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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80화 (8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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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락가

“에리스 여신이여! 저의 죄를 사하소서!”

면죄부를 들어 올리며 에리스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자 보라색 빛이 사방에 퍼지더니 이내 허공에서 소녀의 형상이 나타났다. 검은 머리에 금색 눈동자를 가진 10대 중반의 소녀였다.

[…….]

까마귀의 것과 같은 날개를 가진 그녀는 허공으로 가볍게 떠올라 나와 주위에 있는 사람들 스윽 훑어보았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황금 사과 같은 그 아름다운 눈동자를 보고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넋을 잃고 말았다.

다음 순간, 에리스의 환영은 허공을 향해 손을 내밀며 몇 번인가 날갯짓했다. 가뜩이나 멍하니 있던 사람들은 그로 인해 완전히 굳어 버렸다. 다들 선 채로 기절한 것 같았다.

“지금이야 나나야! 얼른 튀자!”

광역 기억상실에 걸린 사람들을 뒤로 하고 나나의 손을 붙잡았다.

이로써 사건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내가 가해자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릴 것이다. 설령 사건 현장에 증거가 남더라도 가볍게 넘기거나 아예 발견하지 못하리라.

허나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사건 현장에 멀뚱히 서 있는 건 얘기가 다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의심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사건 현장에서 빠르게 벗어날 필요가 있다.

누가 의심하지 않더라도 괜히 금태양의 동료니 클랜원이니 하는 놈들이 나타나서 시비 걸면 골치 아파질 테니까.

“……네!”

내 손을 맞잡은 나나가 힘차게 대답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였으나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화색이 된 채 달리기 시작했다.

길드 지부를 벗어난 우리는 광장을 지나 남쪽 메인 스트리트까지 달렸다. 사건 현장에서 멀어질 겸 인파가 많은 대로에 섞여 들어가 최대한 흔적을 지운 것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골목을 몇 번이나 지나자 시냇가가 나왔다. 우리가 처음 발을 내딛었던 그 시냇물이었다.

물론 처음에 방문했던 곳보다는 하류였지만 어쨌든 이곳에서 몸을 씻을 수 있겠다. 마침 구석진 곳에 위치한 곳이라 보는 눈도 없었다.

나는 거의 잠수하듯이 물 안에 들어가 몸을 씻었고 곧 온몸에 묻어 있던 금태양의 피는 강물을 따라 사라졌다.

“이걸로 길가다가 의심 받을 일은 없겠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내 모습을 봤겠지만 길이 워낙 혼잡한 나머지 제대로 눈에 담지는 못했을 거다. 봤다고 해도 내가 금태양을 죽인 범인이라곤 생각하지 못하겠지.

그렇게 내가 몸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물 밖으로 나올 때, 나나가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여기요 다키님! 이걸로 몸 말리세요!”

“아 고마워 나나야.”

나나가 내게 준 건 가방에 넣어뒀던 수건이었다. 헤베가 챙겨준 물건 중 하나인데 아직 젖지 않은 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수건을 펼쳐서 몸을 닦으려 했는데 뭔가 익숙한 게 섞여 있었다. 금속 구슬처럼 생긴 그것을 본 나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응? 나나야 이건…….”

“저 옆에 있는 잡화점에서 사왔어요. 열을 내는 물건이라면서요?”

그녀 말대로 이 황금색 구슬은 자체적으로 열을 내는 마법 아이템이다.

곳곳에 있는 균열 사이로 주황색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슬을 작동시키면 이 빛이 한층 더 강해져 열풍을 일어나는 식이다.

가디스 던전 세계관에선 휴대용 온열 기구로 자주 사용된다. 씻는 동안 잠깐 안 보이나 싶었는데 이런 걸 사왔을 줄이야. 나나에게 감사하길 잠시, 나는 곧 또 다른 의문을 품었다.

“돈은 어디서 났어?”

난 나나에게 돈을 나눠준 적이 없다. 지금까지 번 돈도 전부 가죽 벨트 안에 넣어뒀다.

물 안에 들어간 후에도 내 옆에 잘 뒀으니까 나나가 그 안에서 돈을 빼 갈 틈은 없었을 거다.

그러면 이 온풍구는 어떻게 산거지? 비싸진 않지만 싼 것도 아니어서 냉큼 받아올 수는 없었을 텐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나나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웬 묵직한 주머니였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로 보아 돈주머니임이 분명했다.

“아까 그 양아치한테서 털어왔어요! 새어 보니까 7천 아웬이나 들어있더라구요!”

그 난리통에 금태양의 시체를 파밍했다니.

뭔가 기특하면서도 황당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죽었는데 어찌 저리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내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깨달았다. 나나에게 돈주머니를 건네받으면서 나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보다 나나 너 괜찮아?”

“네? 괜찮다니 뭐가요?”

“금태양 그 새끼가 나쁜 놈이긴 했어도 일단 사람 죽이는 걸 봤잖아. 그것 때문에 충격 받았다거나……”

지금까지 별의 별 흉흉한 장면을 보고도 꿋꿋한 나나였지만 사람이 죽는 광경을 보는 건 또 별개의 일이다. 평화로운 현대 사회에서 살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충격을 받지 않겠는가.

나나도 겉으론 태연한 척 하지만 속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한 심정으로 질문을 건넸는데 나나는 내 걱정과 달리 너무나 멀쩡했다.

“괜찮아요! 뭐어…… 다키님이 갑자기 그 새끼 팔 썰어버릴 때는 좀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 PTSD 도지고 그럴 것 같지는 않네요!”

“정말로? 나 때문에 괜찮은 척 하는 거 아니고?”

“에이, 괜찮다니까요~ 뭐랄까, 굳이 설명하자면 그 놀들 잡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에요. 사람이 죽었다기 보단 게임 속의 몬스터가 죽은 것 같아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은 나나가 나에게 되물었다.

“다키님은 그렇지 않으세요? 다키님도 사람 죽인 것치곤 아무 느낌 없으신 것 같은데.”

“그러게…… 솔직히 나도 너랑 같은 심정이야…….”

나나의 말대로다.

사람을 찢어 죽였는데 딱히 죄책감이랄 게 느껴지지 않았다.

비단 금태양 쓰레기여서 그런 건 아니다. 상송을 죽였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게임 속의 몬스터를 죽인 것 같은 기분이다.

이것도 게임 세계의 영향인 걸까. 나도, 나나도 게임 세계에 들어온 영향으로 다른 사람의 죽음 같은 건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된 건가?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게임 속 캐릭터를 아무리 잔인하게 죽여도 플레이어에겐 죄책감은커녕 후유증조차 남지 않으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여러모로 소름끼쳤다. 지금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세계 사람들을 게임 속 캐릭터라 인식하고 있다는 소리 아닌가.

사람처럼 행동하고, 사람처럼 생각하는 존재를 데이터 덩어리로 여기다니. 오히려 우리 쪽이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금태양의 팔을 잘랐을 때도 그의 몸에서 나온 건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가짜 피가 아니라 진짜 피였다. 쇠 냄새가 진동하고 기분 나쁠 정도로 새빨간 생명체의 혈액이었던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 방금 있었던 일로 미루어 보건데 나는 앞으로도 사람을 꽤나 죽일 것이다.

내가 조심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이쪽에서 가만히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먼저 칼을 뽑으면 어쩔 수 없이 대응해야한다.

그러니 사람을 죽여도 별 감흥이 없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축복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누구 하나 죽일 때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면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정신병원에 들어가야 할 거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상념을 털어버렸다.

“그나저나 다키님. 아까는 왜 그러셨어요……?”

“응?”

내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나나가 문득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나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금태양을 죽인 게 섣부른 행동이라 말하고 싶은 거겠지.

나나의 의도를 파악한 나는 한동안 말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그 새끼가 너 추행하려 했잖아.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가슴 만지려 한 건 선 넘은 짓이지. 어떻게 두고 볼 수 있겠어?”

“하지만 다키님이 가만히 계셨으면 일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예요…… 절 데려가려고 한 것도 적당히 눈치 봐서 빠져나올 수 있었구요……! 면죄부가 있어서 망정이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다키님은……!”

나나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책망하는 것 같은 어투였지만 나는 차마 그녀에게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나나가 저렇게 말하는 이유는 전부 날 걱정해서 그런 거니까.

확실히 조금 전의 난 너무 감정적이었다. 나나 말대로 면죄부가 없었다면 난 경비대에게 붙잡혀 끌려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나는 혼자 남겨져 보복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됐겠지.

그 점을 고려하면 나나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나나의 말에 마냥 수긍할 수 없었다.

“설령 네가 잘 해결할 수 있었더라도 내가 용납 못해. 그런 새끼가 내 팬한테 손대는 건 못 참는다고. 솔직히 나나 너도 싫었잖아.”

“다키님…….”

“이번엔 면죄부 믿고 설친 거긴 한데, 다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난 똑같이 행동할 거야. 아니면 뭐, 나나 넌 내가 그런 병신한테 빌빌거리는 게 보고 싶어?”

말이 끝나자마자 나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저도 다키님이 그런 병신 새끼한테 빌빌 거리는 꼴은 보기 싫어요…… 하지만 저는 그런 식으로 밖에 해결할 줄을 몰라서…….”

“남들한테 비위 맞춰주는 거 말이야?”

고개를 끄덕이는 나나. 아래로 내려간 고개는 다시 올라오지 않았다. 시선을 땅에 고정한 채 의기소침한 얼굴을 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그녀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과거 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든 그리 밝고 긍정적이진 않으리라. 하지만 그렇기에 더 나나가 남의 비위를 맞추지 않았으면 했다.

“나나야.”

“네?”

문득 진지한 어투로 부르자 나나가 고개를 들었다. 살짝 붉어진 눈시울이 눈에 들어왔다. 에메랄드 같은 그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하며 이야기를 이었다.

“이제부터 남의 비위 같은 거 맞춰주지 마. 나한테도, 다른 누구한테도.”

“하, 하지만…….”

“넌 좀 더 자기 주관대로 행동할 필요가 있어. 하고 싶지 않은 건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건 적극적으로 하는 식으로 말이야. 적어도 난 그랬으면 좋겠어.”

하고 싶은 않은 건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건 적극적으로 해라.

나나는 내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했다. 그녀는 그게 난생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몇 번이고 되새겼다. 그런 나나에게 나는 더욱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태양처럼 재수 없는 새끼가 집적거리면 애써 웃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 면전에 쌍욕을 박아도 좋고, 그냥 무시하고 가도 돼. 내가 옆에 있는 이상 아무도 너한테 허튼 짓 못하게 할 테니까.”

거기까지 말하자 나나의 얼굴이 붉어진다. 촉촉해진 눈가에선 방울진 눈물이 하나둘씩 떨어져 내렸다. 그것이 기쁨의 눈물이라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왜요? 제가 다키님 여자라서요?”

감동어린 표정과 달리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무척이나 장난스러웠다. 나나 특유의 활발한 분위기가 되살아나 안심이 됐지만 질문이 질문이다 보니 엄청 부끄러웠다.

“아…… 그, 그건 말이지…… 내가 진짜 그렇게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니고…….”

쪽팔린 나머지 나는 다급히 변명에 나섰다.

그때는 분위기에 너무 취해 있었다. 이상하게 그 상황에선 나나가 내 여자라고 당당히 못 박아야 할 것 같았단 말이다.

아무튼 오해를 풀고자 한 나였지만 나나는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뭐. 그러니까 일일이 변명하실 필요 없어요.”

“응? 진짜?”

어느덧 내 옆에 달라붙은 나나는 자연스레 손을 맞잡아왔다. 그리곤 어깨를 살포시 기대면서 수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물론이죠~ 애초에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다키님이랑 산 속에서 진득하게 섹스하지도, 따라가겠다고 조르지도 않았을 거라구요.”

“그, 그렇구나. 난 그냥 원나잇인 줄 알았지…….”

“뭐예요~! 여자 쪽에서 그렇게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다키님은 완전 눈새네요!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 한 건가요?!”

어느새 나나의 얼굴에선 암울한 분위기가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내 말이 와 닿은 걸까. 이전과는 분위기가 살짝 달랐다. 마치 진심에서 나오는 것 같은 밝은 분위기였다.

“어, 으음…… 그러면 우리 오늘부터 1일인가……?”

멋쩍게 웃고 있던 나는 조심스레 우리의 관계를 확인했다.

내가 검지를 펼쳐서 1을 표시하자 나나는 엄지와 검지로 만든 동그라미를 내 손가락에 끼워 넣으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죠! 아니라고 했으면 제가 섭섭해서 죽어 버렸을지도 몰라요!”

“그, 그래…… 그러면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히히힛, 좋아요~! 다키님 너무 좋아앗~!”

그 후로도 나나는 날 껴안은 채 연신 좋아한다고 소리쳤다.

당황스러웠지만 결코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나나가 나에게 안겨들 수록 젖가슴의 촉감이 전해져 왔고 달콤한 향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계속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니 엄청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도 그녀를 꼬옥 껴안았다. 이러니까 진짜 연인 관계가 된 것 같다.

아니, 비단 된 것 같다 정도가 아니라 이제부턴 진짜 나나가 내 여친이지.

“그보다 이제 어디로 갈까? 다시 길드로 돌아가긴 좀 그럴 거 같은데.”

나나와 포옹을 유지한 채 앞으로의 일정을 논의했다.

면죄부가 내 죄를 싹 없애줬지만 그 부분을 차치하더라도 지금 모험가 길드는 갈 곳이 못 된다. 백주 대낮에 사람이 썰려 죽었으니 무척 소란스러울 거다.

그런 곳에선 볼 일도 제대로 못 보리라. 그러니 모험가 길드는 내일 다시 들르기로 하고 다른 곳을 둘러보는 게 좋겠다.

“으음~ 그러면 높은 곳으로 가보고 싶어요. 이 도시가 전부 보일 정도로 높은 곳이요!”

잠시 고민한 나나가 의견을 내놓았다.

확실히 높은 곳에서 도시의 전경을 확인하면 길 외우기도 한층 쉬울 것이다. 관광으로서도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말이다.

“제일 높은 곳이라면 도시 중앙이지. 따라와, 안내해줄 테니까.”

“헤헤헤, 그거 본 다음엔 제대로 된 숙소도 구해요. 오늘 밤에도 밤새도록 놀고 싶거든요.”

내 팔을 꼬옥 끌어안으며 나나가 말했다.

대놓고 섹스를 암시하는 그 발언에 나는 얼굴을 화악 붉혔다. 비단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내 가슴을 살살 간질여서 더욱 흥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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