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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성벽 율리아나
이 질문 받아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가끔 뉴비들이 설정 관련으로 질문할 때 종종 대답해주곤 했었는데.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을 되짚으며 나나에게 설명해줬다.
“이 동네 종교가 현실의 종교랑 좀 다르거든. 보통 종교라 하면 하나님이나 부처님처럼 신적인 존재를 믿고 그러잖아?”
“그렇죠?”
“그런데 여기는 그런 신적인 존재 보다단 진리나 섭리 같은 걸 믿거든. 네가 속한 광휘의 대신전만 해도 창조신 보단 내면의 빛을 숭배하는 편이고.”
종교 세력과 지배신들 사이에 마찰이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장 광휘의 대신전을 예로 들면 그쪽 종교인들은 이 세상의 창조주가 라이트원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라이트원에 대한 신앙은 그리 깊지 않다.
그들이 실질적으로 숭배하는 것은 라이트원이 이 세계를 떠날 때 인간의 내면에 남겨두었다고 하는 빛이다.
이 빛이라는 건 인간의 정의감, 이타심, 선한 면모 등을 뭉뚱그려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 숭배 대상이라고 말하기도 뭐한다.
대신전의 종교인들은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지키고 살아가면 내면의 빛이 각성하여 인간들도 라이트원처럼 선하고 강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지배신들도 그게 딱히 틀린 말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무엇보다 내면의 빛을 믿는다고 해서 자신들을 숭배하지 않는 건 또 아니기 때문에 대신전의 종교인들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다른 두 종교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믿는 진리, 섭리 등은 지배신들도 모두 인정하는 것. 그렇기에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고 서로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흠흠! 이러나저러나 이 세계에선 종교인이 짱이라는 거네요! 대신전 말고 다른 두 종교는 뭐예요?”
“진리의 성화 교단이랑 명륜교. 각각 기독교랑 불교를 모티브로 만들었대. 말했듯이 현실의 종교들이랑은 차이가 꽤 크지만.”
“명륜교라니……! 뭔가 무한으로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이름이네요……!”
저 드립 꼭 칠 줄 알았지.
잠깐 종교 관련 이야기로 넘어갔던 나는 다시금 본론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나나 넌 그런 대단한 단체에 소속된 입장이라 웬만한 도시는 마음대로 오갈 수 있어. 그에 비해 나는 연고도 모르고, 팬티 한 장만 입은 이상한 놈이라 쉽게 안 들여보내주겠지.”
“그러면 어떡해요? 뇌물 공세라도 해야 될까요?”
“뭐, 그럴 수도 있긴 한데…….”
원작 게임에서 대 도시에 들어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신분증을 제시하는 것. 추방자 이외의 다른 신분들은 저마다 신분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특별히 범죄를 저지르거나 하지 않았다면 문제없이 입성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통행세를 지불하는 건데, 솔직히 별로 쓰고 싶지 않는 방법이다.
“뇌물 내고 들어가면 뭐 안 좋은 거라도 있어요? 후환이 나쁘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가격이 좀 세. 경비병 새끼들이 한 사람당 5천 아웬이나 요구하거든.”
“5천이요? 잠깐만…… 여기 돈은 원화에 0 두 개 더 붙인 정도라고 했으니까…… 50만원?!”
아웬의 가치를 계산한 나나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아니 무슨 통행세로 50만원이나 받아 처먹어요!? 이건 그냥 들어오지 말란 소리잖아요!”
나도 나나와 같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가디스 던전의 세계는 생각 보다 냉정하고 특히 추방자 신분에겐 더더욱 그렇다.
“원래는 2천 아웬 정도라고 하는데 경비병들이 더 떼먹는 거래. 추방자 입장에선 달리 방도가 없으니 이 악물고 5천 아웬 모아서 들어가는 거지.”
추방자 신분이 괜히 하드모드인 게 아니다.
튜토리얼도 튜토리얼이지만 추방자라는 이유만으로 게임 전반에 걸쳐서 여러 불이익들이 뒤따르는 것이다.
물론 마신들의 힘을 얻을 경우 후반에 갈수록 이러한 불이익이 있는 둥 마는 둥 되어버리지만 당분간은 이런 신세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안 되겠네요……! 저도 이러고 싶지는 않지만 극단적인 방법을 쓰는 수밖에요!”
“극단적인 방법이라니…… 뭘 하려고?”
주먹을 부르쥐며 말하는 걸 보니 뭔가 비장한 결심을 한 모양이다. 내가 질문하자 나나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대답했다.
“제가 커마만 3시간 걸린 이 캐릭터로 경비병 새끼들은 유혹하겠어요! 사제가 좋은 거 보여주면서 비키라 하면 마지못해 비켜주겠죠!”
“아니, 아니…… 그것 보다 더 좋은 방법 있으니까 제발 그러지 마…….”
치마를 살짝 들추며 말하는 나나.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한사코 제지했다.
경비병들을 유혹하면 성 안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외간 남자들에게 나나를 파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대신전의 위상이 있어서 경비병들도 나나를 함부로 대하진 못하겠지만 크나큰 수치심이 동반하는 일 아닌가.
나나하곤 딱히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아직 원나잇 한 번한 사이일 뿐이지만 나랑 애정을 나눈 그녀가 날 위해 몸을 바치는 광경은 보고 싶지 않다.
만에 하나 경비병들이 나나에게 더러운 손길을 뻗는다면 난 거짓말 안 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칼을 뽑을지도 모른다.
“앗, 방법이 있으셨으면 진즉에 말해주셨어야죠~ 전 또 다키님이 그대로 입구 컷 당하는 줄 알았잖아요!”
내 제지에 나나도 순순히 생각을 바꿨다. 매사에 고분고분한 성격이 이럴 때는 참 좋았다.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내 계획을 이야기했다.
“일단 율리아나 내부로 들어가는 방법은 성문만이 아니야.”
“어디 샛길이라도 있나 봐요?”
“그렇지. 거기로 가면 돈 뜯길 일 없이 편하게 들어갈 수 있어. 따라와 봐.”
그렇게 말할 때쯤 우리는 어느덧 성문에 다다랐다.
성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을 줄을 잇고 있었는데 다들 검문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맨 앞줄은 성문과 이어져 있었고 경비병들이 방문자들의 신원과 소지품을 확인하고 있었다.
“뭔가 존나 대충하는 거 같네요. 소지품 검사도 만지작거리는 시늉만 하고.”
“아무래도 진짜 위험한 사람들은 바로 티가 나니까 그렇겠지. 저것도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걸 거야.”
“진짜 위험한 사람이랑 가짜 위험한 사람은 어떻게 구분하는데요?”
멀리 떨어져서 성문을 살펴보던 도중 나나가 질문했다. 나는 경비병들 주위에 설치되어 있는 기둥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마 저 기둥이 사람들의 카르마 수치를 측정해줄 거야. 기본적으로 범죄를 저질렀거나 그럴 의향이 있는 NPC는 카르마 수치가 높게 측정되거든. 그런 사람들만 걸러내도 충분히 안전한 거겠지.”
“와, 뭔가 사이코패스 같네요.”
“여기서 사이코패스가 왜 나와……?”
뜬금없는 단어 선정에 의아해하자 나나는 그런 제목의 애니가 있다고 대답했다. 사이코패스라고 해서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반사회적 인물을 말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잠시 성문을 구경한 우리는 외벽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비현실적으로 새하얀 성벽은 일말의 균열도 없이 매끈했다. 벽돌은커녕 그와 비슷한 재질도 아닌 모양이다.
이것만 보면 들어갈 구멍 하나 없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처럼 보이겠지만 마냥 그런 것도 아니다.
한동안 외벽을 따라 걷기를 잠시, 나는 익숙한 광경을 목격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도착했어.”
“네? 여기가요? 아무 것도 없는데요?”
나와 다르게 나나는 이변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다. 그런 나나를 조금 물러나게 한 뒤 나는 쾌도를 뽑아들었다.
촤아악!
깔끔한 검선을 그으며 벽을 베자 곧 새하얀 벽 중 일부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 대 도시 보안 수준 실화냐?!”
나나가 놀라는 사이에 벽 너머에 있는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둡고 깊은 터널이었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 같았으며 내부에선 발광석 조명이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던에는 환영벽으로 숨겨진 길이 꽤 많아. 여기도 그 중 하나고.”
“왕국의 제 2 수도라는 곳의 보안이 이 모양이라니! 유르돌리아라는 나라도 참 말세인가 보네요!”
확실히 나나 말대로 성벽에 뚫려 있는 구멍은 좀 작위적이긴 했다. 게임에서나 허용될 법한 구조라고 할까. 별로 현실적으로 와 닿지는 않았다.
“뭐, 여기에도 나름 복잡한 사연이 있겠지.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졌는데 오래 방치하다 보니 다들 잊어버렸다거나.”
실제로 환영벽과 관련된 설정 중에는 그런 게 많다.
환영벽은 기원전쟁 당시에 많이 사용했던 기술이다. 그렇게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비밀 구조가 오늘 날엔 잊혀서 끝내 방치된다고 한다.
“하긴 뭐, 게임에 이런 비밀 통로 하나 있는 것쯤은 별로 이상하지도 않죠! 다키님 같은 부랑자들도 들어갈 구멍은 있어야 될 테니까요!”
그리하여 우리는 비밀 통로를 지나 도시 안까지 들어갔다.
비록 어둡고 축축한 터널이었지만 안을 오가는 동안엔 아무 일도 없었다.
환영벽도 우리가 들어오자마자 다시 생성됐고 동물들조차 들어오지 못한 건지 쥐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어두운 터널을 걷길 잠시, 우리는 이윽고 맞은편에 다다를 수 있었다. 축축한 터널은 시냇물과 이어져 있었으며 출구 앞에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어때 나나야? 사람 소리 들려?”
“으음…… 아무래도 다리 주위에는 없는 것 같아요. 전부 멀리서 들리는 소리예요.”
“좋아, 나가자.”
환영벽은 밖에선 안이 보이진 않지만 안에선 밖이 보이는 구조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위에 인기척이 없는지 최대한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터널을 빠져나왔다. 괜히 사람들 눈에 띄거나 경비병들에게 발각당하면 골치 아파질 테니까 말이다.
다행히 나나 말대로 다리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시냇물이 흐른 소리와 새들의 울음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도시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긴장해야 된다니. 가디스 던전은 의외로 쫄깃한 게임이네요!”
“미안해. 내가 추방자 신분만 고르지 않았으면 이런 개고생은 안 했을 텐데.”
“에이 뭘 사과하고 그러세요~ 잠입물 찍는 것 같아서 재밌는데요 뭐~”
다리 위로 올라올 무렵 나나가 그런 태평한 감상을 내놓았다.
그녀 딴에는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로선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목조 건물 사이를 지난 우리는 이내 큰길이라고 할 만한 곳에 접어들었다.
“오오오……!”
역시 나나는 이번에도 탄성을 흘렸다.
“저, 저기 좀 보세요, 다키님! 엘프예요……! 진짜 찐엘프가 돌아다니고 있어요!”
그녀가 놀란 이유는 바로 거리를 활보하는 행인들 때문이었다.
판타지 세계관이어서 그런지 가디스 던전에는 수많은 종족들이 있다. 엘프나 드워프 같은 클래식한 것에서부터 수인처럼 오타쿠 애니에서나 나올 법한 종족도 있는 것이다.
율리아나는 종족간의 차별이 심하지 않아서 여러 종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나가 가리킨 미모의 엘프 여성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아니 근데 너도 엘프잖아…….”
“제가 엘프인 거랑 남이 엘프인 걸 보는 건 또 다르다구요! 보는 맛이 있단 말이에요! 언니 나 죽어어!”
“…….”
뭐지. 순간 나나가 웬 변태 오타쿠 새끼랑 겹쳐 보인 것 같은데.
처음엔 장난으로 그러는 줄 알았지만 나나는 진짜 거리를 지나는 엘프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훤히 드러난 허벅지나 출렁이는 가슴에 시선을 꽂았다. 거기에 숨을 헐떡거리고 얼굴까지 붉히는 게 영락없는 변태였다.
“하아, 하아……! 언니 찌찌 존나 말랑말랑할 것 같아……! 저기에 코 박고 죽어버리고 싶어요……!”
“야, 야……! 예의 없이 무슨 짓이야……! 찐따처럼 왜 그래?!”
“킹치만 찐깐프의 말랑 찌찌라구요! 이건 못 참는단 말이에요!”
노골적이기 그지없는 추행에 나는 황급히 나나를 말렸다.
하지만 너무 대놓고 훔쳐본 걸까. 내가 제지하기도 전에 상대방이 나나의 시선을 눈치 챘다.
“응?”
“앗!”
“아……!”
길을 지나던 엘프녀와 눈을 마주쳤다.
식겁한 나는 뭐라고 변명해야할지 궁리했으나 나나는 일말의 부끄러움 없이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예쁜 깐프 언니 안녕~!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나라면 상상조차 못할 행동에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하지만 엘프 누님은 그런 나나를 보며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도 손을 흔들어줬다.
“후후훗.”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은 엘프 누님은 자기 갈 길을 갔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고 나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엘프 누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장담컨대 분명 엉덩이를 감상하는 것이리라.
뭐지? 방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거기까지 생각한 난 뒤늦게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원작 게임의 엘프들은 어떤 종족과도 조화롭게 지낼 수 있는 포용심 강한 종족으로 묘사된다.
그녀들은 오크들의 강렬한 성욕도, 드워프들의 깐깐한 성격도 드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 줄 수 있다.
실제로 인게임에선 플레이어가 어떤 짓을 해도 도가 지나치지 않으면 웃어넘기곤 한다. 갑작스러운 희롱에도 사근사근하게 반응해줬던 건 이러한 설정 때문이리라.
“히야…… 빵댕이 죽이네…….”
“…….”
애초에 내가 당황한 이유는 엘프 누님 때문이 아니다.
다른 여자를 보자마자 180도 돌변해버린 나나야 말로 날 당혹스럽게 만든 이유였다.
“벽에 기대게 해서 엉덩이 존나 때리고 싶네요! 그죠 다키님?”
“어, 어어……. 그, 그래…….”
너무나 적나라한 질문에 나는 무어라 항의할 수 없었다.
얼떨결에 대답하는 나를 뒤로 하고 나나는 주위에 다른 예쁜 여자가 없는지 물색하듯 둘러봤다. 그런 나나를 보면서 난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얘 진짜 정체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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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엘프 빵댕이 마구 때려주고 싶네요. 참고로 가디스 던전 세계관의 엘프는 전원 여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