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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 여기사
“그럴 수가……! 절 빌미로 교단이 누명을 쓴다니요! 사악한 마법사를 붙잡기 위해, 영지의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 성기사단에게 그 누가 누명을 씌운단 말입니까……!”
참을 수 없는 이야기에 밀리아는 분개하며 소리쳤다. 이곳이 사령관의 집무실이란 것도 까맣게 잊은 채 말이다.
비록 임무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성화 기사단은 영지와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싸웠다.
그런 자신들에게 대체 누가, 어떤 누명을 씌운단 말인가. 누명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이번 사건으로 자네스 영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주민들이 몰살당해 영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지. 하지만 그 땅의 영주는 버젓이 살아있다.”
목소리를 높이는 밀리아에게 로스리아가 냉철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영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밀리아도 간부들의 얘기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자네스의 영주가 참극의 책임을 저희에게 돌릴 거란 말씀입니까……?”
“맞아요, 자네스 영주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율리아나로 왔습니다. 그 후부터 불미스러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참모의 설명까지 들은 밀리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는 무례를 무릅쓰고 다시 한 번 질문했다.
“그 인간은 영주로서의 의무를 다 하지 않고 자기 혼자 도망쳤습니다! 영지를 수호하지 못한 책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영주 본인에게 있을 터인데 그런 그가 어찌 교단에게 책임을 묻는단 말입니까?!”
“밀리아 양 말이 맞아요……. 영지와 주민들을 수호하는 것은 영주의 의무고 이를 수행하지 못할 경우 왕명으로 처벌이 가능하죠. 허나 저희도 책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점점 흥분하는 밀리아를 진정시키듯이 참모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에 따라 밀리아도 심호흡을 하면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저희 교단은 사악한 세력들을 추적하고 벌하기 위해 왕국으로부터 많은 권한을 얻었어요. 그리고 큰 권한에는 책임도 뒤따르는 법이죠.”
참모의 말대로다. 성화 교단은 불경한 존재들을 몰아낸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특혜를 받고 있다.
종교 집단인 그들이 왕국을 들쑤시며 수사를 진행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특혜 중 하나다. 그렇게나 큰 권한을 받은 성기사단인 만큼 일이 잘못됐을 때는 책임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퀀케니스, 널 처벌하는 것으로 워록을 잡지 못하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한 부대의 부대장을 일반 기사까지 강등시키는 건 결코 가벼운 처벌이 아니지.”
참모의 말을 받아 사령관이 이야기를 이었다. 그녀의 말에 동조하면서 참모도 첨언했다.
“결론적으로 퀀케니스 양에게 징계를 내린 이유는 자네스 영주의 책임 전가를 막기 위해서였어요. 당신을 처벌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책임을 졌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거죠.”
“그런 거였군요…….”
비로소 간부들의 깊은 뜻을 이해한 밀리아는 얌전히 수긍했다. 그런 밀리아를 보며 부사령관이 상냥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비록 상태가 심각한 만큼 하루아침에 복직하는 건 무리일 걸세. 하지만 추후에 자네가 그럴 듯한 공훈을 세우면 그것을 바탕으로 다시 부대장 자리에 앉혀주지!”
“정말입니까?!”
부사령관의 말에 밀리아는 정말 그래도 되냐며 화색이 된 채 묻는다. 이에 부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였고, 로스리아 역시 확고한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우린 줄곧 네 능력을 눈 여겨봤다. 대귀족이자 명망 높은 기사 가문인 컨퀘니스의 차녀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특권을 내치며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성기사가 됐다지.”
“어디 그뿐인가요? 6년 동안 모험가 생활을 겸하며 기사학교를 수료한 것으로 모자라 차별 없는 태도로 평민 출신 기사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얻어냈죠.”
“그렇게 대단한 인재를 내치는 건 우리에게도 큰 손해인데 어찌 그럴 수 있겠나. 이번에는 일이 안 좋게 돌아갔지만 너는 역시 지휘관으로 활약해야 하는 몸이야.”
사령관과 참모의 말에 밀리아는 화색이 되었다. 허나 곧 흥분을 가라앉히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모험가 생활을 겸한 건 학비를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평민 출신 기사들을 차별 없이 대한 건 당연한 그래야하기 때문이죠. 저 자신이 다른 동기들 보다 좋은 성적을 거둔 건 사실이지만 그런 당연한 일로 치켜세워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겸허하고 올곧은 태도에 간부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평범한 귀족들에게 모험가 생활을 하라하면 치를 떨며 거절할 것이다.
하물며 그녀는 명망 높은 후작 가문의 차녀. 돈이 궁한 것도 아닌데 굳이 모험가 생활을 하며 자립하려는 모습은 기특해 보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 더해 평등한 태도로 부하들을 다루는 모습은 어지간한 귀족 자제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면모다.
과연 퀀케니스 가문의 덕망은 허울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간부들은 이야기를 잇는다.
“그러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참모, 자네스 영주의 자세한 동향이 어떻게 되지?”
“조사대원이 보고하길 율리아나의 실력 있는 모험가들을 고용해서 토벌대를 구축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성기사단과 왕국군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영지를 되찾을 셈인 듯해요.”
안경을 고쳐 쓰면서 손에 든 자료들을 훑어보는 작전 참모. 그런 그녀의 첨언에 로스리아는 일리 있는 말이라며 긍정했다.
확실히 이 시점에서 성기사단이나 왕국군에게 조력을 요청하면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자네스 영주는 어떻게든 영지에 닥친 재앙을 자기 손으로 해결하고 싶을 거다.
“아니 그런데 도망쳐 나온 영주가 어찌 그리 많은 모험가를 고용할 수가 있나? 한두 푼으론 해결될 문제가 아닐 텐데?”
그때 부사령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에 작전참모는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율리아나로 도망쳐올 때 영주가 다량의 금품을 챙겨온 것 같아요. 현재도 호화로운 별장에서 재정에 큰 문제없이 지내고 있다는 것 같아요.”
“허! 주민들을 챙길 시간은 없었으면서 돈 챙길 시간은 있었다는 게야? 이 무슨 짐승만도 못한……!”
대답을 들은 부사령관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영주에 대한 분노를 드러냈다.
‘고블린 불알 같은 새끼…….’
밀리아 역시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분개했다. 영주 혼자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눈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자료를 읽어보니 비단 영주성에서 가져온 금품만 있는 건 아닌 듯해요. 자네스 영주는 사건이 발생하기 몇 주 전부터 꾸준히 율리아나로 마차를 보냈다고 하는군요.”
“사전에 재산을 빼돌렸다는 이야긴가?”
“네,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영주와 워록 사이게 유착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죠.”
자네스 영지에서 율리아나까지 가려면 대로로 사흘은 족히 걸린다.
밀리아처럼 신체 능력이 발달한 사람이라면 하루 이틀 만에 오갈 수도 있겠지만 금품을 실은 마차라면 그렇게 빨리 이동할 수는 없을 거다.
그토록 먼 거리에 있는 도시로 다량의 금품을 옮기는 건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차례나 재산을 빼돌렸다면 영주와 워록의 관계를 의심하고도 남는다.
애당초 밀리아의 증언으로 아크 데몬은 다른 곳도 아닌 영주의 저택에서 소환됐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르지만 저택에는 흑마법사의 연구실도 숨겨져 있었다.
“백성을 대신하여 부패한 귀족을 처단하는 것 또한 성화 교단의 의무. 그 귀족이 사악한 마법사와 연루되어 있다면 두 말할 것도 없지.”
“좀 더 면밀히 조사해보라고 지시할까요?”
“그래주게. 나는 왕궁에 서신을 보내도록 하지. 영주를 처벌하기 위해선 여왕 폐하께서 직접 나서셔야 할 테니.”
자네스 영주는 통치자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으며 그의 자택에선 악마가 소환됐다.
이러한 사실이 여왕의 귀에 들어간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자네스 영주의 통치권을 빼앗고 성화 교단에게 재판을 위임하리라.
자네스 영주에 대해 거기까지 말한 뒤 사령관은 웬 쪽지 한 장을 밀리아에게 내밀었다.
“……? 사령관님 이건…….”
“한 번 확인해보겠나? 네게 익숙한 얼굴이 있을 거다.”
이야기에 경청하던 밀리아는 얼떨결에 쪽지를 받았다.
슬슬 자신은 여기서 나가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뜬금없이 쪽지를 내밀어서 좀 의아했다.
그런 심정으로 밀리아는 쪽지를 읽었고, 이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사령관을 바라봤다.
“……!!”
“말했지? 익숙한 얼굴이 있을 거라고.”
그런 밀리아를 보며 사령관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쪽지에는 사령관에게 전하는 글귀와 함께 웬 그림이 첨부되어 있었다. 기록 주문을 통해 촬영한 것을 종이에 옮겨 그린 것이었다.
그 안에는 웬 검은색 머리를 한 반라의 남성이 있었다.
사실 기록 주문에 찍힐 때는 전라였지만 사령관에게 보내는 자료라 그런지 조사대원이 적당히 편집을 한 모양이었다.
어찌되었든 그림 속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다키였고, 밀리아는 그의 얼굴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쪽 조사대원이 성조를 통해 보낸 거다. 네가 증언할 당시에 언급한 남성과 외견적으로 일치하는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무아지경으로 율리아나까지 돌아온 후 밀리아는 사건 경위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적이 있다.
사건에 관한 모든 정보를 기술해야했기에 당연히 다키에 관해서도 적었다. 그와 만났을 때의 일까지는 상세하게 묘사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맞습니다…… 분명 제가 저택에서 만난 남자예요…….”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밀리아는 이내 긍정했다.
이 특유의 검은 머리와 푸른색 눈동자, 그리고 잘 보면 미형인 얼굴까지 틀림없이 자신이 마주한 남자였다.
비록 첫 만남 때와 달리 피칠갑이 된 모습도 아니었고 비교적 단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때 당시 충격이 워낙 컸던 나머지 확실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자가 널 이 자리에 부른 진짜 이유다.”
“이 남자가 말입니까……?”
“너도 보고서에 적지 않았나? 정황상 이 남자가 아크 데몬을 처치하는데 크게 일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확실히 밀리아는 그렇게 보고했다.
믿기 힘들지만 당시 상황을 돌이켜 보면 그 외엔 아크 데몬을 쓰러뜨렸을 만한 인물이 없었다. 영지를 빠져나오는 도중에 목격한 패닉 상태의 악마들이 그 증거이기도 했다.
“우린 네 보고서를 읽은 후부터 줄곧 이 남자를 찾았다.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영지 주위를 샅샅이 뒤졌지.”
로스리아가 심려어린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스 영지에 숨어든 워록은 아직까지 잡히지 않고 있다. 그놈이 언제 어디서 똑같은 일을 자행할지 모르는 지금, 우리에겐 대악마와 맞서 싸울 수단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남자를 찾으신 겁니까?”
“그래. 퀀케니스 네가 본 것이 사실이라면 그 남자야 말로 워록과의 성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열쇠일 거다. 이후에 일어날 참사를 막기 위해선 반드시 그의 도움이 필요해.”
자네스 영지 이전에 대악마가 소환된 적은 무려 수백여 년 전이다. 그에 관한 기록들도 이교도들과의 전쟁으로 대부분 훼손되거나 유실된 상태다.
현재 교단 측은 대악마에 관한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다.
어떤 식으로 소환되는지, 어떤 습성을 가졌는지, 약점이 무엇인지 무엇 하나 알지 못한다.
세계 3대 종교 세력 중 하나인 성화 교단 측에서 정보가 부족하다는 것은 다른 어디에서도 관련 정보를 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악마 소환을 진행하고 있는 흑마법사를 붙잡지 않는 한 대악마에 관한 정보는 계속 미궁 속에 있으리라. 그런 와중에 대악마를 단신으로 쓰러뜨린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그 남자와 접촉을 시도할 계획이다. 연고도 모르는 괴력난신에 가까운 인물이지만 지금으로선 달리 방도가 없지.”
정체불명의 남성과 조우하여 자문을 구하는 건 매우 매우 불안정한 계획이다. 허나 교단 측에선 그마저도 절실한 실정이다.
자네스 영지의 괴멸 소식은 대중들 사이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아직 대악마가 소환됐다는 정보까지는 누설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백성들은 충분히 두려워하는 중이다.
영지 하나가 하루아침에 멸망했으니 다른 곳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이미 백성들의 머릿속에는 이러한 생각이 박혀 있었고 이는 머지않아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질 것이다.
“제가 하게 해주십시오, 사령관님……! 제가 반드시 그 남자를 찾아오겠습니다!”
사령관이 다음 말을 잇기도 전에 밀리아가 대뜸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부사령관도, 참모도 그녀에게 시선을 모았지만 밀리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열성적인 그녀의 태도에 로스리아는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우리가 먼저 부탁하려 했다. 우리 쪽 조사대원은 그를 끝까지 추적할 수 없었지. 그 터무니없는 남자는 신령이 다니는 길을 지나 율리아나로 향했으니까.”
“설마…… 자네스 영지와 율리아나 사이에 있는 그 오지 말씀이십니까……?”
로스리아의 말을 듣고 밀리아는 경악을 터뜨린다.
신령이 다니는 길. 이름 그대로 태고적 존재 중 하나인 신령들의 영역으로 일반인들은 감히 발을 들일 수도 없는 장소다.
최근에는 무시무시한 귀신이 등장한다는 소문도 돌고 있어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곳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는다.
오죽하면 밀리아도 반쯤 정신이 나간 와중에도 그 길만은 피해서 하산했을 정도다.
조사대원이 다키를 끝까지 추적하지 않은 이유 또한 함부로 신령이 다니는 길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 조사대원 말로는 한 여사제와 함께 안전하게 하산 중이라고 한다. 성조로 추적해본 결과 목적지는 율리아나인 것 같다고 하더군.”
“말도 안 돼…… 사람이 어떻게 단신으로 그런 마경을…….”
“나도 믿을 수 없었지만 어쩌겠나. 조사대원이 증거 자료까지 보내줬는데 믿을 수밖에.”
그리 말하며 로스리아는 또 다른 자료를 보여주었다. 조금 전에 본 자료처럼 그림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산길을 내려와 평지에 도착한 다키와 나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대체 뭐하는 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범인凡人은 아닐 거다. 단신으로 대악마를 토멸하는 걸로도 모자라 신령이 다니는 길을 넘어 율리아나까지 가고 있다니. 어떤 남자인지 꼭 한 번 보고 싶군.”
재미있다는 듯이 말한 로스리아가 밀리아를 직시했다.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물었다.
“퀀케니스, 네가 그 남자를 내 앞까지 데려다줄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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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동안의 밀프 유부녀께서 찾아주셨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