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맹견의 영역
그렇게 생각하길 잠시, 문득 의아한 점을 떠올렸다.
“나나 너 길 쪽에 있던 들개들은 어떻게 했어?!”
[깨개애애앵!!]
주위에 있던 개들을 단번에 베어버리면서 질문했다. 그러자 나나는 자신의 홀장을 힘껏 휘두르며 대답했다.
“이렇게요!!”
퍼어억!
[캐액……!!]
현직 야구 선수 못지않게 멋진 풀 스윙이었다.
나나에게 맞은 들개는 목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이면서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놈은 아직 죽지 않았다. 들개들의 생명력은 90, 나나의 공격력으론 한 방에 해치우지 못할 거다.
나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공격을 이어갔다.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연계였다.
“조용히 하세욧!!”
빠가아아악!!
위로 꺾인 들개의 머리가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홀장에 직격당한 놈의 두개골은 오목하게 함몰됐으며 안구와 혀가 기괴한 형태로 튀어나왔다. 마치 조용히 하세요! 짤방에 나오는 캐릭터 같았다.
그로써 다섯 마리의 들개 중 한 마리는 끔찍한 몰골로 죽음을 맞이했다.
설마 황근과에 당한 들개들도 저런 식으로 하나하나 처리한 건가?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그러는 도중에도 내 몸은 나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를 돕기 위해서였다.
“지금부터는 내가 맡을게! 나나 너는 뒤로 빠져있어!”
“네 다키님!”
마침 기절해 있던 들개들도 하나둘씩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싸움에 능숙해도 다섯 마리의 들개들을 한 번에 상대할 수는 없다.
기절해 있던 놈을 하나 처리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나도 그 사실을 깨닫고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덕분에 나는 마음껏 공격을 펼칠 수 있었다.
“흐읍!”
촤아악! 촤자작!!
들개들 사이로 파고들자마자 놈들을 베어 넘겼다. 내 공격에 맞은 들개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기 위해서 단칼에 목을 베어버린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련사의 마지막 발악은 수포로 돌아갔다. 십여 마리의 들개들은 모조리 시체가 됐다.
이걸로 끝이면 좋겠지만 우리에겐 아직 적이 남아 있다.
쐐애액!!
“……!”
나무 사이에서 화살 날아왔다. 석궁에 넣고 발사하는 화살, 볼트였다. 격발음을 듣고 재빨리 회피했으나 놈들의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철컥! 철컥!
쫘아악!
여기저기서 무기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 뒤에 숨은 놀들이 석궁을 장전하고 있는 것이었다.
“위험해!!”
“꺄아앗?!”
파바바바박!!
얼마 안 가 수십 발의 볼트가 우리를 향해 빗발쳤다. 이를 감지한 나는 나나를 끌어안고 바닥을 굴렀다. 흙과 풀잎이 온몸을 더럽혔으나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쏟아져 내린 화살비가 바닥을 수놓았다. 멀뚱히 있었다면 저걸 곧이곧대로 맞고 벌집이 됐을 거다. 나는 몰라도 나나는 결코 무사하지 못했으리라. 한 차례 주위를 살핀 나는 다급히 지시를 내렸다.
“아직 석궁수들이 남아 있어! 내가 막아줄 테니까 얼른 엄폐물 뒤로 숨어!”
“하, 하지만 다키님……! 어깨에……!!”
나나가 기겁하면서 소리쳤다. 나는 뒤늦게 내 어깨에 볼트가 박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꽤 아프긴 했지만 충분히 버틸 만했다. 신의가 된 가죽갑옷이 착실히 제 성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얼른 움직여야 돼! 놈들이 다시 장전하기 전에!”
“네, 네에……!!”
나나의 손을 붙잡으면서 그녀를 다급히 일으켰다. 슬쩍 그녀의 상태를 확인해봤는데 온몸이 흙과 풀물로 더러워진 것 외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보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나나의 양쪽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눈동자는 차마 내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설마 방금 전에 구해준 것 때문에 그런가? 아니면 자기 대신 맞은 것 때문에?
어느 쪽이든 그녀가 나에게 호감을 느끼는 건 틀림없어보였다. 저 수줍은 표정이 그 증거였다. 나와 맞잡은 손도 떨리고 있었다.
전투 도중에 이런 생각하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지만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방금 나 엄청 멋있었던 거 아니야?
돌이켜 보니까 행동 하나하나가 라노벨에 나오는 주인공 같았다. 화살 맞은 것도 아랑곳 않고 동료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남자라니. 이거 완전 라노벨 주인공의 표본 아닌가?
[컹! 컹컹컹! 컹컹!]
철컥!!
그때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리더격인 놀이 다른 놈들에게 조준을 지시하는 것이리라. 그 말은 곧 우리가 벌집이 되기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뜻이다.
물론 맞아주지만은 않을 거다. 나는 석궁수들의 위치를 파악한 뒤 나무 뒤로 나나를 밀어 넣었다.
“거기 있으면 안전할 거야! 내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절대 나오지 마!”
“다키님은요?!”
“저놈들 잡고 와야지!”
걱정 섞인 얼굴로 소리친 나나였지만 함부로 튀어나오거나 하진 않았다. 그녀는 엄폐물에 몸을 숨긴 채 회복 주문을 영창했다.
현명한 판단이다. 이로써 내 상처는 치유되고 나나도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 거다. 그 모습에 안도하면서 나는 숲을 가로질렀다.
쐐애액!
파박! 파바바바박!!
사방에서 볼트가 날아왔다. 데미지는 한 발 당 65로 그렇게까지 아프진 않다. 가죽 갑옷의 방어력과 저항력까지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내게 들어오는 데미지는 25 정도 밖에 안 될 거다.
가뜩이나 약한 공격인데 명중률도 영 시원찮았다. 두 발로 서도 개는 개 아니랄까봐 조준을 더럽게도 못하는 것이었다.
“에임 실화냐!”
타앗!
가벼운 스텝으로 놈들의 사격을 회피했다. 사실 피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열심히 뛰어주기만 해도 놈들의 볼트는 저절로 빗나갔다. 어느덧 나는 석궁수들이 모여 있는 나무 뒤편에 도착했다.
“잡았다!”
[……?! 케헤에에엑!!]
놈들을 발견하자마자 목덜미에 칼을 쑤셔 박았다. 첫 번째 놀은 그대로 절명했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서둘러 석궁을 장전하려 했다. 물론 소용없는 짓이었다.
서걱!!
놈들이 석궁을 장전하는 동안 힘을 모아 강공격을 날렸다. 쾌도의 풀차지 공격이 놈들의 목을 깔끔하게 절단했다. 나는 지체할 것 없이 곧장 다음 나무로 달려가 차례차례 남은 놈들을 도륙했다.
[꺄우우우울!!]
[깨개애애앵!]
[캐애액!!]
내가 거리를 좁히자 놈들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유린당했다.
석궁 밖에 쏠 줄 모르는 놈들이 근접전에서 뭘 할 수 있겠는가? 설정상 석궁수들은 상대적으로 왜소한 놈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설령 무기를 든다 해도 나에겐 상대도 되지 않으리라.
그렇게 약 2분가량 숲을 휘저으면서 놀들을 베었다. 더 이상 개 짖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 근방에 있는 놀들은 모조리 처치한 듯했다.
“하아……! 하아……!”
무릎을 짚으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쉴 새 없이 달리고 베고를 반복한 탓인지 숨이 찼다. 온몸에서 땀이 쏟아져 나왔고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물 한 잔이 간절한 순간이었다. 기력 높아진 것만 믿고 너무 무리했다. 이대로 바닥에 주저앉을까 싶었지만 사방이 피와 내장으로 가득해서 그러기도 좀 뭐했다.
그렇게 내가 힘겹게 허리를 펼 때였다.
“앗 차거!”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목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옆을 확인했다. 그곳에선 나나가 차갑게 식은 수통을 내게 내밀고 있었다.
“오는 길에 있던 개울에서 떠놓은 거예요! 목마르시면 이거라도 마시세요!”
“아, 고마워 나나야. 마침 목마르던 참이었어.”
나나에게 감사를 표하며 수통을 받아들었다. 철제 수통의 차가운 감촉이 마음에 들었다. 한동안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나는 잠시 후 차가운 숨결을 토해냈다.
“푸하아! 후우……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격렬한 전투 후의 마시는 물은 무척이나 달게 느껴졌다. 시원한 감촉이 목 전체에 퍼져서 온몸에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원래 세계에선 운동이랑 담 쌓고 지내던 터라 잘 몰랐는데, 몸을 실컷 움직인 뒤 수분을 보충하니까 상쾌함이 배로 늘어나는 듯했다.
그렇게 내가 물을 마시면서 숨을 고를 때였다.
“……나나야?”
“네, 다키님?”
“왜 그렇게 바싹 붙어 있어……?”
언제부턴가 나나가 내게 바짝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내 목 쪽을 향해 뾰족하고 예쁜 귀를 들이밀고 있었으며 우리들의 거리는 시시각각 좁혀지는 중이었다.
그녀의 향긋한 복숭아향이 지근거리에서 느껴질 정도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모쏠 아다였던 내게 그것은 너무나 자극적인 일이었다. 나는 당황하면서 천천히 거리를 벌렸고 나나는 살짝 발그레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냥…… 물 마시는 모습이 너무 멋있으셔서 넋 놓고 보고 있었어요…….”
“그, 그래……?”
갑작스러운 칭찬에 적잖게 쑥스러워졌다. 거기에 더해 나나의 태도도 어딘가 묘했다.
조금 전까지는 마치 신나게 뛰어다니는 댕댕이 같았는데 지금은 마치 수줍은 소녀 같았다. 어째서인지 시선을 잘 마주치지 못했고 귓가도 수시로 떨렸다.
그런 나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까지 얼굴이 발갛게 물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가 흐리기 전에 수통을 건네며 이야기했다.
“나 같은 게 어디가 멋있다고 그래. 하마터면 진담인 줄 알았잖아.”
“진담으로 한 말이에요……! 다키님은 진짜 멋있다구요! 방금 전에 놀들하고 싸울 때도 그렇고! 저 구해주실 때도 그렇고……! 어쨌든 너무 멋있으셔서 심장 터질 뻔했단 말이에요……!!”
내 말에 나나가 크게 반발했다. 어찌나 확고하게 말하는지 그녀의 기세에 압도당할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나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칭찬을 이어갔다.
“어깨에 화살 박혔는데도 태연한 것도 멋있으셨고! 날아오는 화살들 여유롭게 피하시는 것도 멋있으셨고! 다 끝난 다음에 물 마시는 모습도 전부 멋있으셨어요! 무슨 영화라도 보는 줄 알았다니까요!!”
“에,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개오바다…….”
“오바라뇨! 다키님이 어떻게 싸우셨는지 직접 보시면 그런 말 안 나오실 걸요! 지금 폰이 없는 게 너무 아쉬워요!!”
손사래 치는 내 손을 덥석 붙잡으며 나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엄격 진지 근엄한 표정을 본 나는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어느덧 나는 스스로가 굉장히 멋있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게 됐다.
겉으론 부담스러운 척 했지만 솔직히 기분 좋았다.
나 감다키 25세. 한 평생 연애 한 번 못해 본 모쏠이자 가족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찌질한 인간이다.
그런 나에게 있어 나나가 해주는 칭찬은 무척이나 값진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좀 더 칭찬해달라고 개처럼 바닥에 드러눕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체면을 아는 사람이다. 마음속에선 욕구가 피어올랐으나 애써 자중했다. 모처럼 호감을 쌓은 상대에게 환멸받고 싶지는 않았다.
“아, 알겠어 나나야. 알겠으니까 목소리 좀 낮추자. 다른 몹들이 또 나타날지도 모르…… 큭!”
차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힐 무렵 어깨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까 꽤나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다, 다키님 그 상처……!”
“싸우는 중에 한 대 더 맞았나보네……. 신경 쓰지 마 넥타르 한 병 마시면 다 나을 테니까.”
아까는 별 통증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갑옷을 입었는데도 이토록 상처가 깊은 걸 보면 석궁수 쪽에서 출혈 효과를 부여한 것이리라.
그렇게 내가 넥타르를 통해 상처를 회복하려 할 때였다.
“잠깐만요……!”
“으, 응?”
나나가 다시금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넥타르 병을 든 채 나나를 바라보았고 나나는 확고한 뜻이 담긴 눈초리로 나에게 말했다.
“제가 치료하게 해주세요……! 명색에 힐러인데 아무 것도 안 하면 다키님한테 미안해서 참을 수가 없어요!”
“그럴래……?”
“네!!”
나는 뭐라 반박하지도 못하고 넥타르 병을 집어넣었다.
사실 넥타르를 마시는 것보다 나나가 회복 법술을 써주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긴 하다. 회복량도 나나 쪽이 더 높은데다가 비용이 낮아서 몇 번이고 더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복
액티브
요구 스탯: 신념 11
비용: 마력 20
사용 조건: 법술 무기 착용
습득 방법: 사제 선택 시 기본 스킬로 습득, 운명 항목에서 습득
효과: 5초간 캐스팅한 뒤 시전자의 신념 x10만큼 아군 1명의 생명력을 회복시킨다. 반경 15미터 이내에 있는 아군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
“위대한 빛의 창세신이시여, 당신이 남겨준 내면의 빛으로 다친 자를 돌보는 걸 허락해주세요……!”
나나가 회복 주문을 영창하자 그녀의 홀장에 따뜻한 빛이 맺혔다.
그것은 곧 자그마한 폭죽처럼 내게 불빛을 떨어뜨렸고 어깨에 생긴 상처는 눈 깜짝할 사이에 회복됐다. 그 위에 붕대를 감아줌으로써 출혈 효과까지 치료됐다.
“고마워 나나야. 덕분에 넥타르 한 모금 아꼈네.”
“고맙긴요……! 오히려 제 쪽에서 감사하고 사과해야 되는 걸요……. 저 같은 거 지켜주시려다가 다치시고…… 정말로 죄송해요…….”
내가 연달아 다친 게 나나에겐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남이 다친 걸 보고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다니. 비록 만난 지 몇 시간 밖에 안 된 사이지만 그녀의 심성이 착하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니야, 나나 넌 엄청 잘 해줬어. 초보자라고 해서 아무 것도 못할 줄 알았는데 찬광을 그렇게 잘 맞추고 말이야. 몇 백 시간짜리 숙련자들도 그렇게는 못할걸?”
“찬광이면 그 번쩍하고 빛나는 거요……?”
“그래 그거. 사제 스킬 중에서도 맞추기 힘든 건데 넌 아무렇지 않게 맞췄잖아. 나 진짜 6천 시간 플레이하면서 그렇게 찬광 잘 맞추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니까?”
나나를 기분 좋게 해주고자 꺼낸 말이지만 내 말에는 그 어떤 과장도 없었다.
말했듯이 찬광은 숙련자들도 맞추기 어려운 스킬. 그런 걸 하나도 아닌 여섯에게, 그것도 달려오는 적들에게 맞췄다는 건 진짜 대단한 거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을 상대로 이런 생각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와 고정 파티를 맺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 작품 후기 ============================
모쏠 아다라고 묘사했던 부분을 좀 수정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추가로 다키는 이제 아다는 아니지만 여전히 모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