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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76화 (7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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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성벽 율리아나

내 몸을 훑는 손이 점점 노골적으로 바뀐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프란체스카를 바라봤는데 어느새 그녀도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다키라고 했지……? 이 누나가 네 저주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데…… 괜찮으면 언제 한 번 천천히 연구해 봐도 괜찮을까? 우리들의 몸을 써가면서 말이야…….”

“저, 저야 좋은데 너무 갑작스러운 게 아닌지…….”

“젊은 애가 왜 그래~ 남녀가 눈 맞으면 하룻밤에 뒹굴고 그러는 거지……. 부끄러워하지 말고 누나랑 같이…….”

프란체스카의 입술이 귀와 가까워진다. 그럴수록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고 내 귀는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것도 검양뿔 때문인가. 프란체스카에게 안기는 건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았지만 길거리에서, 그것도 대낮에 이러는 건 좀 곤란했다.

내가 서서히 발기해가는 육봉을 필사적으로 억누를 때였다.

“미안해 다키야! 이 언니가 너 같은 애 보면 사족을 못 쓰거든. 가뜩이나 낮술까지 하는 바람에……!”

“꺄아앙~”

보다 못한 니아가 프란체스카의 망토 자락을 붙잡아 그녀를 떼어냈다.

근접 클래스여서 그런지 힘이 장사였다. 나에게 끈적하게 붙어 있던 프란체스카는 쪽도 못 쓰고 끌려갔으며 나는 서둘러 상송의 망토로 내 고간을 가렸다.

“아, 아뇨 괜찮아요. 그러실 수도 있죠.”

“어쨌든 뭔가 도움이 필요하면 우리한테 얘기해. 무리한 요구만 아니면 얼마든지 도와줄게. 우린 주로 모험가 길드에 있으니까 거기로 찾아오면 될 거야.”

그렇게 말한 니아는 프란체스카를 질질 끌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어쩐지 와인 냄새 같은 게 났는데 보기보다 많이 취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급전 필요한 게 아니면 전리품은 가급적 길드 부속 거래소에서 처분해! 경매장 비슷한 것도 있어서 제 값 받기 좋거든. 아이템 등급에 따라 실적으로도 적용되고”

“이것저것 고마워요 니아 씨. 덕분에 많이 알아가네요.”

“고마우면 다음에 술이나 한 잔 사주던지. 지금 보다 더 의젓해진 다음에 말이야!”

인사를 나눈 뒤 두 사람은 수많은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참 좋은 사람이구나. 어째 게임 세계에 들어온 이후론 좋은 사람들만 만나는 것 같다.

부쩍 인복이 좋아진 것을 느끼면서 니아와 프란체스카를 배웅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녀들과 파티를 맺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골드 등급이란 게 얼마나 높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들의 장비 수준을 보면 조금만 성장해도 금세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골드 등급이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봐야겠다. 다른 게임에서 그렇듯이 플레이어의 티어를 나타내는 말일까?

원작 게임에는 없던 시스템이어서 잘 모르겠다. 뭐, 모험가 길드에 들를 때 겸사겸사 물어보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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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아, 프란체스카와 헤어진 뒤 우리는 광장 근처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판타지 세계라고 해서 엄청 특이한 요리가 나올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네요!”

식당을 나서며 나나가 짤막하게 감상평을 내놓았다. 그녀의 어투에는 약간 실망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판타지 세계의 요리라고 하면 드래곤 꼬리 스테이크나 만드라고라 스프 뭐 이런 걸 생각하기 마련이니까.

그에 반해 우리의 점심 메뉴는 평범하다 못해 친숙한 것이었다. 전채론 특이할 거 하나 없는 샐러드와 스프가 나왔고 이후 메인 디쉬로 튀긴 닭요리가 식탁 위에 올라왔던 것이다.

현지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 중 하나라는데, 외관으로만 보면 영락없는 프라이드치킨이었다. 원래 세계에서 먹던 치킨하곤 미묘하게 다르긴 했으나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던 것이다.

굳이 차이점을 꼽자면 이 동네는 치킨은 소스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염장이나 향신료로만 맛을 낸다는 거였다.

“뭐 판타지 세계라곤 해도 결국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게임이니까. 완전 독창적이고 새로운 음식이 나오긴 힘들겠지.”

“그렇지만 고증이 전혀 안 맞잖아요! 중세 배경 세계관에서 튀김 요리가 대중화되어 있다니! 완전 이상해요!”

밥 먹을 때도 나나는 이런 식으로 프라이드치킨의 존재를 지적하곤 했다.

옛날엔 식용유 구하기가 어려워서 서민들은 튀김 요리를 꿈도 못 꿨을 거라든지, 이런 식의 요리법이 있었더라도 고위층 사람들만 먹었을 거라든지 하면서 게임 세계의 고증 부분을 집요하게 따진 것이었다.

역사 시간에 졸았던 나로선 뭐라 할 말이 없지만 그렇게까지 고증을 따져야 하나 싶었다.

고증 잘 지키는 작품이 훌륭한 작품인 건 사실이지만 설령 잘 지키지 않더라도 게임이니까 웃어넘길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뭣보다 이 가디스 던전의 세계관은 현실의 지구가 아닌 판타지 세계기도 하고.

“그렇게 말한 것치곤 엄청 잘 먹더만. 다리도 혼자 두 개 다 먹었으면서.”

“그, 그건 다키님이 저 먹으라고 주신 거였잖아요……!”

내 지적에 나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항의했다.

확실히 그녀가 다리를 두 개나 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양보해서 그런 거다. 난 말랑말랑한 살보다 좀 퍽퍽한 부위를 좋아해서 일부러 안 먹었다.

그런데 그걸 맛있게 먹은 건 또 별개의 얘기지.

“어찌됐든 맛있었으니까 됐잖아? 이제 치킨은 못 먹겠구나 하고 한탄할 필요도 없고.”

“그렇긴 하죠! 맛있는 거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말에 맞장구치면서 나나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과장된 행동에 나는 쑥스러움을 느끼며 말했다.

“이 정도 가지고 뭘……. 별로 비싸지도 않으니까 종종 사줄게. 다음엔 진짜 판타지스러운 걸로 먹어보자.”

“꺄앙~ 주인님 최고~”

말이 끝나자마자 나나는 더욱더 오버하며 나와 밀착했다. 이후 자연스레 손을 맞잡은 우리는 연인처럼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로 혼잡한 거리에서 이렇게나 오붓하게 걸으니 나나가 내 여친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다키님? 숙소부터 구할까요?”

거리를 구경하던 나나가 문득 질문했다. 그녀가 본 방향에는 모험가들이 사용할 법한 주점 겸 여관이 있었다.

괜찮아 보이긴 했지만 벌써부터 숙소를 잡을 필요는 없을 듯했다. 나는 태양의 위치를 확인한 뒤 발걸음을 돌리며 대답했다.

“아직 시간 넉넉하니까 다른 곳부터 들르자.”

“다른 곳이라면 어디요?”

“모험가 길드에서 등록 좀 하려고. 가는 김에 너희 교단도 좀 가보고.”

내 기억대로라면 모험가 길드와 광휘의 대신전 지부는 꽤나 가깝다.

어차피 퀘스트를 진행하려면 모험가 길드에 한 번은 들러야 하니 겸사겸사 근처에 있는 신전에도 방문하면 좋을 것 같았다.

“교단에는 왜요? 다른 게임처럼 축복 시스템 같은 거라도 있어요?”

“없는 건 아니지만 당장은 네 스킬 때문에 가는 거지. 내일부터 본격적인 모험을 시작할 텐데 유용한 스킬이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잖아.”

각 던전에는 저마다의 기믹이 존재한다.

어떤 던전은 들어가기만 해도 중독 상태에 빠지며 어떤 던전은 저주를 사용하는 몬스터가 대거 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던전들을 보다 쉽게 클리어하기 위해선 나나가 지금보다 좀 더 다재다능해져야 한다.

사제는 기본적으로 힐러 포지션이지만 회복 주문 외에도 다양한 법술로 아군을 서포트할 수 있다. 찬란한 광채나 거부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전형적인 힐러라기 보단 유틸형 캐릭터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한 사제의 능력을 100퍼센트 발휘하려면 신전에서 새로운 법술을 배울 필요가 있다.

“으흠! 좋아요. 저도 다키님한테 더 쓸모 있는 노예가 되고 싶으니까요!”

신전에 방문하는 이유를 설명해주자 나나는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새로운 스킬이라는 말에 그녀도 두근거리는 듯했다. 역시 RPG 하면 스킬 배우는 맛이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서쪽 메인 스트리트로 향했다.

서쪽의 메인 스트리트는 다른 곳보다 정결한 분위기였다.

건물들은 대체로 하얀색 벽돌과 붉은색 지붕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예쁜 건물들과 깨끗한 대로가 어우러져 도시의 미관을 드높였다.

그런 넓고 쾌적한 거리를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오가며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중갑옷을 걸친 기사부터 로브를 두른 마법사 등 일반인들 보다는 모험가의 비중이 높았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모험가 길드 때문이다.

서쪽 메인 스트리를 조금만 걷다 보면 우리가 식사를 했던 곳보다 훨씬 큰 광장이 존재한다. 모험가 길드는 그 광장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근처에 있는 언덕을 오르니 대신전의 지부 보였다. 도보로 5분 정도만 걸으면 도착할 정도로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모험가들 사이에는 종종 성직자들이 섞여 있었다. 노출도 높은 옷을 입은 여사제가 포교 행위를 광경이나 신출내기 사제가 파티에 합류하는 모습이 곧잘 보였다.

혼잡한 광장을 구경하며 걷길 잠시 우리는 신전에 도착했다. 석재 계단으로 포장된 언덕을 오르자 웅장한 건물이 우리를 맞이해줬다.

“히야아…… 엄청 크네요……! 유럽에 있는 대성당도 이것 보단 작겠어요!”

“그러게…… 원작 게임에서도 크다 싶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걸.”

백금색으로 반짝이는 신전을 보면서 나와 나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인내하는 자의 신전보다야 작았지만 디테일 면에 있어선 이쪽이 더 뛰어낫다. 곳곳에 정교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고 벽과 천장을 따라 수백, 수천 개의 천사상이 늘어서 있었던 것이다.

가히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비주얼. 게임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원래 세계였다면 현대의 기술력을 총동원해도 이 정도 건물을 짓기 힘들 거다.

“어서 오세요, 형제자매님. 신전에는 어쩐 일로 오셨나요?”

앞마당을 지나 입구 쪽으로 다가갈 무렵 한 중년의 여사제가 우리를 응대했다.

그에 나는 나나가 들고 있는 홀장을 가리키며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홀장엔 대신전의 성표가 붙어 있었기에 이를 통해 신분을 밝힐 생각이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처음 뵙겠습니다, 사제님. 제 이름은 나나, 이제 갓 광휘의 의지를 섬기게 된 수습 사제입니다. 많이 부족한 몸이지만 대신전의 가르침을 받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어……?”

내가 여사제에게 이야기하려는 순간, 나나가 유창하게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자기소개를 하는 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나나의 태도였다.

시종일관 댕댕이 같던 애가 순식간에 정갈하고 차분한 여사제로 변모했다. 방금 전까지 보였던 하이텐션이나 푼수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잘 오셨습니다, 나나 사제님. 먼 길을 오느라 노고가 많았겠지만 실례가 안 된다면 먼저 성표를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여기 있습니다.”

여사제의 요구에 나나는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들어보였다.

사제나 성기사 같은 종교 관련 캐릭터는 자기 종교의 성표를 가지고 시작한다.

쉽게 설명하면 십자나가 염주 같은 걸 몸에 지니고 다니는 거다. 이러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으면 NPC들과 상호작용할 때 여러 이점을 얻을 수 있다. 신전에서 도움을 받는 것도 그 일환이다.

“흐음, 의심의 여지가 없군요. 틀림없이 중앙 대신전에서 발행한 성표예요.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나나 사제님.”

“아뇨, 교단의 일원으로서 스스로의 신분을 증명하는 건 당연한 일인걸요. 그런데 어찌하여 성표를 확인하셨는지는 조금 궁금합니다만…….”

나나의 질문에 여사제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 챈 나나는 저도 모르게 ‘아’ 하며 탄식했고 나는 멋쩍은 기분을 느끼며 시선을 피했다.

“이런 말씀드리면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 사제님의 일행 분께서 그…… 많이 개성적인 차림을 하고 계시기에 혹시나 해서 확인해본 거랍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역시 검은 산양의 뿔을 가지고 있다 해도 종교인 앞에서 팬티 바람을 다니는 건 좀 선 넘은 행동이었나 보다.

앞에 있는 밀프 사제님도 양족 허벅지를 훤히 드러낸 데다 얇은 재질의 법복으로 풍만한 몸매를 마음껏 과시하고 있지만 내 입으로 말했듯이 지금 내 차림은 해수욕장에서 속옷만 입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보다 가르침을 원한다고 하셨지요?”

“네, 보다 많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새로운 법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교육실에 한 번 가보세요. 담당 사제님들이 친절하게 알려주실 거랍니다. 고난이도의 법술은 그만큼 많은 지도가 필요하여 헌금을 내야 하지만 간단한 법술 정도는 비용 없이 금방 배울 수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여사제는 나나에게 교육실의 위치를 안내해줬다. 나나는 그녀의 말에 경청한 후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친절한 안내에 감사드립니다. 빛이 그대를 인도하길.”

“네,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뵙도록 하죠. 빛이 그대를 인도하길.”

여사제와 마주보며 인사한 뒤 나나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멀뚱히 구경하고 있던 내게 나나는 어느 때보다 얌전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그러면 다키 형제님, 저는 법술 수련을 위해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교육실에는 교단의 성직자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군요.”

“어, 어? 그, 그래. 잘 다녀와. 난 좀 쉬고 있을게.”

내가 손을 흔들며 대답하자 나나는 꾸벅 고개를 숙인 뒤 계단을 올랐다. 한참이나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뭐지, 다중인가. 어떻게 사람 말투가 저렇게 휙휙 바뀔 수 있지?

평소의 모습이랑 너무 달라서 진짜 다른 인격이라도 나온 줄 알았다. 참 대단한 연기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한참 얼빠진 채로 있던 나는 새삼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을 파랗고 햇볕은 따사롭다. 신전 지부라 그런지 불필요한 소음이 전혀 없어서 낮잠 한숨 때리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마음 같아선 어디 자리 잡고 한숨 자고 싶었지만 팬티만 입은 변태 새끼가 그런 불경한 짓을 저지르면 신전이 발칵 뒤집어질 거다.

그렇기에 나는 최대한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았다. 나 혼자 모험가 길드에 다녀올까 싶기도 했지만 그러면 등록 과정을 두 번 거쳐야 하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리라.

정원 벤치에서 한 시간 정도 기다렸을까. 교육을 받으러 간 나나가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저 왔어요, 다키님! 많이 기다리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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