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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성벽 율리아나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아까와는 달리 본래의 나나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오묘한 심정을 느끼면서 그녀를 반겼다.
“어서와. 법술을 잘 배웠어?”
“네! 법술 수련이라고 해서 복잡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쉽더라고요! 처음 만난 육덕 사제님 말처럼 금방 배웠어요!”
나나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도 게임 세계에선 운명 인도로 밖에 스킬을 배운 적이 없어 살짝 걱정됐는데 기우였던 모양이다.
“그래? 어떤 거 배웠는데?”
“두 개 배웠는데 하나는 지금 바로 보여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나나는 자신이 배운 스킬 중 하나를 시전했다.
“위대한 빛의 창세신이시여, 밝은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주세요!”
파아앗!
나나가 자신의 홀장을 어루만지며 영창하자 곧 그녀의 홀장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을 보고 스킬의 정체를 바로 알아챘다.
성스러운 빛
액티브
요구 스탯: 신념 9
비용: 마력 10
사용 조건: 없음
습득 방법: 운명 항목에서 습득
효과: 3초 간 캐스팅 한 뒤 특정 물체에 신성 속성을 부여한다. 법술의 대상이 된 물체는 밝게 빛나며 반경 5미터 거리를 밝혀준다. 빛을 기피하는 적들은 이 주문이 시전되는 동안 섣불리 공격하지 못한다. 10분 동안 지속된다.
성스러운 빛은 빛을 만들어내는 조명 주문 중 하나다.
여타 비슷한 주문들과 다르게 인챈트 형식이라서 매개체가 필요하지만 신성 속성을 부여하는 효과가 있어서 신성 약점인 적들을 상대할 때 큰 도움이 된다.
또한 언데드나 불경 계열 적들은 성스러운 빛 자체를 두려워하기도 해서 견제용으로 쓰기에도 좋다.
“좋은 걸로 배워왔네. 마침 필요한 스킬이었는데 잘 됐어.”
“헤헤, 두 가지만 배울 수 있다고 해서 뭐로 할지 고민했었는데 역시 기초적인 것부터 배우는 게 좋을 것 같더라구요.”
기회가 됐다면 이러이러한 스킬이 좋다고 알려줬겠지만 입장 제한을 당할 줄은 몰라서 미리 이야기해주지 못했다.
그 점을 후회하던 참이었는데 나나 스스로 적절한 스킬을 골라줘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앞으로 던전 공략을 하다보면 어두운 곳에 많이 들어갈 거다. 그때마다 나나의 조명 주문은 아주 유용하게 쓰이리라.
허나 스킬 습득은 나나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밝게 빛나던 빛이 얼마 지나지 않아 불안정하게 점멸하더니 이내 완전히 꺼져버린 것이었다.
“어, 어라? 이게 왜 이러지?”
그것을 본 나나는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홀장을 몇 번인가 툭툭 쳤다. 그럼에도 빛은 다시 살아날 기미가 없었다.
“다키님 이 스킬 이상해요……! 분명 기본 지속 시간이 10분이라 했는데 몇 초 만에 꺼졌잖아요……! 버그 아니에요……?!”
홀장을 붕붕 휘두르던 나나가 내게 항의하듯 물었다.
성스러운 빛의 지속 시간은 10분. 그런 스킬이 몇 초 만에 꺼지는 건 버그가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한동안 생각에 잠긴 나는 나나와 홀장을 번갈아 본 뒤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원래 가디스 던전에선 헤베를 통해서만 스킬을 배울 수 있었어.”
“헤베라면 그 도시락 만들어준 여신님이요?”
“응, 그 여신님이 운명 인도라는 걸 통해서 플레이어의 잠재력을 일깨워주는 식이야. 내 스킬도 그 방법으로 습득했고.”
이외에도 주살교전 같은 비술서로 스킬을 해금할 수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해금’이지 ‘습득’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원작 게임에서 스킬을 배우는 방법은 헤베의 운명 인도가 유일한 것이다.
하지만 나나는 헤베를 만날 수 없는 상황. 그래서 나는 같은 직종들이 모여 있는 신전에 데려와 스킬을 배우게 했다.
게임 세계의 사제들은 다 그런 방법으로 배우지 않을까 해서였다. 실제로 신전에는 수습 사제들을 위한 교육 시설들도 갖춰져 있어서 내 예측이 적중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꺼져버린 빛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머릿속을 정리한 나는 내 의견을 나나에게도 말해주었다.
“내가 보기엔 운명 인도 외의 방법으로 스킬을 습득할 때는 어느 정도 숙련도를 쌓아야 하는 것 같아. 시스템의 힘을 빌리는 게 아니다 보니 게임처럼 편하진 않은 거지.”
“그렇군요……! 검도 수련하는 것처럼 열심히 연습해야지 제대로 쓸 수 있는 거네요……!”
내 이야기를 들은 나나는 울상이 된 채 이야기했다.
“우우…… 이걸로 다키님한테 좀 더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제일 간단한 법술로 몇 초 밖에 유지 못하고, 전 재능이 없나 봐요…….”
“너무 낙심하진 마.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나야 여신님한테 도움 받아서 바로 쓰는 거지, 다들 처음엔 잘 안 될 거야.”
게임 시스템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법술이든 검술이든 일반인이 배우기엔 너무나 힘든 기술일 거다.
당장 나만 해도 운명 인도를 쓰지 않고 직접 검술을 익혀보라 하면 눈앞이 까마득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나가 고작 한 시간 만에 법술을 두 개나 배워온 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맞아요! 처음부터 잘 하면 그건 뉴비가 아니죠! 지금부터 열심히 연습해서 빠른 시일 내에 마스터 해보겠어요!”
“그래, 숙련도야 쓰다보면 자연스레 늘 테니까. 나나 너라면 금방 능숙해질 거야.”
잠시 침울해한 나나였으나 격려 한 번 받으니 금세 화색이 되었다. 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하려는 거겠지. 그 모습을 보니 고맙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했다.
“그나저나 아까 그건 뭐야?”
“네? 아아~ 사제님 앞에서 목소리로 깐 거요?”
신전 부지를 나서며 나나에게 지나가듯 물었다. 그러자 나나는 눈치 빠르게 질문의 요지를 파악했다.
“그냥 스킬 텍스트에 있는 내용 보고 사제라면 이렇게 행동하겠거니 한 거예요. 뇌지컬로 연습 좀 해뒀죠!”
“고작 하루이틀 연습한 실력이 아니던데? 난 무슨 연기과라도 나온 줄 알았어.”
“헤헤헤…… 제가 원래 남 비위 맞추는 걸 잘 해서요. 상황 맞춰서 태도 바꾸는 것도 잘 하게 되더라고요.”
남의 비위 맞추는 게 특기라. 뭔가 사정이 있을 만한 특기였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가족 얘기를 꺼낼 때 분위기가 차가워진 것도 그렇고, 나나에겐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복잡한 과거가 있는 모양이다.
그녀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궁금증 또한 커져갔지만 내 쪽에서 먼저 파헤치는 건 바람직하지 않겠지. 그녀가 먼저 대답해주기를 기다리는 게 좋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모험가 길드로 발걸음을 옮겼다. 언덕만 내려가면 바로 건물이 보여서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혼잡한 인파를 지나 모험가 길드 안으로 들어가니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길드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건물 내부는 커다란 홀을 중심으로 정면에 접수창구, 오른쪽에 게시판, 왼쪽에 간단한 선술집이 있는 구조였는데 어느 쪽이든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야, 사람 엄청 많네. 적응 진짜 안 된다.”
“제 2 수도의 모험가 길드잖아요. 이 정도는 있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원작 게임에선 NPC들도 이렇게 많진 않았거든. 뭔가 게임하고 괴리감 느껴져서 감회가 새로워.”
의아애하는 나나에게 대답하며 나는 홀 안의 사람들을 스윽 훑어보았다.
모험가답게 다들 무장하고 있었지만 그 수준이 높은 이들은 많지 않았다.
대체로 무기 하나로 족하거나 가벼운 장비만 갖추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 신의를 착용한 사람은 거의 없는 듯했다. 그 말은 곧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대부분이 뉴비라는 것이리라.
‘애초에 실력 있는 모험가면 이 시간에 길드에 있지도 않겠네.’
보통 모험가들은 아침 일찍부터 퀘스트를 받아 성문을 나선다. 늦게 출발할수록 노숙할 확률이 높아지고 그만큼 모험의 위험도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당일치기로 못 끝내는 퀘스트도 많지만 웬만한 사람들은 하루 만에 클리어하는 의뢰를 선호할 거다.
그보다 이 넓은 홀에 있는 게 죄다 뉴비라니. 6천 시간짜리 고인물로서 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남자는 모험심에 불타서 드래곤을 잡겠다며 설치고 있고, 어떤 여자애에는 갑옷이 익숙하지 않은지 어정쩡한 자세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게임상의 뉴비들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풋풋한 새내기들을 보니까 가슴이 뭉클해졌다. 마음 같아선 한 사람, 한 사람 다 집적거리면서 도와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분명 찐따 새끼처럼 보이겠지.
척 봐도 실력자인 사람이 도와준다고 하면 선망의 시선을 보내겠지만 팬티 한 장 입은 노출증 환자가 도와주겠다고 하면 이뭔씹이 조건반사적으로 튀어나올 거다.
그렇기에 나는 설레는 마음을 자중하면서 접수창구로 다가갔다.
나와 나나가 홀 안으로 들어서자 시선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분명 나 때문이리라.
“야, 야 저것 좀 봐. 저 남자 좀 이상해.”
“저 병신은 또 뭐야? 왜 팬티만 입고 있어?”
“하, 거지새끼가 돈 좀 벌어보겠다고 모험가 노릇 하러 왔나?”
“가진 것도 없으면서 칼은 쓸 데 없이 좋아 보이네.”
“어디 대장간에서 훔쳐온 거 아니야? 경비대에 신고하면 잡힐 거 같은데.”
귀를 기울여 보니 여지없이 험담이 들려왔다.
여자들은 거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얼굴을 붉히면서 관심을 보내왔지만 남자들은 정 반대였다. 오히려 여자들이 보내는 시선 때문에 날 더 깎아내리려는 듯했다.
굉장히 불쾌한 경험이었으나 지금의 나로선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욕한다고 해서 깽판을 부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짓을 벌이면 괜히 나만 곤란해진다.
건물 안에는 여기저기 중무장한 사람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아마 길드 소속의 전사들일 거다.
소란을 피우려 하면 저들이 날 붙잡아 경비대에 넘기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이성을 다스리며 들려오는 험담을 애써 무시했다.
도시에 온다고 결정했을 때부터 이 정도 불쾌한 경험은 다 예상했다. 마음을 다 잡으니 썩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하~ 좆늅 찐따들이 주제를 모르고 깝치네요. 싸우면 1초 안에 발릴 새끼들이 몰려 있다고 주절주절 떠드는 꼴이라니. 모험가 길드의 미래는 어둡군요~”
나나가 나와 팔짱을 끼며 속삭였다. 다른 사람들 귀에 안 들릴 정도로 속닥거린 그녀는 같잖다는 듯이 험담이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런 나나의 시선에 뉴비들은 얼굴을 화악 붉히면서 입을 다물었다. 곧 그들의 대화 주제는 내가 아닌 나나로 바뀌게 되었다.
설마 내 기분을 생각해서 그런 건가? 나나의 말을 되새겨 보면 맞는 것 같다. 순간 놀란 나는 몇 번인가 말을 더듬은 뒤 나나에게 얘기했다.
“……고마워 나나야.”
“헤헤, 다키님이 욕먹고 있는데 가만있을 수는 없죠. 바로 쫓아가서 뚝배기를 깨버릴까 했는데 그건 좀 개에바 같아서 참았어요~”
“그래, 잘 했어. 저런 애들은 일일이 신경 쓸 필요도 없지.”
사실 연이은 험담 때문에 기분이 많이 안 좋았었는데 나나가 나서주니 기분이 확 풀렸다.
조금씩 들려오는 멸시의 시선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됐고 오직 나나에게만 집중하게 됐다.
나 혼자 도시로 왔으면 이런 식으로 기분 전환할 수도 없었겠지. 나나의 부드러운 살결을 느끼면서 저 분탕들의 말을 무시하지도 못했을 거다.
새삼 나나를 동료로 받아들인 게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그녀는 비단 내 도움을 받는 뉴비가 아니라 나에게도 도움을 주는 어엿한 동료였다.
우린 그 후로 이런저런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곧 우리 차례가 다가오는 듯했다.
게임 세계의 모험가 등록은 어떤 식으로 진행될까. 그런 영양가 없는 고민이나 하고 있을 때 우리 차례가 되었다.
별 생각 없이 창구 앞으로 다가가려는 그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밀치고 앞에 섰다.
“아, 비켜 병신 새끼야!”
퍽!
“어……?”
“다, 다키님!”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함께 내 몸이 벽에 부딪쳤다. 밀쳐지는 충격으로 발을 헛디딘 것이었다.
곧 적잖은 통증이 등을 두들겼고 나는 난데없는 폭력에 당혹감을 터뜨렸다. 옆에선 나나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뭐지? 이게 무슨 일이지?
길드 부지에서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남자의 우악스러운 손에 반응할 수 없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나는 고개를 돌려 날 밀친 남자를 확인했다.
가죽 갑옷을 걸친 20대 중반의 남자였다. 머리는 금색이었고 피부는 태닝한 것처럼 구릿빛인 게 마치 NTR 망가에 나오는 캐릭터를 보는 것 같았다.
아니,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지.
진짜 중요한 건 저 남자가 경우 없이 날 밀쳤다는 것이다. 나는 곧 어이없는 심정으로 남자에게 말했다.
“너 지금 뭐하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