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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63화 (6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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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 엘프녀와 야외에서

텍스트가 원작 게임과 달랐다.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나온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메시지가 뜬 다음에 보상 목록이 나와야 한다.

공물 이벤트를 통해 받을 수 있는 보상은 3 위업 포인트, 넥타르 사용량을 늘려주는 암브로시아, 그리고 딱 1번 플레이어가 저지른 죄를 없던 일로 해주는 면죄부 이렇게 총 세 가지다.

당연히 나는 그 중에서 가장 효율이 좋은 암브로시아를 고르려 했다. 다른 선택지 같은 건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데 대뜸 소원을 말하라고 하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텍스트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텍스트가 누락된 건가……? 아니, 그러면 원하는 걸 이야기하란 말도 없어야 돼.”

마신들과 대화할 때와 같다. 이건 분명 게임 세계의 변수 중 하나다.

어디까지나 내 가설일 뿐이지만 원작 게임에선 세 가지 뿐이었던 소원의 선택지가 무궁무진하게 늘어난 걸지도 모른다.

구현할 수 있는 소원이 제한되어 있던 원작 게임과는 다르게 게임 세계에선 여신이 이루어줄 수 있는 소원이라면 어떤 것이든 빌 수 있을 테니까.

“정말요? 제가 원하는 건 뭐든 이루어주는 거예요?”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거울을 향해 질문했다. 거울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내 눈앞에는 여전히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라는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잠깐이지만 원래대로 암브로시아를 요구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 추측이 사실일지도 아닐지도 모르는 마당에 불확실한 시도를 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차츰 옅어졌다.

이 산만 넘으면 사람들이 가득한 대 도시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팬티만 입은 차림새는 큰 걸림돌이 될 거다. 노출이 어느 정도 용인되는 세계관이라 해도 팬티 한 장만 입고 다니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할 테니까.

최악의 경우에는 여기사 때처럼 변태 새끼 취급받고 경비대에게 붙잡힐 수도 있으리라. 세상 사람들이 다 헤베나 브릴린트, 나나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정말로 무슨 소원이든 빌 수 된다면…….’

거울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숨을 골랐다. 그리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소원을 입 밖으로 내었다.

“내 소원은……. 옷을 입는 거예요.”

스탯을 올리는 것도 중요하긴 하다. 하지만 스탯을 올릴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당장 와호를 잡았을 때만 해도 5포인트나 얻지 않았는가. 도시에 가서 퀘스트를 수행하고 던전을 공략하다 보면 더 많은 양의 위업을 얻게 될 거다.

위업 포인트를 올리는 것보다 내 몰골을 바꾸는 게 더 중요하다. 나는 그 점을 되새기면서 보다 정확하게 소원을 말했다.

“누가 절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팬티나 허리띠 외에는 아무 것도 못 입게 됐어요. 그러니까…… 저도 남들처럼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싶어요.”

차분하게 소원을 말했지만 지금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혹시나 여신이 내 소원을 거절하지는 않을까 불안해하기도 했다.

잔혹하게도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여신이 그대의 소원을 반려했다. 그녀가 이뤄줄 수 있는 범주의 소원이 아니다.

“세상에…….”

안 될 수도 있다는 건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었다. 허나 막상 메시지를 통해 들으니 경악스럽기 그지없었다.

설정상 에리스 여신은 가디스 던전 세계관 내에서도 엄청난 위세를 자랑하는 대신이다.

입지가 그리 높지 않았던 원전과 다르게 이 동네에선 제우스나 크로노스 같은 신들의 왕 보다도 강력한 여신으로 묘사된 것이다.

비록 실제로 현현하지 않았더라도 그녀의 힘은 어느 신들 보다도 전능하다.

그런 여신조차도 이루어줄 수 없는 소원이라니. 여러 가지 의미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역시 내 옷차림은 게임 시스템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직접 유다희를 만나던가 해야 할 것이다.

처음 가죽 갑옷을 입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기에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아쉽지 않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암브로시아로 만족해야겠다. 그리 생각하며 나는 다른 소원을 이야기하려고 했다.

-여신이 그대에게 다른 소원을 제안한다.

-그대에게 걸린 제약을 해제할 수는 없지만 그로 인한 불이익은 막아줄 수 있다. 여신의 제안을 승낙하겠는가?

“네?”

갑작스레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이익을 막아주겠다니, 그게 무슨 의미지? 메시지와 거울을 번갈아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한 번 생각에 빠졌다.

팬티 한 장만 입고 다닐 때 생기는 불이익이라고 하면 단연 수치심이리라.

나 혼자만 속옷을 입고 다녔을 때의 그 부끄러움, 그런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큰 불이익일 터다.

에리스 여신은 모종의 방법을 사용해서 이를 막아주겠다고 이야기한 거다. 도시에서의 일이 걱정인 나로선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옷을 입지 못하는 건 똑같은데 어떻게 수치심을 막아줄 생각인 거지? 나한테 환영이라도 씌워주려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는 듯했다. 결과는 달라도 원래의 목적과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으니까.

나는 이내 거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하겠습니다.”

내가 간결하게 대답하자 거울이 반응을 보였다.

그것은 공물이 그랬던 것처럼 보라색 빛을 뿜어냈고 그 빛은 곧 내 머리 위에서 깃털 같은 형상을 취했다. 빛으로 이루어진 깃털이 내게 떨어져 몸 안으로 스며들어 가는 것이었다.

그 현상은 몇 초간 지속되었고 이윽고 빛도, 수많은 깃털들도 모습을 감추었다. 깃털이 몸에 스며드는 동안 나는 별 다른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 시각적인 효과마저 없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끝난 건가……?”

잠잠해진 제단을 둘러볼 때쯤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여신이 그대의 소원을 이루어줬다.

메시지 내용을 보면 그녀가 해주고자 한 것은 틀림없이 이루어진 듯했다.

하지만 나는 몹시 의아했다. 수치심을 막아준다는 말과는 다르게 겉으로는 바뀐 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사기당한 건 아니겠지……?’

여러모로 의심스러웠으나 곧 생각을 달리했다.

여신이 나한테 사기를 왜 치겠는가. 그녀에게 이 정도 소원 들어주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원작 게임의 에리스는 남을 등쳐먹을 정도로 악랄한 여신도 아니었다.

찝찝한 기분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도시에 가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겠지.

나는 일단 물구나무를 서서 여신에게 감사를 표했다. 흔히들 그랜절이라고 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10만원 도네이션을 받았을 때의 기분을 상기하며 약 1분간  물구나무를 유지했다.

“감사합니다, 여신님. 도와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뭘 어떻게 도와줬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으나 일단 형식적인 멘트라도 던졌다.

나름 여신님인데 예의 차릴 필요는 있지 않겠는가. 신이란 족속들은 죄다 숭배 받고 싶어서 안달 났으니 분명 기뻐할 것이다.

그렇게 내가 숨을 고르며 자리에서 일어날 무렵이었다.

[여신은 그대의 성의를 보고 기뻐하고 있다. 그녀가 또 다른 보상을 하사한다.]

응?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반사적으로 제사상 위를 확인했다. 어느 샌가 보라색 빛과 함께 자그마한 부적 하나가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설마 열렬히 반응해줬다고 떡 하나 더 얹어준 건가? 진짜 그랜절 때문에 안 줘도 되는 보상을 준 거야?

“아니 이렇게 감사할 데가…….”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면서 새롭게 나타난 보상을 확인했다.

금색으로 빛나는 웬 종이였는데, 화려한 표면 위에 까마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를 본 나는 종이의 정체를 곧장 알아챌 수 있었다.

면죄부

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이름으로 죄를 면해주는 호부. 그녀의 상징인 까마귀 문양이 새겨져 있다. 사용 시 자신이 저지른 죄를 하나 면죄한다. 면죄된 죄는 아예 없었던 일로 취급하며 사람들은 사용자가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와 세상에…….”

면죄부는 본래 세 가지 보상 목록 중 하나인 아이템이다. 이름과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플레이어의 죄를 없앨 때 사용되며 획득처가 한정되어 있어서 입수가 매우 까다롭다.

위업 포인트나 암브로시아 보단 효율이 떨어지지만 죄를 지은 플레이어, 특히 실수로 NPC를 공격 또는 살해한 초보 플레이어들에겐 매우 간절한 물건이다.

가디스 던전에선 NPC를 공격하거나 물건을 훔칠 때마다 카르마 수치라는 것이 쌓인다.

카르마가 높은 플레이어는 마을에 들어가지 못하고 경비병에게 적발될 시 바로 공격당한다. 거기에 더해 현상금 사냥꾼들이 붙어서 언제 어디서든 사냥당할 위험에 놓이게 된다.

허나 면죄가 있다면 범죄를 저지르고도 카르마 수치를 0으로 만들 수 있다. 비록 1번 밖에 못 쓰는 소모품이긴 하지만 매우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아이템인 것이다.

‘내가 범죄를 저지를 것 같지는 않지만…….’

희귀한 아이템을 얻어서 좋긴 한데 과연 이걸 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사실 난 원작 게임에선 살인이나 절도 같은 짓을 밥 먹듯이 저질렀다.

격리된 도시에 역병을 퍼뜨려서 주민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거나 귀족가의 영애를 납치해 노예로 팔아버리는 등 악질적인 범죄를 컨텐츠 삼아 즐겼던 것이다.

허나 이런 건 다 게임이기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실제로 같은 짓을 할 거냐고 물으면 난 주저 없이 고개를 가로 저을 거다.

원작 게임에서야 NPC들이 죄다 감정이 없는 데이터 덩어리여서 얼마든지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으나 게임 세계의 주민들은 현실의 인간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존재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극악무도한 짓을 벌이고 싶지는 않다. 난 어디까지나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였을 뿐이지 악행을 즐기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니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일단 챙겨두기는 했다. 가급적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런 심오한 생각을 뒤로 한 채 에리스 여신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여러모로 정말 감사합니다, 여신님. 나중에 기회 되면 또 뵐게요.”

다음에도 신당이 보이면 간단하게 제사라도 지내줘야겠다. 제사라고 해봤자 제단 위에 음식 몇 개 올려주고 기도하는 게 전부지만.

그렇게 인사를 마친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사당을 나왔다.

하늘은 어느새 군청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땅거미가 진 하늘 위에는 별들이 잔뜩 빛나고 있었고 그 아래로 저녁놀의 잔조가 어렴풋이 보였다. 지금 내 기분과 어울리는 멋들어진 하늘이었다.

“어서 오세요, 다키님! 하려던 일은 잘 끝내셨…… 꺄아아?!”

사당 밖으로 나간 순간, 내 얼굴을 본 나나가 비명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비명에 가슴이 철렁했다. 왜 저러는 거지? 내 얼굴이 어떻게 되기라도 했나?

한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다행히 그녀의 얼굴 위에 드러난 건 공포나 혐오 같은 감정이 아니었다. 나나는 오히려 양쪽 뺨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왜 그렇게 놀라……?”

그래도 일단 나나의 저의를 알아보기로 했다.

조심스러운 내 질문에 나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어버버 거리며 몇 번이나 말을 고른 그녀는 이내 목청을 높이며 대답했다.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욧! 그냥 오늘따라 더 잘 생겨보여서요!”

“어어…… 그래……. 그런데 우리 오늘 처음 만나지 않았니……?”

어색한 대답에 나는 수상쩍은 눈빛으로 나나를 바라보았다. 그에 나나는 태연함을 가장하면서 화제를 돌렸다.

“그, 그보다 어두워질 것 같은데 빨리 이동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제가 쓸 만한 것들 좀 주워놨어요! 보세요!”

다급히 말하며 내민 것은 여행에 필요한 물자들이었다.

불을 피우기 위한 장작과 식재료로 쓸 수 있을 육류, 조미료 등이 보였다. 폐허에서 구한 것치곤 꽤나 쓸 만한 것들이었다.

이런 걸 어디서 찾았나 싶었는데 생각해보면 이곳은 놀들의 소굴이기 이전에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이다.

본래 이곳에서 살던 주민은 전부 떠났으나 놀들도 간단한 도구를 다루거나 음식을 보존하는 정도의 지능은 가지고 있다.

주민들을 남겨 놓은 도구로 장작을 패고 고기를 말렸다고 하면 이런 물건들이 나오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잘했어 나나야. 오늘 저녁밥은 걱정 없겠네. 볼 일도 다 봤으니 슬슬 출발할까?”

“네! 얼른 이 동네에서 나가고 싶은 참이었어요! 빨리 나가죠, 다키님!”

우리는 마을을 벗어나 야영지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놀들이 전부 사라졌으니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도 상관없긴 하지만 여기저기 널린 시체들 때문에 썩 내키지 않았다. 하물며 건물들이 죄다 반쯤 무너지거나 어지럽혀 있어서 밖에서 자는 것보다 못해보였다.

그렇게 발길을 돌려 음산한 마을을 벗어날 때였다.

“어……?”

내 손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순간 당황한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선 내게 바싹 달라붙은 나나가 수줍게 웃고 있었다.

“헤헤헤.”

부드러운 감촉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나나의 손이었다. 그녀가 아주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은 것이었다.

졸지에 나와 나나는 커플들이 그러는 것처럼 사이좋게 손을 잡은 채 걷게 됐다.

친화력이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외간 남자 손까지 아무렇지 않게 잡다니.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적잖게 놀랄 무렵, 나는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응……?’

왼팔에 차고 있던 검은 산양의 뿔이 피부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몸속으로 들어간 그것은 끝내 문신 같은 형태로 바뀌었다. 마치 내 몸과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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