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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귀
“하아아…….”
한동안 무령을 울리던 상송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주술을 완성한 것이었다. 나는 그 움직임을 하나하나 관찰하며 대응에 나섰다.
‘무령이 가슴보다 조금 아래에 있다. 무령을 울린 시간은 대략 5초, 그렇다면 놈이 사용할 주술은 분명 도깨비불……!’
플레이어들과 다르게 황혼귀들은 주문을 외우지 않는다. 말을 하지 못한다는 설정이어서 주문 내용을 듣고 어떤 공격을 해올지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공격을 예측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주문 시전에 필요한 행동은 똑같이 취하며 캐스팅 시간 역시 동일하다.
그것들을 종합하면 어떤 주문이 나올지 예상할 수 있다. 이를 파악한 나는 곧장 놈을 향해 달려갔다.
도깨비불은 주술사의 대표적인 공격 스킬 중 하나다.
암흑 속성을 주로 사용하는 주술 중에서도 특이하게 화염 속성인 스킬로 전방을 향해 폭발하는 불덩어리를 발사한다.
암흑 속성이 담겨 있긴 하지만 결국 기본 베이스는 화염이다. 그 말은 즉 내가 가진 화염의 리본으로 막아낼 수 있다는 소리다.
화르르르륵!!
상송의 무령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노을빛으로 일렁이던 불꽃은 도깨비 같은 형상을 취한 채 내게 날아왔다.
나를 태워죽일 기세로 날아온 불꽃이었으나 소용없다. 요사스러운 불꽃은 나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못한다.
놈에게 가까워진 순간 새하얀 불꽃 이펙트가 내 몸을 감쌌다. 리본의 효과가 발동된 것이다.
“유감이다!”
파아앗!
이글거리는 불길을 그대로 뚫고 지나갔다. 마치 저승에서 올라온 것 같은 불쾌한 열기가 온몸을 뒤덮었으나 데미지는 전혀 없었다.
나는 그대로 상송의 코앞까지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날카로운 검선이 놈에게 향했다. 뒤늦게 등 뒤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또 다른 주문을 준비하는 상송이었으나 대응하기엔 너무 늦었다. 놈은 반격조차 못하고 내 검에 베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스스스스스.
“……!”
놈의 몸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쾌도로 놈의 몸을 베었음에도 베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림자 같은 검은색 기체만이 내 앞에서 아른거릴 뿐이었다.
촤아악!
“크학……!”
그렇게 당황할 무렵, 난데없이 옆구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초단위도 지나지 않아 피가 터져 나왔으며 고통이 척추를 내달렸다.
안개처럼 사라진 상송은 어느덧 내 뒤에 서 있었다. 놈이 내 몸을 통과하면서 허리를 벤 것이었다.
‘이 새끼 설마 혼령화를……!’
이 비현실적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건 혼령화라는 스킬뿐이다. 놈이 기본적으로 주술사라는 것을 생각하면 틀림없다.
혼령화
액티브
요구 스탯: 신념 25
비용: 마력 150
사용 조건: 주술 무기 착용
습득 방법: 운명 항목에서 습득
효과: 3초간 캐스팅한 뒤 무적 상태가 된다. 2초 동안 지속되며 이동 속도가 대폭 상승한다. 스킬 발동 도중엔 이동 밖에 할 수 없다. 적에게 공격받을 때 사용하면 선딜레이가 대폭 감소한다.
무적 상태가 되어 빠르게 이동하는 스킬. 3초 동안 캐스팅해야 해서 사용하기 까다로워 보이지만 즉발 슬롯에 올려뒀다면 최고의 회피기가 된다.
놈은 혼령화를 사용해서 내 공격을 피한 것이다. 그 후 곧바로 혼령 상태를 해제하여 반격을 가했으리라.
“다키님……!!”
나나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그녀의 외침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다급히 몸을 돌리면서 나나에게 대답했다.
“이 정도는 괜찮아! 회복 주문 한 번이면 바로 나을 거야!”
“네……! 위대한 빛의 창세신이시여……!”
내 말을 듣고 나나가 영창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상송의 낫이 나에게 날아들었다. 양손 무기라곤 믿기지 않을 속도였다. 나 역시 쾌도의 공격 속도를 살려 빠르게 닥쳐오는 낫을 전력으로 튕겨냈다.
카아앙! 카앙! 카가앙!
놈의 공격에는 살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오직 날 죽이기 위해서 낫을 휘두르고 있다는 게 피부로도 느껴졌다.
공격을 주고받을 때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지만 반대로 이점도 있었다. 살기가 워낙 강한 탓에 어느 방향에서 공격해올지 보다 쉽게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낫의 평타는 주로 대각선과 횡공격 위주. 1대1이라는 걸 감안하면 범위가 넓고 느린 횡공격 보단 강하고 빠른 대각선 공격을 사용하겠지!’
놈의 패턴을 파악하면서 연이어 공격을 튕겨냈다. 방어 패링에 성공할 때마다 내 앞에 새하얀 보호막이 나타나 상송이 준 데미지를 상쇄했다.
격변이나 사영격 등으로 반격할 수도 있겠지만 놈이 피하거나 패링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반격 계열 스킬은 성공할 경우 큰 이점을 가져다주는 반면 실패했을 땐 적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팅! 티잉! 티디이이잉!!
그렇기에 난 거센 공격으로 상송을 몰아붙였다. 공격 후의 후딜레이를 하나하나 캐치하여 여지없이 연격을 가했다. 어느덧 상송은 공격보단 방어에 열중하게 됐고 점점 뒤로 물러났다.
근접전에서 날 이기지 못한다고 판단하면 상송은 다시금 혼령화를 써서 거리를 벌릴 거다. 그 후엔 도깨비불 같은 위험한 주술로 날 압박하리라.
허나 혼령화라고 해서 만능인 것은 아니다.
최고의 회피기 중 하나인 것은 맞으나 이 스킬에도 엄연히 허점이 존재한다. 사용하고 난 후에는 후딜레이 때문에 약간 빈틈이 생기는 것이다.
그때를 노리면 오히려 놈의 전략을 이용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놈의 방어가 허술해지는 게 눈에 보였다. 내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다.
“하아아……!”
후우웅!
공방전을 이어가던 상송이 있는 힘껏 올려 치기를 가했다. 날 떼어내려는 속셈이었다. 여기까진 내 계획대로다. 나는 막거나 회피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공격을 튕겨냈다.
카아아아앙!!
쾌도와 낫 사이에서 화려한 이펙트가 터졌다. 공격 패링에 성공한 것이었다. 무방비 상태가 된 상송이 날 노려보았다. 놈의 눈빛에서 위기감이 엿보였다.
“흐읍!”
스스스스스!
내가 결정타를 먹이려는 순간 상송의 몸이 검은색 기체로 변했다. 그것은 마치 허공에서 움직이는 그림자와도 같았다.
역시나 놈은 혼령화를 사용했다. 혼령 상태가 된 상송은 빠르게 거리를 벌렸고 순식간에 십여 미터나 이동했다. 놈은 근처에 있는 폐가에 도착한 후에야 혼령 상태를 해제했다.
딸랑, 딸랑, 딸랑!
안전거리를 확보한 상송이 다시금 무령을 흔들었다. 원거리에서 주술을 사용할 속셈이다. 놈은 내가 접근하는 것보다 자신이 주문을 완성하는 게 더 빠를 거라 생각하고 있다.
내가 바라던 상황이 완벽하게 실현됐다. 나는 급박한 목소리로 나나에게 소리쳤다.
“나나야, 지금이야! 찬광으로 기절시켜!”
“위대한 빛의 창세신이시여! 태양처럼 눈부신 빛으로 저 새끼 눈을 멀게 해주세요!”
나나가 홀장을 치켜들었다. 그녀는 상송을 노려보면서 또박또박 주문을 외웠다.
그에 대항하듯 상송도 빠르게 무령을 흔들었으나 나나 쪽이 좀 더 빨랐다. 눈치 빠른 나나는 놈이 무령을 흔들기도 전에 이미 주문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아앗!!
이윽고 나나의 찬광이 완성되었다. 눈부신 구체가 상송 앞에 나타나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번쩍였다.
주문을 계속 영창하든 캔슬하고 회피하든 섬광이 터지는 게 더 빠를 거다.
상송은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기절하게 되리라. 나는 놈을 치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상송은 인간형 적이어서 인내력도 낮고 생명력도 2천 정도다.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면 약간의 빈틈만 생겨도 충분히 잡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놈에게 돌진할 때였다.
딸랑!
“……?!”
놈이 갑작스레 캐스팅을 취소했다. 크게 손을 터는 동작이 그 증거였다.
기존의 캐스팅을 캔슬한 뒤 혼령화를 사용하려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선딜레이 때문에 그러지 못할 거다.
지금은 직접적으로 공격받는 상황이 아니라 혼령화의 선딜레이 감소 효과를 받을 수 없다. 결국 혼령화를 쓰나 마나 찬광에 맞는 건 똑같다.
놈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알고 있으리라. 상송은 원작 게임에서도 똑똑한 AI로 플레이어들에게 온갖 고통을 선사했다. 게임 세계의 상송이라고 해서 멍청하진 않을 거다.
거기까지 생각한 내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츠츠츠츠츠츳!!
그것은 웬 더듬이였다. 상송의 망토 속에서 기다란 더듬이가 기습적으로 튀어나와 나나에게 뻗어나갔다. 난 그제야 놈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 나나야 당장 피해!!”
“네? 꺄아악!!”
상송에게 달려가던 나는 다급히 경로를 바꿨다. 동시에 나나가 깔아둔 찬광도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번쩍이는 빛을 뒤로하며 나나에게 몸을 던졌다. 그러자 섬광을 꿰뚫은 무언가가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거센 풍압이 불어옴과 동시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키이이이이잇!
콰아아아앙!!
가까스로 나나를 붙잡은 나는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같은 순간 나나가 있던 장소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다. 고개를 돌리니 버스만한 지네가 땅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으며 한 차례 지면이 흔들렸다. 지네가 파고든 구멍 주위엔 방사형 균열이 새겨져 있었다.
멀뚱히 서 있었다면 나나는 거대 지네의 박치기를 맞고 말 그대로 박살났을 거다. 생각만 해도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저, 저게 뭐예요 다키님?!”
나와 함께 바닥을 구른 나나가 경악하며 물었다. 나는 서둘러 그녀의 몸을 일으킨 뒤 빠르게 설명했다.
“지네신이야! 데미지도 엄청 세고 맞으면 중독 걸려! 스쳐도 안 돼!”
“추, 축구 감독이요……?”
“아니 지네딘 말고 지네신! 주술사가 소환하는 소환수라고! 또 공격해올 테니까 얼른 피해!”
츠츠츠츠츠츳!!
내가 말하기 무섭게 땅속으로 들어간 지네가 발밑에서 튀어나왔다. 진동을 느낀 나는 나나를 끌어안은 채 다시 한 번 옆으로 굴렀다.
콰가가가가가각!!
다음 순간 무수히 많은 다리가 우리의 곁을 지나갔고 흙과 돌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미친 듯이 날뛰는 거대 지네를 노려보며 나는 낭패감을 느꼈다.
‘설마하니 상송놈 지네신까지 즉발 슬롯에 올려뒀을 줄이야……!’
주술사는 디버프와 지속딜, 그리고 소환에 특화된 주문 계열 클래스다. 그리고 저 커다란 지네는 그런 주술사의 소환 스킬 중 하나다.
지네신
액티브
요구 스탯: 신념 23
비용: 마력 80
사용 조건: 주술 무기 착용
습득 방법: 운명 항목에서 습득
효과: 3초간 캐스팅한 뒤 거대한 지네를 소환하여 적들을 공격한다. 전방 18미터까지 돌진하여 경로 상에 있는 모든 적에게 시전자의 신념 x15만큼 타격 피해를 준다. 지네는 30의 저지력을 가지고 있으며 피해를 받은 적에게 50의 중독 수치를 부여한다. 적을 타격하기 전에는 최대 8초까지 소환 상태를 유지한다.
무려 시전자의 신념 15배만큼 피해를 입히는 걸로도 모자라 중독 효과, 저지 효과, 추적 효과까지 가진 말도 안 되는 스킬이다.
거기다가 상송의 신념은 약 30. 놈이 들고 있는 무령의 효과까지 더하면 신념이 최대 51까지 올라간다.
그 말은 곧 지네신의 데미지가 무려 765나 된다는 소리다. 여기에 50의 중독 수치까지 달렸으니 총합 데미지는 더욱 높아진다. 중독 효과를 배제하더라도 나와 나나는 한 대만 맞아도 즉사할 것이다.
콰과과과광!!
이리저리 피하는 사이에 지네신의 소환이 해제됐다. 놈은 사라지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몸부림쳐 주위에 있던 폐가를 모조리 박살냈다.
지네신이 사라진 건 좋았으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어느덧 상송도 기절에서 풀려났기 때문이다.
“하아아…….”
스르르르릉.
낫을 쓰다듬으면서 다가오는 상송. 흙먼지를 가르며 나타난 놈의 모습은 저승사자를 방불케 했다. 때마침 땅거미가 지기 시작해서 놈을 향한 공포감이 배로 커졌다.
“다키님…… 저 새끼 진짜로 잡을 수 있는 거예요……?”
나나가 바들바들 떨면서 물었다. 나도 그녀 못지않게 무서웠지만 나까지 약한 소리를 할 수는 없다. 나는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면서 단언했다.
“잡을 수 있어. 그러니까 나나 너도 겁먹지 마.”
“아까는 수틀리면 저라도 도망치라 했으면서……!”
“그건 맞는데 아직 그 정도로 수틀리진 않았어!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려!”
딸랑, 딸랑.
내가 나나를 격려할 무렵 상송이 무령을 흔들었다. 새로운 주술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나는 재빨리 놈을 향해 달려갔다.
“나나야, 방금 전처럼 다시 한 번 찬광 맞출 수 있겠어?!”
달려가는 도중 나나에게 물었다. 그러자 나나는 당혹스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맞출 수는 있는데 기절 저항 생긴다면서요……!”
“저항해도 괜찮아! 최대한 놈을 방해하기만 하면 돼!”
그렇게 말하며 상송에게 횡베기를 가했다. 피할 거란 것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상관없다. 맞든 피하든 캐스팅은 끊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