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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귀
“에, 에이~ 다키님이야 말로 오버하지 마세요! 저는 그냥 예상만 잘할 뿐이에요~ 방금 전에도 들개들이 절 먼저 노리지 않을까, 대충 이 정도쯤에 깔아두면 오다가 맞겠지, 이런 생각으로 적당히 맞춘 거구요~”
그런 내 칭찬에 나나는 부끄러움과 의기양양함이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얼굴이 헤벌쭉해진 걸 보니 엄청 기분 좋은 것 같았다.
“예측샷도 실력이야. 제일 어려운 기술 중 하나고. 그런 걸 잘 한다는 건 나나한테 재능이 있다는 거지.”
“정말요? 다키님이랑 같이 다녀도 될 정도로 괜찮은 실력이에요?”
“응? 음 뭐…… 기본이 잘 되어 있으니까 내가 이것저것 알려주면 금세 늘지 않을까 싶은데…….”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나랑 같이 다녀도 될 정도의 실력이냐 라니. 그런 식으로 물어보면 산을 내려간 이후에도 줄곧 동행하고 싶다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아니, 그녀가 내 열혈팬이란 걸 생각하면 내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시종일관 믿음직스러운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나랑 같이 다니는 게 더 안전할 거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건 굉장한 착각이야.’
내 목적은 세계 각지에 존재하는 던전을 공략하고 재앙신들을 처치하는 것이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며 아니며 매번 생사의 갈림길에 서야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그렇게 위험한 모험에 나나 같은 뉴비를 데려갈 수는 없다. 애초부터 모험가였다면 모를까, 그녀는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평범한 대학생이지 않았는가.
아예 딱 잘라 거절할까 싶었지만 지금은 지켜보기로 했다. 괜히 나 혼자 착각한 거면 여러모로 어색해질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우리들 꼴이 말이 아니네. 좀 씻어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 문득 나와 나나의 몰골이 엉망이란 걸 깨달았다.
나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썼고 나나는 옷과 머리카락이 황근과의 과즙으로 질척거리고 있었다. 거기에 풀물과 흙까지 묻어서 완전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이 앞으로 가면 개울이 하나 나올 거야. 거기서 잠깐 씻고 갈까 하는데 괜찮지 나나야?”
“다키님이 원하신다면 얼마든지요! 저도 마침 엄청 찝찝했거든요~”
내 의견에 나나나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씻을 기회가 생겨서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한데 내가 가지 않으면 자신도 절대 가지 않겠다는 의사가 느껴졌다. 모든 결정권을 나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었다.
요 몇 시간 동안 봐온 나나의 모습은 여러모로 수동적이었다. 남에게 의지하기만 하는 수동적임이라기 보단 다른 사람의 뜻을 우선 시하는 그런 수동적임이었다.
나야 말을 잘 들어줘서 편하긴 했으나 살짝 묘한 느낌이 들었다.
본의 아니게 그녀의 의견을 묵살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썩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면 전리품만 회수하고 바로 출발하자. 시간이 남으면 마을 쪽도 공략할 수 있겠어.”
“좋아요! 잡템 줍는 건 저한테 맡겨주세요! 제가 가방 안에 잘 넣어둘게요!”
내 말에 나나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이야기했다. 사소한 것에도 의욕을 불태우는 그 모습이 나에게도 힘을 불어넣었다.
그녀의 수동적인 성격이 살짝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이걸 구태여 걸고넘어지긴 좀 그렇겠지. 싫다고 반항한 것도 아닌데 이것저것 따지면 꼰대처럼 보일 거다.
한동안 시간을 할애하여 우리는 놀들의 소지품을 챙겼다.
인간형 몬스터라 그런지 놈들은 제대로 된 돈도 가지고 있었다. 많아봤자 30아웬 정도였으나 들개처럼 아무 것도 안 나오는 것보단 나았다.
반대로 들개는 진짜 쓸 만한 걸 1도 안 뱉어서 허망함만 안겨주었다.
다른 게임이었다면 이빨이나 발톱 같은 걸 뽑아다가 상점에 팔겠지만 가디스 던전에선 그런 아이템들의 가치가 별로 높지 않았다.
개 이빨이랑 발톱을 어디에다 쓰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가치가 없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나마 잘 팔리는 가죽은 벗겨내기가 까다로우니 들개들의 시체는 그대로 방치했다.
“석궁이랑 도끼는 어떻게 할까요? 먼저 잡은 놈들 것처럼 챙겨둘까요?”
마지막 남은 놀의 이코르를 채취하고 있을 때 나나가 질문했다. 그녀는 어느덧 놀들이 사용하던 병장기를 한 곳에 모아두고 있었다.
“아니, 그냥 두고 가자. 석궁은 돈이 안 되고 도끼는 들고 다니기 너무 힘들어.”
“의외네요. 전당포 영상 보면 석궁 같은 거 되게 비싸게 주고 사던데.”
“그건 골동품이니까 그렇지. 여기 있는 석궁들은 죄다 폐품이어서 몇 십 아웬 밖에 못 벌 거야.”
석궁 하나를 들어 보이며 나나에게 설명했다.
놀들이 쓰던 석궁은 작동되는 게 신기할 정도로 관리 상태가 엉망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놀들에겐 석궁을 만드는 기술도, 그걸 관리할 만한 세심함도 없다. 애당초 여기 있는 석궁들은 전부 버려진 마을에 방치되어 있던 장비를 놀들이 멋대로 주워다 쓴 것이다.
“뭔가 아쉽네요. 이렇게 몹을 많이 잡았는데 얻는 게 별로 없다니, 헛고생만 한 기분이에요.”
“잡몹들이 다 그렇지 뭐. 그래도 이코르는 돈 좀 될 거야. 도시에 도착하면 네 몫도 확실하게 챙겨줄게.”
가방을 등에 매면서 나나에게 말했다. 그에 나나는 뭔가 의무감을 느낀 사람처럼 주먹을 부르쥐면서 대답했다.
“그러면 가방은 제가 들게 해주세요!”
“응……? 굳이 왜……?”
“그야 돈을 받으려면 그만큼 노동을 하는 게 맞으니까요!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다키님이 버신 돈을 얌체 같이 떼먹을 수는 없어요!”
대체 얼마나 성실한 거지. 보통은 이럴 때 어이쿠 감사합니다, 하면서 입 스윽 닦지 않나.
사실 나는 나나가 아무런 도움이 안 됐어도 기초적인 생활비 정도는 떼어주려 했다. 나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지만 나나는 그렇지 않으니까. 게임에서 그랬듯이 고인물된 입장에서 뉴비를 그냥 두고 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나나는 전투에서 활약했고 내 상처까지 치료해줬다. 그것만 해도 합당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지금의 그녀는 충분히 1인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거 꽤 무거운데 괜찮겠어?”
“괜찮아요! 검도 유단자였으니까요!”
“굳이 안 들어도 되는데…….”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나나의 뜻이 너무 완강한 나머지 그녀에게 가방을 넘겨주었다. 묵직한 가방을 등에 맨 그녀는 한 차례 휘청거렸으나 곧 능숙하게 무게를 잡았다.
“안 무거워? 역시 그냥 내가 들까?”
“끄으응……! 아니에요! 충분히 들 만해요! 이대로 전력질주도 할 수 있어요!”
“넘어질 것 같으니까 그러진 마…….”
살짝 걱정되긴 했지만 요령 좋게 걷는 나나를 보니까 그런 마음도 점차 사라졌다.
생각해보면 사제는 주문 계열 캐릭터 중에서 가장 높은 근력을 가지고 있다. 저 정도 가방을 드는 것 정도야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 무리하지 말고.”
“네 다키님! 개울까지 들어 보고 말씀드릴게요!”
힘차게 대답하며 나나가 내 곁에 바싹 달라붙었다. 의욕 충만한 그녀와 어깨가 맞닿았다. 보아하니 의도적으로 나에게 밀착하는 듯했다.
태생이 인싸여서 그런가? 나 같은 놈하고 아무렇지 않게 접촉하다니. 그녀의 친화력에 감탄하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마 내게 마음을 품고 있는 건 아닐까. 조금 전 일 때문에 팬심이 연정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도 은근슬쩍 그녀의 어깨를 감싸볼까 했으나 이내 포기했다. 전부 내 착각이라면 나만 부끄러워지지 않겠는가.
내가 아무리 대악마와 마신들을 쓰러뜨린 사람이라지만 여자에게 막 들이댈 만큼의 자신감은 없었다. 헤베 때처럼 상대방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도저히 손을 댈 용기가 안 났다.
그렇게 설레는 고민을 하면서 개울로 향했다. 조련사와 싸운 장소에서 몇 미터 정도 걸어가자 곧 물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모양이다.
“와 저기 보세요, 다키님! 드디어 도착……! 히에에에엑?!”
물가를 발견한 나나가 갑작스레 비명을 질렀다. 괴상한 비명과 함께 그녀는 몇 걸음인가 뒤로 물러났고 나 역시 눈살을 찌푸리면서 걸음을 뚝 멈췄다.
“이런 미친…….”
개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수많은 놀의 시체가 물 위에 둥둥 떠 있었으며 근처에 있는 나무들에는 놈들의 내장과 살점이 걸려 있었다.
마치 아비지옥의 한 장면 같은 광경에 욕지기가 밀려왔다. 나나도 적잖게 동요했는지 내게 더욱 달라붙었다. 생각지 못한 흔들다리 효과가 내심 기뻤으나 지금은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 놀들…… 전부 마을에 있어야 하는 놈들이야.”
가까이 가서 시체를 살펴본 나는 놈들의 행적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무장 상태로 보아 이놈들은 보스를 지키는 호위병들이다. 물론 호위병만 있는 건 아니었고 일반 전투원이나 일꾼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마치 마을에 있는 놀들을 전부 죽인 다음 개울에 던져놓은 것 같았다.
“누, 누가 이런 거예요? 설마 자기들끼리 싸웠다거나…….”
긴장한 목소리로 나나가 물었다.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족상잔은 아니야……. 상처들이 전부 일정해. 누군지는 몰라도 한 놈이 벌인 짓이야.”
“하, 한 명이요? 이 많은 놈들을 다요?”
내 말을 들은 나나가 경악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개울에 버려진 시체는 얼추 50여구. 지금까지 우리가 상대해온 놀보다 훨씬 많은 숫자다.
원작 게임에서 등장하는 무리보다 훨씬 더 많았다. 이 또한 게임 세계의 변수라고 할 수 있으리라.
시체 중에는 암컷과 어린 놀도 섞여 있었다. 놀들에게 동정심을 느낄 필요는 없지만 여자와 아이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죽인 걸 보면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렇게 내가 시체들을 조사할 때였다.
까아악! 까아악!!
푸드드드득!!
“꺄아악! 고대의 존재여!!”
사방에서 까마귀 떼가 날아올랐다. 검은색 깃털이 여기저기 흩날렸으며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나나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까마귀들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붉게 물든 노을 위로 날아오르는 까마귀 떼는 불길하기 그지없었다.
동시에 차치해뒀던 가능성이 불현 듯 떠올랐다.
“까마귀랑 사신…… 설마…….”
조련사는 사신이 나타나 동료들을 죽였다고 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됐는데 여기 널려 있는 시체들을 보면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내가 산길을 걸으면서 생각했던 굉장히 위험한 몬스터. 그놈의 생김새가 약간 사신이랑 비슷하다. 사용하는 무기도 낫이고 무엇보다 까마귀 떼를 끌고 다니니까.
자세히 보니 놀들은 날카로운 무기에 몸이 잘려서 죽었다. 이 역시 놈의 흔적 중 하나다.
이렇게 되니까 확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우려했던 상황이 현실로 벌어진 것이리라.
“나나야,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물가로 돌아오며 나나를 일으켜줬다. 내 진지한 어투에 나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봤다,
“무슨 일 있는 거죠……? 저희도 위험한 건가요……?”
눈치 빠른 그녀의 질문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나오지 말아야할 몬스터가 나왔어. 놈이랑 마주치면 아무리 나라도 위험할 거야.”
“……! 그럴 리가요! 다키님은 6천 시간짜리 고인물이잖아요! 그런 다키님도 못 당해내는 몬스터 같은 게 있을 리가……!”
“있어. 내가 일방적으로 당할 정도는 아니지만 죽을 각오도 해야 되는 적이야. 애초에 가디스 던전은 그런 게임이니까.”
가디스 던전은 소울 라이크 게임이다.
수십, 수백 번의 죽음을 경험하며 클리어하는 장르.
지금까지 나온 몬스터들이 죄다 고만고만해서 잊고 있었지만 이 게임의 본질은 플레이어를 수없이 죽음으로 몰아넣는 극악한 난이도에 있다.
그런 게임인 만큼 고인물들조차 애를 먹는 몬스터들이 상당히 많다.
아크 데몬이나 마신들도 확실히 강적이었으나 놈들은 기믹형 보스여서 어느 정도 편법이 있었다. 사실상 2페이즈부터는 아이템 하나만으로 쉽게 클리어하지 않았는가.
그에 반해 지금 이 맵에 나타난 몹은 오로지 플레이어의 실력만으로 잡아야 한다.
편법 같은 건 없다. 한 번의 실수가 곧장 죽음으로 이어지며 게임을 수차례 클리어한 플레이어들조차 놈에게는 완벽히 대응할 수 없다.
“내 예상이 맞으면 놈은 마을로 갔을 거야. 지금쯤 마을에 남아 있는 놀들까지 죄다 잡아 죽이고 있겠지.”
“그, 그럼 마을을 피해서 가면 되겠네요! 좋은 생각이죠, 그죠?!”
“아니,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여기 하나 뿐이야. 다른 길은 전부 막혀 있어. 설령 다른 길을 찾아 돌아간다고 해도 놈은 우리를 끝까지 쫓아오겠지.”
내 설명에 나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한동안 말을 고른 뒤에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가 놈의 주의를 끌게. 넌 그 틈에 도망쳐.”
“네……?”
나나의 눈빛이 당혹감으로 물든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나는 끝까지 말을 이었다.
“나랑 싸우는 동안은 너한테 신경 쓰지 못할 거야. 마을만 벗어나면 몹들이 없는 안전지대니까 너는 최대한 빨리 산 아래로 내려가. 그렇게 하면 나나 넌 무사할 수 있을 거야.”
“다키님은요……? 다키님은 어떻게 할 건데요……?!”
“그놈 잡아야지.”
그렇게 말한 뒤 개울가를 벗어났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그놈이 우리 쪽으로 오고 있을지 모른다.
놈이 마을을 벗어나기 전에 끝장을 봐야 한다. 그래야 나나가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다. 지체할 시간은 더 이상 없는 것이다.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걸어가던 그때였다.
“바, 바보예요……?! 왜 그렇게 남 좋은 짓만 하세요……?!”
나나가 항의하듯 나를 불러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