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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귀
더 이상 실랑이 벌일 시간은 없다. 하지만 그녀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설득했다.
“남 좋은 짓만 하는 게 아니야. 이렇게 안 하면 나나 네가 너무 위험해지니까 그래. 애초에 난 혼자 싸우는 게 더 편하고.”
“그게 남 좋은 짓이잖아요! 어떻게 봐도 저 하나 살리겠다고 다키님이 희생하는 걸로 밖에 안 보인단 말이에요! 그런 건 대가리 빈 호구 새끼들이나 하는 짓이라고요!”
나나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점점 붉어지는 그녀의 눈시울을 보고 나는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나나는 진심으로 내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나야…….”
“고작 몇 시간 전에 만난 애 하나 살리겠다고 그러는 건 너무 이상해요! 이성적인 생각이 아니라고요! 오히려 절 미끼로 던져두고 다키님 혼자 도망쳐야 정상 아니에요?! 다키님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요!”
나나의 말에 나는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맞다. 내가 하는 행동은 결코 이성적인 행동이 아니다. 나나가 말한 대로 남 좋으라고 하는 호구 짓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난 그녀의 말대로 할 수 없었다. 나나를 미끼로 쓰기는커녕 그녀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비단 그녀가 뉴비라서, 나한테 잘 해준 귀여운 여자애라서 그런 게 아니다.
더 이상 무고한 사람이 내 눈앞에서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자네스 영지에서 겪은 일은 내 마음 속 한 구석에 깊게 파고들어 있었다.
그때 느낀 무력감, 절망감, 죄책감을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 한 번 나눠보지 못한 사람들의 죽음도 이렇게 가슴이 짓누르는데 나나까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이건 그녀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날 위한 일이기도 하다.
더 이상 트라우마를 키우지 않으려는 내 발악인 것이다.
나는 그것을 정의감이나 희생정신 같은 걸로 최대한 포장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짓은 못 해.”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나는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널 미끼로 던져두거나 전투에 참가시키면 내가 살 가능성은 높아지겠지만 넌 분명 위험해질 거야. 전자라면 틀림없이 죽을 거고.”
칼자루 위에 올려둔 손을 나나에게 뻗었다. 잠깐 망설인 나였으나 지금만큼은 용기를 냈다.
나는 이내 나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난 네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너처럼 착한 애를 죽게 내버려두면 분명 후회할 거 같거든.”
“……!”
나나의 눈이 흔들린다. 그녀는 날 똑바로 응시하더니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러면 저는요……! 저라고 해서 마음 편할 것 같아요……?! 다키님한테 저는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저한테 다키님은 엄청 소중한 사람이에요! 괜히 열혈팬이 아니라구요……! 다키님 죽게 내버려두면 저도 평생 후회할 거예요!!”
“누가 죽는대? 죽을 각오로 싸울 뿐이지 난 자신 있어.”
“그러면 저도 죽을 각오로 따라 갈래요! 다키님도 보셨잖아요! 전 예측샷도 잘 하고 싸움도 잘 해요! 절대 짐만 되지 않을 거예요! 오히려 저랑 같이 가면 훨씬 더 쉽게 잡을 걸요!”
나나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따라갈 거란 의지도 말이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무리 좋아하는 스트리머라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그녀의 각오는 비단 죄책감 때문만이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 좋아하는 스트리머 그 이상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다.
“내가 따라오지 말라 해도 따라올 거지?”
“물론이죠! 다키님한테 목숨까지 빚졌는데 무책임하게 도망칠 수는 없어요!”
더 이상 이야기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나 완강하게 이야기하는데 어찌 뿌리칠 수 있을까.
나는 이내 한숨을 쉬듯 수락했다.
“……알겠어. 나나 너도 데려가줄게. 대신 상황이 안 좋게 굴러가면 너라도 잘 도망쳐. 알겠지?”
“물론이죠! 다키님도 저만 보호하려 하지 말고 맘 놓고 싸우세요! 제 몸은 제가 지킬 테니까요!”
아직도 나는 나나가 날 버리고 도망쳐줬으면 했다. 끝끝내 날 따라오려는 그녀가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매사에 수동적이었던 나나가 처음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하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자기 주관을 드러내는 이유가 날 혼자 둘 수 없어서라고 하니까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그럼 가면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가자. 그래야 네가 무사할 확률이 더 높아지니까.”
마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이야기를 꺼냈다. 나나는 어느 때보다 진중한 표정으로 내 말을 경청했다.
“뭐든지 말씀만 하세요!”
“우선 찬란한 광채를 캐스팅 없이 쓰던데, 그거 지금 즉발 슬롯에 올려둔 거야?”
“즉발 슬롯이요? 그게 뭐예요?”
내 질문에 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뉴비여서 그런지 기초적인 시스템도 잘 모르는 모양이다. 아니, 원래는 알았는데 스포일러 방지 때문에 잊어버린 건가?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녀에게 친절히 설명해줬다.
“즉발 슬롯은 주문을 캐스팅 없이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이야. 모든 주문은 발동 전에 최소한 3초, 많으면 10초 정도 캐스팅을 해야 하는데, 즉발 슬롯에 올려두면 선딜이 끝나자마자 바로 주문을 쓸 수 있어.”
과거 주문 계열 캐릭터들은 높은 난이도와 긴 캐스팅 시간 때문에 많은 고충을 겪었다.
내가 말한 대로 모든 주문에는 캐스팅 시간이 있으며 캐스팅을 하는 동안 주문 시전자는 일절 움직이지 못한다.
이동 영창이란 스킬을 찍으면 움직이면서도 주문을 시전할 수 있으나 한 대라도 맞으면 영창이 끊기는 건 똑같다. 그래서 주문 시전자들의 성능은 항상 최하위를 기록했다.
마법사나 사제를 키우고 싶다면 멀티 플레이를 하거나 자신을 지켜줄 동료 NPC를 꼭 구해야 했을 정도다.
이러한 고충을 해결해준 것이 바로 즉발 슬롯이다. 즉발 슬롯에 등록된 주문은 캐스팅 없이 곧바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주문 사용자들의 성능이 크게 상향된 것이다.
“그래서 찬광 쓸 때는 영창하지 않아도 됐던 거군요!”
“맞아, 사제들은 기본적으로 찬광이 즉발 슬롯에 등록돼 있으니까.”
“그러면 다른 스킬들도 전부 등록해야겠네요! 이렇게 좋은 걸 왜 이제야 알려주시는 거예요~.”
나나가 신나서 상태창을 열었다. 내 눈에는 그녀의 상태창이 보이지 않았지만 손동작으로 보아 스킬 리스트를 확인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나나에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아직은 하나밖에 등록할 수 있어. 즉발 슬롯은 정신 스탯 10당 1개가 열리거든. 나나 네 정신은 15 정도 정도일 테니까 즉발 슬롯도 한 개뿐일 거야.”
“앗……! 맞아요! 여기에 딱 15라고 적혀 있어요. 5는 더 올려야지 슬롯이 하나 더 열리겠네요!”
이해한 나나가 허공을 가리키면서 얘기했다. 마찬가지로 내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나마 효율 좋은 스킬을 슬롯에 올려둘 필요가 있어. 나나 네가 갖고 있는 스킬 나한테 하나하나 불러줄래?”
“으으음, 세 개 있는데 두 개는 먼저 보여드린 것들이에요. 나머지 하나는…… 거부? 라고 하네요!”
회복과 찬란한 광채, 거기에 거부라. 역시 변동 사항은 없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지금으로썬 거부가 제일 좋겠네. 기본적으로 생존기지만 그밖에도 활용성이 높거든.”
“네? 회복이나 찬란한 광채 쪽이 더 낫지 않나요? 그 편이 다키님 돕기에도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렇기야 한데 나나 넌 날 돕는 것보다 스스로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해. 거부만 즉발 슬롯에 올려둬도 어지간해선 잘 안 죽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거부의 효과를 떠올렸다.
거부
액티브
요구 스탯: 신념 13
비용: 마력 20
사용 조건: 법술 무기 착용
습득 방법: 사제 선택 시 기본 스킬로 습득, 운명 항목에서 습득
효과: 3초간 캐스팅한 뒤 법술 무기를 들어 올려 신성한 충격파를 발생시킨다. 충격파는 반경 3미터 이내의 모든 적을 최대 6미터까지 넉백시킨다. 인내력이 60 이상인 적은 넉백당하지 않고 경직 당한다.
거부는 사제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기다.
가까이 다가온 적을 장풍 쏘듯이 날려서 거리를 벌릴 수 있으며 지형을 잘 이용한다면 낙사나 함정 킬을 유도할 수도 있다.
비단 생존기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는 효율성 높은 스킬인 것이다.
“게다가 찬광은 즉발 효율이 별로 안 좋아. 한 번 기절했던 적은 일정 시간 동안 기절 저항이 생기거든. 남발해봤자 별 의미가 없는 거지. 회복이야 내가 넥타르 마시면 해결될 일이고.”
물론 찬광도, 회복도 즉발 슬롯에 올려두면 좋기야 하다.
찬광의 경우 들개들을 잡을 때처럼 보다 빠르게 섬광을 터뜨릴 수 있고 회복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내가 거부를 추천하는 이유는 순전히 나나의 안전을 위해서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나는 의욕이 가득한 얼굴로 주먹을 부르쥐었다.
“좋아요! 그러면 제가 거부로 최대한 지원해드릴게요! 보니까 공격 스킬로 써도 괜찮을 것 같더라고요!”
“그렇긴 한데 무리는 하지 마. 적이 보이면 최대한 거리를 벌리고 너한테 다가오려고 할 때만 공격해.”
“네 다키님!”
그 후로도 나는 나나에게 이런저런 정보들을 알려주었다. 대체로 우리가 상대해야 될 사신에 관해서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열심히 대화하다 보니 우리는 어느덧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길 한쪽에 손상된 여신상이 놓여 있었으며 마을의 주위는 목책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물론 사람들이 떠난 지 오래된 터라 목책들의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까악! 까악!
까아악!
나무 위엔 까마귀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다. 족히 수백 마리는 될 것 같았는데 한 마리 한 마리가 기분 나쁘기 그지없었다. 마치 우리를 감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여기 참 좆되게 기분 나쁜 동네네요…….”
나나가 욕지거리와 함께 침을 꿀꺽 삼켰다. 나도 말로 표현하지 않을 뿐이지 그녀와 같은 심정이었다.
어느덧 하늘은 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본격적으로 해가 저물어가는 것이었다.
저녁놀에 뒤덮인 폐촌은 그야말로 공포 게임의 한 장면 같았다. 거기에 까마귀 울음소리까지 더해지니까 와호 굴에 들어갈 때보다도 더욱 음산한 분위기가 완성됐다.
“일단 여신상에서 정비부터 하자. 나나도 제단에 손 올려봐.”
“이렇게요? 오옷!”
제단 위로 손을 올리자 전신에서 활력이 솟아났다. 나나도 활발한 표정을 지으면서 감탄을 터뜨렸다.
“다키님 이거 뭐예요?! 손대자마자 몸에서 힘도 나고 머리도 맑아졌어요!”
“여신상이랑 제단인데 일종의 세이브 포인트야. 게임처럼 세이브는 못 하지만 손만 대도 생명력, 기력, 마력이 전부 회복 돼. 넥타르도 충전할 수 있고.”
“좋네요! 보스전 전에 이런 것도 마련해주고! 가던 개발진들도 마냥 변태 새끼들은 아니었나 보네요!”
나나의 말에 나는 내심 부정했다.
가디스 던전 개발진들은 변태가 맞다. 이 앞에 있는 적을 상대해보면 나나도 방금 한 말이 쏙 들어갈 거다.
아직 마을 안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공기가 무거워졌다.
걷잡을 수 없는 살기가 날 찍어 누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크 데몬과 마신들을 상대로 멘탈을 단련하지 않았다면 이 시점에서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나나는 그런 게 전혀 안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러니 저렇게 해맑은 표정으로 웃을 수 있겠지. 여러 가지 의미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이제 슬슬 들어가자. 내가 먼저 진입할 테니까 나나는 내 뒤에 바싹 따라붙어. 혹시라도 이상한 소리가 나면 바로 나한테 말해주고.”
“걱정 마세요 다키님……! 달라붙는 거랑 듣는 거에는 자신 있으니까요……!”
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나나도 숨을 죽인 채 대답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너진 목책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 직접 들어오니까 밖에서 볼 때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
을씨년스러운 폐가들과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까마귀 소리, 거기에 더해 곳곳에 세워진 불상들까지 안 무서운 게 하나 없었다. 장르가 RPG에서 공포 게임으로 바뀌었다 해도 될 정도였다.
“으으으…… 무슨 그림자 복도 같아요…… 저기 어두운 골목에서 무녀 귀신 튀어나오는 거 아니에요……?”
“아니 게임 타이틀부터가 다르잖아……. 그리고 여기엔 귀신 안 나와. 비슷한 애들은 나오지만.”
“비슷한 애들이라고요……? 그게 무슨…… 히이익!!”
폐가 사이를 지나 마을 중심부로 들어설 무렵이었다.
나나가 무언가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양손으로 입을 가려서 소리는 별로 크지 않았으나 표정을 보아 상당히 식겁한 모양이다.
“다, 다키님……! 저기 이상한 거 있어요! 존나 무섭게 생겼다구요……!”
눈물을 머금은 채 나나가 날 불렀다. 시종일관 비글 같던 애가 이런 반응을 보이니까 여러모로 색다른 맛이 있었다. 껴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마음 같아선 그녀가 무서워하는 모습을 좀 더 감상하고 싶었지만 나는 잔잔한 목소리로 그녀를 진정시켰다.
“괜찮아 나나야. 쟤네들 무서운 애들 아니야. 이 산에 사는 신령들이라고.”
“시, 신령이요……? 저 소름끼치는 새끼들이요……?”
나나가 가리킨 방향에는 웬 희끄무레한 난쟁이들이 있었다.
크기는 대충 20에서 30센티미터쯤 될까. 전신이 새하얗고 반투명했으며 얼굴에는 우리나라의 전통 탈을 쓰고 있었다.
어떤 녀석은 양반탈, 어떤 녀석은 각시탈을 썼는데 척 보기에 굉장히 소름끼쳤다. 고개가 180도 돌아가기도 해서 더더욱 불쾌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래, 성격에 하자 좀 있는 놈들이지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진 않아. 공격해도 사라지기만 하고. 그냥 배경이라고 보면 돼.”
“으으…… 아무리 그래도 너무 기분 나빠요……. 그 무시무시한 적만 아니었으면 지팡이로 다 두들겨 패는 건데…….”
신령들에게 혐오감을 표출하는 나나였으나 이 앞에 있는 적 때문인지 자중하는 기색을 보였다.
신령들은 그런 나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어깨를 들썩였다. 얼핏 보면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한동안 신령들을 노려보던 그녀는 다시금 무서워졌는지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내 팔을 붙잡고 얼굴을 묻는 게 귀엽기 그지없었다.
이번에야 말로 나는 그녀의 어깨를 팔로 감싸주었다. 정색하면서 지금 뭐하는 거냐고 물어보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히 나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무서운 분위기 덕에 생각지도 못한 이득을 보고 있을 때였다.
촤아악! 촤아악!!
마을 광장 쪽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틀림없이 날붙이로 살가죽을 찢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