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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72화 (7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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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성벽 율리아나

나나의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나였지만 곧 그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고민인지 깨달았다.

나나는 아다단이다. 변태와 이상성욕자들로만 이루어진 내 팬덤 중 한 명인 것이다. 그런 그녀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원래 세계에선 어땠는지 몰라도 이곳은 게임 세계. 다소의 기행 정도는 너그럽게 이해해주는 세계니까 말이다.

언젠가 들은 얘기인데 여성들 중에서도 남자 못지않게 변태성 투철한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남자든 여자든 결국엔 같은 사람인데 여자들 사이에서 변태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나나의 개성을 이해해주기로 했다. 솔직히 지나가는 사람한테 대놓고 추파 던졌을 땐 좀 놀랐지만 어느 정도 선만 지킨다면 문제될 건 없겠지.

“그나저나 나나야. 모처럼 온 대 도신데 뭐 해보고 싶은 거 없어?”

“네? 해보고 싶은 거라뇨?”

마침 건강미 넘치는 아마조네스를 발견한 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까스로 두 번째 추행을 막은 나는 내심 안도하면서 그녀에게 설명했다.

“관광하는 기분으로 잠깐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시간도 넉넉하고 이 동네 지리도 익혀둘 필요가 있거든.”

현재 시각은 대충 오전 11시경. 모험을 떠나기엔 상당히 애매한 시간이다.

원작 게임에선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모험가 등록을 한 뒤 퀘스트를 받곤 했지만 게임 세계에선 그렇게 막무가내로 진행할 수 없을 거다.

내가 가진 빈약한 정보에 따르면 중세 시대의 성문은 낮에만 개방되고 밤에는 굳게 닫힌다고 한다.

아직 정오도 안 됐으니 이 주변에 있는 던전 정도는 시간 맞춰 클리어할 수 있겠으나 모종의 이유로 클리어가 지체된다면 영락없이 성문 밖에서 하룻밤을 보내야할 거다.

어제 하루 종일 산행을 한 탓에 나도, 나나도 많이 지쳐 있다. 힘겨운 모험을 끝낸 참이니 오늘만큼은 침대 위에서 자고 싶다. 그러려면 숙소를 쓸 여관도 구해야겠지.

이러한 이유로 지금 당장 모험을 떠나는 건 무리다. 그러니 오늘 하루는 휴일 삼아 편히 지내기로 했다. 나나에게 데이트를 제안한 건 그 일환이다.

“도시에 오면 이것저것 해야 되는 거 아니었나요? 저 때문에 다키님 일정 미루실 필요는 없어요!”

내 제안에 나나는 부담감을 느낀 듯 손사래를 쳤다. 내가 본인을 배려하느라 내 할 일을 못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나를 배려한 건 맞지만 나 또한 쉬고 싶어서 여유를 부리는 거다. 나는 그 사실을 담담하게 전했다.

“난 이쪽에 온 이후로 허구한 날 싸우기만 했다고. 도시까지 와서 바쁘게 돌아다닐 생각 없어.”

“아, 그러고 보니 다키님은 저랑 만나기 전에도 막 괴물들이랑 싸우고 다녔다고 하셨죠?”

“그래. 그러니까 오늘 하루 정도는 느긋하게 쉴 거야. 쉬는 김에 나나랑 같이 구경 다니면 더 좋고.”

그리 말하며 나는 은근슬쩍 나나의 손을 잡았다.

원래 세계의 나라면 절대 못할 일이지만 나는 요 며칠 간의 경험으로 자신감을 얻었다.

하물며 나나와는 사이좋게 몸까지 섞은 사이 아닌가. 그녀와 더 친밀한 관계가 되기 위해 이 정도 노력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앗…….”

맞닿은 손을 보고 나나가 살짝 놀랐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곧 양쪽 뺨을 발그레 물들이며 미소 지었다.

“헤헤…… 좋아요……. 그러면 다키님이 가고 싶은 데로 데려가 주세요.”

“응? 그래도 괜찮겠어? 예쁜 언니들 많은 데로 데려가 달라할 줄 알았는데.”

“슬쩍 훑어봤는데 여긴 어딜 가도 예쁜 언니들 천지일 것 같더라구요! 뭐가 있는지도 모르니까 지금은 다키님에게 맡기겠습니다!”

확실히 난생 처음 서울을 와본 외국인한테 어디 가고 싶어? 라고 물어보면 쉽게 대답하지 못할 거다.

나나도 그와 비슷한 입장이리라. 게임에 관해서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딜 가야 좋을지도 전혀 모르겠지.

그런 나나를 위해서 나는 좋은 데이트 코스가 없을까 고민했다. 허나 연애 경험은커녕 여자랑 말도 별로 못 나눠본 나였기에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 일단 밥부터 먹으러 갈까? 슬슬 점심시간 같은데.”

“좋네요! 저도 마침 배고프려던 참이었거든요! 판타지 세계 식당이 어떻게 생겼을지도 궁금하고요.”

오늘 아침 우리는 육표 몇 조각에다 황근과 서너 개밖에 먹지 못했다. 헤베가 만든 도시락은 진즉에 다 먹어버렸고 산길에 구할 수 있는 식량이라곤 그런 것들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도 도시에 들어온 후부터 배가 고파졌다. 큰길로 접어들수록 맛있는 냄새가 나서 금세 식욕이 돋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식당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제대로 된 식당들은 전부 번화가 쪽에 몰려 있는지 근처에선 괜찮은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처음 접어든 길도 일단 큰길이긴 했지만 식당가라기 보단 공업단지 같은 느낌이 강했다.

“여기도 전체적인 구조는 게임이랑 똑같나 보네. 여기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되겠다.”

“역시 다키님! 고인물답게 마을 지리 같은 건 다 외우고 계시는군요! 안심이 돼요!”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데 뭘. 이 동네에서만 몇 천 시간 돌아다녔으니 다 외울 만도 하지.”

나나의 칭찬 일색에 나는 멋쩍게 대답했다.

실제로 율리아나는 유저들의 수도라 불릴 만큼 유저의 왕래가 잦은 곳이다.

위치부터 다른 곳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각종 편의 시설도 몰려 있어서 거점으로 삼기 좋다. 온라인 매칭을 하다 보면 과반수의 유저들이 율리아나에 모여 있을 정도다.

그런 장소이다 보니 길을 외우게 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애당초 그리 복잡한 동네도 아니어서 나나도 게임을 좀 플레이했었다면 금세 외웠을 거다.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어느덧 번화가로 접어들었다.

어딜 보나 판타지 세계의 주민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상인으로 보이는 사람부터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모험가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가 혼잡한 거리로 섞여 들어갈 무렵이었다.

“뭐, 뭐야 저 사람……? 팬티 밖에 안 입고 다니고……”

“거진가……?”

문득 말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쫓아 눈을 흘기자 한 무리의 여성들이 나를 보며 이야길 나누고 있었다.

나름 속닥속닥 말하는 것 같았지만 내 귀에는 다 들렸다.

중학교 때부터 여학생들에게 ‘저거 네 남친 아니냐’는 식으로 놀림 받아온 나였기에 내 뒷담화할 때는 이상할 정도로 귀가 밝아진다.

올 게 왔구나. 여성들의 뒷담을 들으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비단 저 여자들만 날 보고 있는 게 아니다. 이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 차림새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졸지에 수치 플레이에 끌려 나온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이 날 바라보며 뭐라 중얼거릴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학창 시절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내가 바싹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거지치곤 너무 곱상하게 생겼는데…… 저렇게 잘생긴 거지가 있다고?”

“피부 완전 하얘…… 저렇게 피부 예쁜 남자는 난생 처음 봐……!”

“복근도 좀 봐봐……! 엄청 섹시하지 않아……?!”

경악스러운 시선 사이에 담긴 것은 모멸이나 혐오 같은 게 아니었다.

물론 남성들은 대개 그런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여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방금 전의 여성들처럼 동경어린 시선을 보내면서 얼굴을 붉히는 것이었다.

“모험갈까? 칼 차고 다니는 거 보면 그럴 것 같은데.”

“얘는, 저렇게 다니는 모험가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어? 틀림없이 남신님일 거라고.”

“확실히 얼굴도 엄청 잘 생기셨고, 뭔가 신기한 느낌도 나고…….”

급기야 일부 여성들은 날 도시에 방문한 남신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가디스 던전 세계관에선 신이 도시를 활보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기에 그런 착각을 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남신으로 오해받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내 캐릭터가 꽤나 곱상한 외모긴 하지만 팬티 하나만 입은 차림 때문에 다 묻힐 줄 알았다.

‘이게 다 검은 산양의 뿔 때문인가?’

처음 효과를 읽었을 땐 반신반의 했지만 여성들의 반응을 보면 틀린 것 같지도 않았다.

어색하게 정면만 직시하던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내 얘기를 하는 여성들을 바라보았다.

“앗……!”

“야, 야……! 너무 큰소리로 얘기했잖아……!”

“어떡해……! 이쪽 보고 계셔……!”

날 남신이라고 착각한 그룹이었다. 인간, 수인, 님프 등 다양한 종족으로 이루어진 무리였는데 다들 무기를 착용하고 있는 걸 보면 모험가들인 모양이다.

그런 그녀들과 눈을 마주친 나는 순간 어떻게 반응할지 고민했다. 물론 이번에도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천성 찐인 내가 저들에게 가서 뭐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나는 여성향 애니의 남주들처럼 슬쩍 웃어 넘겼다.

“……!!”

“꺄아아……!”

“우리 보고 웃었어……!”

내가 한 차례 웃어주자 여성 모험가들은 화들짝 놀라면서 비명을 질렀다.

너무 멀뚱히 웃고만 있으면 이상할 것 같아서 얼른 고개를 돌려 제 갈 길을 갔다. 그러는 도중 다른 여성들의 반응을 살폈는데 여성 모험가들을 은근히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녀들의 반응을 보고 난 깨달았다.

‘아아…… 이게 잘생김이란 건가…….’

원래 세계의 내 얼굴도 못 생긴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당시 내 키는 165센티미터 밖에 안 됐고 어깨도 좁아서 별로 멋있는 인상은 아니었다.

그에 반해 지금의 나는 키가 180센티미터를 아득히 넘고 전신이 균형 잡힌 근육질로 이루어져 있다. 그뿐이랴. 피부도 관리 받은 연예인들 못지않게 좋다.

그런 남자가 반라의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처음에는 수치 플레이도 이만한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건 여성들에게 엄청난 눈호강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난 천연 페로몬이나 다름없는 검은 산양의 뿔까지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 모든 게 합쳐져 나란 남자의 등장은 존잘남의 스트립쇼가 된 것이다.

‘근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괴감 드네…….’

처음에는 여자들이 날 보면서 얼굴을 붉히는 게 썩 나쁘지 않았지만 진지하게 돌이켜보니 지금 내 모습이 얼마나 추한지 알게 됐다.

반라인 채로 돌아다니며 여성들의 눈요깃거리가 되다니. 이래서야 내가 진짜 창남이 된 것 같지 않은가.

“아주 그냥 웃긴 년들이네요……! 자기들도 벗을 만큼 벗었으면서 남말이나 하고 말이에요! 팬티 벗고 혼내주도록 하죠, 다키님!”

“아니 넌 또 무슨 소리야…….”

“어이없는 건 맞잖아요! 다키님이 팬티 한 장 입은 거나, 쟤네들이 찌찌 다 내놓고 다니는 거나 거기서 거긴데 다키님만 스트립쇼 하는 창남처럼 보고! 용서할 수 없어욧!”

내가 자괴감을 느끼고 있을 무렵 나나가 분개하며 소리쳤다.

귀가 좋은 그녀도 다른 사람들의 속닥거림을 다 들었을 거다. 이 세계의 문화를 모르는 그녀 입장에선 상당히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나나의 말대로 날 보며 뭐라 뭐라 떠드는 여자들은 전부 노출도 높은 복장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했듯이 가디스 던전은 씹덕들을 겨냥하여 만든 남성향 게임이다.

그런류의 게임들이 다 그렇듯 여성 NPC들의 노출도가 상당하다. 이는 헤베나 브릴린트 같은 주연급 캐릭터에게만 국한된 패션이 아니라 평범한 NPC들에게도 해당된다.

당장 나와 마주친 여성 모험가들도 다들 야겜에서 나올 법한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다.

단순히 가슴 부근이 파인 옷에서부터 원피스 수영복을 방불케 하는 하이레그 복장, 상의는 멀쩡한 대신 하의가 티팬티인 복장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몸매를 과시하는 것이었다.

물론 내 팬티 보다야 가리는 부분이 많긴 하지만 문란한 면에 있어선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허나 가디스 던전의 설정을 알아보면 그녀들이 왜 저런 옷을 입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이 기억을 더듬으면서 나나에게 이야기했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 노출이라고 해서 다 같은 건 아니거든.”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다키님?”

“쉽게 말해서 속옷과 수영복의 차이라고 할까. 그 왜, 아무리 다들 반쯤 벗고 다니는 해수욕장이라고 해도 거기서 속옷만 입고 다니는 사람은 이상하게 보잖아.”

“그렇죠?”

“그거랑 같은 논리야. 이 도시는 해수욕장이고 저 사람들이 입은 옷은 수영복 같은 거지. 내 팬티랑 다르게 때와 장소에 맞는 옷이란 거야.”

내 설명에 나나가 심오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우주의 진리라도 깨달은 것처럼 진지한 얼굴을 하던 그녀는 무언가를 발견하곤 다급히 날 불렀다.

“다키님, 다키님! 그러면 저기 있는 박음직, 아니, 바람직한 차림을 한 언니도 같은 논리인 건가요?!”

그녀가 가리킨 곳에선 웬 여성이 비키니 수영복만 걸친 채 대로를 걷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나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방방 뛰어댔다.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반응에 황당해하면서도 나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래, 저건 비키니 아머라는 방어군데 이쪽 세계에선 꽤 흔해. 아마 광장에 가면 저렇게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한 무더기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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