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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68화 (68/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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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 여기사

넓은 홀 중심에 한 여성이 서 있다.

다홍색 머리를 사이드업 포니테일 형식으로 묶은 단신의 여성.

머리 스타일이 달라지긴 했지만 140cm 정도의 체구로 보아 그녀는 틀림없이 아크 데몬으로부터 다키를 구해준 여기사였다.

그녀는 엄숙한 표정으로 정면을 주시했다. 앞에는 높은 단상과 함께 그녀를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앉아 있는 좌석 뒤편에는 붉은색 화염 문양이 그려진 커다란 깃발이 걸려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대륙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3대 종교 중 한 곳, 진리의 성화 교단의 문양이었다.

그 문양을 통해 이곳이 성화 교단의 율리아나 지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홀의 구조로 보아 여기사가 서 있는 장소는 일종의 법정인 듯했다.

즉 단상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사람들은 그녀의 죄를 판결하기 위한 법관들인 것이다.

한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붉은색 망토를 걸친 여성이 엄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13부대의 부대장 밀리아 페레니케 퀀케니스.”

“……네 지방 사령관님.”

밀리아를 호명한 여성은 다름 아닌 율리아나의 지방 사령관.

왕국의 제 2 수도라 불리는 대 도시 율리아나에서 모든 성기사들을 지휘하는 교단의 고위 권력자 중 한 명이다.

그런 인물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말하자 밀리아는 절로 몸을 떨었다. 한껏 움츠러든 밀리아의 대답에 사령관은 담담히 이야기를 이었다.

“그대는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못해 자네스 영지의 주민들이 몰살당하는 참극을 낳았다. 뿐만 아니라 상관과 부하들을 내팽겨 치고 홀로 도망치는 불명예를 저질렀지. 반론의 여지가 있나?”

사령관과 다른 고위 성직자들이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다름 아닌 밀리아의 처벌을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직책은 제 13 부대의 부대장. 대장을 보좌하여 율리아나에 속해 있는 13개의 성기사 부대 중 하나를 지휘하는 엄중한 직책이다.

그녀 밑에는 수십여 명의 상급 성기사와 수백여 명의 일반 성기사들이 있었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사흘 전에 있었던 참극으로 몰살당하고 말았다.

부대장인 밀리아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없습니다……. 부대장으로서 실책을 인정합니다…….”

남모르게 주먹을 부르쥐면서 밀리아가 말했다.

분하지만 사령관이 하는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그 과정에 무슨 일이 있었든 결과적으로 주민과 성기사들이 죽었다. 밀리아는 지휘관이자 유유일한 생존자로서 이에 대한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

“이는 우리 성기사단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임과 동시에 그대의 믿음과 능력을 의심하게 만든 실적이다. 하여 우리 진리의 성화 기사단 율리아나 지부는 이러한 그대의 실책이 책망 받아 마땅하다고 판단하여 그에 따른 징계를 내린다.”

거기까지 말한 사령관이 다른 이들을 둘러보았다.

화려한 갑옷을 걸친 대장들과 법복을 입은 고위 사제들이 보였다.

그들 중에서 반대 의견을 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밀리아의 처벌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오늘 이 순간부로 밀리아 페레니케 퀀케니스의 직위를 부대장에서 일반 기사로 강등하고 상급 기사로서의 모든 권한을 박탈한다. 퀀퀘니스, 이 판결에 이의가 있는가?”

“없습니다……. 사령관님과 임원님들이 내리신 결정, 일말의 불신 없이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밀리아는 끝내 고개를 숙인 채 수긍했다.

그녀의 고분고분한 태도로 징계회의는 빠르게 끝났다.

밀리아는 부대장임을 증명하는 성표와 망토를 반납하고 일반 기사의 망토를 받았다.

화려하게 장식된 망토가 손에서 떠나고 다시 수수한 붉은 망토가 손에 쥐어지자 밀리아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부대장의 자리는 쉽게 오를 수 있는 게 아니다.

부대장에 지원하려면 수습 기사 과정을 수료하여 일반 기사가 된 뒤 자격을 인정받아 상급 기사가 되어야 한다.

상급 기사가 된 후에도 바로 부대장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건 아니다. 능력과 실적들을 통해 엄격한 심사를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지원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밀리아는 부대장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무려 8년의 시간을 쏟아 부었다.

부대장들의 평균 연령이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인 것을 고려하면 고작 25세에 부대장이 된 것은 매우 빠른 승진이라고 할 수 있으나 결코 적은 시간은 아니다.

애당초 남들 보다 몇 배나 되는 노력을 했기에 8년 만에 부대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거다. 지금 밀리아는 그 오랜 노력의 성과를 한순간에 빼앗겨 버린 것이다.

‘분해……! 분해, 분해……!!’

수수한 디자인의 망토를 찢을 듯이 움켜쥐며 밀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키가 작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서민 출신 기사들과 어울린다는 이유로 모자란 인간 취급받았다.

그럼에도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끝끝내 부대장의 자리까지 올라왔다.

자신과 부하를 깔본 놈들에게 한 방 먹여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과를 올리겠다고 다짐했다. 가문과 교단을 위해서 가장 훌륭한 부대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러한 결심이 첫 임무 만에 무너졌다. 누가 소환했는지도 모를 대악마가 8년간의 노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거다.

분하지 않을 리가 없다. 이곳이 신전만 아니었다면 밀리아는 성기사의 몸가짐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괴성을 지르며 발광했으리라.

그렇게 울분을 꾹 참으면서 법정을 나설 때였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전멸이라니?! 그러면 내 딸은 어떻게 됐단 거요?!”

“응……?”

문득 안뜰 너머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는데 소리의 근원지에는 비단 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전의 창살 문 너머로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소리를 지른 중년 남성에서부터 나이 지긋한 노파, 코흘리개 어린이들까지 다양했다.

공통점이라 한다면 그들의 얼굴이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인형을 끌어안은 여자아이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오빠를 찾았다.

중년 남성은 딸의 이름을 부르면서 제지하는 일반 기사들과 말싸움을 벌였고, 노파는 참다못해 실신하여 자리에 쓰러졌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채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밀리아는 그들의 얼굴을 전부 한 번씩 본 적이 있다.

창살 문 너머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13부대원의 유가족들이었다. 자신의 자식, 형제, 손주가 순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 같이 몰려온 것이리라.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 이곳은 성화 교단의 신성한 땅입니다! 모두 진정해주십시오!”

“지금 그걸 말이라 하는 거요?! 내 딸이 악마가 가득한 영지에서 죽어 시체도 못 건지게 생겼는데 댁 같으면 진정하게 생겼소?!”

“흐아아아앙……! 오빠, 오빠아아아아……!!”

“저희도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가족 분들을 모셔올 테니 부디 진정을……!”

“웃기지 마! 이러는 동안에도 내 형제의 시체는 악마 놈들 노리개가 되어 있을 거라고! 애매하게 대답하지 말고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으란 말이야!”

유가족들의 원성이 심해지자 곧 열댓 명의 성기사들이 모여 진압에 나섰다.

수적으로는 유가족 측이 우세했으나 일반 성기사라 할지라도 한 명, 한 명이 능력치 상승으로 단련된 초인들이다.

그들이 유가족들을 몰아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전 밖으로 쫓겨나는 동안에도 그들의 비탄은 끊이지 않았다.

‘내가…… 내가 나서야…….’

밀리아는 그 과정을 마냥 지켜볼 수 없었다.

저들이 애타게 찾는 가족은 전부 밀리아의 동료, 부하였던 사람이다. 그 중에는 수습 기사 시절부터 함께해온 이들도 있었다.

다들 자신을 믿고 따라준 소중한 동료들인데 지금은 차가운 시신이 되어 가족들에게 돌아오지도 못하고 있다.

어쩌면 악마들의 놀이개로 쓰여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지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동시에 부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밀리아 본인을 채찍질했다.

한순간의 실책으로 지위와 동료를 전부 잃었다. 전부 밀리아에게 있어선 목숨과도 같은 것들이었으나 동료들을 잃은 것이나 특히나 더 슬펐다.

지금 당장 저들 앞에서 무릎 꿇지 않으면 죄책감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면서 인파들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밀리아가 발걸음을 돌릴 때였다.

“아서라, 지금은 네가 나설 때가 아니다.”

“……?”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나아가는 그녀를 누군가가 제지했다.

어깨에 닿은 손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성화 기사단의 율리아나 지부 사령관, 로스리아 아겔하이든이 있었다.

“사, 사령관님?!”

갑작스러운 사령관의 등장에 밀리아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수차례 동공을 굴린 그녀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인사한다.

“일반 기사 밀리아 페레니케 퀀케니스가 위대한 성화의 사도를 뵙습니다……. 사령관께서 제게 무슨 용무신지…….”

일반 기사가 사령관과 조우하는 건 원래 세계 기준으로 일반 병이 장성급 장교를 만나는 것과 같다.

그만큼 지방 사령관의 권위는 드높으며 휘하에 있는 기사들은 마땅히 예의를 차려야 한다.

특히나 밀리아는 방금 전에 징계를 받고 강등까지 당한 입장. 남들 보다 더욱더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쓴소리 하려고 찾아온 건 아니니 걱정마라. 동료들을 떠난 보낸 네게 이 이상 모질게 대할 생각은 없다.”

“그렇…… 습니까……?”

바싹 긴장한 채 고개를 숙인 밀리아였으나 사령관의 말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온화했다.

아니, 비단 온화한 수준을 넘어서 자신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까지 건네고 있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걱정을 거듭하던 밀리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거지? 내가 따로 훈계라도 할 줄 알았나?”

그런 밀리아의 마음을 귀신 같이 알아본 사령관, 로스리아가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물었다.

올해로 쉰을 넘어선 그녀였지만 그 미소는 여느 젊은 처자들보다도 화사했다.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반응에 밀리아는 연신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저, 저는 동료들을 내버리고 혼자 살아남은 도망자입니다……! 그런 제가 훈계를 받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령관 앞이라 모범적인 답안을 고른 것도 있지만 밀리아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설령 사령관이 자신에게 엄한 태도로 훈계와 처벌을 줬어도 밀리아는 달게 받을 생각이었다. 그게 기사로서, 부대장이었던 사람으로서 보여야 할 태도니까.

허나 그런 밀리아의 대답에 사령관은 기뻐하기는커녕 쓴웃음을 지었다.

“공적인 자리에선 책망하듯 말했지만 네 생환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로선 너라도 멀쩡히 돌아와 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네……?”

생각지도 못한 위로에 밀리아는 무어라 대답하지 못한다. 오죽하면 사령관 앞에서 얼빠진 얼굴로 네? 라며 되물을 정도였다.

그녀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 무렵 로스리아가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보다 잠시 시간 좀 내줄 수 있겠나?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만.”

“저, 저 같은 일반 기사가 어찌 사령관님의 명령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이건 사령관으로서의 명령이 아니라 내 개인적인 부탁이다. 그러니 편히 생각해라. 따라올지, 따라오지 않을지는 순전히 네 자유다.”

로스리아의 제안에 밀리아는 잠시 눈치를 살폈다.

사령관이 자신을 개인적으로 부르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그녀와 함께 지낸지 고작 몇 달 밖에 되지 않은 밀리아로선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허나 아무리 개인적인 부탁이라 할지라도 사령관의 말에 거스를 수는 없는 법, 밀리아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관님의 부름이라면 얼마든지 동행하겠습니다…….”

“길게 이야기하진 않을 거다. 이쪽으로 와라.”

그 말을 듣고 로스리아는 밀리아를 이끌었다.

그녀가 향한 곳은 사령관의 집무실이었다. 안에는 이미 방문객이 와 있었는데 다름 아닌 율리아나 지부의 부사령관과 작전참모였다.

“오오. 오셨습니까, 사령관님.”

“퀀케니스 양도 데려오셨군요. 마침 그녀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잘 됐네요.”

갑옷을 입은 훤칠한 차림의 남성과 법복을 입은 여성이 두 사람을 반겼다.

징계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연이어 만나자 밀리아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허나 두 사람 역시 편한 태도로 밀리아를 대했다. 징계 회의에서 봤던 엄격한 모습은 마치 거짓말이라도 되는 듯 했다.

“하하,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말게나. 징계도 끝났는데 뭘 그리 어려워하고 그러나?”

“맞아요, 퀀케니스 양. 당신에게 불편한 자리는 아닐 테니 편히 있으셔도 된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간부들의 격려에 밀리아는 최대한 자연스러움을 가장했다.

하지만 일반 기사 입장이 되다 보니 그들 앞에서 편히 있을 수가 없었다.

부대장이었을 시절에도 하늘같던 사람들인데 어찌 일반 기사가 된 몸으로 그들 앞에서 여유를 부릴 수 있겠는가.

“다들 와 있었군. 그러면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이야기하지. 참모? 퀀케니스에게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해주겠나?”

밀리아가 그러든 말든 사령관은 이야기를 진행해나갔다. 부탁받은 참모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밀리아에게 이야기했다.

“네 사령관님. 퀀케니스 양? 우선 당신에게 부대장 자리를 빼앗은 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는 건…… 절 강등시키지 않을 의사가 있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말없이 시선만 돌리던 밀리아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에 참모는 안경테를 올리면서 대답했다.

“저희는 당신을 책망하기 위해서 지위를 박탈한 게 아니에요. 당신을 빌미로 성기사단에 불미스러운 누명이 씌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시적으로 강등시킨 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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