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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 엘프녀와 야외에서
“……!”
그 순간, 나나의 홀장이 상송이 후두부를 강타했다.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상송의 동공이 흔들렸다.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지만 놈이 얼마나 아픈지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제 3자가 보기에도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아파보였다.
“하아아……!”
그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상송. 놈은 뒤늦게 낫자루에 손을 가져가며 대응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나나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녀는 전심전력으로 공격을 이어갔다. 양손으로 쥔 홀장이 연이어 호를 그려 상송을 타격한 것이었다.
“해동검도 기본자세 11번! 광光자 베기!! 아다아다아다아다아다아다앗!!”
퍽! 퍽! 퍽! 퍼억! 퍼억! 빠가아아악!
“……! ……?! ……!!”
나나의 홀장이 상송을 쉴 새 없이 두들겨 팼다. 처음에는 머리를 때리는가 싶더니 허리와 어깨까지 패서 놈에게 상당한 고통을 선사했다.
어느덧 상송은 대응할 여지를 찾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쳐맞기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인내력이 21 밖에 안 되는 놈이 저렇게 연달아 쳐맞았는데 뭘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인내력은 0이 돼서 모든 공격에 경직을 받을 거다. 홀장의 데미지가 미미하긴 해도 나나는 놈을 성공적으로 제압한 것이다.
“광자를 죽이겠어요! 김광자는 내 원수!!”
그걸로 족하지 않고 나나는 끊임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중간 중간 상송이 반격하려 했으나 나나는 호기롭게 손과 팔을 타격하여 놈의 행동을 차단했다. 그녀가 검도 유단자라는 말은 틀림없이 사실이리라.
“잘 했어 나나야! 믿고 있었어!!”
“다키님!”
그런 나나와 상송 사이에 칼을 휘두르며 난입했다. 암흑의 소용돌이는 애저녁에 없어졌다. 나나가 상송을 타격한 순간 스킬이 캔슬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동안 맞은 게 있어서 몸 곳곳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런 건 개의치 않았다. 이로써 놈에게 유효타를 먹일 수 있게 됐다.
“하아압!!”
촤아아아악!
은빛 검광과 함께 섬격이 날아들었다. 노린 것은 상송의 목. 크리티컬을 터뜨려서 치명상을 입히고 말리라.
푸화악!
“……!!”
그런 나의 염원은 확실하게 이뤄졌다. 상송의 목덜미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비록 얕긴 했지만 목덜미가 베인 것이었다. 놈의 눈동자가 일그러지고 주황색 안광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데미지는 728. 붉은색의 숫자와 피가 터지는 효과음이 치명타가 떴음을 알려줬다. 비록 죽을 정도의 데미지는 아니지만 생명력이 2천 정도인 놈에게는 상당한 피해이리라.
스르륵!
목덜미를 맞은 것과 동시에 놈이 혼령화를 사용했다. 혈액과 검은색 안개가 허공에서 한 데 뒤섞였다.
나나에게 맞을 때는 암흑의 소용돌이의 캔슬 페널티 때문에 대응을 제대로 못했는데 내가 때릴 때 페널티가 풀린 것이리라.
그림자처럼 변한 상송은 우리와 수 십 미터나 떨어졌다. 이것도 슬슬 지겹다. 한 번에 끝났으면 저 역겨운 패턴을 다신 보지 않아도 됐을 텐데. 발밑에서부터 아쉬움이 올라왔다.
“아깝다……! 잡을 수 있었는데!”
나나도 분한지 주먹을 부르쥐면서 소리쳤다. 나는 그런 그녀를 격려하면서 재빨리 태세를 정비했다.
“죽이진 못했지만 저놈도 이제 간당간당할 거야! 생명력도, 마력도 얼마 안 남았겠지!”
“그렇군요……! 앗, 그보다 다키님 피가……! 치료해드릴게요!”
상송을 주시하던 나나가 내 상태를 확인했다. 그녀는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알아서 회복 주문을 영창했다. 점점 좋아지는 게 눈에 보인다. 그녀에게 재능이 있다는 걸 부정할 여지가 없다.
내가 상송의 동태를 살피면서 치료 받을 때였다.
“하아아…….”
까아악! 까아악! 까아악!
상송이 자세를 잡자 사방에서 까마귀가 모여들었다. 마을 곳곳에 모여 있는 평범한 까마귀는 아니었다. 놈들의 눈동자는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었으며 깃털은 연기처럼 흔들렸다.
저것도 상송의 소환수들이다. 하나씩 소환하는 지네신, 장승과 다르게 수십,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소환되는 군체형 소환수. 까마귀 거군인 것이다.
까마귀 거군
액티브
요구 스탯: 신념 28
비용: 마력 120
사용 조건: 주술 무기 착용
습득 방법: 운명 항목에서 습득
효과: 6초간 캐스팅한 뒤 저승의 저편에서 까마귀 떼를 불러낸다. 까마귀 떼는 전방 30미터, 폭 10미터 범위를 휩쓸어버리며 시전자의 신념 x18만큼의 암흑 피해를 30번에 걸쳐서 준다. 까마귀는 각각 5의 저지력을 가지고 있다. 시전자의 카르마 수치만큼 피해량이 상승한다.
캐스팅 시간은 암흑의 소용돌이와 1초 밖에 차이나지 않지만 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주문을 완성했다. 수백 마리의 까마귀 떼가 그 증거였다.
즉발 스킬은 아니었다. 놈이 스킬을 영창할 때 손에서 푸른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주문의 캐스팅 시간을 대폭 단축시켜주는 스킬, 신속 영창을 사용한 걸 거다.
신속 영창은 한 번 사용한 후에 시간을 들여서 다시 준비해야 되는 스킬이다. 그렇기에 보통 전투 중에는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는데, 그걸 썼다는 건 놈도 여기서 끝장을 보겠다는 것이리라.
욕심내서 달려들었다간 놈이 바로 까마귀를 날려 보냈을 거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명중률은 올라가니까.
지금 뜸 들이고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까마귀를 최대한 많이 마킹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텍스트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까마귀들은 추가 캐스팅을 할수록 유도 성능이 향상된다. 거리가 상당하니까 유도 성능을 끌어올려 최대한 많은 까마귀를 맞추려는 거겠지.
“어, 어떻게 하죠 다키님……?! 일단 도망쳐서 숨을까요?!”
수백 마리의 까마귀 떼를 보며 나나가 몸을 떨었다. 어느덧 하늘이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어디를 봐도 시커먼 까마귀들 밖에 보이지 않았다. 놈들이 울부짖는 소리 때문에 고막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 까마귀의 거군을 보면서 나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나나야, 자꾸 무리한 부탁해서 미안한데 이번에도 네 도움이 필요해.”
“뭘 하시게요?! 말씀만 하세요! 저도 여기서 죽고 싶지는 않거든요!”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방법이야. 그래도 괜찮겠어?”
내가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나나가 거절한다면 그녀를 껴안고 냅다 달릴 거다. 전부 피할 수는 없지만 열심히 회피하면 죽지는 않을 거다.
허나 싸움은 좀 더 장기화되고 그만큼 우리들도 더 지치겠지. 나나도 그걸 깨달은 건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키님은 이미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잖아요! 저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어요! 이제 와서 쫄지 않는다고요!”
단호한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인맥 폭이 좁기는 하지만, 그녀는 여태껏 내가 만난 여자 중에서 가장 용감한 여자다.
“그럼 가면서 설명해줄게! 꽉 잡아!”
“네? 꺄아아아악?!”
대답을 받자마자 그녀의 몸을 안아들었다. 공주님처럼 안기자 나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소리쳤다.
“가, 갑자기 이게 뭐예요?! 싫은 건 아닌데 좀 당황스럽네요!!”
“지금부터 놈을 향해 돌진할 거야! 달려가는 동안 우리에게 까마귀 떼가 날아들겠지!”
“당연히 그렇겠죠! 완전 자살 행위 아니에요?!”
나나의 얼굴에 불안감이 깃들었다. 아무리 날 신뢰해도 위험천만한 상황에 직면하니까 두려움이 앞선 것이리라.
그런 그녀의 질문을 단번에 부정했다.
“아니! 저놈들은 하나하나가 소환수야! 투사체가 아니라고! 네 스킬로 날려 보낼 수 있어!”
“제 스킬이라니…… 아!!”
비로소 나나가 내 계획을 파악한 듯했다. 한 차례 눈을 번뜩인 그녀는 양손으로 홀장을 움켜쥐며 말했다.
“알겠어요, 다키님! 저만 믿으세요!!”
“좋아! 강행 돌파한다!!”
타아앗!!
온힘을 다리에 실어서 전속력으로 달렸다.
시시각각 상송과의 거리가 좁혀지고 건물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풍압 때문에 나와 나나의 머리가 마구 흩날렸다.
까아악! 까아악!!
그런 우리에게 까마귀 떼가 쇄도했다. 황천의 까마귀들은 우리를 찢어발길 기세로 날아들어 발톱을 세웠다.
한 놈, 한 놈의 피해는 고만고만하지만 한 놈 당 저지력이 무려 5나 돼서 나는 3대만 맞아도 경직을 받는다. 경직 받고 멈춰서는 순간 죽는 거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하지만 이쪽에는 나나가 있다. 수백 마리의 까마귀 떼도 한꺼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거부 스킬이 있는 것이다.
거부
액티브
요구 스탯: 신념 13
비용: 마력 20
사용 조건: 법술 무기 착용
습득 방법: 사제 선택 시 기본 스킬로 습득, 운명 항목에서 습득
효과: 3초간 캐스팅한 뒤 법술 무기를 들어 올려 신성한 충격파를 발생시킨다. 충격파는 반경 3미터 이내의 모든 적을 최대 6미터까지 넉백시킨다. 인내력이 60 이상인 적은 넉백당하지 않고 경직 당한다.
“지금이야 나나야!!”
까마귀 떼가 가까워진 것을 보고 소리쳤다. 그에 나나도 홀장을 들어 올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푸스! 로 다아아아앗!!”
콰아아아앙!!
[까아아악!?]
[까아악!!]
나나의 외침과 함께 엄청난 충격파가 돔 형태가 뻗어나갔다.
충격파에 휩쓸린 까마귀들은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저 멀리 날아갔으며 검은 연기 같은 깃털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거부를 즉발 슬롯에 올리게 한 건 정답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렇게 강행돌파 하는 건 꿈도 못 꿨을 거다. 나는 사방팔방 튕겨져 나가는 까마귀 떼를 보며 더욱 박차를 가했다.
“으아아아아아!!”
“끼요오오오오옷!!”
내가 기합을 넣자 나나 역시 괴상망측한 포효를 내지르며 거부를 연발했다.
신성한 충격파가 연달아 터지면서 까마귀 떼를 몰아냈다. 쏟아지는 깃털들을 가로지른 우리는 끝내 상송의 코앞까지 육박했고, 직후 놈을 향해 나나를 집어던졌다.
“나나야!”
“네 다키님!!”
나나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것을 본 상송은 눈을 부릅뜨며 낫을 들어올렸다. 시퍼렇게 날이 선 낫이 나나를 두 동강내려 했지만 거부 앞에선 놈의 저항 같은 건 무의미했다.
“푸스! 로 다아아아아앗!!”
콰아아아앙!!
“……?!”
낫을 휘두르려던 상송이 그대로 튕겨져 나갔다. 몸의 균형을 잃은 놈은 혼령화를 사용할 여유도 없는 듯했다. 아니면 마력이 바닥났거나.
어느 쪽이든 놈은 이제 좆된 거다.
“쯔아아아앗!!”
빠르게 짓쳐 들어가 검을 휘둘렀다. 내가 준비한 스킬은 파고들기. 대각선을 그리며 날아든 검이 놈을 한 차례 허공으로 띄웠다.
촤아아아악!
“커허억!!”
피보라가 몰아치면서 놈의 입에서도 드디어 사람다운 소리가 났다.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 빌어먹을 놈을 드디어 족칠 수 있다.
지금까지 참아온 분노를 터뜨리듯 나는 마지막 스킬을 날렸다.
“벽력일섬!!”
서거억!!
상송을 향해 도약하면서 섬격을 날렸다. 은빛 섬광이 놈의 허리를 깔끔하게 베었다.
한 차례 멈춘 상송의 몸은 두 쪽으로 쪼개져 지면으로 추락했다. 동시에 주황색 피가 허공에 수놓아졌다.
푸화악!!
후두두두둑!
핏줄기와 함께 쏟아지는 상송의 몸. 눈앞에 데미지가 떴는데 몇이든 상관없다. 놈은 확실하게 죽었다.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주황색 빛이 되어 사라지는 시체가 그 증거였다.
“하아…… 하아……!”
“해치웠나……?!”
지면에 착지한 내가 숨을 헐떡일 때 나나가 긴장감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굉장히 불길한 대사였지만 만화처럼 죽은 놈이 다시 살아나는 일은 없었다.
상송의 시체가 있던 장소에는 화려한 빛을 뿜어내는 아이템이 몇 개 떨어져 있을 뿐, 놈은 확실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 나나야.…… 우리가 이겼어.”
“와, 와아아……! 이얏하아아아!!”
고된 싸움이 끝나서일까. 나나는 온몸을 흔들면서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런 나나를 보고 있자니 나도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까지 적들을 물리치고 나면 크나큰 성취감을 느끼곤 했다.
상송을 쓰러뜨렸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에는 비단 성취감 뿐만이 아니었다. 나나를 향한 동료애와 유대감이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이 아니었다. 비록 오늘 만난 사이지만 나나와도 한층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난 나나의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나나야 잠깐 가만히 있어봐.”
“네, 네……?”
내가 머리 쪽으로 손을 가져가자 나나는 얼굴을 화악 붉혔다. 그래도 딱히 거절하지 않고 가만히 내 행동을 기다렸다. 나는 그런 그녀의 머릿결에서 까마귀들의 깃털을 털어줬다.
“아까 거부 쓰면서 머리에 내려앉았나봐. 지금 네 머리 완전 둥지 같아.”
“그, 그렇군요……!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다키님!”
“이 정도 가지고 뭘.”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나의 머리를 정돈해줬다.
그러는 동안 나나는 내게 묘한 시선을 보내왔다. 얼굴이 점점 붉어져 가는 게 눈에 보인다.
그런 표정을 보고 있자니 오해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마 방금 전의 전투로 나나도 나에게 뭔가 느낀 게 아닐까?
어쩌면 동료애와 유대감 외의 다른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불현 듯 나나의 머리를 만져지는 게 쑥스러워졌다.
“으, 으흠. 다 됐다. 따로 다친 데는 없지?”
“그, 그럼요~! 다키님 덕분에 손가락 하나 안 다쳤다구요!”
겸연쩍게 화제를 전환하자 나나도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우리 둘 사이에서 어색한 분위기가 오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결코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헤베나 브릴린트 때와 같은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이어졌다.
“그러면 전리품 챙기고 슬슬 움직일까? 곧 있으면 해도 완전히 떨어질 테고.”
“그러죠! 이 무서운 동네에서 밤까지 있기는 싫으니까요!”
내 제안에 나나가 곧장 수긍했다. 우리는 그렇게 상송이 남긴 전리품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