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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와 여사제
홍등가를 벗어난 우리는 모험가 길드가 있는 서쪽 메인 스트리트에 왔다.
어제 하루 잘 쉬었겠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모험을 시작할 생각이다.
당장 떠오르는 던전만 서너 군데다. 우선 저 레벨 던전과 서브 퀘스트를 병행하면서 스펙을 올린 뒤 메인 스토리를 밟을 생각이다.
사실 지금 공략하고자 하는 던전들은 전부 필수 던전은 아니지만 앞으로의 진행을 편하게 해줄 유용한 성장 구간이다.
게임 세계에선 한 번 죽으면 그걸로 끝. 거기다 책임져야할 목숨이 나 하나 뿐이 아니니 가급적 모든 수단은 갖추기로 했다.
그렇게 모험가 길드로 들어가려는 와중 우리는 수많은 인파가 광장 한 가운데에 몰려 있는 것을 보았다.
“뭔가 어제보다 사람이 많네요?”
“설마 그 일 때문인가……?”
길드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으니 자연스레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게임 세계가 현대의 대한민국 보다 훨씬 흉흉한 곳이라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 도시의 공공장소에서, 그것도 백주 대낮에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신과 괴물이 실존하는 세계의 주민들이라도 충격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이곳은 치안이 좋기로 유명한 율리아나니 사건이 널리 퍼지는 건 시간 문제였으리라.
조금 불안한 마음을 품으며 나는 몰려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면죄부가 내 살인을 없었던 일로 해줬다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하지 않는가.
괜스레 걱정되어서 경비병들이 얼마나 있나 살펴봤는데 내가 생각한 것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응?”
멀리서 봤을 때는 저 많은 인파가 전부 살인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나온 경비병들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경비병의 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사건 현장을 구경하러 온 민간인들인가 싶었지만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그런 부정적인 취미를 즐기기 위해 온 건 아닌 듯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선망과 동경, 설렘 등 긍정적인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마치 공항에서 외국 아이돌의 방한을 기다리는 팬들 같았다.
내가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때 프란체스카가 말했다.
“아무래도 그 사람들이 납신 모양이네.”
“그 사람들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야?”
프란체스카의 어투에는 흥미진진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누군지 무척 궁금해졌다.
내가 대답을 기다릴 무렵, 프란체스카는 어느 한 방향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그곳은 바로 모험가 길드의 정문이었다.
“저기에 걸려 있는 검은색 깃발 보이지? 칼 문양 새겨져 있는.”
“아, 응. 무슨 클랜 마크 같은데.”
“맞아. 저건 최근 율리아나에서 가장 잘 나가는 클랜인 칠흑검 클랜의 문양이야. 여기 있는 사람들도 전부 칠흑검 클랜을 구경하러 온 거겠지.”
칠흑검이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늑대 문양을 상징으로 한 펜리르의 권속들은 집히는 바라도 있었는데 쟤네들은 뭐하는 애들인지 전혀 모르겠다.
애초에 가디스 던전 세계관에서 검은색 검을 상징으로 쓰던 신이나 세력은 없었다.
그 말은 즉 저들은 원작 게임에는 없는 새로운 세력이라고 볼 수 있으리라.
엄밀히 따지면 바나르간드라는 클랜도 원작 게임에선 등장하지 않았지만 저들은 진짜 게임 세계의 변수로 탄생한 듯했다.
“존나 중2병스러운 네이밍 센스네요. 겉멋에만 잔뜩 찌들어 있는 것 같아요.”
프란체스카의 설명을 듣고 나나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순간 멋있다고 생각한 나였으나 나나의 말을 듣고 생각을 고쳤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의도적으로 중2병 컨셉을 노리고 만든 것 같았다.
허나 우리들과 가치관부터 다른 게임 세계의 주민들에게는 마냥 멋있어 보이는 듯했다. 모험가건 일반인이건 다들 들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내가 봐도 멋있어 보이려고 애쓰는 것 같지만 꼭 겉멋만 부리는 클랜은 아니야. 수많은 신들이 맹약을 맺고 싶어서 안달을 내는 유망주라고.”
“그 정도야? 얼마나 세기에?”
“일단 마스터가 다이아 등급이야. 거의 슬레이어에 가까운 다이아지. 고작 10명이서 하백의 던전을 클리어 했을 정도라고 하니까.”
프란체스카의 말을 듣고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뭐? 하백이 잡혔다고?”
“응, 꽤 최근의 일이긴 해. 대략 3개월 전에 토멸됐으니까. 그때부터 칠흑검 클랜이 유명세를 얻게 된 거고.”
하백은 율리아나 인근을 지배하던 재앙신 중 하나다.
도시 동쪽에 위치한 님페아 강의 상류 지역을 다스렸던 그는 고대 생물인 이무기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반면 인간에겐 매우 적대적이었다고 한다.
그러한 이유로 기원전쟁이 끝난 후로 수차례 인간들과 대립했으나 초대 여제가 율리아나를 세우는 과정에서 이무기들과 함께 패배하고 끝내 재앙신이 되었다고 한다.
재앙신이 되기 전부터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여자를 바치라고 협박하고 그렇게 받은 처녀와 여자아이를 이무기들한테 던져줬으니 죽어 마땅한 신이지만 문제는 따로 있다.
놈이 죽은 뒤에 토해내는 보상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무려 적의 속성 저항을 무시하는 장신구를 떨구는 것이다.
거의 성물급 장신구 중에서도 1티어에 속하는 장비라 꼭 먹고 가려 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줄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당해 보니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마치 내가 돈 모아서 사려고 한 한정판 굿즈를 다른 사람이 먼저 채간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딱히 그게 내 거는 아니지만 뭔가 빼앗긴 느낌이 들지 않는가?
“잘나신 클랜이 행차한 거랑 저희가 길드에 못 들어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걔네들은 지들 볼 일만 보면 되잖아요.”
아쉬움을 느끼고 있던 찰나, 나는 나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정문이 굳게 닫혀 있다는 걸 확인했다.
정문 근처에는 길드의 경비로 보이는 이들이 일렬횡대로 늘어서서 사람들의 출입을 가로막고 있었다. 칠흑검이 들어가 있으니 나중에 오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게. 보통 대형 클랜이 와도 출입을 통제하진 않던데…….”
프란체스카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형 클랜이 의뢰를 받을 때면 어느 정도 교통정리를 하지만 아예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은 적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도 불만 반, 궁금증 반으로 칠흑검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듣기론 의뢰주가 출입 통제를 요청했다나 봐. 뭔가 남들이 들으면 안 되는 중요한 얘기라도 하는 모양인데?”
“니아 씨?”
갑자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보자 그곳에는 프란체스카의 파트너인 은발 여기사 니아가 서 있었다.
어제처럼 메이스와 방패, 그리고 가슴이 파인 갑옷으로 무장한 그녀의 등장에 나나와 프란체스카가 반색했다.
“앗 니아 언니! 좋은 아침이네요~”
“일찍 나왔네. 밤새도록 해서 늦게 올 줄 알았더니.”
활기차게 인사하는 나나와 달리 프란체스카는 아침부터 섹드립을 쳤다. 그 능글맞은 발언에 니아는 얼굴을 확 붉혔고 나와 프란체스카를 번갈아 보며 소리쳤다.
“야, 야……! 그런 거 대놓고 말하지 마! 다키랑 나나도 듣고 있잖아!”
“뭐 어때서~ 다 큰 여자가 남자랑 노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잖아.”
“그걸 대놓고 말하면 부끄럽다고!”
예상대로 니아는 어젯밤 다른 남자와 한 침대에서 뒹군 모양이다.
니아가 누구랑 즐거운 시간을 보냈든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저렇게 예쁜 누님이 다른 남자와 섹스했다는 얘기는 은근 신경 쓰였다.
그 왜 유명 연예인도 열애설이 터지면 상대가 누구일지 궁금해지지 않는가. 그것과 같은 이치다.
대체 어떤 남자가 니아 누님과 떡쳤을까. 저 건강미 넘치는 몸매를 맛봤을 남자의 얼굴이 너무 궁금해졌다.
동시에 그가 부럽기도 했다. 프랑 누나만큼이나 니아 누님도 내 취향이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깨달은 건데 나는 유독 연상을 좋아하는 것 같다
뭐, 나도 나나랑 프란체스카랑 실컷 떡쳤기에 질투할 정도로 부럽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검은 산양의 뿔도 반응하지 않았다.
“아, 아무튼…… 길드 들어가려면 시간 좀 걸릴 거래.”
“우후훗…….”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길 잠시, 니아가 얼굴을 붉히면서 화제를 전환했다. 프란체스카는 그런 니아의 반응이 재밌는지 여전히 음흉을 미소를 흘렸다.
“혹시 어떤 임무를 받는다거나 그런 건 못 들으셨어요?”
니아의 부끄러움을 덜어줄 겸 질문을 건넸다.
하백을 토멸할 정도로 강한 클랜이라면 내가 노리고 있는 다른 던전을 공략할 수도 있다.
이미 하백이 털린 것만으로도 꽤 큰데 다른 중요 던전들까지 털리면 나한텐 너무나 큰 손실이다. 경우에 따라선 전반적인 진행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만약 칠흑검이 내가 점찍어둔 던전을 노린다면 그들보다 먼저 움직일 필요가 있다.
이 이상 내 소중한 던전들이 NTR 당하게 둘 수는 없는 것이다.
“경비들은 입 꾹 다물고 있지만 이 시기에 칠흑검 길드가 맡을 의뢰는 하나 밖에 없지. 분명 자네스 영지랑 관련된 일일 거야.”
“자네스 영지…….”
예상외의 이름이 거론되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놀라고 있을 때 프란체스카가 일리 있다는 듯이 긍정했다.
“그러네……. 마침 그쪽 영주가 율리아나로 도망쳐왔다고 하니까. 영지를 되찾으려고 칠흑검을 고용했다고 하면 앞뒤가 맞지.”
“지금 율리아나에 남아 있는 클랜 중에서 악마 군단과 싸울 만 한 건 칠흑검 밖에 없고 말이야.”
니아가 말하길, 본래 율리아나에선 칠흑검 외에도 수많은 대형 클랜들이 활동한다고 한다. 유르돌리아 5대 클랜이라고 알려진 최상위 클랜 중 한 곳도 여기에 포함된다.
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모종의 이유로 도시를 벗어났다, 언제부터인가 안 보이기 시작하더니 다들 특별한 의뢰를 받고 인근 지역으로 흩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규모는 작지만 실력만큼은 입증된 칠흑검이 의뢰를 수주하게 됐을 거다.
추측성으로 말한 니아였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녀의 말이 맞는 듯했다.
자네스 영지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라면 성화 교단이고, 지배신들이고 다들 워록을 잡느라 정신이 없을 거다. 워록은 비단 자네스 영지에서만 소환 의식을 벌인 게 아니니까.
공론화되진 않았으나 지금쯤 어느 정도 규모 있는 도시에선 비슷한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을 거다. 대형 클랜과 성화 교단은 의식을 막고 워록을 쫓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리라.
이후에도 니아와 프란체스카, 나나는 칠흑검과 그들이 맡은 임무에 대해서 더 이야기를 나눴지만 난 그녀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영주 얘기가 나오니 생각이 많아졌다.
자네스의 영주, 별로 비중 있는 NPC는 아니나 유저들 사이에서도 악명 높은 NPC였다.
따지고 보면 자네스 영지 사람들이 죽은 건 다 그 놈 탓이지 않은가. 그가 성문을 닫고 도망치지 않았으면 주민들은 그렇게까지 학살당하지 않았을 거다.
나도 원작 게임을 플레이할 땐 자네스 영주 욕을 많이 하곤 했다. 더군다나 게임 세계에선 그놈이 자기 혼자서만 도망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런 놈이 멀쩡히 살아있다고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다.
당시 자네스의 주민들은 공포와 고통 속에서 처참하게 죽어나갔다.
자식을 끌어안고 우는 어머니, 살려달라고 비명 지르던 마을 처녀, 아크 데몬에게 벌레처럼 죽어나가던 성기사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들 모두가 자네스 영주 때문에 죽은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영주를 향한 감정이 점점 증오로 변해갔다.
“다키님 왜 그러세요? 갑자기 심각한 표정 짓고…….”
“응?”
그때 내 얼굴을 본 나나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에 나는 뒤늦게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지 깨닫고 손사래를 쳤다.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기다리기 짜증나서.”
“확실히 그러네요! 지들이 뭐라고 공공장소를 점유하는지 모르겠어요!”
순간 우려 섞인 눈빛을 보낸 나나였지만 곧 태연하게 맞장구쳤다.
눈치 빠른 그녀는 내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이미 다 파악했을 거다. 이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건 그녀 나름의 배려일 것이다.
나나에게 감사하며 어렴풋이 웃을 때 프란체스카가 이야기했다.
“너무 기분 상하진 마. 슬슬 나오려고 하는 것 같으니까. 저기 봐.”
프란체스카의 손을 따라 다시금 정문을 확인했다. 일렬로 문을 막고 있던 경비들이 양쪽으로 흩어졌고 안쪽에서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칠흑검이다! 드디어 나왔어!”
“키리야님~! 여기 좀 봐주세요!”
검은색 망토를 걸친 사람들이 행렬을 이루었다. 정문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양쪽으로 물러나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진짜 아이돌 그룹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도시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한 클랜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지만 난 검은색 망토를 걸친 사람들 보단 자네스 영주에게 관심이 갔다.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구경이라도 해보자. 원작 게임에선 등장은커녕 모델링도 없었으니까. 대체 얼마나 잘난 놈이기에 마을 사람들을 제물로 삼았는지 내 눈으로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