데 여기에 원래 세계 사람들까지 개입하면 진행된 스토리가 크게 꼬일지 모른다.
넘겨짚어선 안 되겠지만 벌써부터 그런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겠지.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나나에게 말했다.
“아무튼 지금 바로 접촉하는 건 너무 섣부른 것 같아. 당장 저쪽은 자네스 영지로 가느라 바쁜 입장이기도 하고.”
“그러면 천천히 정보를 모아 보는 거 어떨까요? 도시에서 유명한 클랜이니까 찾으려 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겠죠!”
“그래, 우리 할 일 하면서 차근차근 알아보자.”
어차피 퀘스트를 받기 위해선 매일 같이 모험가 길드에 들러야 한다.
그때마다 조금씩만 캐물어 봐도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으리라. 칠흑검 클랜이 비밀에 쌓여 있는 신비주의 집단이 아닌 한 말이다.
“오늘은 좀 한산한 편이네. 그러고 보니 다키랑 나나는 아직 모험가 등록도 안 했지?”
홀을 스윽 훑어본 니아가 우리에게 물었다.
그녀의 말과 다르게 건물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어제 보다야 줄어들긴 했지만 내 입장에서 봤을 땐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이게 원작 게임이었다면 진즉에 튕겼겠지. 새삼 가디스 던전의 발적화를 떠올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오늘 그 통과 의례란 걸 봐보려고요.”
“옛날 생각나네~ 아무 것도 모르고 여기 들어온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너희들 보고 있으니까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마치 초등학교에 입학한 동생에게 말하는 것 같은 어투였다. 우리가 그렇게 귀여워 보이는지 니아의 입가에선 흐뭇한 미소가 떨어지지 않았다.
골드 등급이 어느 정도 베테랑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겐 아직 랭크도 달지 않은 우리가 햇병아리로 보일 것이다. 나로선 뉴비한테 뉴비 취급당하는 꼴이라 기분이 묘했지만.
“그럼 출발하기 전까지 이것저것 알려줄게. 가르쳐준 대로만 하면 헤매지 않을 거야.”
“엥? 언니들은 저희랑 같이 안 가요?”
창구 쪽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니아에게 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에 옆에 있던 프란체스카가 조금 미안한 어조로 설명했다.
“응…… 우리는 먼저 받아놓은 퀘스트가 있거든. 초보들 데려가기엔 조금 위험한 퀘스트라 이번에는 같이 못 갈 것 같아.”
“에잉~! 이래 보여도 다키님 겁나 세다구요~! 언니들이랑 가면 오히려 하드 캐리해줄 걸요? 그렇죠 다키님?”
나나의 말에 어떻게 말할까 조금 고민했다.
사실 나도 니아, 프란체스카와 같은 파티를 맺고 싶다. 운이 좋으면 그녀과도 동료가 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몰골로 보나 행적으로 보나 방금 막 도시에 굴러들어온 초보자다.
그런 내가 무리하게 파티에 낀다고 하면 두 사람이 곤란해질 거다. 내 실력을 모르는 그녀들로선 초보자가 땡깡 피우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까.
내 실력이야 지금 당장이라도 입증할 수 있지만 괜한 어그로를 끌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관종 기질이 있긴 해도 때와 장소 정도는 가릴 줄은 안다.
그러니 당분간은 힘순찐 메타로 가겠다.
“그래도 골드 등급에 비빌 정도는 아니야. 뭣보다 첫 퀘스트니까 가벼운 걸로 하고 싶어.”
“흠, 확실히 다키님 말도 맞네요. 처음부터 목숨 걸 필요는 없죠!”
눈치 빠른 나나는 내 의도를 금세 알아차린 듯했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자 니아와 프란체스카도 안도한 기색을 보였다.
“잘 생각했어. 초보들은 초보답게 차근차근 올라오는 게 좋아. 고향에서 한 가닥 했다며 설치는 녀석들이 제일 빨리 죽더라고.”
프란체스카 때와 마찬가지로 니아의 말에는 날선 경고가 담겨 있었다. 굳이 저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이리라.
그리하여 우리는 니아와 프란체스카를 따라 접수창구로 향했다.
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우리들에게 시선이 쏠렸다.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여자들은 얼굴을 붉히며 수군거렸고 남자들은 모멸의 시선을 보내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 있자니 어제 있었던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길드가 이렇게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신기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문득 신경 쓰이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부자연스럽게 지워진 핏자국이 검붉게 변색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대부분 다 지워져서 내가 발견한 핏자국은 아주 작았다. 다른 사람들은 신경도 못 쓰고 지나칠 정도로 말이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치곤 되게 멀쩡하네요?”
그러던 도중 나나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프란체스카가 해줬다.
“확실히 트롤 슬레이어 중 한 명이 살해당한 건 큰 사건이지만 그렇다고 길드 업무 자체를 마비시킬 수는 없으니까. 빠르게 수습하고 나머지는 경비대에게 맡긴 거겠지.”
“길드 업무가 그렇게나 중요해요?”
“그럼. 이래봬도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야. 모험가들한텐 아무 것도 아닌 약한 몬스터도 사람을 해칠 수 있으니까.”
모험가나 모험가 길드나 영리목적으로 움직이지만 그들이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사실이다.
가디스 던전 세계관에는 몬스터가 굉장히 많다.
놈들의 근원이 기원전쟁에서 패한 신들의 피라는 점을 생각하면 바로 납득되는 부분이다. 수많은 신들이 죽은 전쟁이니 그만큼 흘러내린 피도 많겠지.
신들의 피 한 방울, 한 방울에서 태어난 몬스터는 본능적으로 인간을 해친다. 죽은 신의 살의를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에 매우 잔학한 본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 살육광 괴물들이 도처에 깔려 있으니 괴물을 사냥하는 모험가는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덩달아 그들을 관리하는 모험가 길드 또한 매우 중요해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숲이나 산에서 피에 굶주린 괴물이 튀어나와 사람들을 습격하고 있을지 모른다.
각 마을에선 이러한 소식을 길드에 전하여 모험가들을 고용해야 하는데, 길드가 하루라도 업무를 멈춰버리면 그만큼 모험가들의 투입도 늦어지고 희생당하는 사람 또한 많아진다.
제 아무리 트롤 슬레이어들이라 해도 이 순환을 막을 수는 없다. 이것이 프란체스카가 말한 이야기의 논점이었다.
“그래서 퀘스트 중에도 어떤 몬스터를 퇴치해 달라, 몬스터가 모여 있는 소굴을 토벌해 달라 같은 의뢰가 압도적으로 많아. 모험가는 곧 괴물 사냥꾼이라 볼 수 있지.”
“뭐, 잘 찾아보면 쉽고 편한 의뢰도 있어. 약초 수집이나 재료 조달 의뢰도 많으니 가급적 안전한 걸로 찾아보렴.”
의뢰서가 가득 붙어 있는 게시판을 가리키며 두 사람이 조언해줬다.
확실히 넓은 게시판에 붙어 있는 의뢰서 중엔 괴물의 모습이 그려진 것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좀비나 코볼트 같은 약한 몬스터부터 드레이크 같은 강력한 몬스터들까지 다양하게 의뢰가 들어와 있었다. 저런 놈들이 도시 주변에서 배회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좀 끔찍하기도 했다.
그렇게 줄을 서서 기다리기를 잠시 어느덧 우리 차례가 가까워졌다. 기다리면서 두 사람에게 이런저런 팁을 듣긴 했는데 나한테 썩 쓸 만한 정보는 아니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난 어떤 퀘스트를 받을지 이미 정해뒀다.
초보자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퀘스트지만 메인 스토리 진행에 큰 도움을 주는 퀘스트다. 그만큼 어렵고 위험한 실체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통과의례 열심히 해! 항상 너희 목숨 먼저 생각하고. 아무리 큰 업적을 쌓아도 죽으면 다 소용 없으니까.”
“그리고 이건 누나가 주는 선물, 모험 도중에 필요해지면 써.”
슬슬 갈 시간이 된 건지 니아와 프란체스카가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서 프란체스카는 나에게 뭔가를 건네줬는데 붉은색 액체가 든 병과 밝은 녹색 액체가 든 병이었다.
“프랑 누나 이건…….”
“회복 포션이야. 빨간색은 상처를 치료하고 녹색은 기력을 회복시켜줘. 심하게 지치거나 다쳐도 한 병씩만 마셔주면 괜찮아질 거야.”
내게 건네준 포션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면서 프란체스카가 설명했다.
넥타르는 훌륭한 회복 수단이긴 하지만 사용 횟수가 제한되어 있으며 한 번 떨어지면 여신상을 찾을 때까지 보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된 아이템이 바로 포션인데 넥타르와 달리 인벤토리가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얼마든지 가지고 다닐 수 있는데다가 대부분의 마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허나 단점 또한 명확하다. 마시자마자 생명력의 30퍼센트를 회복시켜주는 넥타르와 달리 포션은 30퍼센트를 회복하는데 10초나 걸린다.
거기에 더해 넥타르는 한 모금만 마셔도 효과를 발휘하는 반면 포션은 한 병을 전부 비워야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복용 모션도 더 길다.
이래저래 넥타르의 하위 호환 같은 느낌이지만 항상 회복 수단이 부족한 소울라이크 게임에선 감지덕지한 물건이다.
특히나 기력을 자주 쓰는 나로선 기력 회복 포션의 존재가 무척이나 각별했다.
“이런 거 막 줘도 괜찮아? 엄청 비싼 걸로 아는데…….”
포션들을 손에 쥔 채 나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포션의 최대 단점은 다름 아닌 가격이다.
이 조그마한 물약 하나에 무려 1천 아웬이나 한다. 원래 세계로 따지면 박커스를 10만원 돈 주고 사먹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물론 현실의 물약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효과가 뛰어나지만 부담스러운 가격인 건 변함없다. 프랑 누나는 그걸 두 병이나 줬으니 우리에게 무려 2천 아웬이나 지출한 셈 아닌가.
허나 프란체스카 본인은 별로 상관없는 듯했다. 그녀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면서 포션을 받아든 손을 꼬옥 쥐었다.
“괜찮아, 이것들은 전부 누나가 직접 만들었으니까 부담 없이 받아도 돼.”
“프랑은 포션 조제에 도가 텄거든. 재료만 있으면 얼마든지 더 만들 수 있어.”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프란체스카 옆에서 니아가 거들었다.
설정집에서도 포션이 비싼 이유는 재료 보단 조제 과정에 있다고 했다. 만드는 법이 워낙 까다롭고 이에 숙달된 사람도 몇 없어서 자연스레 가격이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런 포션을 이토록 쉽게 건넬 수 있는 걸 보면 프란체스카는 실력 있는 모험가임과 동시에 훌륭한 약사인 듯하다. 확실히 마녀다운 이미지랑 잘 어울리는 재능이다.
“고마워 누나. 나중에 꼭 갚을게.”
“후훗…… 누나는 다키가 무사히 돌아와 주기만 하면 돼. 그러면 침대에서 다 갚아줄 테니까…….”
내 감사에 프란체스카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야기를 할수록 그녀의 얼굴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곧 그녀의 숨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고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지, 진짜……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줄 거 다 줬으면 빨리 가자. 이러다 늦겠어.”
이를 보다 못한 니아가 프란체스카의 망토를 잡아끌었다. 결국 프란체스카는 지난번에 그랬던 것처럼 질질 끌려갔고 시야에서 사라지는 내내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돌아오면 어제 갔던 여관에서 만나~ 몸조심하고~”
나와 나나 역시 손을 흔들어 준 뒤 접수창구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우리 차례가 됐기에 나는 창구에 가까이 다가가 접수원과 마주했다.
접수원은 2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길드의 얼굴로 세워놓은 만큼 이쪽도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까지 만나온 여성들 보단 한 수 아래였다.
새삼 나나를 비롯한 다른 여성들이 얼마나 절세의 미인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모험가 길드 율리아나 지부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 히익……!”
화사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한 접수원이었으나 곧 내 차림새를 보고 경악을 터뜨렸다.
허나 당황은 곧 수줍음으로 변모했고 그녀의 얼굴 또한 빨갛게 물들었다.
“모험가 등록을 하고 싶은데요, 여기서 서류 작성하면 되나요?”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접수원은 여전히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처음 등록하시는 분들은 서류 작성부터 해주시면 돼요. 길드 규정이랑 행동 수칙 같은 걸 설명 드리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데, 일단 안쪽으로 따라와 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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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집필 속도가 많이 느려졌습니다. 91편도 빠르게 업로드하고 수정 작업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