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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49화 (49/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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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이 다니는 길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우린 게임 세계로 오는 과정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유다희를 의심하면서 내 생각을 말했다. 엘프녀 또한 내 의견에 맞장구쳤다.

“안 그래도 계속 이상하던 참이었어요! 다키님 방송을 3년 동안 봤는데 여기가 어디인지, 어디로 가야 마을이 나오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여기가 가던이랑 같은 세계라면 기억나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의아한 기색으로 질문했다.

“옛신의 성소라던가, 청춘의 여신 헤베 같은 것도 전부 기억 안 나시는 건가요?”

“전혀요……! 대충 마을이랑 NPC인 건 알겠는데 그건 가던 안 해본 사람이라도 바로 눈치 챌걸요!”

보아하니 엘프녀는 가디스 던전이란 게임은 기억하지만 그 안에 등장하는 지역이나 NPC 등 게임 관련 정보는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나도 그랬다.

게임 세계에 온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악마들에게 쫓기는 동안 나는 놈들의 이름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나는 좀 더 집요하게 물어봤다.

“정말 기억 안 나세요? 검은 머리를 트윈테일로 묶은 여신님이라던가, 황금색으로 빛나는 분수 같은 것도 전혀요?”

“으으음…… 죄송해요 다키님…… 아무리 생각해도 마찬가지예요……. 게임이랑 관련된 걸 떠올리려 하면 누가 제 머릿속에 블라인드 처리라도 해놓은 것처럼 생각이 흐려져요. 스포일러 방지할 때 자주 쓰는 그거 있잖아요.”

거듭된 질문에도 엘프녀는 곤란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 이상 묻는 건 의미가 없겠지.

“역시 저희끼린 답을 찾아낼 수 없을 것 같네요. 지금은 산을 내려가는데 집중하도록 하죠. 여기서 이러고 있다간 날이 저물겠어요.”

단념하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슬슬 정오에 가까워졌는지 태양이 머리 위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반도 오지 않았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다니. 서두르지 않으면 해가 지기 전까지 안전지대에 도착하지 못할 거다,

“좋아요 다키님! 버스 감사히 타겠어요!”

내 말에 동의하면서 엘프녀가 지팡이를 꽉 움켜쥐었다. 나와 동행해서 그런지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살짝 걱정되는 부분이 없잖아 있었으나 겁먹고 움츠리는 것 보다야 나았다.

“그럼 당장 출발하죠. 아,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아직 못 들은 것 같은데…….”

발걸음을 옮기면서 엘프녀를 바라보았다. 내 옆에 바짝 따라붙은 엘프녀는 한동안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번뜩 고개를 들었다.

“다키님 이름 앞에 들어가는 감은 과일 감을 말하는 거였죠?”

“네 맞아요. 방송 초기에는 그냥 다키였다가 나중에 붙인 거죠.”

내 닉네임은 과일 감과 영문자 DIE, 그리고 위키위키의 합성어다.

왜 이름을 이런 식으로 지었냐고 물어보면 딱히 할 말이 없다.

감은 나랑 내 최애캐가 좋아했던 과일에서 따왔고, 다이랑 위키위키는 뭔가 적당한 닉네임 없을까 생각하다가 대충 갖다 붙인 거다.

“그러면 저도 과일 이름으로 해야겠어요! 으흠흠~ 뭐가 좋을까~”

검지와 엄지로 턱을 매만지면서 고심하는 엘프녀. 나는 그녀의 금발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의견을 제시했다.

“머리색이 밝은 금발이니까 바나나는 어때요?”

“좋은 생각이에요! 근데 바나나를 그대로 쓰면 별로 안 예쁘니까 나나는 어떨까요?”

“좋네요, 부르기도 쉽고 발음도 예쁘고. 그러면 이제부터 나나 씨라 부를게요.”

그리하여 엘프녀의 이름은 나나로 결정됐다.

그렇게 이름을 정한 나나는 내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살갑게 얘기했다.

“씨는 빼셔도 돼요~ 괜히 거리 벌리는 것 같잖아요!”

“네? 그래도 처음 보는 사이인데 무턱대고 이름만 부르는 건 좀…….”

“앗……! 혹시 다키님 저랑 그다지 친해지고 싶지 않으셔서 일부러……!”

나나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혼자 이상한 추측을 한 그녀는 심각한 기색으로 몇 발자국이나 물러났다. 그것을 본 나는 다급히 나나의 말을 부정했다.

“아,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시청자 분한테는 예의 차리는 게 좋지 않나 싶어서 그런 거예요……!”

“예의 같은 건 안 차려도 되니까 씨 빼고 그냥 나나라고 불러주세요! 그 편이 더 친숙해 보이잖아요! 저는 다키님이랑 친해지고 싶다구요~!”

내 변명에 나나가 땡깡 부리듯 요구했다. 비단 말로 그러는 게 아니라 볼을 부풀리며 은근슬쩍 달라붙는 것이었다. 그녀와 어깨가 맞닿을 때마다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이 무슨 친화력이란 말인가. 친해지고 싶다는 의사를 저렇게까지 적극적으로 표현하다니. 나라면 절대 못할 거다. 그녀에게서 선천적인 인싸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 그러면 나나. 잘 부탁할게요.”

“존댓말도 빼고요! 괜히 더 어색해보이잖아요. 제가 다키님보다 한참 어리니까 편하게 대하셔도 돼요~”

“그, 그래요? 아니 그래……? 나나는 몇 살인데?”

그녀의 요구를 하나하나 수용하면서 질문을 건넸다. 마침 나도 그녀의 나이가 궁금하던 참이었다. 생긴 건 어려 보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캐릭터의 외모였으니 말이다.

“저 올해로 스물이요! 다키님 방송은 고1 때부터 봤어요. 다키님과 고교 생활을 같이 했다고 볼 수 있죠! 물론 대학교 와서도 계속 봤고요!”

“이야 스물…… 풋풋하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고딩이었다는 거잖아.”

스무 살 여자애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내 방송을 봐왔다니.

감회가 참 새로웠다. 뭔가 내가 발을 들일 수 없는 영역을 간접적으로 접한 기분이라고 할까. 어쨌든 신기한 기분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나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다키님은 고딩이 취향이세요?”

“으, 응? 가,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뭔가 고딩이라고 말할 때 목소리톤이 올라가서 말이죠! 생각만 해도 흥분된다는 느낌이었어요!”

뭐? 내가 그랬다고? 진짜로?

나나의 말에 나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고딩 생각만 해도 흥분하면 그건 그냥 변태 새끼잖아.

“아니 난 그냥 고등학생이 내 방송 봤다는 게 신기했을 뿐이야! 고등학생 상대로 흥분을 왜 해?!”

“에이, 재미없게 왜 그러세요~ 저는 딱히 다키님이 교복 취향이어도 뭐라 안 할 거예요~ 누구나 부끄러운 페티시 정도는 가지고 있기 마련이잖아요?”

“페…….”

거침없는 단어 선택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가상의 캐릭터도 교복만 입으면 인권이 생기는 마당에 교복을 주제로 문란한 이야기를 꺼내다니.

경솔하기 그지없는 언행이다. 여기가 원래 세계였으면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문제소지가 됐을 거다.

애당초 교복은 추잡한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 청춘을 상징하는 신성한 의복이란 말이다.

그런 걸 딸감으로 삼는다니. 나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진 모르겠는데 나는 나나 네가 생각하는 그런 취향 절대 아니야. 고등학생 취향도 아니고, 교복 페티시도 없어!”

“그러면 다키님은 어떤 나이대가 취향이신데요? 20대 초반? 후반? 아니면 동갑~?”

“응? 어…… 글쎄…….”

갑자기 취향 문답의 시간이 될 줄이야. 나는 곤란해 하면서도 질문에 답했다.

“굳이 따지자면 20살 이상이면 다 좋은 것 같은데…… 아 물론 너무 나이 많으신 분들은 좀 그렇고……. 대충 50대까지가 적정선이 아닐까…… 너 표정이 왜 그러니?”

내가 말하는 동안 나나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약간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씁쓸한 것 같기도 한 표정이다.

“역시 다키님이네요……. 프로 창남은 모든 나이대의 여성들을 수용할 수 있는 거군요. 이야아……”

“아니 그거 그냥 밈이잖아, 누가 들으면 내가 진짜 몸 파는 줄 알겠네!”

“다키님 취향이 너무 상식 외여서 혹시나 했어요~ 근데 아무런 배경도 없이 그런 취향이시면…… 그건 그것대로 대단하네요…….”

고개를 스윽 돌리면서 말하는 나나. 그녀의 반응에 나는 내 뒤늦게 내 취향을 돌아보게 됐다.

20대 이상 50대 이하를 좋아하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 미성년자 좋아하는 페도들 보다는 정상 아니야?

아니…… 생각해보니까 페도들이랑 비슷하거나 그보다 못하면 그건 사람 새끼가 아니지……. 페도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바꿔 생각하면 난 일반인들 입장에선 충분히 독특한 취향일지 모른다.

“어, 어쨌든…… 여기서부터는 진짜 위험한 길이야. 이제부턴 꼭 필요한 말만 하고 긴장도 늦추지 마. 알겠지?”

“네, 다키님! 제가 확실하게 사주경계 할게요! 옆구리에 와드 하나 박았다고 생각하세요!”

거수경례와 함께 나나가 눈썹 위로 손을 가져갔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그녀가 스무 살 여자애라는 것을 확신했다.

경례할 때 왼손을 쓴데다가 손 자세도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군대를 안 나왔더라도 남자가 저렇게 경례하긴 힘들지.

“그러고 보니 다키님, 저희들 목적지는 정확히 어딘가요?”

주위를 둘러보던 나나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확실히 그녀에게도 목적지 정도는 말해두는 편이 좋으리라. 무작정 따라오라고만 하면 불안해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빛나는 성벽 율리아라나는 곳인데 가디스 던전 안에서도 손에 꼽는 큰 도시야. 플레이어들이 가장 많이 상주하는 중심 지역 같은 도시지.”

“아아~ 헨돈 마이어처럼요?”

-던-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아무튼 거기 가면 몬스터들한테 습격 받는 일은 없을 거야. 치안도 좋은 편이고. 나나는 사제니까 신전의 보호도 받을 수 있겠지.”

빛나는 성벽 율리아나는 그 이름처럼 높은 성벽에 둘러싸인 대 도시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나라, 유르돌리아 왕국의 제 2 수도로 남부에서 가장 큰 도시다. 한국으로 따지면 부산 같은 곳이라 볼 수 있다.

어마어마한 대 도시인만큼 치안도 좋고 경제 활동도 활발하다. 나나가 속한 교회인 빛의 대신전의 지부도 있으니까 사제인 나나는 도시에 들어가기만 해도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으리라.

“듣기만 해도 마음이 놓이네요! 역시 사람은 문명사회 안에서 지내야죠!”

그녀의 활발한 대답을 들으면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녀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는 옛신의 성소다. 그곳은 오직 헤베나 여명의 투사에게 허락받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으니까. 몬스터들의 위협은 물론 도적이나 불한당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그녀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다.

아무리 내 시청자였다고 해도 바로 본진에 데려다줄 수는 없다. 만에 하나 나나가 나쁜 마음을 품고 있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산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바스락.

수풀 속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웬 다람쥐 한 마리가 수풀 속에서 튀어나와 나무 위로 올라간 것이다.

“와, 저것 보세요, 다키님! 다램쥐예요! 색도 파란색이고요!”

그것을 본 나나가 해맑은 표정으로 감탄했다. 그녀가 신기해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 앞에 나타난 녀석은 평범한 다람쥐와 다르게 몸이 형광 파란색이었으니까.

허나 지금은 다람쥐를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저 친구가 나무 위로 올라갔다는 건 일종의 신호다.

수풀 속에 숨은 짐승이 우리에게 살의를 드러냈다는 경고인 것이다.

“나나야 숙여.”

“네? 으갸아아아악!”

의아해하는 나나의 머리를 아래쪽으로 잡아당겼다.

다음 순간, 수풀 사이에서 무언가가 날렵하게 튀어나왔다.

[커허어어엉!!]

두 발로 선 개의 형상을 한 몬스터, 놀이었다. 들개처럼 달려든 놈은 나나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횡을 그리며 날아든 도끼가 나나의 금발을 몇 가닥이나 잘랐다. 내가 대응하지 않았다면 나나의 머리는 도끼에 찍혔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기습이라고 하냐!”

놀의 도끼를 향해 쾌도를 휘둘렀다. 방금 전까지 칼집에 들어가 있던 쾌도였지만 딜레이 삭제 효과로 어느덧 내 손 안에 들어와 있었다.

카아아아앙!!

[크르륵?!]

섬광처럼 날아간 쾌도가 놈의 도끼를 보기 좋게 튕겨냈다. 자세가 무너진 놀은 자신의 빈틈을 훤히 보여줬다. 무방비 상태가 된 것이다.

놈의 공격 속도는 조금 느림. 패턴도 정직해서 패링하기 무척 쉽다. 타이밍을 노리며 기습한 건 나쁘지 않았으나 나에겐 소용없는 짓이다.

나는 이놈이 언제 나타날지 진즉에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히면 죽어야지.”

파아아아앗!!

무방비해진 놀을 노려보며 왼손을 뒤로 당겼다.

그러자 손등에 새겨진 푸른 태양이 환하게 빛나더니 내 왼손은 마신들처럼 바뀌었다. 갑옷과도 같은 형태에 크고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흉기로 변모한 것이다.

“흐으읍!”

푸후욱!

[깨개애애앵!!]

변형이 끝나자마자 놀의 복부를 향해 왼손을 내질렀다.

다음 순간 손톱이 놈의 살가죽을 꿰뚫으면서 내장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것을 움켜쥔 직후, 나는 있는 힘껏 놈의 내장을 뽑았다.

푸화아아아악!!

============================ 작품 후기 ============================

많은 분들이 헷갈려 하시던데 주인공의 이름은 김다키가 아니라 감다키입니다.

그리고 제가 미처 수정하지 못한 부분까지 짚어서 말씀해주신 많은 독자님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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