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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귀
“……! 다키님 이 소리……!”
나나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덧 사색이 되어 있었다. 나보다 청각이 좋으니 이 끔찍한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을 거다.
“……아무래도 내 예상이 맞은 모양이야.”
나 역시 긴장감을 느끼고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역시 놈은 마을 안에 있었다.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아직 살아남은 놀이 있는 모양이다. 그만큼 저쪽에서 우리를 눈치 챌 확률도 낮아지겠지.
애당초 이곳은 놈의 인식 범위 밖, 선공의 기회는 우리가 쥐고 있다. 이대로 살금살금 접근하면 확정적으로 기습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나야 지금부터 가급적 말하지 말고 발밑도 조심해. 기습 실패하면 엄청 힘들어질 테니까.”
내 지시에 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했는지 행동이 과장스럽다. 무리도 아니다. 나도 놈과 가까워질수록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저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압박감을 버텨내기 힘들 거다.
그렇게 우리는 무너진 건물 사이를 지나 마을 광장에 도착했다.
“맙소사…….”
광장의 전경을 본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 눈앞에 펼쳐진 건 그야말로 지옥도였다. 어딜 봐도 시체가 가득했으며 피와 살점들이 사방팔방 흩뿌려져 있었다. 발을 들이자마자 역한 쇠 냄새 탓에 구토감이 밀려올 정도였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시체들은 비단 바닥에만 널려 있지 않았다. 광장에는 서낭당처럼 생긴 커다란 나무가 있었는데, 마치 장식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십여 마리의 놀들이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놀들의 얼굴은 전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끔찍한 고통을 맛본 것이리라. 사지육신이 멀쩡한 놈은 단 마리도 없었으며 다들 어디 한 군데 잘려나간 상태로 피와 내장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까악! 까아악!
그런 놀의 시체를 여기저기서 날아온 까마귀들이 게걸스럽게 파먹었다. 정말 악취미적인 광경이다. 원래 세계의 나였다면 이 시점에서 이미 졸도했을 거다.
“다, 다키님 저 놈 혹시…….”
내가 수많은 시체들을 보고 압도당할 때였다.
나나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확인했고 그곳엔 다른 놈들 보다 훨씬 큰 놀이 만신창이가 된 채 서 있었다.
[허억……! 허억……!]
어마어마한 거구였다. 도끼잡이 이상으로 비대한 체구는 양손에 든 그레이트 액스를 손도끼처럼 보이게 할 정도로 커다랬다.
그 압도적인 크기를 보고 놈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바로 이 무리의 대장이자 신령이 다니는 길의 보스, 놀 우두머리인 것이다.
매서운 연격 패턴과 빠른 공격 속도, 슈퍼 아머 스킬을 갖추고 있어서 초보자들에게 큰 난관을 안겨주는 보스. 유저들 사이에선 수문장, 혹은 제초기라고 불릴 만큼 악명 높은 몬스터다.
그런 무시무시한 몬스터가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걸레짝이 됐다. 온몸은 피로 물들었고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운지 연신 휘청거렸다. 진짜 거짓말 안 하고 한 대 툭 치면 죽을 것 같은 몰골이었다.
[크오오오오오옷!!]
비틀거리던 우두머리가 갑작스레 포효했다. 마지막 남은 생명력을 쥐어짜듯 소리친 놈은 어딘가를 노려보았다. 그곳에선 웬 남자가 자기 키만한 낫을 끌며 걸어오고 있었다.
“하아아…….”
새하얀 백발에 붉은색 눈동자를 가진 장신의 남성이었다.
꽤 미형의 얼굴인 것 같지만 해골 모양 가면으로 얼굴의 반 이상을 가려서 음침한 인상을 줬다. 거기에 검은색 망토와 정장, 커다란 낫까지 더해지니 서양의 사신을 보는 듯했다.
“카, 카네키 군……?”
문득 나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자의 모습을 보고 어떤 만화의 주인공을 떠올린 것이리라.
그럴 만도 하다. 나는 그 만화 안 봐서 잘 모르겠지만 가디스 던전 커뮤니티에서도 저놈을 부를 때 카네키라는 별명을 자주 쓰곤 했다. 저 특이하게 생긴 가면이 만화 캐릭터가 쓴 마스크와 비슷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커허어어엉!!]
그때였다. 놀 우두머리가 지면을 박찼다. 놈이 있던 자리에 방사형 균열이 새겨졌고 주위에선 풍압이 몰아쳤다. 그것은 두 말할 것 없이 전투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동하는 것만으로 공간이 요동치다니. 정말 엄청난 박력이었다. 저놈이 내 쪽으로 달려왔다면 정신이 아찔해졌을 거다.
놈이 노리는 것은 당연히 검은 정장의 남자. 둘 사이의 거리는 시시각각 좁혀졌고 눈 깜짝할 사이에 우두머리가 남자의 지근거리로 육박했다.
이윽고 한 쌍의 도끼가 X자를 그렸다. 놈은 그대로 남자를 조각낼 심산이었다.
우두머리의 공격력은 한 방당 250. 저 공격에 맞으면 순식간에 500이나 되는 무지막지한 딜이 들어갈 거다. 딜러나 힐러라면 말할 것도 없고 탱커조차 직격당하면 치명상을 면할 수 없는 데미지다.
그러나 검은 정장의 남자는 피하지도, 막지도 않았다. 그는 멀뚱히 도끼가 날아오는 것을 구경했다. 누가 보면 죽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처럼 보일 거다.
하지만 난 이미 결과를 알고 있다.
이 싸움은 놀 우두머리의 압도적인 패배로 끝나리라.
서걱!
맹렬히 날아든 도끼가 남자를 찢어발기려던 순간이었다.
[케헤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남자가 우두머리를 지나쳤다. 순간이동을 방불케 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우두머리의 도끼는 허공만 갈랐고 놈은 곧 단말마를 내질렀다.
푸화아아악!
다음 순간 우두머리의 목덜미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터진 수도꼭지를 보는 것 같았다. 마개 역할을 해줘야 할 머리통은 저 멀리 날아갔고 우두머리는 이내 힘없이 쓰러졌다.
털썩!
과연 이걸 싸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쓰러지는 우두머리를 보니 불현듯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남자의 힘 앞에서 우두머리의 박력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놈과 남자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었다.
이것은 일방적인 유린, 아니, 처형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싸웠다는 자각도 없을 거다. 그에게 있어 우두머리와의 전투는 죄수의 목을 치는 것만큼이나 손쉬운 일이었을 테니까.
“하아아…….”
촤악! 촤아악!!
우두머리가 쓰러진 후 남자는 뭐가 그렇게 원망스러운지 놈의 시체를 난도질했다.
낫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우두머리의 시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됐다. 사지육신이 잘려나가고 내장이 튀어나왔다. 어지간한 슬래셔 무비 저리가라 할 정도로 끔찍한 장면이 이어졌다.
“……!”
너무나 잔혹한 광경에 나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떨리고 있는 걸로 보아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그런 와중에도 비명을 참는 건 대견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놈이 내가 말한 몬스터야…… 주살의 칼날 상송…… 이 지역, 아니, 초반부를 통틀어서 가장 위험한 적 중 하나지.”
촤아악! 촤아악!!
내가 말하는 도중에도 상송, 통칭 카네키는 난도질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형체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인데 언제까지 고인, 아니, 고견? 어쨌든 간에 얼마나 더 죽은 자를 모욕해서 직성이 풀리는 걸까. 놈의 잔혹성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하아아…….”
한동안 시체를 썰던 상송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저녁놀처럼 붉게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불꽃이 피어오르듯 오른쪽 눈에서 커다란 안광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요…… 저 남자 착한 사람은 아니죠……?”
그 모습에 위축된 나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놀은 플레이어의 적. 그런 놈들을 처치해줬으니 우리에겐 우호적일 수도 있다. 나나는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말했으리라.
허나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히 부정했다.
“착하기는커녕 말도 안 통하는 미친놈이야. 대화로 해결할 여지는 1도 없어.”
“으으……. 생긴 건 사람처럼 생겨 놓고…….”
오만상을 지으며 질색하길 잠시, 나나의 시선이 상송에게 고정됐다. 관찰이라도 하는 건가? 한동안 상송을 살펴보던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내게 물었다.
“그럼 놀들은 왜 죽인 거래요? 시체도 험하게 다루고…… 확인 사살치곤 너무 과한 것 같은데…….”
“굳이 말하자면 종특이지……. 설정상 저놈 같은 레버넌트들은 사람과 몬스터를 가리지 않고 산 자들을 모조리 증오하는 습성이 있어. 그래서 죽이고 난 다음엔 저렇게 꼭 고인능욕을 하더라고.”
“자기 혼자 재미 보는 중인데 이틈에 슬쩍 지나가면 안 돼요……? 이렇게까지 가까이 왔는데도 눈치 못 챘잖아요. 몰래 지나가면 분명…….”
“아니, 원작 게임하고 같다면 여기서 몇 발자국만 더 움직여도 바로 인식할 거야. 놈은 어지간한 몹들 보다 인식 능력이 좋아서 그냥 지나치는 건 불가능해.”
“히잉…….”
레버넌트, 다른 말로 황혼귀들의 인식 능력은 가디스 던전의 몬스터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다.
지금이야 인식 범위 안에 들어가지 않아서 눈치 못 채는 거지, 범위에 들어가는 순간 곧장 공격해올 거다.
“결국 여길 지나가려면 저놈을 잡는 수밖에 없다는 거네요…….”
울상을 짓던 나나가 진지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녀의 눈빛에 비장함이 어렸다. 나나도 끝내 자각한 것이리라. 이 앞에 놓인 난관은 결코 편법으로 넘어설 수 없다는 걸 말이다.
“이제 와서 말 바꿔도 뭐라 안 할 게. 무서우면 먼저 도망쳐도 돼. 지금이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무섭긴요……! 살짝 긴장한 것뿐이에요……! 전 이미 준비됐으니까 언제든지 시작하셔도 돼요……!”
내 마지막 제안에도 나나는 꿋꿋하게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상송을 직접 보면 생각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나나 역시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거겠지.
그녀의 각오는 잘 알겠다. 더 이상 배려해줄 필요는 없으리라. 나 또한 현 상황에 집중하면서 작전을 이야기했다.
“좋아, 그럼 지금 바로 저놈한테 찬광을 써. 거의 백 퍼센트로 피하겠지만 적어도 내 공격에 대응하기는 힘들어질 거야. 주문이 완성되면 내가 뛰쳐나가서 선공을 먹일게.”
“알겠어요 다키님……! 어디 보자…… 찬광 주문이…….”
지시받은 나나가 양손으로 홀장을 쥐었다. 그녀는 곧 찬광의 주문을 확인하여 낮고 뚜렷한 목소리로 법술을 영창했다.
“위대한 빛의 창세신이시여…… 태양처럼 눈부신 빛으로 적의 눈을 멀게 해주세요……!”
파아아아앗!!
“……!”
영창을 마치자 상송의 눈앞에 빛나는 구체가 소환됐다. 우두머리를 해체하는데 정신이 없던 놈은 뒤늦게 그것을 발견하고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타앗!
순식간에 찬광 범위에서 벗어난 상송. 과연 황혼귀 중에서도 악명 높은 놈답게 회피 능력, 상황 대처 능력 모두 탁월했다. 움직임도 날렵했지만 어떻게 이동해야 찬광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창졸간에 파악한 것이다.
허나 이것으로 놈의 주의는 찬광에게 쏠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건물 사이에서 튀어나갔다.
“흐읍!!”
약진과 함께 사용한 스킬은 파고들기. 짧은 거리를 빠르게 돌진하는 효과가 있어서 중단거리에 있는 적을 상대할 대 매우 효과적이다.
자세를 취한 직후, 강력한 올려 치기와 함께 내 몸이 가속했다. 상송과 나의 거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좁혀졌고 이내 쾌도가 상송의 몸을 크게 갈랐다.
촤아아아악!!
“……!”
피가 왈칵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파고들기의 에어본 효과로 상송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무렵 나나가 깔아둔 찬광이 눈부신 섬광을 뿜어내 주위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제대로 먹혀들었다. 내 생각대로 찬광에 대응하느라 옆에서 가해지는 기습을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이대로 콤보를 이어가면 큰 피해를 줄 수 있겠지만 상송도 거기까진 당해주지 않았다.
펄럭!
공중에 뜬 놈이 순식간에 지상으로 착지했다. 낙법을 이용해 에어본 상태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까마귀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같았다.
그 후에도 놈은 몇 번인가 스텝을 밟아 나와 거리를 벌렸고 어느덧 상송과 나의 간격은 수십 미터나 벌어졌다.
“하아아…….”
까악! 까악! 까아악!
자세를 가다듬으며 나와 대치하는 상송. 놈이 낫을 들어 올리자 주위에 있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붉은빛 하늘은 어느덧 까마귀들의 군무로 새카맣게 물들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놈의 안광은 아까보다 한층 더 크게 뚜렷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붉게 물든 노을이 놈의 눈동자 속에 담긴 것만 같았다.
“지금이에요 다키님! 멍 때리고 있을 때 한 방 먹이세요!”
나나가 다급히 소리쳤다. 날 위해 조언해준 건 고마우나 놈과의 전투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무턱대고 덤벼들면 역으로 당할 뿐이다.
“함부로 공격하면 안 돼! 나나 너도 최대한 물러나 있어! 곧 주술을 쓸 거야!”
“주, 주술이요?”
내가 나나에게 소리칠 때였다.
딸랑, 딸랑.
딸랑딸랑딸랑!
맑고 명료한 방울 소리가 광장 전역에 울려 퍼졌다. 상송이 들고 있는 새하얀 방울에서 나는 소리였다.
놈이 왼손에 들고 있는 방울은 무령이란 물건으로 주술사들이 사용하는 전용 무기다. 그것을 흔든다는 건 주술을 사용할 거라는 신호다.
“놈은 플레이어형 몬스터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놈도 다 할 수 있어! 게다가 놈이 무슨 스킬을 가지고 있는지는 나도 몰라! 그러니까 섣불리 공격하면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다키님은 가던만 6천 시간 플레이하셨는데……!”
“저놈 스킬셋은 전부 랜덤이거든! 매번 상대할 때마다 다른 스킬을 들고 와서 어떤 전술을 쓸지 전혀 예측할 수 없어!”
황혼귀들은 특정 조건이 만족되면 출현하는 히든 몬스터다.
한쪽 눈에서 주황색 안광이 나온다는 것을 제외하면 플레이어와 똑같이 생긴 인간형 적으로, 플레이어에게 허락된 모든 행동할 수 있다.
더군다나 능력치도 플레이어 보다 훨씬 높고 스킬셋도 랜덤이라서 고인물조차 상대할 때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플레이 타임이 길어도, 모든 적의 패턴을 파악하고 있더라도 황혼귀들을 상대할 때만큼은 긴장해야 한다.
놈들과의 전투는 사실상 PVP나 다름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