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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성벽 율리아나
“뭐 보세요, 다키님?”
내가 말이 없어지자 나나도 나를 따라 그 건물을 확인했다.
“어라……? 저긴 왜 간판이 한국어로 써져 있어요?”
아무래도 나나가 신경 쓰인 부분은 간판 쪽인 듯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대답했다.
“그야 가던이 한국 게임이니까 그렇겠지. 저기 말고도 오는 길에 한국어로 쓰여 있는 간판 많았어.”
“앗, 그러네요! 예쁜이들 구경하느라 미처 못 봤어요~”
내가 몇몇 상점을 가리키며 이야기하자 나나는 뒤늦게 깨달았다며 배시시 웃었다.
식당이나 잡화점, 포션 상점 등 커다란 간판을 내건 가게들은 대부분 한국어로 자신들의 업소명을 적어뒀다.
문맹률을 고려한 건지 글자보단 그림이 주가 되었지만 어찌 됐든 게임 세계에선 한국어가 공용어처럼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위화감이 드는 광경이었으나 가디스 던전이 본래 국산 게임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이미 내 머릿속에선 이 세계의 창조자가 유다희라고 못 박혀 있어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내 관심을 끈 건 간판에 쓰인 모국어가 아니었다. 나는 다시금 전당포를 가리키면서 나나에게 말했다.
“우리가 모은 전리품 말이야, 저기서 팔 수 있지 않을까?”
“다키님이 불확실하게 말씀하시고 별 일이네요. 게임에선 저런 거 없었어요?”
“응, 원작 게임에선 전리품 얻는 족족 아무 상인한테나 팔 수 있었거든. 전당포 같은 게 따로 있을 이유가 없지.”
여느 롤플레잉 게임이 그렇듯이 가디스 던전도 어떤 상점에서든 아이템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물건을 매입해주곤 했다.
반면 게임 세계는 어느 정도 현실성을 갖추고 있다. 당장 브릴린트만 해도 이코르와 가고일들의 무기가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매입하지 않았는가.
그러한 점을 고려하면 전리품들을 아무 가게에서나 처분하는 건 힘들 것이다. 저런 전당포야 말로 게임 세계에서 전리품을 처분하는 방법이겠지.
“그러면 일단 들어가 보죠! 어차피 생활비 챙기려면 전리품은 팔아야 되잖아요!”
“그래, 따로 급한 일도 없으니까 가서 한 번 물어나 보자.”
내 수중엔 이미 6800 아웬이나 있어서 숙박비, 식비 정도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겠지만 본격적인 모험을 위해선 이 정도론 부족하다.
쓰지도 않을 물건을 애지중지 들고 다니기도 귀찮고 말이다.
“아, 어서 오세요. 어떻게 오셨죠?”
그런 생각을 하며 거래소 안으로 들어가자 웬 중년 남성이 우리를 반겼다.
편안한 복장을 입은 대머리 아저씨였는데 척 보기에 인상이 썩 나쁘지 않았다. 웃으며 맞이해주는 아저씨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나는 용건을 말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간판 보고 들어왔는데 혹시 모험 도중에 얻은 전리품도 매입해주나요?”
“어떤 물건이냐에 따라 다르죠. 지금 가지고 계신가요?”
“아 네. 바로 보여드릴게요. 나나야 가방 좀.”
내 말을 들은 나나가 등을 돌려 가방을 내밀었다. 잠시 가방 안을 뒤적거린 나는 상송에게서 파밍한 아이템들을 카운터 위에 올려놨다.
여신의 자장가와 주살교전, 그리고 지네신의 허물 등이었다. 놀들의 이코르도 꽤 있었지만 이런 건 대장간에 파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굳이 꺼내지 않았다.
당장 브릴린트만 해도 가고일들의 이코르를 고가에 매입해주지 않았는가. 대장장이들에겐 언제나 부족한 물건이니 도시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흐으음…….”
내가 전리품을 꺼내자 대머리 아저씨는 천장갑을 낀 손으로 그것들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특이하게 생긴 단안경도 끼고 섬세하게 이곳저곳 살펴보는 것이 전문가의 기운이 느껴졌다.
“어떤가요……?”
한동안 말이 없자 나는 조금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 운석 감정을 맡긴 사람마냥 기대에 부풀어서 질문하니 대머리 아저씨는 몹시 흥미로운 어투로 이야기했다.
“이 무령은 평범한 주술사들을 위한 물건은 아니네요. 여기 보시면 세밀하게 조각된 상감이 보이죠?”
“아, 네 그러네요.”
“이건 약 200년 전 아리에스 시대에 유행하던 양식입니다. 못 해도 이 물건이 200년 전의 유물이란 걸 알 수 있죠. 또 조각을 잘 보면 어떤 여신과 제사장을 묘사해놓았는데 정황상 이건 이름 모를 여신이 제사장에게 직접 선물한 물건 같군요.”
유창하게 떠드는 대머리 아저씨를 보며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아저씨, 마치 게임 텍스트를 읽듯이 이 아이템에 얽힌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파악하고 있다. 고작 무령 표면에 새겨진 상감만 보고 말이다.
이쪽 업계에선 상식적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 아저씨가 전문가인 건 틀림없는 듯했다.
“무령 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책이나 부적도 정말 흥미로운 물건이에요. 이런 걸 다 어디서 얻으셨나요?”
“아, 그게 말이죠…….”
아저씨의 질문에 나는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웬 남자를 죽인 다음에 파밍했다고 말하기는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은가. 게임에선 전혀 문제가 안 됐으나 게임 세계에선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모험 도중에 버려진 마을을 발견했거든요. 꽤 오래된 폐허였는데 거기서 발견했어요.”
“그렇군요. 하긴 율리아나 근처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유적지가 많으니까요.”
애초에 율리아나의 터 자체가 고대 유적이나 원시생물들이 많은 신비로운 땅이다 보니 대머리 아저씨도 쉽게 납득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몇 번인가 더 물건들을 살펴본 후 내게 물었다.
“그래서 이걸 팔고 싶다고요?”
“그러면 팔려고 보여줬지 구경시켜주려고 보여줬겠어요?”
거듭 질문한 아저씨에게 나나가 노골적으로 대답했다. 멀뚱히 보고만 있어서 꽤 지루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런 나나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면서 첨언했다.
“저희가 돈이 좀 필요하거든요. 바로 현금으로 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그럼 얼마에 파실 건가요?”
“네?”
대머리 아저씨의 질문에 나는 순간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런 질문이 나올 거라곤 차마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얼마에 팔 거냐니…… 여신의 자장가는 당연히 2만 6천 아웬에 매입해야 되는 거 아니야?’
모든 아이템에는 구매가와 판매가가 정해져 있다. 그 중 여신의 자장가의 판매 가격은 26000아웬이다.
원작 게임에서 그랬듯이 게임 세계에서도 당연히 그 가격으로 팔릴 줄 알았는데 저쪽에서 얼마에 팔 거냐고 물어보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 가격이 일정했던 건 게임이니까 그런 거잖아. 게임 세계에서도 원가대로 구매해줄 거란 보장은 없어.’
브릴린트도 물건을 싸게 팔아주거나 비싸게 사주곤 했다.
그 말은 곧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26000아웬이 반값이 될 수도 있고, 훌쩍 뛸 수도 있으리라.
잠시 고민한 나는 이내 입을 열었다.
“버려진 폐허에서 주워온 거긴 한데 거기까지 가느라 죽을 뻔했거든요. 사장님 말씀하신 것처럼 아주 오래된 유물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5만 정도는 받아야 될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해도 양심 없는 가격이었지만 나는 꿋꿋하게 철면피를 깔았다.
어차피 세게 불러도 알아서 잘 깎을 거다. 얼마를 불러도 가격이 내려간다면 처음부터 정가를 부를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이 아저씨는 물건들의 가치를 스스로 입증해주지 않았는가. 내가 다소 비싼 가격을 불러도 본인이 자초한 일이니 면박을 주지는 못하리라.
“후우……!”
어느 정도 계산을 해가며 가격을 제시하자 대머리 아저씨가 갑자기 자신의 반들반들한 머리를 매만졌다. 그의 입에선 카운터가 푹 꺼질 정도로 무거운 한숨이 나왔다.
저게 대체 무슨 반응이지? 역시 5만 아웬은 좀 선 넘은 가격인가?
살짝 불안해하며 대답을 기다리길 잠시, 대머리 아저씨는 착잡한 심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손님 형편이 어려운 건 차림새만 봐도 알겠어요. 그래도 5만 아웬은 너무 세군요.”
“아, 하하…… 그런가요?”
“이 무령은 확실히 흥미로운 유밀이에요. 하지만 이런 물건들은 대체로 판매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구매자를 찾을 때까지 들 관리비랑 판매 후에 나갈 세금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고가는 힘들어요.”
확실히 팔 생각만 했지 관리비나 세금 같은 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애초에 이 아저씨는 손익에 상관없이 아무 물건이나 사주는 게임 속 NPC들과는 다르지 않는가. 매입을 위해선 고려해야할 게 많을 것이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 싶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생각을 고친 나는 겸연쩍은 기색으로 물었다.
“그렇군요…… 그러면 얼마나 쳐주실 수 있나요?”
“글쎄요, 이런저런 부분들을 다 따져봤을 때 제가 생각하는 적정가는…….”
“적정가는……?”
다시 무령을 둘러보며 골똘히 생각하는 대머리 아저씨. 그는 이내 나와 나나를 훑어보며 이야기했다.
“2만 아웬 정도면 매입할 수 있겠네요.”
“네?”
“뭐라구요?”
아저씨의 말을 듣고 나와 나나가 동시에 되물었다. 나는 조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고 나나는 대놓고 불쾌함을 드러냈다.
급기야 나나 쪽에서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가격이 갑자기 절반 이하가 돼요? 아저씨 우리 이거 시세 다 알아보고 온 거예요. 2만 6천 아래로는 절대 안 받을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나나야 진정 좀…….”
언성을 높이는 나나를 말리며 아저씨의 태도를 살폈다. 다행히 아저씨는 별로 불쾌한 기색도 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해줬다.
“두 분 사정이 어려운 건 알겠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도 이윤을 남겨야죠. 2만 6천이나 드리면 남는 게 별로 없어요.”
“그러면 2만 5천! 와 이 정도면 많이 깎아줬다! 다키님도 그렇게 생각하죠?”
“뭐…… 그렇기는 하지…….”
사실 난 2만을 받든 2만 5천을 받든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하면 너무 허세부리는 것 같겠지만 게임을 다 클리어해본 내 입장에선 5천 아웬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지금이야 클리어한 던전이 하나 밖에 없어서 돈이 궁한 거지 바로 다음 던전만 클리어해도 내 자산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거다.
던전 자체가 돈이 되는 것도 있지만 나는 고가의 아이템들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지 다 알고 있다.
물론 게임 세계의 변수가 있는 이상 막연하게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5천 아웬이 조금만 노력해도 벌 수 있는 돈인 건 사실이다.
그래서 2천 아웬에 팔아도 딱히 상관없는데 나나가 그걸 용납 못하는 기색이었다. 나한텐 시종일관 맞춰줬으면서 지금은 절대 손해 보지 않으려고 악을 쓰는 것이었다.
“후우…… 좋아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저도 선심 좀 쓸게요. 2만 2천으로 합의 보죠. 저도 이 이상은 드릴 수 없습니다.”
“2만 3천 5백……!”
“사제님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오시면 저도 곤란해요. 저희처럼 규모 있는 거래소니까 이렇게 매입해주는 거지 다른 곳에선 부담돼서 아예 매입도 못할 겁니다. 2만 3천으로 하죠. 진짜 이게 마지막입니다. 더는 안 돼요.”
나나가 연이어 가격을 후려치자 대머리 아저씨의 얼굴에도 피로한 기색이 떠올랐다.
여전히 내가 부른 가격에서 반값 이하였으나 2만 3천 정도면 원가와 그렇게 큰 차이는 안 났다. 30만원이 작은 돈인 건 아니지만.
“어떻게 할까요, 다키님?!”
신나게 떠들던 나나가 날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발포 명령을 기다리는 병사와 같았다.
이 이상 더 올리게 두면 교섭 자체가 결렬될 수도 있다. 애당초 우리가 팔 물건이 무령 하나만은 아니어서 최종 수익도 2만 3천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대머리 아저씨가 제시한 가격에 만족하기로 했다.
“2만 3천이면 나쁘지 않네요.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좋아요, 그러면 나머지 물건도 마저 감정하죠. 그전에 일단 서류 하나 작성해주시고…….”
아저씨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오른 순간이었다.
딸랑!
문에 매달린 방울이 크게 울리면서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그렇게 좋은 무령을 2만 3천에 판다고? 완전 거저네!”
“응……?”
거래를 성사하려는 나와 아저씨 사이에 웬 여성이 끼어들었다.
찰랑거리는 은색 단발을 가진 미모의 여성이었다.
나이는 20대 중후반 정도 될까. 성숙한 미모에 당당한 기세까지 더해져 매력이 흘러넘쳤다. 걸 크러쉬로 인기 몰이 하는 서양 여배우들과 비슷한 분위기가 흘렀다.
거기까지만 해도 내 시선을 잡아끌기엔 충분했는데 윗가슴을 훤히 드러내는 갑옷 덕분에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나나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녀도 상당한 거유였다. 뽀얀 가슴에 시선이 팔린 나는 본의 아니게 그녀의 가슴을 뚫어져라 쳐다봤고 문득 익숙한 물건을 보게 됐다.
‘어? 저 문양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그녀는 웬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별로 특이할 거 없는 장식품이었지만 문제는 목걸이에 새겨진 문양 어딘가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능력치가 있는 장신구는 아닌지 아이템창은 뜨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치곤 너무 익숙했다. 목걸이 새겨진 사자 문양이 머릿속에서 계속 아른거렸다.
나는 그녀의 문양에 대해서 깊게 고민하게 됐고, 그러는 사이에 은발의 여성이 거침없이 말을 걸어왔다.
“저기, 괜찮으면 그 무령 우리한테 팔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