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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락가
신경질적인 부름에 나는 의아한 심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나나 못지않게 긴 금발에 붉은색 눈동자가 참 예쁘신 누님이었다.
그런데 뭔가 나한테 엄청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위로 치켜 올라간 눈매를 보니 당장이라도 내게 쌍욕을 박을 듯했다.
뭐지?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 팬티 한 장만 입고 들어와서 진상 손님 취급 받은 거 아니야?
하지만 여기 사장님은 나한테 아무런 눈치도 주지 않았다. 직원들도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절하게 대해주지 않았는가.
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머릿속에서 수도 없이 고민을 반복할 때 문득 금발적안의 누님이 우리 테이블에 무언가를 올려줬다.
“서비스야. 맛있게 먹어.”
“……?”
그녀가 건네준 건 웬 샐러드랑 빵 그리고 무알콜 음료수였다.
안주용으로도 식사용으로도 괜찮을 것 같은 음식에 알록달록 예쁘게 꾸며진 음료수가 나오니 당황스러움이 밀려왔다.
어떤 욕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는데 대뜸 서비스를 해주다니. 황당하지 않은 게 이상하리라. 테이블 위에 올라온 요리와 금발 누님을 번갈아 바라보곤 일단 꾸벅 인사했다.
“가,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언니! 가뜩이나 직원들도 예쁜데, 오자마자 이렇게 서비스도 팍팍 해주고! 여기 장사 잘 되겠네요!”
우물쭈물 감사하는 나와 다르게 나나는 언제나 그렇듯 활발하게 추파를 던졌다. 그런 나나의 태도에 금발 누님은 까칠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딱히 너희들만 주는 건 아니거든……. 신장개업 기념으로 주는 거니까 착각하지 마.”
“아, 네…….”
뭐지 츤데렌가.
금발 누님의 묘한 행동에 의문을 표하고 있을 무렵 나나가 음료수를 홀짝이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는 컨셉 주점 뭐 그런 건가 봐요. 홍등가에 있는 술집이라 그런지 가게들도 다 재밌네요!”
“그런가……? 하긴 뭐……, 길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네.”
당장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도 메이드 컨셉, 현모양처 컨셉, 노예 컨셉 등 온갖 컨셉질을 하는 창부들을 보았다.
술집이라고 해서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겠지. 그러려니 하자.
“그보다 이거 엄청 맛있어요! 다키님도 얼른 먹어보세요! 먹고 나서 천국 보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래봤자 샐러든데 뭘 그리 호들갑이야?”
“흔한 샐러드가 아니라구요!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봐요!”
마침 요리를 입에 넣던 나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난 별 생각 없이 포크를 가져가 샐러드를 푹 하고 찍었다.
뭔가 알 수 없는 생물의 고기가 들어간 샐러드였는데, 고기 생긴 걸로 보아 조류에 가까운 듯했다. 대충 원래 세계의 치킨 샐러드와 비슷한 느낌이다.
고기가 특이하단 걸 제외하면 원래 세계에서 먹던 음식이랑 별 차이 없는 것 같다. 그리 생각하며 포크로 찍은 야채와 고기를 한 입에 넣었다.
“으움…… 음? 으으음?!”
대수롭지 않게 우물거리길 잠시, 나는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과 함께 눈을 부릅떴다.
뭐지? 이거 진짜 샐러드 맞아? 풀떼기랑 고기 좀 넣은 것치곤 이상할 정도로 맛있는데?
싱싱한 야채들이 새콤달콤한 소스와 어우러져 고기와 함께 씹히는 그 맛이 너무나 훌륭했다.
내가 미식가가 아니어서 이 이상 상세하게 묘사할 수는 없지만 어찌됐든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진미였다. 마치 요리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처럼 리액션이라도 취해야 할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샐러드의 맛은 훌륭했고 나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면서 한 입, 또 한 입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어때요? 제 말 맞죠? 그죠?”
나나 역시 열심히 포크를 움직이면서 내게 말했다. 나는 대답할 여유도 없이 샐러드를 거의 흡입하듯 먹었고 우리는 주문하기도 전에 요리 하나를 전부 해치웠다.
“와 씨…… 여기 뭐야, 요리에 마약 넣고 뭐 그런 거 아니야? 평범한 맛이 아닌데?”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고기와 야채의 조합도 절묘했지만 소스 맛이 진짜 개오졌다.
뭔가 바비큐 소스 같으면서도 과일 소스 같은 게 깊은 풍미와 달콤한 맛이 동시에 느껴졌다. 마음 같아선 이것만 계속 핥아먹고 싶을 정도였다.
“설마 그러겠어요~ 제가 보기엔 그냥 여기 주방 보시는 분이 요리를 잘 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잘 하시면서 왜 홍등가 주점에서 일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비록 마약 조미료 설은 부정했지만 나나 역시 이 훌륭한 맛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과장 하나 안 보태서 5성급 호텔 셰프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실력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제 제대로 주문 해보자.”
“좋아요! 뭔가 두근거리네요!”
메뉴판을 다시 본 우리는 가장 눈길이 가는 요리를 두 개 정도 주문했다.
드레이크 안심 구이랑 조금 전에 시켰던 코카트리스 가슴살 샐러드였다. 뭔가 점심으로 먹었던 치킨과 다르게 이쪽은 본격적인 판타지 음식이었다.
그나저나 조류의 고기라곤 생각했는데 설마 코카트리스 가슴살이었다니. 닭이랑 다르게 엄청 부드럽고 쫄깃해서 가슴살일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아무튼 거기에 생맥주 두 잔을 더 주문한 뒤 메뉴가 나오길 기다렸다. 드레이크 스테이크는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해서 샐러드랑 맥주가 먼저 나왔다.
딱 맥주잔 하면 생각나는 커다란 잔 안에서 샛노란 액체가 거품을 일으켰다. 어찌나 많이 들어가 있는지 2리터는 될 것 같았다. 과연 판타지 세계답게 맥주잔도 화끈하다.
“양이 너무 많은 거 같은데…… 나나 너 다 마실 수 있겠어?”
“그야 물론이죠! 술은 센 편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다키님은 술 잘 못 드신다고 했죠?”
나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주량이 약한 것도 있지만 술 마실 기회가 별로 없다 보니 자연스레 멀어지게 됐다. 사실 술 자체를 싫어하기 보단 경험이 없어서 좋아하지도 않게 된 거다.
이러한 사실을 나나에게 전하자 그녀는 의욕을 불태우며 말했다.
“그러면 이 기회에 진탕 마셔 봐요! 다른 사람이랑 같이 마시면 좋아지게 되는 법이라구요~ 그게 저처럼 예쁜 여친이면 더 그렇구~?”
“하하, 어련하시겠어.”
요염한 미소를 짓는 나나를 보며 나 역시 입 꼬리를 올렸다. 곧 나나는 맥주잔을 시원스레 내밀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일단 건배 먼저 하죠! 건배사는 뭘로 할까요?”
“글쎄…… 앞으로의 여정을 위하여?”
“좋네요! 앞으로의 여정을 위하여!”
짧은 건배사와 함께 우리는 술잔을 부딪쳤다. 나나가 워낙 세게 부딪친 나머지 안에 있는 내용물이 조금 흘렀지만 본인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 후 나나는 마치 일주일 동안 물 한 모금 안 마신 사람처럼 꿀꺽꿀꺽 맥주를 들이켰다. 그녀의 목울대 울리는 소리가 술집 가득 울려 퍼질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안 마실 수가 없었다. 여자도 저렇게 잘 마시는데 남자인 내가 홀짝홀짝 마시면 꼴불견일 것 같았다.
“좋아요 다키님! 쭈우욱! 들으키세요! 원 샷! 원 샷!”
“푸하아……! 아니 2리터가 넘는 걸 어떻게 원샷 해? 맥주 마시다가 익사할 일 있어?”
“에이~ 술은 원래 마시고자 하면 다 들어가는 법이라구요~ 자자, 안주 한 입 드시고 계속 달리죠!”
말하자마자 나나는 내게 코카트리스 샐러드를 권하면서 술잔을 부딪쳤다.
본인 입으로 잘 마신다곤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녀는 2리터짜리 맥주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마냥 순식간에 비워버렸다. 그리곤 나에게도 얼른얼른 마시라며 연이어 건배와 술 게임을 제안했다.
“그냥 마시면 심심하니까 게임 한 판하죠! 뭐로 할까요?!”
“한 번도 안 해봐서 잘 모르겠는데…… 그리고 둘이서 무슨 술 게임이야.”
“재미없게 왜 그러세요~ 둘이서라도 얼마든지 재밌게 할 수 있다구요~”
내키지 않아 하는 나에게 나나는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나한테 계속해서 술을 먹이려는 걸 보니 즐기는 건 둘째 치고 어떻게든 내가 취하는 걸 보고 싶은 모양이다.
난생 처음으로 가진 여자친구와의 술자리지만 이 이상 나나의 페이스에 말려들면 순식간에 인사불성 상태가 될 거다. 이를 직감한 나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슬쩍 질문했다.
“그런 것보다 네 얘기 좀 들려줘.”
“네? 제 얘기요?”
“그래, 여기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돌아가고 싶지 않은지 같은 거 말이야.”
원래 세계 얘기가 나오자 나나의 텐션이 팍 죽었다. 좋은 분위기를 망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때가 아니면 물어볼 기회가 없을 듯했다.
나나는 이제 내 애인이고, 앞으로 계속 함께할 동료인데 서로의 과거 정도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래야 나도 나나를 좀 더 신뢰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나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이내 입을 열었다.
“……별로 대단한 이유는 아니에요. 그냥 집에 돌아가기 싫어서 그런 거죠.”
“왜? 가족들이랑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안 좋은 일이라고 할까…… 저희 가족이 절 좀 힘들게 했거든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한 나나는 지금껏 숨기고 있었던 과거를 전부 들려주었다.
“저희 부모님은 좀 일찍 결혼하셨어요. 거의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요.”
“뭐? 그러면 스무 살에 널 낳으신 거야?”
“네, 그렇다고 해서 절 학대하거나 방치하시진 않았어요. 오히려 어린 나이에 애 키우려고 엄청 노력했죠.”
나나의 부모님은 젊은 부부치곤 금슬이 무척 좋았다고 한다. 책임감 또한 강해서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육아를 전혀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전혀 문제될 게 없어보였다. 우리 부모님과 비교하면 선남선녀들로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나가 힘들어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문제는 제 동생들이 태어난 후에 생겼어요……. 저희 부모님은 사이가 너무 좋아서 애를 진짜 생각 없이 낳았거든요.”
“몇 명이나 낳으셨는데……?”
“저 포함해서 여섯 명이요. 둘째가 저랑 10살 차이고 그 밑에 애들은 비슷비슷해요.”
나나의 대답에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여섯이라고? 둘 키우기도 힘들다는 부모가 수두룩한데 여섯 명이나 낳았단 말이야? 아버지께서 무슨 하렘물 남주라도 되나?
거기까지 들은 나는 나나의 고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둘째와 열 살 차이라면 당시 나나의 나이가 초등학교 3학년. 5명의 동생들이 모두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을 고려했을 때 나나는 중학생이 될 무렵 졸지에 6남매의 맏이가 됐을 거다.
나랑 10살 차이나는 큰누나를 봐와서 잘 알고 있다. 나이 차이 나는 동생을 가진 형 누나가 어떤 부담을 느끼는지 말이다.
더군다나 동생들의 머릿수가 다섯 이나 되면 나나는 결코 편한 삶을 살지 못했으리라.
“저희 부모님들은 원체 책임감이 강하셔서 그걸 저한테도 강요했어요. 동생들은 네가 잘 보살펴야 한다. 동생들을 위해서라면 네가 하고 싶은 것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동생들부터 우선적으로 챙겨라, 그런 식으로 저한테 애 보기를 떠넘기신 거죠.”
“아니…… 첫째가 동생들 보살필 수도 있다지만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동생들 때문에 하고 싶은 것도 포기하라니…….”
“어쩔 수 없긴 했어요. 그 때쯤엔 아빠도 엄마도 일 때문에 바빠졌거든요. 그런 와중에 제가 훌륭한 보모로 보였을 뿐이죠.”
동생들 좀 잘 보살펴라, 네가 언니니까 동생들에게 맞춰줘라.
나나는 거의 세뇌에 가까운 수준으로 그런 이야기를 들어온 듯했다. 그것이 부모님의 무리한 강요라는 걸 깨달았을 때쯤엔 이미 남에게 맞춰주는 게 습관이 됐을 정도로 말이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 가족들 때문에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비록 막내의 입장에서 가족들에게 무시당한 나와 맏이의 입장에서 책임을 강요받은 나나는 많이 다르지만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지 생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며 측은한 마음이 들 때, 나나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러다 보니까 제 취향 같은 것도 배제하게 되더라구요…… 이걸 하느라 시간 보내면 동생들을 못 챙기겠구나, 이런 걸 좋아하면 동생들한테 나쁜 영향이 미치겠구나…… 하면서요.”
어린 동생들에게 집중하려면 정말 많은 걸 포기해야한다. 거기에 학업까지 병행했으니 취미 생활 같은 건 제대로 가져보지도 못했으리라.
그렇게 하나 둘씩 좋아하는 걸 포기하고, 배제하다 보니 어느덧 세상만사가 다 재미없어졌다고 한다.
남들에게 맞춰주는 버릇이 더 심해진 이유는 자기의 주관과 흥미가 점점 옅어져서일 거라고 나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전부 다키님을 만나기 전의 얘기예요. 다키님을 만나고 나니까 생각이 조금 바뀐 거 있죠?”
벌써 두 번째 맥주잔을 비운 나나가 발그레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양손으로 뺨을 괸 채 날 지그시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순수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