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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성벽 율리아나
“물론입니다……! 퀀케니스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밀리아의 대답에는 일말의 고민도 없었다.
비록 조사대원은 아니지만 사람을 찾는 것에는 도가 텄다. 6년간의 모험가 생활은 허투루 보낸 게 아니다.
얼굴과 목소리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 거기에 이동경로까지 파악됐다면 그를 찾는 건 시간문제이리라.
“그러면 결정됐군. 좋은 성과가 있기를 바라지.”
“퀀케니스 양 혼자 찾는 건 힘들 수도 있으니 조사대원을 한 명 붙여드릴게요. 당신하고도 면식이 깊다고 하니 임무 수행하는데 더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격려하는 로스리아 곁에서 참모가 덧붙였다.
밀리아가 사람을 찾는 것에 능숙하다고 해도 현역 조사대원 보다는 부족하다. 그런 밀리아가 실력 있는 대원과 함께 한다면 임무의 효율은 더욱 높아질 거다.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따로 필요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얘기하도록.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지원해주마.”
로스리아의 든든한 말을 들으면서 밀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인사를 건넨 그녀는 이내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그녀의 어깨에선 일반 기사의 망토가 바람을 타고 펄럭였다.
그때마다 자신이 강등 당했다는 사실이 되새겨졌지만 어째서인지 밀리아의 얼굴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남자와 다시 만날 수 있어.’
밀리아가 이 임무를 받아들인 이유는 사령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도, 흑마법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전부 부수적인 것일 뿐. 지금 밀리아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적인 원동력은 다름 아닌 다키였다.
반쯤 제 정신이 아닌 채로 율리아나까지 달려온 후, 밀리아는 줄곧 다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대체 누구였을까. 뭐하는 사람이기에 단신으로 대악마를 쓰러뜨릴 수 있었던 거지?
특별한 무장 같은 없었다. 그가 가진 거라곤 치부를 가리는 팬티 한 장과 녹슬고 부러진 검 한 자루 뿐.
싸우는 과정을 못 봤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는 아마 그렇게 볼품없는 차림새로 아크 데몬을 쓰러뜨렸을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밀리아는 남자를 향한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 명의 기사이자 무인으로서 강함을 동경해왔다. 그런 그녀가 다키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 남자, 날 도와주려고 했고…….’
피칠갑된 몰골과 난데없이 솟아오른 육봉 때문에 무심코 도망치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자신을 도와주려 했다.
자신을 겁탈할 의사가 있었다면 진즉에 옷을 벗기고 자신의 육체를 탐했으리라.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그에게 악의가 없었다는 뜻이겠지.
어쩌면 발기한 육봉은 생리적인 현상일 뿐, 그에겐 자신을 돕고자 하는 선의만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남자한테 꼭 묻고 싶어……. 어떻게 하면 그렇게 강해질 수 있는지, 어떻게 혼자서 대악마를 쓰러뜨릴 수 있었는지…….’
밀리아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으나 다키를 향한 그녀의 감정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이성을 향한 관심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에 대한 증거로 다키에 관해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허나 연애와 담을 쌓고 지내온 밀리아로선 이것이 연애 감정이란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복도를 지날 무렵이었다.
“이야, 우리 꼬마 아가씨 웬일이야? 연애 소설 주인공처럼 얼굴을 다 발그레 붉히고. 누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어?”
“뭐……?”
꼬마라는 말에 발끈하여 고개를 돌린 밀리아.
그녀는 조건 반사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고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당장 쥐어박겠다는 듯이 눈을 부라렸다.
허나 그녀의 앙증맞은 주먹에선 곧 힘이 풀렸다. 자신을 놀린 누군가가 때릴 만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루시아……?”
“안녕, 안녕~”
모퉁이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웬 젊은 여기사였다.
성화 교단의 문장이 들어가 있는 후드 망토를 걸치고 석궁으로 무장한 조사대원.
밀리아처럼 붉은 빛이 도는 머리카락을 가졌지만 다홍색에 가까운 밀리아와는 다르게 그녀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와인색에 가까웠다.
그녀의 이름은 루시아 디아닌. 밀리아의 입단 동기 중 한 명으로 평민 출신의 일반 기사다.
그녀와 알고 지낸지는 벌써 8년째이며 수습 기사, 일반 기사 시절에는 몇 년이나 같은 숙소를 사용하기도 했다.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의 등장에 밀리아는 금세 화색이 되었다. 놀림 받은 것도 까맣게 잊은 밀리아는 신이 난 채로 루시아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디안느 영지 쪽으로 배정된 거 아니었어?”
140센티미터 언저리인 밀리아와 다르게 루시아는 무려 170센티미터나 되는 장신이었다.
그래서인지 밀리아는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들어야 했고 그런 동기를 배려하듯 루시아가 허리를 숙이며 이야기했다.
“밀리아 넌 정신없어서 못 들었겠구나. 이번에 지방 사령관님이 다른 영지에 있는 단원들한테 소집 명령 내렸거든. 나도 그것 때문에 여기 온 거야.”
“아…… 하긴…… 그렇게 큰일이 벌어졌으니 인원이 부족할 만하지…….”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성기사들이 워록의 행방을 좇기 위해서 율리아나 인근을 샅샅이 수색하고 있을 것이다.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디안느 영지에서 루시아가 파견된 이유도 부족한 일손을 채우기 위해서이리라.
“어? 그러면 혹시 나랑 동행할 조사대원이 너야?”
옛 친구와의 재회에 기뻐하길 잠시, 밀리아는 그녀가 자신에게 찾아온 이유를 직감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시아는 시원스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맞아, 여기 오자마자 사령관님이 따로 부르시더라고. 네 친구가 이런저런 일을 겪어서 심란할 테니 곁에서 잘 챙겨주라 하셨어.”
“그렇구나…… 사령관님이 날 신경 써주셔서…….”
새삼 로스리아의 배려에 감격했다. 괜히 명망 높은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할 무렵, 문득 루시아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나저나 밀리아 너 13부대에서 혼자 살아남았다며. 그런 일이 있었는데 바로 나가도 괜찮겠어?”
오래 사귀어온 친구인 만큼 루시아는 밀리아의 상태가 걱정되는 듯했다.
하루아침에 동료들을 전부 잃고 자신마저 죽을 뻔했다. 거기에 강등이라는 불명예까지 얻었으니 심신이 말도 못할 정도로 지쳤으리라.
이 상태로 임무를 수행하는 건 역시 무리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루시아였지만 밀리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물론 괜찮아. 괜찮지 않아도 나갈 거야. 내가 부족해서 주민들도, 동료들도 전부 희생됐어.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절대 쉴 수 없다고.”
밀리아의 입가에는 어느덧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꿋꿋함을 가장한 그녀였으나 루시아는 그 너머에 있는 상처를 엿볼 수 있었다.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루시아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사람 하나 찾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야. 굳이 둘이서 갈 필요 없어. 그런데 이렇게 말해도 넌 절대 말 안 들어먹을 거지?”
“당연하지. 아니면 내가 방에서 질질 짜고 있길 바란 거야?”
“후후, 어련하시겠어.”
결국 설득하는 걸 포기한 루시아는 밀리아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동료의 결연한 의지에 감탄하길 잠시, 루시아는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장난스럽게 질문한다.
“그나저나 아깐 왜 그렇게 실실 쪼갠 거야?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어?”
“뭐, 뭔 헛소리야 이 시국에……. 강등당한 마당에 잘도 남자 생각이 나겠다!”
“그렇지만 방금 너 완전 사랑에 빠진 소녀 같았다고~ 얼굴 빨개져서 헤헤헤 웃고 있는데 어떻게 의심 안 할 수가 있겠어?”
정곡을 찔린 것처럼 홍조를 띄우는 밀리아. 그 모습을 본 루시아는 계속해서 그녀의 본심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보자, 후보가 누가 있을까~ 으으음~ 아무리 생각해도 대악마를 단신으로 쓰러뜨렸다는 그 전설의 용사님 같은데, 내 말이 맞지 밀리아?”
“……! 뭐, 뭐래! 아니거든?! 내가 그 남자를 찾으려는 이유는 순전히 사령관님 명령이 있어서야! 개인적으로 보고 싶다거나, 얘기하고 싶다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라고!”
능구렁이 같은 질문 속에서 밀리아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강하게 부정할수록 속내가 훤히 보인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 어떤 면으론 참 순진한 절친을 보며 루시아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냥 장난삼아 해본 소리야. 우리 퀀케니스 가문의 귀~ 한 둘째 따님께서 외간 남자 생각이나 할 리 없지~ 암, 그렇고말고~”
어깨를 톡톡 치면서 능글맞게 이야기하는 루시아. 이걸로 좀 진정하겠거니 했지만 밀리아는 예상외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 그렇지…… 난 고결한 성기사니까……. 나, 남자 생각 같은 건 전혀 안 했어……!”
“…….”
정말 보면 볼수록 알기 쉬운 녀석이다. 루시아는 내심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밀리아를 안내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율리아나의 서쪽 관문. 다키가 신령이 다니는 길을 지나 하산했다면 분명 그쪽을 통해 진입하리라.
관문 주위를 수색하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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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아!”
나나가 감탄을 터뜨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푸른색 꽃이 흐드러지게 핀 초원이 있었다.
이곳의 이름은 루센 초원.
신령이 다니는 길을 내려오자마자 바로 보이는 드넓은 평지이며 신령이 다니는 길과 율리아나 사이를 잇는 길목이기도 하다.
“저것 보세요, 다키님! 엄청 큰 성이에요! 완전 게임에 나오는 성 같아요!”
“그야 그렇겠지. 실제로 게임에서 나왔던 성이니까.”
감탄을 금치 못하는 나나를 보면서 나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사실 나도 그녀 못지않게 들뜬 상태다.
아름다운 꽃밭 너머로 보이는 새하얀 성벽과 그보다 더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산맥들. 이것이야 말로 판타지 세계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광경에 나는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때마침 기분 좋은 봄바람이 불어 푸른색 꽃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그로 인해 수많은 꽃잎들이 바람을 타고 흩날렸고 안 그래도 멋들어진 광경이 한층 더 절경이 되었다.
누차 얘기하지만 가디스 던전이 연출이랑 맵 하나는 잘 만들었다.
원작 게임에서도 율리아나에 처음 도달하는 장면은 유저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되는 명장면 중 하나였다. 게임 트레일러에서도 쓰였으며 유저들을 낚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물론 예쁜 배경과 그래픽을 보고 접한 유저들은 차고 넘치는 버그들 때문에 대부분 접었지만.
“저기가 그 율리아나로군요! 대 도시 아니랄까봐 진짜 좆되게 크네요!”
빛나는 성벽 율리아나. 유르돌리아 왕국에선 수도 다음 가는 대 도시로 그 이름답게 휘황찬란하기 그지없는 도시다.
성벽은 어찌나 크고 높은지 수 백 미터 떨어진 이곳에서도 뚜렷하게 보일 정도였으며 특유의 새하얀 표면에 햇빛이 반사되어 정말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면 더 굉장할 거야. 해외여행이라도 온 기분일걸?”
나나 말에 맞장구치면서 나는 성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넋을 잃고 구경하던 나나도 곧 내 곁에 따라붙었다.
그렇게 꽃향기가 가득한 초원을 걷길 잠시, 나나가 불현 듯 심려어린 기색으로 말했다.
“그런데 말이에요 다키님.”
“응? 왜?”
“보통 저렇게 큰 도시에 가면 들어가기 전에 검문 같은 거 하지 않아요? 우리 같은 사람을 그냥 들여보내 줄까요?”
나나의 시선이 내 몸을 한 차례 훑었다. 나 역시 스스로의 몰골을 내려다보면서 그녀의 말에 긍정했다.
“넌 몰라도 난 좀 힘들겠지. 나나 넌 누가 봐도 광휘의 대신전 소속 사제니까.”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속한 종교가 그쪽이라고 하셨죠? 그렇게 대단한 종교예요? 대 도시 검문도 프리 패스할 만큼?”
돌이켜 보면 나나는 가디스 던전의 세계관이나 그와 관련된 설정을 전혀 모른다.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자신이 어떤 종교에 속해 있는지 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나나가 들고 있는 홀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디스 던전 세계에는 크게 세 가지 종교가 있어. 얘들을 한 데 묶어서 3대 종교라고 하는데, 세계 각지에서 엄청 큰 영향력을 가졌다고 해. 왕이나 영주, 심지어는 지배신들조차 종교인은 함부로 못 건드릴 정도지.”
“지배신은 또 뭐예요?”
“쉽게 말해서 이 세상에 강림한 신들 중 아직 미치지 않은 신들이야. 현세를 지배하는 실질적인 지배자들이기도 하고.”
기원전쟁 당시 수많은 신들이 죽거나 재앙신이 됐지만 그 중에선 끝까지 살아남은 자들도 있다.
이들은 오늘 날에 이르러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권세를 얻게 됐고 이러한 모습에 빗대어 지배신이라 부르게 되었다.
종교인들은 그런 절대자들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그렇기에 대 도시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것이다.
“응? 다키님, 저 좀 의아한 게 있는데요.”
“뭔데?”
내 말을 경청하던 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현세에 진짜 신이 강림해 있는데 어떻게 종교 단체가 활개 칠 수 있는 거예요? 애초에 이 동네 신들은 숭배 받고 싶어서 안달 났다면서요. 지들 본성 때문에라도 가만히 안 놔둘 거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