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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60화 (6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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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귀

스르윽!

망토를 흩날리며 회피하는 상송. 이번에는 혼령화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회피가 보다 다급했으며 망토 끝자락이 쾌도에 베였다.

역시 놈도 혼령화를 막 쓸 수는 없는 모양이다. 혼령화의 비용은 무려 마력 150. 내 최대 마력과 같은 수치다. 놈이 주문 계열 클래스인 걸 감안해도 남발할 수는 없을 거다.

“……!!”

촤아아아악!

지면에 착지한 놈이 곧장 낫을 휘둘렀다. 살기어린 일격에 나는 공격 패링으로 대응했다.

카아앙!

낫과 쾌도가 맞물리면서 맑은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격 패링이 제대로 먹혀든 것이다. 상송은 순식간에 무방비 상태가 됐고 나는 왼손을 뻗으면서 소리쳤다.

“지금!”

“네!”

나나가 영창에 들어갔다. 나는 그동안 놈의 복부를 노리고 결정타를 날렸다. 마신화한 내 팔이 놈의 뱃가죽을 뚫으려 했으나 상송은 쉽게 맞아주지 않았다.

스스스스스!

놈의 몸이 검은색 안개로 바뀌었다. 혼령화로 위기를 벗어난 것이었다. 내 손은 허공만 스칠 뿐이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상송은 나와 몇 보나 떨어진 채 낫을 치켜들고 있었다.

저 개사기 스킬, 결정타까지 피하다니. 내심 불평을 토로했으나 결국 놈은 내 예상대로 움직였다.

파아아아앗!

상송의 눈앞에서 빛나는 구체가 소환됐다. 나나가 아주 정확한 타이밍에 스킬을 완성한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놈이 이동할 위치까지 파악했다. 가히 천재적인 예측 능력이었다.

“……!”

구체를 포착한 상송이 재빨리 몸을 날렸다. 찬광의 범위 밖으로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그런 상송의 이동경로를 쾌도가 가로막았다. 회피에 전념하던 놈은 갑작스레 날아든 검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애당초 내 목적은 찬광을 맞추는 게 아니었다.

방금 전에 찬광을 맞은 상송은 현재 기절 저항 효과를 받고 있는 중이다. 저항력이 올라간다고 해서 기절이 아예 안 통하는 건 아니지만 성공 확률이 급격히 낮아진다.

그렇기에 나는 놈이 찬광을 피하는 순간을 노렸다.

놈은 자신에게 기절 저항이 붙는 걸 모른다. 그러니 조금 전과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 찬광 범위에서 최대한 벗어나려 할 거다.

그 순간 놈은 움직이는 과녁이 된다. 아무리 민첩한 적이라 해도 회피할 때를 노리면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촤아아아악!!

쾌도가 대각선을 그리며 놈의 머리를 노렸다. 머리를 쪼개버릴 심산으로 섬격을 날린 것이었다. 이 공격을 시작으로 놈에게 연속기를 꽂아 넣겠다.

그 순간.

콰가가가각!!

“뭣……!”

내 검이 상송에게 닿기 직전, 지면이 갈라지면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커다란 장승이었다. 우리가 흔히 봐왔던 장승보다 훨씬 무시무시하게 생겼으며 공격으로부터 상송을 보호하듯이 입을 쩍 벌린 채 내 앞을 가로막았다.

카가아아악!!

“큭?!”

결국 내 공격은 허무하게 가로막혔다. 장승 표면엔 선명한 칼자국이 새겨졌지만 놈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섬격을 사용해도 장승을 부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설마 저것까지 들고 줄이야. 나는 질색한 얼굴로 장승을 노려보았다.

저 스킬은 역시 주술사의 소환 스킬이다. 공격에 치중된 지네신과 다르게 오로지 시전자를 지키기 위해 나타나는 소환수인 것이다.

장승 소환

액티브

요구 스탯: 신념 15

비용: 마력 30

사용 조건: 주술 무기 착용

습득 방법: 운명 항목에서 습득

효과: 3초간 캐스팅한 뒤 전방에 적의 공격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승을 소환한다. 장승은 시전자의 신념 x20만큼 생명력을 가지며 처음으로 받는 피해를 무조건 상쇄한다. 장승은 20초 후 자동으로 파괴된다.

상송의 신념 곱하기 20이면 무려 1020이라는 수치가 나온다.

그에 반해 섬격의 데미지는 500을 채 넘기지 못한다. 한두 방으론 뚫을 수 없으며 장승은 처음 받는 데미지를 무조건 0으로 만들기까지 한다.

결과적으로 내 계획은 저 장승 하나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아잉……! 맞출 수 있었는데……!”

나나가 아쉽다는 듯이 소리쳤다. 나도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나나의 귀여운 한탄 때문에 힘을 낼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격려하면서 장승을 지나쳤다.

“괜찮아 나나야! 이 정도는 전부 감안한 거야! 다시 시도하면 돼!”

황혼귀들은 매번 다른 스킬로 무장하여 이렇다 할 공략법이 없다. 놈들을 잡는 최적의 방법은 데미지로 찍어 누르거나 차분하게 가지고 있는 스킬을 하나하나 파악하는 것이다.

비록 몇 번이나 공격이 막혔으나 전혀 문제없다.

이로써 놈의 행동 패턴을 대부분 파악했다. 즉발 슬롯에 뭐가 들어있는지 다 알아낸 것만 해도 큰 수확이라 볼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싸움을 이어가면 충분히 승기를 잡을 수 있다.

분명 그럴 터였다.

콰가가가각!

콰각! 콰가각!!

“……?!”

사방에서 장승이 나타났다. 상송이 여섯 번 연달아 장승 소환을 사용한 것이었다.

설마 즉발 스킬이라고 해서 이렇게 무작정 사용할 줄이야.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장승 사이에 갇히고 말았다. 무섭게 생긴 장승들이 날 에워싼 채 입을 벌렸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놈이 날 가둔 이유는 틀림없이 시간을 벌기 위해서일 거다. 방해받지 않고 강력한 주문을 영창할 수 있는 시간 말이다.

“저 새끼 설마……!!”

상송은 다른 황혼귀들처럼 스킬 세팅이 랜덤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늘 가지고 있는 스킬이 하나 있는데, 바로 상송의 필살기라고 할 수 있는 스킬이다.

콰과과과과과과!!

불길한 예상은 적중했다. 등 뒤에서 무언가가 요동치더니 지면에 검은색 틈이 생겼다.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시커먼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마치 거센 물살처럼 흔들렸고 머지않아 소용돌이 같은 형상을 취했다.

그 이름 하여 암흑의 소용돌이, 주술 계열 최고의 적폐 스킬이 날 집어삼키기 위해서 아가리를 벌린 것이었다.

암흑의 소용돌이

액티브

요구 스탯: 신념 31

비용: 마력 250

사용 조건: 주술 무기 착용

습득 방법: 주살교전을 통해 해금

효과: 7초간 캐스팅한 뒤 전방 25미터 이내 원하는 지점에 거대한 소용돌이를 형성한다. 범위 내에 있는 적들은 소용돌이 중앙으로 끌려가며 시전자의 신념 x3만큼의 암흑 피해를 지속적으로 받는다. 소용돌이는 9초 동안 지속되며 피격된 대상의 인내력을 무시하고 경직을 준다. 단, 스킬이 유지되는 도중 시전자가 피해를 받으면 소용돌이는 즉시 소멸한다.

가디스 던전에서 주술은 굉장히 강력한 스킬군으로 통한다.

홀딩이나 실명 등, 적을 방해하는 스킬이 많고 직접적으로 능력치를 하락시키는 약화 계열 스킬도 다수 갖추고 있다. 그런 캐릭터가 데미지도 마법사 못지않게 세서 가디스 던전 직업 순위에서 항상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캐릭터인 것이다.

그런 주술사인 만큼 대부분의 스킬이 엄청난 효율을 자랑하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최고를 뽑으라면 반드시 암흑의 소용돌이가 거론된다.

통칭 앰흑의 씹용돌이. 유저들이 부르는 별칭, 아니, 멸칭만 봐도 이 스킬이 얼마나 극악한 밸런스 붕괴를 가져오는지 알 수 있다.

일단 범위가 미친 듯이 넓고 판정이 진짜 양심 없을 정도로 좋다.

끝부분에 살짝 걸치기만 해도 바로 경직이 걸리며 경직 당하는 순간 중앙으로 끌려들어가니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뭘 해볼 새도 없다. 더군다나 인내력을 무시하는 효과도 있어서 최상위급의 회피 스킬이 아닌 이상 어떻게 빠져나올 방법이 없는 거다.

거기에 더해 데미지도 미친 듯이 높다. 상송을 기준으로 한 번 맞을 때마다 153의 데미지가 들어온다. 그걸 1초당 한 번씩 주니 다 맞으면 무려 1377이라는 정신 나간 데미지가 나오는 것이다.

1377.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내 열공의 한 획 데미지가 1천이 조금 넘는다. 무기 내구도를 20퍼센트나 깎아먹고, 3초 동안 죽을 각오를 하고 사용해야 간신히 1천을 넘기는 것이다.

물론 암흑의 소용돌이 캐스팅 시간도 꽤 길긴 하다. 7초 동안 멀뚱히 주문만 영창하는 건 그냥 자길 죽여 달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상송은 주술사다. 소환수들을 불러내 캐스팅 시간을 확보할 수 있고 기본적으로 적과 거리를 벌린 채 싸운다.

내가 폭풍의 숏소드 들고 3초 기 모으는 것보다 저놈이 멀리서 7초 캐스팅하는 게 훨씬 쉬울 수밖에 없다.

실제로 놈은 내가 장승들이랑 씨름하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주문을 완성시켰다. 소용돌이는 점점 커졌고 당장이라도 날 삼키려 했다. 잡히는 순간 죽는 것과 다름없다.

나나에게 치료받아서 풀피가 되긴 했지만 630의 빈약한 생명력으론 저 딜을 버티지 못한다.

“당하고만 있을 것 같냐!!”

허나 나도 가만히 멍 때리고 있었던 건 아니다. 필사적으로 공격을 퍼부어 장승 하나를 거의 부숴놓았다. 스킬 한 번 만 더 쓰면 얼마든지 탈출이 가능하다.

그렇게 다시 한 번 섬격을 사용하여 장승을 두 동강 내려할 때였다.

“다키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구해드릴게요!”

“……?! 나나 너 여기서 뭐하는 거야?! 오지 마, 위험해!”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나나가 급하게 달려왔다. 그녀는 어디서 주워왔는지 녹슨 도끼 하나를 챙겨서 장승을 향해 휘둘렀다.

“씹새끼야! 우리 다키님을 놔줘어어엇!!”

캉! 카앙!

어설프게 도끼를 휘두르는 나나. 전력을 다하는 그녀였지만 고작 녹슨 도끼 하나로 장승들을 부술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도끼는 언제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듯이 우지끈 소리를 냈다. 그럼에도 나나는 눈에 불을 켜며 도끼질을 이어갔다.

“나나야…….”

그녀는 날 필사적으로 구하려 했다. 여기 있으면 상송에게 공격당할 수 있는데도 몸을 사리지 않고 날 위해 위험에 뛰어든 것이다.

그 모습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친구 한 명 없었던 내게, 가족들에게도 소외당했던 내게 동료애란 게 무엇인지 느끼게 해준 것이었다.

그렇게 감성에 빠지려는 찰나, 번뜩이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잠깐만 나나야! 도끼질 그만 하고 내 얘기 좀 들어봐!”

“네?! 하지만 다키님 뒤에……!”

나나가 식겁하면서 소리쳤다. 그녀 말대로 내 등 뒤에선 암흑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것은 기어이 내 몸에 닿았고 나는 수많은 사람에게 붙잡힌 것처럼 소용돌이 중심을 향해 끌려갔다.

콰아아아아아!!

“으, 으어어어어억!”

“다키님!!”

다음 순간 뼈가 부러지는 통증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허나 나는 수정쐐기를 자기 가슴에 박은 미친놈이다. 이 정도 고통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이 악물고 버티며 나나에게 소리쳤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들어! 나나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달렸어!!”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빨리 말하세요, 이대로 가다가 다키님이 죽겠어요!!”

“저놈은 지금 나한테 정신이 팔려 있어! 놈이 한 눈 팔고 있는 사이에 아다아다 러쉬를 먹여줘!!”

그녀도 내 팬이라면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것이다.

“제, 제가 아다아다 러쉬를……!”

예상대로 나나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녀의 얼굴에 사명감이 떠올랐다. 나는 고통을 참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나야! 너라면 할 수 있어! 네가 해내면 저놈한테 이길 수 있을 거야!!”

방금 전, 나는 나나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딱히 나나가 방해돼서 탈출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구태여 탈출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존재가 승리의 단초가 되어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스킬을 퍼부어서 탈출해봤자 상송은 또 혼령화로 도망갈 것이다. 그 다음에도 지네신이나 장승 등을 소환하여 날 압박하고 기회를 봐서 암흑의 소용돌이 같은 강력한 주술을 사용하겠지.

놈도 마력의 한계가 있는 이상 몇 번이나 같은 방법을 쓸 수 없겠으나 놈의 마력이 떨어지는 것보다 내가 지치는 게 더 빠를 거다. 이런 식으로 소모전만 이어가면 내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것이다.

그렇기에 나나와 협력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내게 도움만 받는 약자가 아니다. 스스로 싸울 수 있고, 그럴 만한 용기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녀가 있는데 혼자 싸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알겠어요 다키님……! 조금만 버티세요!!”

나나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그녀는 원을 그린 장승들을 돌아 상송에게 달려갔다. 누가 봐도 도박이지만 나는 그녀를 믿는다. 그녀라면 해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야이 비겁한 새끼야!! 너도 남자 새끼면 이딴 수작 부리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일기토로 싸워! 좆 달고 쪽 팔리지도 않냐?!”

나나의 안전을 위해서 어그로를 끌었다. 상송이 나에게 신경을 쏟게끔 한 것이다.

“…….”

비난을 퍼붓자 상송이 멀뚱히 나를 바라보았다. 놈은 들고 있던 낫을 등에 매더니 갑자기 양팔을 휘젓기 시작했다.

그 동작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관을 보는 것만 같았다.

“저 새끼가……?”

저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금세 알아챘다.

저놈은 날 도발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아무 것도 못하니 날 위한 장송곡이라도 연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티배깅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고 나에게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심어주었다. 동시에 원작 게임을 플레이할 때의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했다.

상송의 악랄한 황혼귀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놈의 강함 때문만이 아니다.

놈은 플레이어를 암흑의 소용돌이로 가둔 후에 꼭 저렇게 지휘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다른 주술을 사용해서 빠르게 끝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헛짓거리를 하면서 플레이어의 죽음을 감상하는 것이다.

어떤 놈의 발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악의적인 AI다. 보고 있으면 욕이 절로 나온다. 애초에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모친 유무를 알 수 있다는 적폐 스킬을 쓰는 새끼가 티배깅까지 완벽하게 하니 욕지거리가 안 나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로써 전투의 주도권은 우리에게 넘어왔다. 놈이 헛짓거리를 하는 사이에 나나가 놈의 지근거리까지 당도한 것이었다.

“씨발년아아아아아앗!!”

퍼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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