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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R 분쇄자
최대한 점잖게 얘기해 보려 했지만 본의 아니게 시비조가 튀어나왔다.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 밀치고 쌍욕까지 박았는데 화가 안 날 리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날 밀친 저 금발 태닝 양아치, 줄여서 금태양 새끼는 아무렇지도 않게 접수원에게 말을 걸고 있다. 마치 자기가 새치기 하는 게 당연한 권리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분노가 치솟았다. 저 새끼 대답에 따라 칼자루에 손이 올라갈 것 같았다.
“왜? 불만 있냐 머저리 새끼야?”
이 불미스러운 상황이 내 착각이었으면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질문 받은 금태양은 오히려 신경질적인 어조로 날 노려보았다. 나 같은 놈은 자기한테 말도 걸어선 안 된다고 압박하는 것이었다.
머릿속에선 당장 저놈을 반으로 찢어 죽이라고 부추겼지만 나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난 무턱대고 사람을 죽여 대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욕 좀 먹었다고 죽여 버릴 거라 발광하는 건 중학생들이나 하는 짓이다.
마음을 다스리길 잠시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면서 남자에게 말했다.
“그럼 불만이 있지 없겠어? 왜 멀쩡히 있는 사람 밀치고 새치긴데? 내 뒤에 있는 사람들 안 보여? 접수처에 볼 일 있으면 다른 사람들처럼 줄 서서 기다리던가.”
내가 항의하자마자 금태양의 표정이 변했다. 가뜩이나 더러운 인상이 더욱 구겨졌고 그 위로 짜증이 드러났다.
“……야,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네가 누군지 왜 알아야 되는데?”
“하…… 이 새끼 이거…… 팬티만 입고 다니는 거 보고 병신인 줄은 알았는데 그냥 병신이 아니라 좆병신이었네. 율리아나에서 모험가 노릇한다는 새끼가 어떻게 나를 몰라?”
거기까지 말한 남자가 자신의 가죽 갑옷을 풀어서 맨가슴을 보여줬다. 조끼 형태의 갑옷이라 그런지 쉽게 풀어헤쳐졌고 곧 놈의 흉근이 드러났다.
저게 뭐하잔 짓이지? 지가 무슨 죠르노라도 되나 조끼는 왜 잡아당기는 건데.
그렇게 생각하는 나와 달리 주위 사람들은 사색이 되었다. 두 눈을 크게 뜨며 경악한 그들은 곧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저, 저 문신……!”
“사슬 물어뜯는 늑대 문양…… 분명 바나르간드 클랜의 마크잖아……!”
“저 사람 트롤 슬레이어였어?!”
바나르간드에 트롤 슬레이어, 생소한 단어들만 연이어 들려온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 금태양 새끼가 대형 클랜에 소속되어 있는 건 알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뉴비들이 저렇게 벌벌 떨진 않겠지.
확실히 늑대라면 나도 좀 집히는 바가 있다. 가디스 던전 세계관에서 늑대를 상징으로 삼는 세력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하물며 문양만으로 사람을 기겁하게 만들 정도라면 금태양이 어떤 신의 권속인지 쉽게 짐작이 갔다.
그렇게 문신을 깐 것만으로도 주위 사람들이 기겁하고 있을 때, 금태양은 비릿하게 웃으며 날 위협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 한 말 다시 해봐 머저리 새끼야. 어디 트롤 슬레이어 파티의 서브 딜러인 나한테 또 깝쳐 보라고!”
금태양이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다. 기선 제압을 위해서인지 지근거리까지 다가와선 날 노려보았다.
나보다 키가 작아 좀 같잖아 보였지만 근육질의 남정네가 달라붙으니 확실히 좀 부담스러웠다.
학교의 일진들도 실제론 그리 세지 않지만 특유의 껄렁한 태도만으로 충분히 무섭지 않은가. 그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보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달라붙다니 굉장히 불쾌한걸. 이런 경험은 가급적 예쁜 여자랑 하고 싶단 말이다.
참다못한 나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남자를 툭 밀어냈다.
“아니 남자 새끼가 왜 달라붙고 지랄이야……! 가까이 오지 마 존나 징그러우니까!”
나도 위협적인 어투로 기선 제압을 하고 싶었으나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갈피가 안 잡혔다. 지금으로선 이 새끼를 한 시라도 빨리 떨어뜨리고 싶을 뿐이었다.
내가 그렇게 금태양을 밀어내자 놈은 코웃음을 치면서 이를 갈았다.
“하, 진짜 미친 새낀가……. 야, 너 내가 한 말 못 들었냐? 나 트롤 슬레이어야. 트롤 슬레이어 파티의 서브 딜러 자이크라고. 그런 날 너 같은 병신 새끼가 밀쳐?!”
금태양의 언성이 점점 높아진다.
그의 어투엔 분노보다 어이없는 심정이 더 많이 담겨 있었다. 설마하니 자기를 이렇게 대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다.
그렇게 말해봤자 난 네가 누군지 모른다. 알아야 할 필요성도 못 느끼겠다.
아무리 대형 클랜의 일원이라고 해도 본인은 그냥 말단이지 않은가. 그런 놈이 대체 뭘 믿고 저렇게 나대는 거지?
내가 의문을 느끼고 있을 무렵, 때마침 소란을 듣고 몰려든 모험가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내 주위에 있던 뉴비들과 다르게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야, 자이크라면 그 사람 아니야……?”
“마, 맞아…… 트롤 슬레이어 중 한 명이잖아. 저 사람 속한 파티가 신을 삼키는 늑대의 권속이라던데…….”
“하필이면 걸려도 트롤 슬레이어한테 걸리다니…… 저 헐벗은 남자도 안 됐네. 앞으로 율리아나에선 모험가 생활 못하겠어.”
그들은 한 결 같이 연민의 시선을 보냈다. 뭣 모르고 일찐들한테 깝친 전학생에게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불안한 분위기가 홀 전체를 둘러싸고 있을 때, 금태양 새끼가 주먹을 들어올렸다.
“내가 누군지 모르면 지금부터 알게 될 거다. 오늘 걸어서 나갈 생각하지 마라, 좆병신 새끼야!!”
급기야 놈은 나에게 싸움을 걸려는 듯했다. 이쯤 되니 나도 참을 수가 없었다. 자기가 먼저 밀쳐놓고 나보다 더 화내는 꼴이라니. 이게 무슨 행패란 말인가.
난 사람간의 분쟁을 정말 싫어하지만 여기선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겠다. 인성에 문제 있는 놈에겐 전통적인 치료법을 쓸 수밖에.
그렇게 달려드는 금태양에게 대응해 격변을 준비할 때였다.
“잠깐만요! 이러지 말고 말로 해결해요!”
“……!”
“……?!”
나와 금태양 사이에 나나가 끼어들었다. 발차기를 날리려던 나는 나나의 난입에 다급히 제동을 걸었다.
다행히 금태양도 마찬가지였다. 놈의 주먹이 나나 앞에서 멈춰 섰다. 순간 신경질적인 기색을 보인 놈이었지만 나나의 얼굴을 자세히 보곤 표정이 다소 풀어졌다.
“넌 또 뭐야? 뭔데 중간에 끼어들어서 이래라 저래라야?”
나나의 몸을 이리저리 훑은 금태양이 목소리를 잔뜩 깔며 말했다.
폼 잡으려고 센 척하는 게 훤히 보였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비릿한 미소를 짓는 놈의 얼굴에선 혐오감까지 느껴졌다.
내가 다시 한 번 증오심을 품을 때, 나나는 살가운 미소를 지으면서 금태양을 진정시켰다.
“정말 죄송해요, 제 동료가 눈치 없이 굴어서 많이 불편하셨죠? 제가 이렇게 사과할 테니까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이런 데서 싸움나면 오빠도 곤란하잖아요.”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나나의 말을 들은 나는 어처구니가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나나는 내가 괜한 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싸움이 일어나면 나에게도 악영향이 있을 테니 본인이 금태양에게 맞춰주기로 한 것이리라.
화가 나지만 그녀의 생각이 맞다. 이놈이 뭐하는 놈이든 이 근방에선 이름 좀 날리는 놈일 거다.
그런 놈과 싸움을 벌이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거다. 나는 물론이고 일행인 나나에게도 불이익이 따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도저히 저 남자에게 발길질을 할 수 없었다.
그래, 그냥 더러운 거 피한다고 생각하고 참고 넘어가자. 그 편이 모두에게 좋은 해결책이다.
길드 직원도 간절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제발 얌전히 있어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건물 곳곳에 배치된 경비들도 우리의 행동을 예의주시하는 중이다.
내가 나나의 행동을 이해하고 울분을 참을 때였다.
“그래, 굳이 저런 새끼 때문에 힘 뺄 필요 없으니까.”
금태양이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나나 같은 미인이 설설 기어주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대답을 들은 나나는 화색이 된 얼굴로 놈의 비위를 맞췄다.
“잘 생각하셨어요. 잘 생긴 줄만 알았는데 현명하기까지 하고~ 과연 이름 있는 모험가는 격이 다르네요!”
“크흐흣, 다 네 덕분인 줄 알아. 너 아니었으면 저 새낀 오늘 내 손에 죽었어.”
자아도취에 빠져있기를 잠시, 금태양이 나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놈은 나나가 자기 애인이라도 되는 듯 그녀의 어깨에 팔을 걸며 말했다.
“그보다 저 새끼하곤 무슨 관계야? 애인이라도 되냐?”
“네? 아, 아뇨~ 그냥 동료예요.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 전혀 아니에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흐으음~”
대답을 들은 금태양이 비웃음을 흘렸다. 반면 나나의 눈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매사에 활발한 그녀라도 처음 보는 남자가 스킨쉽을 해오면 불쾌할 테니까.
그런 와중에도 나나는 날 바라보면서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내가 잘 처리할 테니 나서지 마라. 지금 나서면 말로 잘 해결한 게 수포로 돌아간다. 나나의 눈동자에는 그러한 의사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속옷만 입고 다니는 미친놈이 과분한 동료를 뒀구만~ 너 같이 잘 빠진 여자는 어디 가서 보기 힘든데 말이야.”
“치, 칭찬 감사합니다…….”
“저런 병신이랑 같이 다니지 말고 우리 파티에 오는 거 어때? 마침 사제가 한 명 필요하던 참이었는데 네가 들어오면 딱일 것 같아. 형님들도 좋아하실 거라고.”
금태양의 스킨쉽이 점점 노골적으로 변한다. 어깨에 걸친 팔이 그녀의 쇄골을 따라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그 소름끼치는 손길에 나나는 한 차례 몸을 떨더니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 아뇨. 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제가 모험가 시작한지 얼마 안 됐거든요……. 저 같은 건 오히려 오빠랑 일행 분들에게 폐만 끼칠 거예요.”
“아 걱정할 거 없어~ 나랑 형님들로 말하자면 무려 남쪽 산의 폭군, 숲 트롤 칼이빨을 처치한 트롤 슬레이어들이라고! 고작 5명이서 그 무시무시한 숲 트롤을 잡았다 이거야!”
또 다시 자화자찬을 시작하는 금태양. 놈은 자기가 엄청난 대업이라도 이뤄낸 것처럼 신나게 떠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놈은 아예 나나를 반쯤 끌어안았다.
본래라면 무척 화가 나야 되지만 지금은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놈의 얘기를 듣고 순간 사고가 멈춰버린 것이었다.
말도 안 돼…… 숲 트롤을 6명이서 잡았다고……? 정말로……?
“넌 그냥 뒤에서 회복 주문만 잘 써주면 돼. 그러니 잔말 말고 나랑 같이 가자고. 안 그러면 너무 서운해서 저 새끼 얼굴에 주먹이 날아갈 거 같단 말이야~”
경악하는 나를 바라보며 금태양이 말했다. 놈의 권유는 이미 강요의 수준을 넘어섰다.
당장 날 따라오지 않으면 동료를 두들겨 패겠다. 금태양은 그런 식으로 나나를 협박하고 있는 거다.
“그, 글쎄요…… 어떻게 할까아…….”
금태양의 협박에 나나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녀의 동공은 갈 곳 없이 흔들렸고 끝내 내 쪽으로 향했다.
여전히 그녀는 나서지 말아달라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허나 그 속에 담겨 있는 감정은 분명 불안과 두려움이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멀뚱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내 머릿속에선 트롤을 잡았다는 얘기가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6명이서 트롤 1마리를 잡았다니.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트롤 슬레이어라고 해서 뭔가 했는데 트롤을 잡았다고 그런 칭호를 내건 거였어?
가디스 던전을 6천 시간 동안 플레이하면서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가디스 던전 커뮤니티에서도 6명이 트롤을 잡았다는 글은 단 한 번도 못 봤다.
그럴 만한 게, 트롤은 초보자들도 1트만에 잡는 호구 몹 중의 호구 몹이니까.
‘어떤 병신이 트롤을 혼자서 못 잡아……?’
트롤은 초반 구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몬스터다.
덩치가 크고 그에 따라 인내력과 공격력도 무척 높지만 AI는 멍청하기 그지없다.
그냥 한 대 때리고 구르고, 한 대 때리고 구르면 놈이 혼자서 발광하다가 죽는다. 공속은 어찌나 느린지 걸어서도 피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 잡몹을 6명이서 잡았다고 하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심지어 저놈은 그걸 자랑 삼아 떠들고 있지 않은가? 1일차의 초보들도 그런 짓은 안 하는 데 말이다.
“그나저나 젖통 한 번 존나게 크네. 얼굴도 예쁜데 몸매도 착하고 말이야…… 역시 넌 꼭 데려가야겠어, 크흐흣.”
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도 못하고 있을 때 금태양이 기어코 선을 넘었다.
놈의 손이 나나의 가슴을 쥐려 했다. 나나는 저항하지도 못하고 눈을 찔끔 감았다.
방금 전까진 나서지 말자고 다짐한 나였지만, 어째서인지 몸이 튀어나갔다. 발도하는 내 손을 저지할 수가 없었다.
“손모가지 날아가기 싫으면 그 손 치워라.”
급기야 나는 칼을 뽑아들며 금태양을 위협했다.
이 상황에서 싸움을 거는 건 현명하지 않는 판단이다. 이후에 어떤 위험이 닥쳐올지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나나가 괴로워하는 모습은 두고 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 젖을 잡아야 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란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놈을 저지하려 했는데, 약간 문제가 생겼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금태양의 손을 썰어버린 것이었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